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숙청의 단면:에이헤와 루주타크의 숙청의 사례. 소련사

오늘날 이러한 가짜 '스파이들''과 '적대세력들' 중 몇몇에 관한 사건을 조사했는데, 그 사건들은 조작된 것이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적대 행위로 고발되어 체포당한 많은 사람의 자백은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고문으로 받아낸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스탈린은 당시의 정치국 위원들이 알려준 바와 같이, 중상모략을 당한 몇몇 정치가가 군사협의회의 법정에서 자신들의 진술을 부인하면서 사건을 객관적으로 조사해줄 것을 요구했을 때, 그런 성명서들을 정치국 위원들에게 송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성명서는 적지 않았으며 스탈린은 그것들에 대해 알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중앙위원회는 제17차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당 중앙위원회 위원들을 겨냥했던 일련의 날조된 '사건들'에 관해 이번 전당대회에서 보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에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이었고 당과 소비에트 국가의 뛰어난 활동가 중 한명이었으며 1905년부터 당원이었던 에이헤 동지 사건은 추악한 관제 선동, 악의에 찬 날조, 혁명적 준법성의 범죄적 위반 등의 사례입니다.

(대회장 내 동요)

에이해 동지는 중상모략하는 자료에 따라 소련 검사의 승인도 없이 1938년 4월 29일에 체포되었는데, 검사의 승인은 체포된지 15개월 후에야 받았습니다. 에이헤 사건의 심리는 소련 법률의 극심한 위반, 그리고 전횡과 날조 등의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에이헤는 고문당한 상태에서 조사관이 사전에 작성한 심문 기록에 서명하도록 강요받았는데, 그 기록에는 자기 자신과 몇몇 뛰어난 당 및 소비에트 일꾼들을 반소비에트 활동으로 고발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1939년 10월 1일에 에이헤는 스탈린에게 성명서를 보냈는데, 거기서 그는 자신의 범죄를 단호하게 부인했으며 사건을 자세히 조사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성명서에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자신이 언제나 쟁취하고자 했던 그 체제에서 감옥에 갇히는 것보다 더 쓰라린 고통은 없다."

에이헤가 1939년 10월 27일에 스탈린에게 보낸 두번쨰 성명서도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 성명서에서 에이헤는 자신을 겨냥한 중상모략적인 고발을 사실에 입각하여 설득력 있게 반박했으며, 또한 이러한 관제 선동적 고발은 한편으로는 서부 시베리아 지역 당위원회의 제1서기였던 자신의 승인 하에 체포되었던 진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그에게 복수하려고 꾸민 사건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조사관들이 조작된 자료들을 비열하게 날조한 결과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에이헤는 자신의 성명서에 이렇게 썼습니다.

"올해 10월 25일에 그들은 제 사건의 심리가 끝났다고 알려주었고 심리 자료를 볼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만약 제가 했다고 제시된 범죄들 중 단 하나라도, 그것의 100분의 1이라도 제게 책임이 있다면, 저는 이런 유서같은 성명서를 당신에게 보낼 엄두를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고소당한 범죄들 중 그 어떤 것도 저지르지 않았으며, 제 영혼에 비추어 비겁한 짓을 했던 적도 없습니다. 저는 평생 동안 당신에게 한마디라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으며, 지금 저는 무덤 안에 두 발로 서 있지만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저에 관한 모든 사건, 그것은 관제 선동과 중상모략의 전형적인 사례이자, 혁명적 준법성의 근본 토대를 파괴한 전형적인 사례인 것입니다.

제 심리 사건에서 제 정체를 폭로한다는 증언들은 황당무계할 뿐만 아니라, 몇몇 부분에서는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를 비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주도하지도 않았고 참석하지도 않았던 상태에서 채택된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의 올바른 결정들이 저의 제안에 따라 이루어졌던 반혁명 조직의 적대적 행위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는 제 생에서 가장 치욕적인 부분을, 그리고 당과 당신에 대한 저의 가장 큰 잘못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제가 반혁명 활동을 했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된 일입니다. 우샤코프와 니콜라예프가 제게 했던 고문을, 특히 제 척추가 골절된 후 아직 제대로 낫지 않아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고 있다는 점을 교묘히 이용하여 우샤코프가 했던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저는 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게 되었습니다.

제 증언은 대부분 우샤코프가 암시했거나 불러주었던 것이고, 나머지는 제가 서부 시베리아에 관한 내무 인민위원부의 자료들을 기억에 의존하여 고쳐 쓰면서 거기에 인용된 사실들을 모두 제 잘못으로 돌린 것입니다. 만약 우샤코프가 창조해내고 제가 서명한 꾸민 이야기에서 무언가 잘 맞지 않으면, 저는 수정된 다른 진술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예비 중앙 조직에 소속시켰다가 그 다음에 제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빼버린 루히모비치의 경우가 그러했으며, 부하린이 1935년에 조직했다는 예비 중앙 조직의 의장 경우도 그러했습니다. 처음에 저는 저 자신을 적어 넣었지만, 그 다음에 메즐라우크를 적어 넣으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많은 부분도 그러했습니다.

저는 제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도록 시킬 것을 당신에게 부탁하고 간청합니다. 그리고 이는 저를 용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특히 제 소심함과 범죄적인 비방 때문에, 마치 뱀처럼 많은 사람들을 휘감아버린 비열한 관제 선동을 폭로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결코 당신과 당을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제가 저에 관한 관제 선동을 조직한 당과 인민의 적들의 추잡하고 비열한 작업 때문에 죽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성명서는 반드시 중앙위원회에서 논의되어야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고, 성명서는 베리야에게 보내졌으며, 중상모략을 당한 정치국 후보위원 에이헤 동지에 대한 가혹한 폭력은 계속되었습니다. 1940년 2월 2일 에이헤는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법정에서 에이헤는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른바 저의 모든 진술에서, 어쩔 수 없이 써넣은 기록 아래의 서명을 제외하고는, 제가 언급한 단어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 진술은 저를 체포하자마자 마구 때리기 시작한 조사관의 압력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이후에 저는 갖가지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게 중요한 것은 제가 결백하다는 점을 법정과 당과 스탈린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음모에 가담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제 모든 활동 기간에 믿었던 것처럼, 지금도 당 정책이 옳다는 믿음을 가진 채 죽어갑니다."

2월 4일 에이헤는 총살당했습니다.

(대회장이 분노로 웅성거림)

현재 에이헤 사건은 날조되었음이 명백히 확인되었고, 그는 사후 복권이 되었습니다.

1905년부터 당원이었으며 차르 시대에 10년간 징역을 살았던 정치국 후보위원 루주타크 동지는 자신의 강요된 진술을 법정에서 모두 부인했습니다. 최고재판소 군사협의회의 재판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루주타크의 발언이 적혀 있습니다.

"법정에서 그가 했던 유일한 요청은, 내부 인민위원부의 기관들 내부에는 어떤 잘못도 없는 사람들에게 자기 죄를 인정할 것을 강요하여 인위적으로 사건을 만들어내는 아직도 뿌리 뽑히지 않은 부패 세력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고발당한 상황에 대한 어떠한 조사도 없었고, 여러 사람의 이러이러한 진술에서 제시된 그 범죄에 자신이 가담하지 않았음을 입증할 어떤 가능성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조사 방법들도 그렇습니다. 피의자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도 않은 채, 그 어떤 잘못도 없는 사람들을 생각해내어 비난하도록 강요하는 것입니다. 법정은 그가 전연방공산당 중앙위눤회를 위해 그런 모든 일에 대해 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요청합니다. 법정은 그가 개인적으로 우리 당의 정책에 반대하여 잘못된 생각을 가진 적이 없음을 보증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경제 및 문화 건설의 모든 분야에서 실행되었던 당의 모든 정책에 완전히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루주타크는 한때 레닌의 사상에 따라 당의 단합을 위해 투쟁하도록 설치된 중앙 통제위원회 의장을 지냈지만, 그의 이런 성명서는 주의를 끌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높은 권위를 가진 당 기관의 의장이 무자비한 전횡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를 중앙위원회 정치국으로 부르지도 않았으며 스탈린은 그와 대화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20분 만에 형을 선고받고 총살당했습니다.

(대회장이 분노로 웅성거림)

1955년에 이루어진 꼼꼼한 조사로 인해 루주타크 기소 사건은 날조되었으며, 그를 중상모략한 자료들에 근거해서 형이 선고되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루주타크는 사후 복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인위적으로 -관제선동적인 방식으로- 예전의 내무 인민위원부 요원들이 다양한 '반소비에트적인 중앙 조직'과 '연합'을 만들어냈습니다.

소련 공산당 20차 전당대회에서 흐루쇼프의 연설 "개인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해"
박상철 역, 책세상, 45~51페이지.



덧글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