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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의 패배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반응

독일 국민들은 파울루스가 불멸의 영웅으로 남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는지에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6군 장교들과 병사들이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독일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죽었다"는, 끝까지 믿고 싶지 않았던 비보를 2월 3일 접했을 때 독일 국민이 생각한 것은 참극이 일어났다는 것이었고 참패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었다. 친구와 가족들을 잃은 사...

히틀러는 파울루스와 스탈린의 장남을 바꾸려고 했는가?

1941년 7월, 비텝스크에서 포로로 잡힌 야코프 주가시빌리 포병대위.굉장히 유명한 일화.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소련군 포로로 잡히자 히틀러가 1941년에 포로로 잡혔던 스탈린의 장남 야코프 주가시빌리 대위와 파울루스를 바꾸자고 했다는 것이다. 이에 스탈린은 일개 대위와 원수를 바꾸는 미친놈은 없다고 깠다는 것인데... (좆좆위키...

히틀러에게 자본주의란 무엇이었는가?

오랜만에 해보는 커쇼의 히틀러 평전 관련 포스팅히틀러는 확실히 전임 총리들과는 스타일이 달랐다. 경제관도 아주 특이했다. 경제 원리에 대해서는 사실은 제대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경제인들을 모아놓고 한 연설에서도 그렇게 말했지만 경제는 부차적이며 정치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치관과 마찬가지로 히틀러의 경제관도 투박한 사회진화론의 지배를 받았...

2차 세계대전은 오로지 히틀러의 책임인가?

제2차 세계대전의 모든 책임을 히틀러 개인에게 돌리는 것은 전후의 독일은 물론이고 서방세계에게는 하나의 정신적인 위안이었다. 독일 국민은 제2차 세계대전의 책임으로부터 면제될 수 있고 나치 추종자들도 모든 악의 소재를 히틀러에게 전가함으로써 자신들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었다. 서방국가들은 히틀러 개인의 침략정책을 분쇄하기 위해 전쟁을 한 것이지 독일 국...

하지만 히틀러 클라스는 영원하다

(전편에 이어서)그렇다고 해서 히틀러가 유대인을 건드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모든 것을 유대인의 탓으로 돌리는 외곬에 가까운 병적 집착은 1919년 이전까지도 볼 수 없었지만 이제는 단 한번도 빠지지 않고 히트러가 하는 연설에서 어김없이 나타났다. 독일을 덮쳤거나 위협하는 모든 악의 배후에는 유대인이 있었다. 연설을 할때마다 히틀...

히틀러의 초기 연설의 의외성

연설 주제는 거의 바뀌지 않았다. 막강했던 독일의 찬란한 과거와 힘센 적들에게 조국을 팔아먹은 반역자와 겁쟁이들 때문에 지금은 약해져서 민족적 굴욕을 감내해야 하는 병든 몸을 대비하고, 이 적들과 그 배후에 있는 유대인의 농간으로 일어난 전쟁에서 패배하여 나라가 허물어진 이유를 밝히고, 반역자와 유대인이 일으킨 배신과 혁명을 고발하고, 독일은 노예로 부...

국가사회주의는 히틀러주의인가?

국가사회주의를 히틀러와 동일시하면서 국가사회주의는 곧 히틀러주의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그것은 지나친 단순화이고 오류이기 십상이다. 물론 국가사회주의가 권력을 거머쥐고 휘두르는데 히틀러가 절대적으로 기여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국가사회주의라는 현상 그 자체는 히틀러라는 이름이 등장하기 전부터 존재했으며 히틀러가 '빈에서 별볼일 없는 사람'으로 ...

안톤 드렉슬러:총통 각하, 주작질 자제 좀.

오늘의 대미를 장식할 잡 포스팅.조직책을 맡아주십사는 저의 부탁으로 위원회에 일곱번째로 들어오신 것이라면 모를까 일곱번째로 당원이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지도자께서 잘 아실 것입니다. 몇해 전의 일이지만 쉬슬러와 제가 서명을 한 당신의 독일노동자당 당원증은 원래 번호가 555번인데 이것이 지워지고 7번이라고 적힌 것을 보고 제가 담당자를 야...

오스트리아인 히틀러는 어떻게 독일 군대에 들어갔는가?

뮌헨을 비롯해서 유럽의 수많은 도시에서 개전 이후 처음 며칠 동안 군대에 나갈 뜻을 밝힌 수많은 군중의 열기에 고무되어 자기도 펠트헤른할레 앞에서 시가 행진이 있었던 다음날로, 그러니까 8월 3일에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3세 앞으로 오스트리아인 자격으로 바이에른 군대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는 탄원서를 개인적으로 보냈다는 히틀러의 진술은 의심할 이유가...

1차 세계대전에서의 히틀러의 군생활

1930년대 초반에 히틀러의 정적들이 연락병으로 근무하는 데 따르는 위험성을 폄하하고 히틀러를 농땡이꾼에 겁쟁이라고 손가락질하면서 그의 군 생활을 헐뜯은 것은 번지수를 잘못 짚은 비난이다.(...)연대 안의 60명의 연락병 중에서 훈장을 받은 병사는 히틀러를 포함하여 네명밖에 없었다. 히틀러의 말마따나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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