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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몰로토프 관계의 퇴행 (4) 지도체제의 개편(1945~1946)

스탈린은 런던 회담에서의 몰로토프의 태도를 문제 삼아 모스크바로 돌아온 몰로토프에게 외무 인민위원부의 부하들 앞에서 자아비판을 하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몰로토프의 불운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는데, 서방 언론에서 스탈린의 후계에 대해서 끝없이 추측성 기사를 쏟아낸 것이었다.1945년 12월 1일 영국 <데일리 헤럴드>가 스탈린이 인민위원회 ...

스탈린-몰로토프 관계의 퇴행 (3) 런던 회담

9월 11일 런던 회담이 개최되었다. 이 회담에 있어 스탈린의 목적은 소위 '얄타 회담의 논리 고수'였는데 스탈린이 생각하기에 얄타의 논리란 강대국들은 서로의 영향권에 간섭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관철시키는 것이었다. 즉 소련의 영향권인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등지에 서방 연합국이 간섭하는 것을 중지시키는 것에 있었다. 스탈린은 9월 12일 다음과 같이...

스탈린-몰로토프 관계의 퇴행 (2) 종전과 서방과의 대결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스탈린은 다시 몰로토프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은 몰로토프에 대한 공격을 가하는 것은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고착화된 정치 체제에 대한 재편의 구실이 될 수 있었다. 흘레브뉴크는 스탈린, 몰로토프, 베리야, 말렌코프, 미코얀으로 구성된 5인방의 지배체제가 '불편할 정도로 오래' 유...

스탈린-몰로토프 관계의 퇴행 (1) 1939~1941년

전에 연재한 스탈린이 몰로토프를 숙청하려 한 이유는?을 엮어서 좀 더 학술적인 것에 근접한 것으로 만들어보려는 시도. 보고 돌을 던지면 됩니다.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이 체결되는 시점에서까지 몰로토프가 스탈린의 매우 가까운 측근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939년 4월 스탈린은 외무인민위원 막심 리트비노프를 해임하고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로 교체하...

스탈린이 몰로토프를 숙청하려 한 이유는? (2)

배경:2차 세계대전을 영도한 루스벨트, 처칠 등이 퇴갤하는 것을 본 서방 언론은 이제 스탈린도 퇴갤할 때가 되지 않았냐고 입방아를 찧으며 스탈린의 후계자가 누가 될지를 떠들어댐. 스탈린이 진노함.물론 스탈린은 이런 시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소련 지도자가 교체될지도 모른다는 암시들은 그의 분노와 의심만 더욱 높여 놓았고, 그 타격은 그의 최측근 동지들에게...

1939년 막심 리트비노프의 해임이 가져온 파장

유대인인 외무장관 막심 리트비노프를 해임한 것이 독일과 적극적 데탕트를 추구하던 스탈린이 독일을 배려하기 위해 취한 행동이었음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저도 얼마전까지 그런가 하고 생각했는데 이에 대한 정면 비판을 소개합니다.(독일과 소련이 서로 관계 개선의 의지에 대한 반응을 보이지 않던 와중에) 독일이 소련과의 데탕트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게 된 계기는 ...

마셜 플랜에 대한 소련의 반응

트루먼 행정부는 독일로부터의 철수 정책에서 서방 지대들의 장기적인 경제적 재건 정책 쪽으로 계속 움직였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차 외무장관 회의(1947.3~4)가 독일에 관한 합의를 이루는 데 실패한 후, 미국 국무장관 조지 마셜은, "의사들이 숙고하는 동안 환자가 죽어가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고, 트루먼 행정부는 유럽의 경제 회복을 시동시킬 마셜...

라브렌티 베리야:"우린 사회주의 독일이 필요없다."

배경:1953년 5월, 소련의 가혹한 점령정책과 경제적 파탄을 견디지 못한 수천명의 공산당원을 포함한 22만명의 난민이 서독으로 망명하고 발터 울브리히트는 나토를 자극하지 않고 영국과 접촉하면서 나토 내부의 균열을 유도한단 소련 내부의 지침에 방해되는 도발적 언사를 일삼아 소련 지도부와 충돌하던 중. 이 때문에 소련 집단지도체제는 대독 정책을 놓고 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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