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주의적 국제정치학이란 무엇인가? 기타 근현대사

학문의 발전단계에 있어 최초의 환상이 깨어지고, 유토피아적인 시기의 끝을 기록하게 되는, 즉 사고가 소망에 미치는 영향을 흔히 현실주의라고 한다. 초기 단계의 소망과 꿈에 대한 반발을 의미하는 현실주의는 비판적이고 때로 냉소적 측면을 지니게 마련이다. 사고의 영역에서 현실주의는 사실을 사실로 수용하고 그 인과관계의 분석에 초점을 둔다. 따라서 현실주의는 목적의 역할을 평가절하하고 묵시적 혹으 명시적으로 사고의 기능이 사태의 진전을 연구하는 것이지 이에 영향을 미치거나 혹은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행위의 영역에서 현실주의는 현존하는 세력의 힘에 저항하는 무모하며, 현존하는 추세는 불가피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최고의 지혜란 이들 세력과 추세를 수용하고 이에 적응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객관성"이라는 이름 하에 주장되는 이러한 태도는 결국 사상을 무력화시키고 행동을 부정하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한다. 그러나 학문의 발전단계에서 현실주의는 유토피아주의의 지나침을 교정하기 위해 필요하다. 이상주의가 현실주의의 모자람을 교정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과 같다.

(...)

현실주의자들은 스스로 변경할 수 없는, 주어진 발전단계를 분석한다. 이들이 볼 때 철학이란 언제나 세상을 변경하기에 너무 늦게 온다. 철학이란 기왕의 질서를 변경하는 수단이 아니라 알기 위한 수단이다. 이상주의자들은 미래를 쳐다보며 창조적 자율성으로 사고한다. 현실주의자들은 과거를 돌아보며 인과적으로 사고한다. 모든 건전한 인간의 행동과 사상은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자유의지론과 결정론 사이의 균형 위에 서야 한다. 사건의 인과적 전개를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절대적 현실주의자는 현실을 변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적으로 부인한다. 인과적 전개를 부정하는 절대적 이상주의자는 자신이 변경코자 하는 현실과 그 변경방법을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이상주의의 결점은 순진함이다. 현실주의자의 결점은 황페함이다.

(...)

현실주의자들은 이러한 이상주의자적인 명제가 사실이 아니라 의욕에 불과하며, 직설법이 아닌 소망법으로 기술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인식한다. 나아가 그들은 이상주의의 명제가 선험적이 아니라 이상주의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현실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현실주의자들의 눈에 '인간평등론'은 '잘나고 싶어 하는 못난이들'의 이데올로기요, '평화의 불가분성'이란 타국의 공격에 취약한 국가가 자국에 대한 공격은 다른 모든 국가의 관심사라고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이며, '주권국가의 부조리성'은 주권의 원칙이 자국의 이익에 반한다고 여기는 지배국가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이처럼 이상주의적 이론의 숨은 배경을 폭로하는 것은 진지한 정치학 논의에 필요불가결한 조건이다.

20년의 위기, E.H. 카, 녹문당.
30~34페이지.

덧글

  • 파리13구 2018/09/13 10:59 # 답글

    현실주의의 황폐함을 잘 보여준 것은

    저자인 카가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을 지지한 것 입니다. ^^
  • 까마귀옹 2018/09/13 11:18 # 답글

    어떻게 보면 현실주의자들도 '순진'한 경우가 있던 것 같더군요. 자신들은 '냉철'하고 '현실적'이라고 착각한 채,단기적인 이익(인 것처럼 보였던 것)에 눈이 멀어서 장기적인 이득을 놓쳐버리는 형태가 의외로 많지요.

    그리고 이런 '순진한 현실주의자'조차도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냉혹함'과 '냉철'을 구분하지 못하고, 모든 인류 보편적인 윤리 및 명분을 무시한 채 무조건 약육강식에 의거한 잔인한 행동 만이 현실주의라고 여기고 여기에 반대하는 주장을 '유치한 이상주의'로만 매도해버리는 작자들이 의외로 꽤 존재하죠.
  • 까마귀옹 2018/09/13 11:19 #

    그런데 왜 댓글을 쓰다 보니까, 내가 왜 '스노브' 같지????????????
    (아는 거 좀 나왔다고 신나게 글 썼다가 갑자기 현자타임 느끼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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