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씨개명, 원래는 폐성창씨였다. 기타 근현대사

아마 고수분들은 다 아시리라 믿지만서도... 배움이 일천한 본인의 경우에는 어제서야 겨우 안 지식이라서 다른 분들과 한번 나눠보고자 글을 올립니다.

1890년대 일본에서 메이지 민법의 제정을 통해 폐성창씨를 이뤄낸 이토 히로부미와 우메 겐지로 교수가 새로운 식민지가 될 조선의 새로운 민법을 구상하면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둘은 조선의 서구 문명화를 구실로 조선의 성 제도를 없애고 일본처럼 씨 제도로 바꿀 계획을 구상했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되고 우메 겐지로 교수도 급사하면서 이 계획은 흐지부지해졌다. 조선 총독부는 조선의 정서상, 일본식 성명을 강제하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고 여겼고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계획이 아주 포기되진 않아 1919년에 창씨정책 시안을 수립했다. 얼마 후 3.1운동이 일어남으로 이 계획은 유보되었지만 일본은 1923년 조선민사령을 통해 조선의 호적을 일본식 家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식 호적제도로 개편했고 1929년에 다시 창씨개명 2안을 수립했지만 본국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한편 일본 내부에선 동경제국대학 교수인 니토베 이나조우 교수를 필두로 조선을 점진적으로 동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고 있었다. 이들은 기존의 무단통치의 가혹함이 오히려 조선 지배에 해가 됨을 지적하면서 조선에 유화적인 통치를 펼쳐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일본의 통치를 우러러보게 한 다음에 아예 일본인의 일부로 동화시켜 조선을 내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미즈노 정무총감 등에 의해 채택되었으니 이게 바로 문화통치다. 하지만 동시에 일본에선 식민지에게 자치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분화 운동 역시 격렬히 제기되었고 이에 따라 동화와 자치를 동시에 추진하는 '자주협동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배 방식인 연합주의의 벤치마킹이었다. 프랑스는 식민지에 강제적인 프랑스 동화를 강요했는데 오히려 격렬한 반발로 식민통치가 어려워지자 동화엔 관심이 없는 영국식 통치와 기존의 방식을 절충하여 내놓은 자치와 동화의 병행 정책이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선 이런 점진적 동화가 급진적 동화로 전환되었는데 1935년 일본의 국정교과서들은 조선인과 대만인을 일본인이라고 표기하는 등 동화의 의지를 표명하고 있었다.

1936년 8월 전 육군대신이자 관동군 사령관인 미나지 지로가 7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천황이 조선에 방문해도 좋을 정도로 조선의 치안을 안정시키며 조선인들에게 천황 숭배 사상을 가지도록 정신을 개조하여 '우량한 황국신민'으로 만드는 것과 조선에 징병제를 실시하고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의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세뇌시키기 위한 교육의 확보를 목표로 삼았다. 그는 부임 직후 일본어의 생활화와 천황 숭배를 방해하는 다른 종교들을 탄압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미나미 지로는 가혹한 탄압으로 조선 내부의 독립 운동을 완전 독립과 자치, 좌와 우를 가리지 않고 때려잡아 조선의 표면적인 안정화를 가져왔다. 이에 고무된 미나미 지로는 황민화와 징병을 기반으로 한 동화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1937년 10월 황국신민의 서사가 발표되었고 조선인들에게 신사참배를 하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1938년 2월에 지원병제가 실시되었고 4월에 조선어의 상용 및 교육 금지 정책과 더불어 일본어 보급 정책이 실시되었다. 5월에는 일본의 국가총동원령을 조선에까지 확대시켰다. 그리고 조선인의 충성심 고취와 완전한 내지화를 통한 사법 행정의 일원화와 징병 및 국가 자원의 동원을 완성하기 위해 조선과 대만에 조선, 중국식 성을 폐지하고 일본식 씨를 새로 만드는 폐성창씨를 강요하게 되었다. 총독부는 이 정책이 조선인과 대만인의 차별을 완전히 철폐하고 그 증거로 그들에게 일본식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했으며 폐성창씨의 대체어로 개성명이란 용어도 적극 사용했다.

우선 일본은 조선의 지식인층을 단속하기 위해 수양동우회 사건과 흥업구락부 사건을 일으켜 좌우익을 망라한 조선의 수많은 지식인들을 체포했고 이들에게 극심한 고문을 가하며 천황과 국가에 충성하는 황국신민이 되겠다는 전향서를 쓸 것을 강요했다. 결국 이광수를 비롯한 수백명의 지식인이 사상 전향서를 쓰고 나서 겨우 풀려났다. 하지만 구속된 지식인들은 조상을 욕되게 하는 폐성창씨 정책에는 차라리 자신들을 죽이라고 거의 미친듯이 반발했다. 이들 대다수가 프라이드가 높은 지식인들이었으니 일본식 성명을 강요하는 것은 더욱 치욕이었을 것이다. 이들의 반발에 놀란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미나미 지로에게 일본식 성명을 강요하면 3.1운동을 뛰어넘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날 것이니 일본식 성명을 강요하는 것을 불가능하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결국 일본은 조선식 성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일본식의 새로운 씨를 부여하는 것에 그치는 창씨개명으로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만에선 기존의 폐성창씨를 그대로 추진했다. 그렇게 1939년 11월 10일 제령 19호와 20호를 통해 창씨개명의 방침을 발표했다. 이는 1940년 2월 11일 기하여 효력을 발휘했다. 조선총독부는 기존의 '관습적 성명'과 더불어 일본식 씨명을 등재하고 일상생활에서 씨명을 쓸 것을 명령했다. 이렇게 호주의 아내와 어머니에게 집안의 성과 다른 성이 허용된 것과 달리 여성들에게도 같은 씨가 강요되었다. 조선총독부는 6개월 안에 호주가 의무적으로 창씨를 해야 한다고 위협했다. 만약 호주가 응하지 않아도 직권창씨라 하여 이름을 강제로 바꿀 계획이었다. 자발적으로 창씨한 사람은 신고(또는 설정) 창씨였다. 과거에는 자발적으로 바꾼 설정창씨와 강제로 이름을 바꾼 법정창씨로 구분되었으나 조사결과 설정창씨와 직권창씨를 따지지 않고 모든 조선인들은 제령 19호에 따른 법정창씨에 해당됐다.

미나미 지로는 창씨개명을 선포하면서 조선은 이제 식민지가 아니라 내지다! 라고 호기롭게 선언하면서 창씨개명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1. 중국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내고 조선 고유의 문화를 확립하기 위해서.

2. 조선인들이 원해서.

3. 조선의 성은 250종 밖에 안되는데 이는 10만종에 달하는 씨를 가진 일본과 대조적이다. 일본처럼 다양한 종류의 씨를 가지면 선진화와 문명화를 이룩할 수 있으니까.

이 부분에서 일본은 꽤 공을 들여 설명했는데 기존의 성이 없어지는게 아니라 착각하지 말라 기존의 성은 그대로 남고 그저 새로운 씨를 부여할 뿐이니 조선인들아 흥분하지 말아라. 란 설명서까지 전국에 배포했다. 그리고 이광수를 비롯한 지식인들을 대거 내세워서 창씨 개명 홍보에 들어갔다. 이광수는 창씨와 나라는 글을 쓰면서 창씨개명의 필요성에 대해 네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1. 조선과 일본의 차별을 제거하기 위해.

2. 조선인 성명을 국어(일본어)로 읽을 때가 많은데 일본식 씨명을 갖추면 훨씬 수월해지기 때문.

3. 기존의 성명은 우리 민족 고유의 이름을 잃고 중국에 사대한 유물이라 중국인과 헷갈림. 이왕 헷갈릴 바엔 어차피 우리가 제국의 신민이 되었으니 일본인 이름과 헷갈리는 것이 자연스러움.

4. 우리가 창씨를 많이 할수록 내지에서 우리를 믿을 것임.

당시 조선에선 30년대부터 족보 편찬 열풍이 부는 등 자신들의 뿌리 찾기에 열심이었는데 일본식 씨명이 강제된다는 말에 조선인들은 몹시 놀랐다. 이에 총독부는 성도 본관도 다 남으며 족보에 아무런 위해가 가지 않는다고 조선인들을 안심시켜야 했다. 또한 이것이 자유의사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거의 강제로 다 고칠 것을 이미 고려하고 있었으니 이는 거짓말이었다. 조선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에도 매우 분노했다. 그 결과 매우 경이적인 무관심이 창씨개명을 맞이했다.

2월 11일 미나미 지로 총독은 열화와 같은 신청이 쇄도할 것이라면서 매우 느긋해했고 총독부 관리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유의사에 일본식 씨명을 줄 뿐이니 조선인들이 당연히 이 기회를 받아들이지 않겠냐는 관측이었다. 하지만 그날 하루 전국에서 48명만 창씨개명에 동참했고 총독부는 충격을 받았다. 총독부는 즉각 언론을 통해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고 유지들과 유력자들에게 창씨개명을 독촉하여 모범을 보일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한달동안 참여자는 0.36%에 지나지 않았고 한달이 더 지난 후엔 1.07%였다. 그간 신청한 사람들은 공무원, 상류층, 전문직 종사자, 총독부의 허가가 필요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결국 미나미 총독은 3월부터 수속 비용과 절차를 줄이는 한편 강제적인 창씨 개명에 돌입했다.

당시 아직까지 잔존한 유력 양반가의 후예들과 유서깊은 가문의 문중, 유림들은 창씨개명에 격렬히 반발했는데 총독부는 치안유지법을 이용해 양반들을 투옥해서 창씨개명할 것을 강요했다. 전국의 유력 양반가의 집엔 순사들이 들이닥쳐 창씨개명을 강요했고 거부하면 연행하길 서슴지 않았다. 조선어학회 회원들도 모조리 잡아 가두고 이들이 자발적 창씨를 했다는 거짓 언론 보도를 하기도 했다. 교사와 이장들은 자신들의 학생과 주민들의 이름을 책임지고 고쳐야할 임무가 주어졌다. 그리고 창씨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불이익이 주어졌는데 다음과 같다.

1. 창씨하지 않은 사람의 자녀는 입학, 전학을 거부한다.

2. 창씨하지 않은 아동은 이유없이 구타, 질책할 수 있다.

3. 창씨하지 않은 사람은 공직에 등용될 수 없으며 이미 등용된 사람은 면직한다.

4. 창씨하지 않은 사람의 공공사무는 처리해주지 않는다.

5. 창씨하지 않은 사람은 비국민, 불령선인이니 징용 우선자로 삼고 철저히 감시하며 불이익을 주라.

6. 창씨하지 않은 사람의 화물은 처리해주지 않는다.

7. 창씨하지 않은 사람은 내지로 도항할 수 없다.

1940년 3월 25일을 기해 학교연맹이 세워져 애국반을 중심으로 창씨가 강요됐다. 결국 창씨는 살기 위해선 해야만 하는 것이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저항하여 자결했고 투옥되길 꺼리지 않고 감옥에 갔다. 양반가는 창씨도 창씨지만 동성동본의 결혼 허용과 장인의 성을 따르게 하는 데릴사위제의 시행에 크게 분노했다. 하지만 대다수 민중은 관리나 순경이 지어주는 일본식 개성명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 상위층, 공무원들은 순 일본식 이름으로 고쳤고 일부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포부를 담은 일본식 이름을 짓기도 했는데 대다수 조선인들은 자신들의 조선 정체성을 숨기지 않는 이름을 지었다. 유형이 다음과 같다.

1. 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경우.

2. 본관을 성씨로 삼는 경우.
우봉 이씨, 풍천 임씨, 평산 신씨 등이 속했다.

3. 본관에서 한 자를 취하거나 본관의 옛 지명을 취하는 경우.
풍양 조씨, 광산 김씨, 안동 권씨 등이 해당했다.

4. 시조, 유명 선조의 호, 이름, 고사에서 취하는 경우.
밀양 박씨, 경주 이씨, 한안 이씨 등이 속했다.

창씨는 문중회의, 종중회의 차원에서 결정되었고 유력자와 원로들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제의 강압으로 각 문중들이 굴복하면서 문중 단위의 창씨개명이 이루어졌는데 덕분에 후반의 창씨개명은 엄청난 속도로 이루어졌다. 결국 80.3%의 조선인이 창씨개명했고 41년까지 81.5%로 늘었다. 그런데 성을 바꿀 필요가 없는 특수한 경우가 존재했다.

1. 이왕가의 주요 인물들. 씨가 없는 일본 황실의 예에 따라 바꿀 필요가 없었다.

2. 친일파 거두들. 창씨개명이 자발적이라는 홍보를 위함이었다. 그리고 친일파 중에서도 가문의 자긍심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에겐 친일의 보상으로 창씨를 하지 않게 해주었다.

3. 홍사익 등 조선인 출신 일본군 고위 장교들. 일제는 이들에겐 아예 정책적으로 창씨를 요구하지 않았다.

4. 남씨, 임씨 등 일본에도 이미 있는 외자성씨.

5. 대학교수들과 기독교도 교사들.

6. 총독부 산하 반관반민 조직에 근무하는 양반가 사무원들. 총독부도 이들의 고집은 꺾지 못해 조선식 성을 일본식 독음으로 읽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창씨개명하지 않는 이유를 배일이 아닌 가문의 긍지로 받아들인 일제의 양보였다.

이러한 일본식 씨명은 1946년 10월 23일 미군정 법령 122호 '조선 성명 복구령'에 따라 모두 무효화되어 모든 조선인들은 원래 이름을 찾게 된다.

본인이 리그베다 위키의 창씨개명 항목에 서술한 창씨개명 정책 시행의 전말. 창씨개명정책과 조선인의 대응(구광모, 중앙대학교) 참조.

덧글

  • 백범 2015/03/29 17:18 # 답글

    어려서 동네 어르신들, 지금 살아계신다면 110~120살쯤 되셨을... 영감님들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6.25 직후까지도 호적이나 성씨가 없던 사람들도 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그게 신분제도의 잔재 때문이긴 한데...

    불과 전국민이 성과 이름을 쓰기 시작한게 50년이 조금 지났다는 소리입니다.

    한국의 국사라는게, 이런 내용들은 절대 알아보려 하지도 않고, 귀기울이지 않지요.
  • 명탐정 호성 2015/03/29 17:39 # 답글

    사실 그전부터 조선반도에서 쓰던 성은 중국식 성이었습니다.
  • rumic71 2015/03/29 20:23 #

    신라때부터 중국식 성을 들여오기 시작했으니...
  • 채널 2nd™ 2015/03/30 01:21 # 답글

    '역시' 대일본 제국은 "치밀"했군요. <-- 조선은 반항(?)했다지만, 어째 대만은 그대로 수용했다니 ㅎㅎ

    그런데도 대동아 전쟁이 끝나자 정작 분할된 나라는 대만이 아니라 조선이었다는 것이 (젠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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