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준 교수님의 역개루 이벤트 답변 기타 근현대사

박영준 교수님께서 친절하시게도 본인의 우문에 일일히 매우 알찬 답변을 보내주셨습니다. 이글루스의 동포 여러분들도께서도 한번 조람하소서.

 

1. 최근 일본 제국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가토 요코 씨의 저작을 몇권 읽은 바가 있는데 가토 요코씨의 책을 번역하신 경력이 있으시므로 감히 질문합니다. 가토 요코 씨의 저작의 신뢰도와 그 논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여쭙고 싶습니다.

 

->가토 요코 교수는 일본 근대역사 전공 학자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리버럴에 속합니다. 같은 동경대의 미타니 히로시 교수 등이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적 경향을 갖고 있다면, 근대 일본 정치외교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지요. 그런 시각에서 일본의 군대, 징병제, 중견 간부, 전쟁에 대한 연구들을 주도하고 있지요. 그같은 일본 학자들의 연구 경향을 소개하고 싶어 그녀의 책을 번역, 출판한 것이구요.

다만 가토 교수가 정치외교 분야에 대한 사회과학적 지식이 충분치는 않아서, 서술상 균형을 잃고 있는 부분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실증적인 사료 발굴은 장점이라고 봅니다만, 일본의 군국주의, 전쟁에 대한 구조적인 설명을 기대한다면, 실망하는 점도 있을 거라고 봅니다. 같은 주제를 다룬 마크 피티(Peattie)나 이리에 아키라 등의 저술과 비교하면 가토 요코 교수의 약점이 보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2. 1930~40년대 일본 육군의 소련의 극동 군사력에 대한 경계심과 소련을 주적으로 설정한 전략에 대해 대략적으로 어떤 인식을 가지고 계신지를 여쭙고 싶습니다.

 

->일본 육군이 러시아(1918년 이후 소련)를 가상적으로 설정한 최초의 공식 문서는 1907년 제국국방방침이었고, 이러한 주적인식은 1918, 1923, 그리고 1936년 제국국방방침 개정에서도 이어집니다. 아무래도 일본 육군은 중국 대륙과 만주에서 소련을 제압하고, 이어 미국과의 최종 전쟁에 임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극동 지방 군사력을 염두에 두면서 대소 전략과 전력증강 계획을 수립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이 계획대로 이행되지는 않았습니다. 일본은 중일전쟁을 벌이면서 육군 주력을 중국 대륙에 투입하는 우를 벌입니다. 그리고 중일전쟁 과정에서의 장고봉 사건과 노몬한 전투를 통해 소련군과 교전을 벌였는데, 특히 노몬한 전투에서 일본 육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습니다.

일본 육군이 소련을 가상적으로 설정하면서도 중일전쟁에서 육군 주력을 소모하고, 실제 소련과의 전투에서는 취약성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일본 육군의 전략 이행에서 문제가 나타났다고 봅니다.

 

3. 1920~30년대 심화된 일본 사회의 모순과 이로 인해 촉발된 군부의 급진화 및 의회정치의 붕괴 과정에 대한 일본 국민의 책임은 어느 정도로 책정하시는지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 1920년대까지 일본에는 민정당과 정우회 등 정당세력이 번갈아 가며 정권을 담당하였고, 이 정당들에 의해 군부의 움직임도 제어됩니다. 그러나 1930년대 이들 정당들에 의해 런던군축회의가 체결되고, 군비축소가 진행되면서, 게다가 대공황까지 겹치면서 육해군 소장파 장교들이 반발하기 시작합니다. 소장파 장교들에 의해 수상이 저격되고(1931), 연이어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면서(19362.26 사건), 천황과 원로 정치인들은 민간 정당들에서 수상을 선출하지 못하고, 군부 인사에게 수상을 맡기게 됩니다.

문민통제 제도의 미비, 그리고 군부 세력의 하극상 등에 의해 군부의 대두가 결정적이 되었다고 보여집니다. 일본 국민들은 1925년 보통선거 실시에 의해 다수가 정치에 참가하게 됩니다만, 천황의 대권을 인정한 메이지 헌법 하에서 아직 국민주권의 힘은 미약하였고, 국민 참

가를 담아낼 정치제도도 성숙하지 않아, 군부의 대두를 제어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4. 일본 학계에서 주장하는 <위로부터의 파시즘>담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여쭙고 싶습니다.

 

-> <위로부터의 파시즘론>이란 일본의 파시즘, 군국주의가 일반 국민들의 의사나 희망과는 무관하게 상층 군부, 정치인들의 일방적 의도에 의해 비롯되었다는 시각이지요? 분명히 그런 측면은 있습니다. 1920년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에 시민들의 자유로운 의사표현이나 정치참여가 가능했던 양상은 있었지요. 그러던 것이 1930년대 군부 대두에 의해 사상과 언론 탄압이 따르면서, 일반 국민들의 정치참여나 의사표현이 제약받기 시작하지요. 더 검토가 필요하지만, 군국주의 혹은 파시즘이 자생적으로 아래로부터 성장한 것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5. 마루야마 마사오 씨 등이 제기한 <8.15 혁명론> 테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여쭙고 싶습니다. 제가 듣기로 1945815일은 단순한 일본 제국의 패망이 아닌 일본국민을 압제하던 군부 독재와 파시즘 세력의 패망으로 일본 국민에 있어서도 해방이었으며 이를 혁명으로 보아야 한다는 시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 1930년대 일본 군부와 군국주의 집권이 일부 리버럴 지식인들의 의사에 반하는 것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들 입장에서 보면 1945년 패전은 군국주의 세력의 퇴장과 자유주의 세력의 복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성향의 국민들이 군국주의 세력에 대해 조직적인 저항을 한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패전은 의도적인 변혁 추진의 산물이 아니었구요, 주어진 것이었다고 보입니다. <8.15 혁명론>은 결과론적인 발상에 불과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6. 1930년대 일본 군부의 화북분리공작에 있어서 일본 외교부는 일본 군부의 폭주를 제어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의 폭주를 사후승인하는 등 결과적으로 방조, 협조하는 모습을 보인바가 있는데 중일전쟁 개전 이전 1930년대 중반의 일본 외교부의 대중 스탠스를 대륙쪽 학자들은 그저 일본 군부가 무력으로 침략하려고 시도한 것이면 외교부는 외교력으로 침략하려한 것 정도로 폄하하는 것을 본 바가 있습니다. 교수님은 이러한 시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흥미로운 질문이군요. 외무성 내에도 두가지 흐름이 병존 혹은 대립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1920년대 시데하라 기주로 외상의 전통을 이어받아, 중국에 대해서는 간섭 최소화, 영미와 협조주의를 취하는 노선이 그 하나구요. 다른 하나는 군부와 비슷하게 아시아에서 영국 및 미국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일본의 독자적 세력 확대를 추구하는 노선이지요.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후자의 혁신세력 영향력이 더 강해지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아요. 1934년 외무성 정보국장 아모우 에이지의 성명, 즉 동아에 있어서의 먼로 선언 발표가 이를 보여줍니다. 그런 점에서 중국측 연구자들의 관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7. 6번에서 조금 더 나아가 소위 협화외교라 불리는 히로타 고키의 대중 유화정책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것의 '진의'라 불릴만한 것은 어떤 것이었겠습니까?

->히로타 코키(廣田弘毅)는 제가 보기에 다른 외상 출신인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郎), 사토 나오다케(佐藤尙武) 와 달리, 대륙팽창주의에 경도된 인물이라고 봅니다. 히로타가 외상이나 수상 재임 시절에 특히 대륙팽창적 정책을 취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미국의 일본사학자 이리에 아키라도 이 점을 강조했지요.

 

 

 

8. 히로타 3원칙을 국민정부가 승인하였다면 국민정부와 일본 제국 사이에는 항구적이라 부를 만한 우호관계가 구축되는 것이 가능했겠습니까?

 

->히로타 3원칙이라면 1935년 히로타 외상 시기에 제안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 시기 히로타 외상의 대중 정책은 1934년 아모우 에이지 성명에 준해 진행된 것으로, 중국 대륙에서 영국 및 미국의 영향력을 배제하는 것에 중점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중국이 받아들이기에도 곤란하고, 영국 및 미국이 동조하기에도 곤란한 것이어서, 국제협력과 중일 우호와는 거리가 있는 성격의 정책이 아니었나 보여집니다.

 

 

 

9. 만약 노구교 사건이 외교적인 해결이든 아님 당고정전협정과 같이 현지 군사협정과 같은 방식으로 소규모 국지전 상태로 종전되었다 하더라도 향후에 중일전쟁과 같은 전면전이 발생했을 가능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시 말해 중일전쟁이 필연이었다고 보십니까?

 

-> 중요한 질문이군요. 전쟁이 발발하려면 군사 혹은 정치지도자의 군사전략, 부대 및 무기체계의 증강 및 배치, 그리고 양국간 정치 군사관계의 대립 등의 조건이 부합되어야지요.

1937년 노구교 사건은 최초에는 우발적인 사건이었는데, 만일 일본 정부가 3개 사단 증파의 결정을 내리지 않았으면, 저는 확대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수상 고노에 후미마로가 영국 및 미국에 대해 대립 의식을 강하게 가진 점, 관동군이나 중앙 육군성 내의 군부 소장파를 중심으로 대중 전쟁 불가피론이 강했다는 점, 1936년 제국국방방침에 의해 중국도 소련, 미국, 영국 등과 더불어 가상적의 하나로 제기되고, 그에 따른 육, 해군 군사력 증강이 추진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우발적 사건이 전쟁으로 비화되었다고 봅니다.

 

10. 외상 및 수상 재임 시절 협화외교를 주장했던 히로타가 1차 고노에 내각 시점에서 트라우트만 공작을 거부하는 등 중국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견지한 것은 히로타의 스탠스 변화로 보는 것이 옳겠습니까? 아니면 일본 군부를 의식한 정치적 행동이라고 보십니까?

->히로타를 평가하시는 것 같군요. 저는 히로타가 일본 외상 가운데에서 가장 군부의 생각에 가까웠던 인물이 아닌가라고 평가해요. 대중 강경 정책, 혹은 영국과 미국의 배제 정책이 그의 근본적 생각이 아니었던가 해요. 그러한 히로타를 수상 고노에 후미마로 등이 중용하구요. 스탠스 변화라기 보다는 그의 정책론은 비교적 일관된 것이 아니었을까요?

 

 

 

11. 태평양 전쟁 직전까지 영국과 미국은 일본에 대해 진정으로 유화정책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분석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9405, 독일이 프랑스를 침략하면서, 영국은 처칠 내각이 성립되면서 본격적으로 대독전에 돌입하지요. 그리고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무력 진주하면서, 미국은 일본에 대한 경계태세를 강화합니다. 그리고 19418, 처칠 수상은 루즈벨트 대통령과 대서양 헌장을 공동발표하면서, 독일 및 그 동맹국들과의 대결 자세를 선명하게 보입니다. 이 상황에서 미국과 일본의 화평 성립 가능성은 거의 사라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12. 1930년대와 1941년까지 일본 군부 및 외교부가 영미에 대해 가졌던 인식은 어떤 것이라고 보면 되겠으며 영미의 대일정책의 성격은 어떻게 규정하는 것이 맞다고 보십니까?

->큰 질문이네요.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1936년 제국국방방침에서 일본 육해군과 정부는 미국, 소련, 중국, 영국을 가상적으로 설정하면서, 그에 대한 전쟁 준비를 보다 구체화합니다. 이것이 영미에 대한 일본의 기본 정책입니다.

영국과 미국 측에서는 잠재적으로 일본을 위협으로 생각하면서도, 본격적으로는 19405, 독일의 대불 공격 이후에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군사 진주하면서 전쟁을 고려했던 것 같아요. 미국은 중립주의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19418월 대서양 헌장에 이르러서야 유럽과 아시아에서의 전쟁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앞으로도 추가 이벤트가 있기를 고대할 뿐이오.


다른 질문들은 역개루 카페 참고!

https://cafe.naver.com/historyarchive/11210


현재 오항녕 교수님과의 이벤트도 진행 중이라오.

https://cafe.naver.com/historyarchive/11065


덧글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