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뱌오:미국과의 화해? 인정할 수 없어. ㄴ공산중국

고전짤로 시작하는 하루


1969년 (중소 국경분쟁) 사태로 마오와 저우언라이가 배운 교훈은 확실히 (당내에서 군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린뱌오의 입장과) 그 반대였다. 즉 소련이 국경에서 훨씬 강경한 노선을 취했고, 중국이 거기에 아무리 단호히 대처하더라도 소련의 가공할 공격을 인민해방군이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베이징이 닉슨 행정부의 (데탕트) 제안을 수용한 것이었다. 워싱턴에 대한 개방은 러시아인들이 중국을 공격했을 때 미국이 무시해도 좋을지 계산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중미관계의 개선 이전에도, 닉슨 행정부는 소련의 침공에 대해 미국이 자비로운 중립을 취하지 않을 것을 모스크바가 알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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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린뱌오는 아시아에서 나치-소비에트 협약에 비견되는 격변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중국이 두 강대국의 동시적인 위협 앞에서 진정으로 홀로 설 수 없다면, 제국주의 미국보다는 수정주의 소련과의 타협이 더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이 문제에서 린의 입장이 분명하게 밝혀진 적은 없었다. 후에 그는 '고립주의자'와 '대국 쇼비니즘'으로 비난받았으며, 이 점은 그가 미국이나 소련 어느 쪽과의 타협에도 반대했고, 중국이 자신을 보호할 만큼 충분히 강하다고 주장했음을 의미한다. 마오는 닉슨과 다른 외국 방문자들에게 린뱌오가 미국과의 접촉을 반대했다고 전했다.

만약 마오의 보고가 정확하다면, 그의 동기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인민해방군은 중국이 예전보다 더욱 고립되고 위협받고 있는 것으로 느꼈다. 마오의 정신을 물려받은 위대한 혁명군이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개인의 권리를 논할 수는 없었다. 저우언라이의 영역인 평화외 외교적 기술은 덜 중요해 보였을 것이다.

린에게는 불행했지만 마오는 외교로 시간을 벌 생각이었고, 10월 7일 신화통신은 중소 국경협상이 시작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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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뱌오가 소련의 기습에 대비한) 명백한 전쟁준비는 러시아인들이 국경에서 더 많은 군사적 행동을 할 구실을 제공했을 수도 있다. 린의 명예가 실추되자 마오는 명백히 자신이 유발한 행위에 대해 그를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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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이 비군사적으로 권력을 잡는 일은 가망이 없음이 증명되었고, 그는 더 위험한 방식에 착수했다.

중국현대정치사, 로더릭 맥파커 등 공저, 푸른길.
제4장 마오의 후계와 마오주의의 종결(1969~1982), 370~373페이지.

주석님 꼬라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은 부주석 동지 ㅠㅠ


여담

1. '더 위험한 방식'에 착수한 결과 린뱌오는 일가족과 몰살당했다더라...

2. 1971년 린뱌오가 소련으로 도주하고 있을때 인민해방군 공군은 린뱌오가 탄 비행기를 야간에 추격할 능력도 없었다더라. -ㅅ-

3. 결과적으로 1972년은 저우언라이의 해로 떠올랐고 저우언라이는 마오가 싼 똥을 상당수 치웠지만 1973년부터 마오가 장칭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다시 혼돈! 파괴! 망가!

덧글

  • 터프한 얼음대마왕 2018/08/28 20:50 # 답글

    1. 린뱌오와 마오의 사진을 보니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너~~~ 같네요.

    2. 중소국경분쟁-데탕트, 린뱌오와 마오, 저우언라이의 갈등. 쩝. 공산국가의 정치투쟁이란... 마오는 명백히 자신이 유발한 행위에 대해가 궁금합니다.

    3. 좀 뭘 싸놓으면 뒤로 물러났다가 누가 좀 치우면 다시 돌아오는 마오의 권력 돌려막기란... 끙.
  • KittyHawk 2018/08/29 15:05 # 답글

    팽덕희의 마지막까지 생각하면...
  • 명탐정 호성 2018/08/31 01:28 # 답글

    저럴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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