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공지 블로그 운영


이제야 공지를 쓰게 되네요.
본인의 신변에 각종 테러를 감행하려는 금치산자, 정신병자, 좌경맹동주의자, 우경기회주의자, 반혁명종파분자, 주자파들이 날로 늘어가는 관계로 블로그 청소를 실시했습니다.

몇차례 테러로 인하여 비로긴 댓글을 도로 막아버릴까 고민했지만 한동안은 허용으로 방침을 유지하겠습니다. 테러는 가차없지만 정론공격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백화제방! 백가쟁명!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분들께 사딸라가 함께하길.

님은 바로 역밸 콘서트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부운! 블로그 운영


굉장히 심각한 복통 잡상

증상은 딱 배탈인데 뭘 잘못 먹은건지 감이 안잡힌다.

별주부전 토끼보다 간을 잘 숨겼던 오리아나 팔라치의 인물평 기타 근현대사

레흐 바웬사:생긴게 스탈린을 닮았다. 오만하고 무지하고 공격적인 파시스트. 촌스럽고 건방지며 자기가 폴란드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믿는 뻔뻔한 놈. 오로지 폴란드 카톨릭 교회가 허세를 부리기 위해 띄워준 허깨비에 불과하다.

미에지슬라우 라코우스키:똑똑한 듯 하다. 계몽된 공산주의자이며 민주적 공산주의자지만 공산주의자니까 믿을 수가 없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조차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데도 자신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지 못한다.

이디 아민:잔인한 범죄자. 국민을 학살하는 폭군. 돼지새끼.

무아마르 카다피:필요할 때만 혁명투사를 자처하는 제국주의자. 내정간섭이라고 우간다에는 간섭 못한다더니 차드에는 필요하니까 간섭하는 꼬라지가 언행불일치 쩐다. 자기가 신인줄 착각하는 미친놈. 40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히틀러랑 베프 먹을 놈. 국민들이 지를 사랑한다면서 경계근무는 왜 맨날 삼엄한지 모르겠네?

윌리엄 콜비:이탈리아가 자기 식민지인줄 착각하는 제국주의자. 종교재판소 사제나 소련 공산당 공무원같은 인간. 부패한 인간보다 더 구역질나는 부패하게 만드는 인간. 자기가 이탈리아 기독교민주당과 사회민주당 고문변호사라도 되는 줄 아나. 남의 나라 내정간섭하는데나 유능하다.

보응우옌잡:쾌활하고 거만한 프랑스 속물. 근데 분석력은 좋더라.

헨리 키신저:엄마 곁에서 안 떨어지려는 아이처럼 닉슨 곁에서 안떨어지려는 마마보이. 그런데 자기가 헨리 폰다인걸로 착각하는 뻔뻔스럽고 거만한 카우보이다. 자기가 말타고 각국에 달려나가기만 하면 사태가 해결된다고 착각한다. 똑똑한 건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얘를 믿고 따르는 놈들은 병신이다. 과거 속에만 살고 있으니 항상 용두사미로 끝나는게 딱 멍청한 놈들 앞에서 연기만 피워대는 꼴이다.

골다 메이어:스스로에 대해 너무 잘 알아서 자기만족에 빠질 수가 없음. 아름다운 어른이며 속속들이 품위가 배어 있는 귀부인. 근데 권력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닌듯.

하일레 셀라시에:지입으로 용기와 품위를 가진 사람만 좋아한다는데 얘를 몰아내려고 쿠데타를 시도했던 장교들이야말로 용기와 품위가 있었다.

팔라비 2세:지가 신통력있다고 설치는데 얘 옆에 있으면 무함마드랑 악수할 수 있을 것 같군. 언제나 표정이 왜 항상 죽상이냐?

아야톨라 호메이니:단순한 광신자가 아니라 머리가 굉장히 좋고 예의바르다.(그건 그렇고 이란의 무솔리니, 로베스피에르임)

...........하다가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여기까지....
그리고 이 평가들 대다수는 본인의 면전에서 쏟아낸 독설이라고 합니다....

여담에 추가하는 일화들

1. 하일레 셀라시에와 인터뷰할때는 6번이나 인터뷰 주제 바꾸라는 명령을 들었지만 생까다가 결국 쫓겨남. 그리고 셀라시에를 까는 인터뷰 기사를 올려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의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을 때 에티오피아의 이탈리아 교민들이 황제가 살아있는 동안엔 에티포이아에 다신 오지 말아달라고 부탁함. 하지만 팔라치는 무솔리니 통치를 너무 오래받은 모양이라고 까버림.(...)

2..아리엘 샤론과의 인터뷰에서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학살한 것을 추궁하였을때 샤론이 부정하자 준비해간 시체 사진들을 샤론 책상 위에 뿌려버림.

3. 부토와 인터뷰할떄 부토가 인디라 간디를 아버지 명성 못따라가는 여학생 수준의 병신이라고 까자 그걸 고대로 기사화해서 인도-파키스탄 외교관계 종칠뻔함. 부토가 팔라치의 조작이라고 주장하면서 비선라인으로 제발 기사를 철회해달라고 사정하자 지옥에나 가라고 비웃어줌. 이 사태는 인디라 간디가 못들은걸로 하겠다고 하면서 정리됐다나...

이상의 모든 일화나 평은 산토 아리코의 오리아나 팔라치 평전 출처.

스탈린은 애치슨 라인 때문에 김일성의 남침을 지원한 것인가? 소련사

대만과 한반도를 미국의 안전보장선에서 제외한다는 애치슨 라인이 발표되자, 소련은 미국이 한반도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오판하여 김일성의 침략전쟁을 승인해주었다는 것은 전가의 보도처럼 인용되는 일이다. 하지만 근래의 연구들은 스탈린이 애치슨 라인에 대해 낙관적으로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에 관련해 데이비드 쑤이 박사의 연구를 인용한다.


김일성의 남침 제안에 대한 스탈린의 입장을 바꾸게 한 것은 바로 국제적 상황의 변화였다. 그러면 스탈린이 말하는 '국제적 상황의 변화'는 과연 어떤 것일까? 웨더스비는 "미국의 개입 가능성에 대한 계산이 소련의 의사 결정에 핵심적 요인이었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김일성의 남침 제안에 대한 스탈린의 승인 시기 -1950년 1월 말-는 같은해 1월 12일 애치슨이 발표한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시킨다는 새로운 국방정책에 대한 반응임에 틀림없다.

웨더스비의 주장은 과연 정확할까? 소련의 자료는 애치슨의 발언에 관련된 김일성, 모택동과 스탈린의 반응은 말할 것도 없이, 아무런 기술이 전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애치슨의 발언에 대한 스탈린의 진의를 유추할 수밖에 없다.

(...)

화이팅이 지적한 바, 1946년 이란 사태와 1948~1949년 베를린 사태에서 군사력 사용을 불사하는 워싱턴의 자세가 모스크바로 하여금 군사적 시도를 단념켰었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스탈린이 애치슨의 발언을 진심이라 받아들였다고 믿기는 어렵다. 이에 대한 저자의 견해로도 스탈린이 애치슨 발언만으로 김일성의 계획에 대한 승인을 결정한다는 견해에는 반대한다. 스탈린은 노련한 전략가로서 미국이 아마도 군사적 개입을 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미국이 대규모 군사력을 한반도에 파병시키기 전에 북한군이 한반도 남부를 석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리고 이것이 실패할 경우에는 이로 인한 미국과 소련 사이의 군사적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는 모택동이 이 사태에 개입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모택동이 이 구상에 동의하도록 이미 성공적으로 설득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6.25전쟁 참전, 데이비드 쑤이 박사학위 논문, 한국전략문제연구소.

여담

1. 그러니까, 애치슨 라인 때문에 스탈린이 남침을 지지하게 되었다는 웨더스비 등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유추'이지 문서적인 직접 증거가 없다.

2. 곤차로프 교수 등의 연구에 따르면, 애치슨 라인이 발표된 지 한참 후인 1950년 4월 시점에서도 스탈린은 "미국은 결코 남한에서 쫓겨나려 하지 않을 것이며, 이로 인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강대국의 위신을 잃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곤차로프 교수는 오히려 스탈린은 애치슨 선언에 대해서 스탈린이 가진 낙관은 중국과 서방 국가들의 거리를 넒혀버릴 수 있는 데에 있었다고 지적한다.

3. 여러번 언급했던 사실이지만 스탈린은 만약 김일성의 코피가 터져도 자신은 도울 생각이 없으니 마오쩌둥에게 가라고 김일성에게 분명히 못박았다. 스탈린은 대국의 자존심을 내세워 미국과 맞서고 싶었지만 막강한 미국과 군사적으로 직접 대결하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모든 순간에서 결정적으로 회피하였다.

단숨에 2천마리의 닭을 잡수시는 마오 주석??? ㄴ공산중국

1961년의 일이다. 마오쩌둥은 류사오치, 저우언라이를 대동하고 호남성 장사를 방문하였다. 호남성 당 지방위원회 제1서기 장핑화와 호남성 보안국장이 마오쩌둥을 영접했고 그들이 장사에 체류하는 동안 경호를 책임졌다. 세 지도자가 장사를 떠날 때가 되자 장핑화는 중앙경위단 주임 왕둥싱에게 지도자들이 장사에 머무는 동안 소요된 비용을 청구하였다. 그런데 믿기지 않는 대목에 왕둥싱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오쩌둥 일행이 장사에 머무는 동안 무려 2천마리의 닭을 먹어치웠으니 이를 변제해달라는 것이 호남성 당국의 요청이었다.

경위단이나 마오쩌둥의 최측근인 제1조의 관계자들은 모두 장핑화의 청구서가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세 사람의 지도자와 그 수행원 몇명이 단 며칠만에 2천마리의 닭을 먹어치울 수 있을리도 없거니와 대약진 운동으로 파탄난 호남성에서 2천마리나 되는 닭을 생각없이 제공했을 가능성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중앙에서는 호남성 당국의 청구서가 20마리를 2천마리로 잘못 기재한 것으로 판단하고 정정을 확인해달라고 호남성 당국에 요청했다. 장핑화 서기 역시 2천마리나 되는 닭이 소모되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 중앙의 요구에 수긍하고 재조사를 지시했다.

허나 호남성 보안국의 조사 결과 청구서는 맞는 것으로 드러났다. 호남성 보안국에서 마오쩌둥을 보호하기 1만 5천명의 군인을 소집하여 장사에 배치시켰던 것이다.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던 군인들을 위해 보안국에서는 닭고기를 지급했고 사기 진작을 위해 최소 2천마리는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리즈수이는 호남성의 지도자들이 마오쩌둥이 그들의 봉사에 대해 최소한 닭 2천마리 정도의 성의는 보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라 회고한다. 왕둥싱은 격노하였으나 군말없이 닭 2천마리값을 호남성 당국에 지불할 것을 승인하였다.

근데 마오의 위세까지 빌려가면서 1인 1닭도 못하던게 당시 중국의 상황이라는 걸 알수있다.(...) 1만 5천명에게 닭 2천마리라니. 반닭만 하려 해도 7500마리는 필요할건데 대체 한 사람당 얼마나 먹은걸까. 구이나 튀김은 언감생심이고 아마 국이나 죽을 끓여먹지 않았을까 싶다.

-참고, 리즈수이의 모택동의 사생활 2권, 고려원.

마오쩌둥:우린 타이완을 정복해서는 안된다 ㄴ공산중국

마오쩌둥의 주치의 리즈수이에 따르면, 흐루쇼프와의 회담 이후 마오쩌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베이다이허로 돌아가는 길에 마오는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하고 불만을 터트렸다.

"흐루시초프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몰라.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원한다고? 좋아, 우리 대포로 환영해주지. 우리 포탄은 탄약고에 너무 오랫동안 처박혀 있어서 이제는 거의 고철이 돼가고 있어. 이번에 그걸 써서 한번 축하해줄까? 미국도 끼여들라고 해. 그렇게 되면 아마 미국이 푸젠성에 원자탄을 터뜨릴 수도 있을 거야. 1천만, 아니 2천만명이 죽을지도 모르지. 장제스는 아마 미국이 우리에게 원자탄을 떨어뜨렸으면 하고 바랄걸? 그래, 사용하라고 해. 그때 흐루시초프가 무슨 말을 하나 한번 들어보고 싶어. 그런데 몇몇 동지들은 지금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 바다를 건너가 타이완을 정복해 버리자는 거야. 하지만 난 찬동하지 못해. 타이완은 그대로 두는 게 나아. 그래서 계속 우리에게 압력을 가하도록 해야 해. 그것은 우리가 내부 통합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거든! 그런 압력이 없어지면 내부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지."

모택동의 사생활 2권, 리즈수이, 고려원.
95페이지.

1. 리즈수이에 따르면, 진먼 포격전은 흐루쇼프와 아이젠하워가 허둥거리는 것을 보고 싶었던 마오쩌둥의 매우 계획적인 도발이었다고 한다. 이는 미국과 소련이 중국을 장기말로 여길 수 없게 하고자 하는 과시이며 흐루쇼프의 서방 유화정책에 대한 모욕이었다.

2. 하지만 마오쩌둥은 타이완의 정복은 물론, 진먼과 마쭈를 점령하는 것에 대해서도 강력히 반대하며 만약 진먼과 마쭈가 중공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면 타이완과의 연결고리가 단절될 것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3. 여튼 이게 적대적 공생인가 그런건가?

청나라 마지막 황후 완룽의 비참한 최후에 대해 ARABOJA ㄴ공산중국

청나라와 만주국의 마지막 황후 완룽(1906~1946)의 모습


사가 히로는 회고록에서 만주국이 붕괴될 즈음에 그녀가 부의와 부걸을 따라 통화로 도주한 사실과 그 뒤 고통스러운 떠돌이 생활에 대해 회고했다. 사가 히로는 회고록에서 그들은 대율자구에서 임강현성으로 이동할 때 공산당 군대-동북민주연합군을 만났으며 바로 감시를 받기 시작했다고 썼다. 그 뒤로 아이신줴뤄 식구들은 여러 차례 나뉘어 통화로 압송돼 트럭 등에 태워져 눈과 얼음으로 덮인 산길을 달렸는데 차량이 뒤집혀 인명사고가 날 수 있을 정도로 위험했다. 통화에서 부의의 황후 완용과 사가 히로 등은 시 공안국 2층의 한 방안에 격리되고 부의의 귀인 이옥금과 수행인원들은 동북민주연합군 사령부 내에 연금되었다. 물론 그녀들은 모두 엄밀한 신변검사를 받았다.

1946년 2월 3일 악몽같은 통화사건이 일어났다. 총탄과 대포의 굉음 속에서 부의의 늙은 유모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사망하고, 이옥금도 부상을 당했으며, 완용은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사가 히로도 너무 놀라 얼이 나갔다. 그후 그녀들은 영하 30도의 엄동설한에 볼품없이 파괴된 건물 내에서 또 일주일을 지낸 뒤에야 주민의 집으로 옮길 수 있었다. 한번은 그들을 지키던 병사가 밤중에 뛰어들어 권총으로 사가 히로의 머리를 겨누고 "움직이지 마랏, 움직이기만 했다간 쏴 죽일테다!"라고 고함을 질렀다. 또 일본인이 동북민주연합군 사령부를 습격한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이 숫브된 뒤 완용 등 아이신줴뤄 가족들은 부대와 함께 움직였다. 그들은 통풍구가 딸린 화물차를 타고 1946년 4월에 장춘으로 돌아가 부대 초대소로 쓰고 있던 전 후덕복 호텔에 며칠을 묵 뒤 철수했다., 그들은 세게 흔들리는 밀폐식 유개화차에 태워져 길림시로 수송되었다. 공안국 구류소의 얼음장 같은 바닥 위에서 연일 이어지는 심문에 지칠대로 지친 사가 히로는 심지어 "그냥 이대로 호생의 목숨을 끊어버린 뒤 스스로도 자살할" 생각까지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살아서 상황이 더 처참한 완용을 돌봐야 했다. 그 황후가 아편 공급을 끊어버리는 바람에 매일 미친 듯이 "살려줘! 살려줘!"라고 외치는가 하면 신음하며 눈을 희번덕거리며 바닥에서 마구 뒹굴었다. 간수와 팔로군의 간부들이 앞 다투어 구류소로 달려 들어와 미친 황후를 구경했다. 마치 동물원의 동물을 구경하듯이 쉴 사이 없이 들락거렸다. 

국민당 군대가 길림을 폭격하고 공격해오자 이미 걸을 수도 없게 된 완용을 긴 막대기 위에 고정시킨 의자에 묶어 여섯 명의 일본 포로가 메고 기차에 올랐다. 연길에 이르러 기차에 내린 다음에는 또 마차에 태워져 길거리에서 조리돌림을 당했다. 한면에 "앞잡이 만주국 황족 일행"이라고 쓰여진 큰 흰기를 수레에 꽂은 채. 그리고 나서 연길법원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때 완용은 이미 다 죽어가고 있었다. 아편을 얻지 못하는 데다 전혀 먹지 못했으며 게다가 돌봐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6월 20일 외롭고 쓸쓸하게 비극적인 생을 마감했다.

모택동과 주은래 그리고 부의, 왕칭샹, 경지출판사.
18~20페이지.

1. 1960년 사가 히로와 직접 대면한 저우언라이는 중공중앙은 만주국 황족들을 보호하라고 지시를 내렸으나 일선의 무식한 졸병들이 일본 침략자와 만주국 황족들을 구분하지 못해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해명했다.

2. 사가 히로의 회고록 <떠돌이 왕비>를 읽은 저우언라이는 이를 칭찬하였지만 중국인민을 자극하는 내용이 있다는 이유로 중국에서의 출판을 금지하고 문제되는 내용을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3. 이후 사가 히로는 푸제와 재회하였으며 베이징에서 같이 살게 되었고 이 이야기를 추가하고 저우언라이의 요구를 수용한 개정판을 내놓았는데 이는 중국에서 출판되었다.

마오쩌둥:푸이를 제거해야 한다! ㄴ민국시대

호남성의 젊은 지식인이었던 모택동은 1917년 정사복벽을 겪은 후 자신이 발간하던 상강평론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하게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마지막 황제 카를이 스위스에 피신해 있을 대 모 신문사 기자가 뵙기를 청했다. 기자가 황제를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를 만나자 그 신하가 말했다. 

'황제가 옥좌에서 물러난 것은 본인이 원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제왕의 제도를 회복하길 원합니다. 다만 지금은 잠시 은거하며 정치에 참여하지 않을 뿐입니다.'

무릇 황제가 되었던 사람 중에는 계속 황제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없고, 벼슬을 해본 사람 중에는 계속 버슬을 원하지 않는 이가 없다. 심리적으로 관념의 습관성이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서양인들은 일을 행함에 있어서 철저한 것을 좋아한다. 역사적으로 국왕을 처형한 사실이 아주 많다. 영국에서는 찰스 1세를 처형했고, 프랑스에서는 루이 16세를 처형했으며, 러시아에서는 니콜라이 2세를 처형했다. 이들 국민들은 모두 그리하지 않으면 화근을 제거할 수 없다고 여겼다.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되어 있을 때 오늘날 빌헬름 2세도 그가 나폴레옹의 후신이 되어 협약국의 재판을 받게 하고자 했다. 그리 된다면 그에게도 큰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 스위스에 피신해 있는 카를과 북경에 숨어 지내는 부의는 국민이 경계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화근이 될 것이다.

-1919년 7월 21일자 상강평론 제2기.

모택동과 주은래 그리고 부의, 왕칭샹, 경지출판사. 14페이지.

여담

1. 이후 카를 1세는 모택동의 예견대로 헝가리에서 2차례 복벽을 시도했다가 미클로시에게 잡혀서 추방된다.

2. 위에서 보았듯이 모택동은 초기에 복벽세력에 대한 제거를 반봉건 투쟁에 대한 중요 과제로 설정, 이후 덕왕이나 이수신 등 일본에 협력하는 세력들을 푸이에 견주며 비판하곤 하였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의 공식 입장에 따르면 중일전쟁 종전 이후 중국 공산당은 만주국 황실을 보호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3. 이후 공산당은 봉건체제의 우두머리를 '개조'한다는 방향으로 선회하여 잘 알려졌듯이 1959년 푸이는 특별사면되어 그럭저럭 먹고 살게 된다.

어느 조선 지식인이 지적한 일제강점기 조선의 마약 중독문제 기타 근현대사

지금 조선에는 모르핀 중독자가 매우 많다. 의사가 확언하는 바에 따르면 경기도 이남 지역만도 그 수가 1만을 넘을 것이라고 한다. 모르핀은 아편에서 정제한 것으로 그것을 주사하는 것이다. 그 작용은 아편연 흡식과 전혀 차이가 없다. 요컨대 오늘날 조선에 모르핀 중독자가 1만명 이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편연 상습흡식자가 1만명 이상이라는 것이다.

중국이 아편연 때문에 가장 고통받고 있는 나라라는 것은 누군가 알고 있는 바이다. 중국은 그로 인해 아편전쟁을 치렀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편연의 병고로부터 중국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따. 아편연은 중국민족의 발전에 거대한 장애가 되는 것이다. 지금은 병독이 검은 손을 뻗쳐 조선을 옥죄고 있다.

(...)

따라서 지금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법률상의 교정이다. 조선형사령에 따라 조선에서도 일본의 형법이 시행되고 있다. 그런데 형법 가운데 아편연에 관한 형벌을 보면 실로 삼엄함이 극에 달하고 있다. 즉 아편연을 수입, 제조 또는 판매하거나, 만약 판매 목적으로 그것을 소지한 자는 6개월 이상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며, 아편연을 흡식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그밖에 상세한 규정을 두어, 미수죄도 처벌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다이쇼 3년(1914년) 9월 21일 조선총독부 훈령 제51호에는, 불평하는 자가 있을 때는 형법의 조항에 비추어 가차없이 검거하여 단죄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모르핀 주사의 경우 전적으로 아편연의 흡식과 동등한 폐해를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특별한 입법수단을 강구하지 않았다. 즉 다이쇼 3년 10월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훈령 갑 제49호에는

"지난달 21일 조선총독부 훈령 제51호에 따라 지금부터 아편흡식은 반드시 금지조치를 집행해야 하고 되도록이면 한층 면밀한 주의를 기울여 아편연 흡식의 폐풍을 근절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모르핀, 코카인 주사는 아편연 흡식의 대용으로 사람의 신체에 미치는 해독이 아편연 흡식과 감히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그러므로 종래 비밀리에 주사를 맞는 자가 적지 않았으므로 아편연 흡식을 금지한 결과 자연히 모르핀이나 코카인 주사로 옮겨갈 열며가 없지 않다."

라고 함으로써 모르핀 주사의 폐해와 머지않아 그것이 조선사회로 내습할 것을 명료하게 간파하였다.

그런데 그 단속법으로는 겨우 약품 및 약품영역 잔속령 제7조의 시행에 힘쓰도록 하였다. 그에 따르면 불법으로 모르핀을 판매공급한 자에게는 3개월 이하의 금고 또는 500엔 이하의 벌금이라는 제재가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모르핀을 주사한 자에 대해서는 어떤고 하니, 조선의 법령에는 그것을 처벌하는 규저잉 존재하지 않는다. 강하게 요구할 경우, 경찰범 처벌규칙 제11조 제32호의 운용이라도 기대할까? 즉 경찰관에서 특별히 지시, 또는 명령한 사항을 위반한 자는 구류 또는 벌금형에 처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통해 동일한 사회악에 대해서도 법률상의 제제에 차이가 너무 크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아편연을 허가없이 판매공급한 자는 6개월 이상 7년 이하의 징역, 모르핀을 멋대로 판매공급한 자는 3개월 이하의 금고, 또는 500엔 이하의 벌금, 아편연을 흡식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모르핀을 주사한 자는 무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모르핀 중독자는 현재 1만명 이상이나 된다고 한다. 또한 모르핀 주산느 아편연 흡식에 비해 매우 간편하다.

"로마법을 통해 로마법 위로", "현대를 통해 현대의 위에"라는 말로 조선의 당국자에 강요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지금, 절박한 이 모르핀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입법수단을 요구하는 것은 누구도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조선의 당국자는 설마 그 단속을 관대하게 하여 선정을 과시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조선의 모르핀 문제>, 김준연, 중앙법률신보 1권 9호, 1921년 6월자.

아편제국 일본, 구라하시 마사나오, 지식산업사.
166~167페이지에서 재인용.

여담

1. 김준연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엘리트로 독일에 유학했다가 귀국 후 신문기자를 하다가 공산당원이 되었다. 1934년 동아일보 주필이 되었으며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에서 사직했다. 위의 글은 도쿄제국대학 정치학연구실 조교 근무 시절 일본어로 쓴 글이다.

2. 일본 내무성 위생국은 공식적으로 조선의 마약중독자는 1922년 시점에서 1570명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명백한 조작으로 추정된다. 당장 1927년 도쿄에 거주하던 4만명의 조선인 중에서 마약중독자가 3000명으로 집계되었으며 모르핀 중독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도에서 모르핀 주사바늘 수천개가 판매되고 있었다.

3. 1928년 기쿠치 유지는 당국의 조작 통계를 비판하며 최소 7만명, 최대 10만명의 중독자가 있다고 추산하였다. 책의 저자 구라하시 마사나오는 70만명까지도 가능할 것으로 추산한다.


꽤 잊혀졌지만 사실 일정~1공 시기 사이 마약중독자는 심각한 사회문제였지비...

국민혁명 초기 국민당의 반기독교 논리 ㄴ민국시대

공부하던 중 발견한 흥미로운 부분. 국민당 좌익 이론가 감내광은 기독교 타도를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논리를 전개합니다.


1926년 말에 국민혁명군 총정치부는 <반기선전대강>을 작성하여 반기운동(반기독교 운동)을 통해 민중을 봉기하여 국민혁명의 완성을 촉성(促成)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여기에서 기독교는 유산계급의 무악부작(無惡不作)의 위선공구(僞善工具)이며 제국주의 침략의 선봉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반기운동의 국공합작체제 하의 국민당의 민중운동 책략의 일부가 됐음은 농민부장 감내광이 1927년 월의 시점에서 "현재의 반기독교, 반문화침략운동은 전처럼 몇몇 학생이 하는 것이 아니고 (당을 통한) 조직적이고 대규모의 것이니 일체의 행동은 모두 본당이 결정한 전체적 책략에 따라야 한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감내광의 이 말은 반기운동의 적극적인 추진의 뜻이라기보다는 황소교회사건 이후의 국민당의 반기운동책략 전변(轉變)의 경우와 같은 통제의 의미를 포함할 수도 있겠으나, 국민당이 반기독교운동을 주된 운동목표의 하나로 보고 있다는 점은 나타나 있다. 실제로 1927년 3월의 광주에서의 반문화침략동맹회 확대회의에서 만든 광동각계옹호정부수회교육권운동주비위원회(廣東各界擁護政府收回敎育權運動籌備委員會)는 국민당 성시당 청년부와 국민혁명군 총정치부를 포함한 28개 단체로 구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밖에 국민당의 청년부가 교회공격에 앞장선 예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적지 않게 발견된다.

국민당 요인들의 반기독교적 주장은 호한민, 왕정위, 대계도, 료중개 등이 기독교를 비판하는 입장이었고, 농민부장 감내광은 기독교 교회가 농민을 '안분취범(安分就範)케 하여 무엇이든지 잘못을 자기 탓으로 돌리도록 하여 농민들의 혁명성을 상실케 하므로, 농민운동을 진작하기 위해서는 교회세력의 타도가 필요하다고 하고 있다.

중국초기혁명운동의 연구, 민두기, 서울대학교출판부.
국민혁명운동과 반기독교운동.
326~327페이지.

여담

1. 그런데 손문과 송경령은 기독교 신자.... 이 때문에 국민혁명기에 송경령은 다른 국민혁명 지도자들과 기독교 문제로 좀 싸우기도 했다더라...

2. 장개석의 경우 기독교를 까면서도 휘하 군대에게 절대로 교회를 공격하지 못하게 지시하며 본인은 기독교 그 자체의 금지에 목표를 두고 있지 않다고 입장 표명. 국민당 좌파도 우한으로 천도한 후 교회 보호 조치를 내림.

3. 그리고 장개석은 1930년 중원대전 때 승리한 걸 계기로 감리교로 개종. 이후 대만은 장경국, 이등휘, 마영구 등 기독교 총통을 많이 배출함.

어느 재일교포 시인이 히로히토에게 바치는 추모시 기타 근현대사

히로히토의 죽음을 전하는 BBC 뉴스방송

<비탄의 패러독스>

종추월

역설의 상자를 열면 "당신의
풍전등화 같은 목숨이
유감입니다. 참으로 참으로
아까워서 견딜 수 없습니다. 아이고!"
아이고 소리 솟아난다.
분명 당신이 살아 있는 이 순간
어찌할 수도 없는 수명이 끝나가는
이 순간에 대신(大神)이 아닌
사람도 아닌 추상의 상징이 마침내
아아 마침내 개체로서 구체화하여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음을 당신을 위하여 함께
기뻐하는 쇼오와 여년(餘年)의 지금은 가을
들녘에 흐드러진 국화에 정이 감돈다.

당신, 죽지 말지어다 아직은.
일선동조론의 대본(大本)의 대신(大神)의
피가 당신의 피가 흐르고 있음으로 하여
적자(赤子)라는 이름으로 끌려온 우리 아버지는
치꾸호오 타전의 갱부였던 우리 아버지는
인고단련하여 훌륭한 국민이 되겠습니다고
된다 되어라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황국신민서사를
외우셨다는 우리 아버지는 열도의
흙이 되어 흩어져버렸고
키미가요의 키미(君)의 국토의 자양이 되었다.

아아 당신, 당신이여 죽지 말지어다.
당신도 또한 국민이 아니므로 인권이 없는
기본적 인권을 박탈당한 사람이었다고
전농병하라고 창씨개명을 한 우리 아버지가
견분식위라 스스로 일컬었던 우리 아버지가
인권이 없는 비인(非人)으로 살았던 우리 아버지가
숨 끊어지기 직전의 절규 혹은 벌레 소리같이
가쁜 솜을 몰아쉬며 남긴 말이었다.

당신 죽지 말지어다 아직은.
살아서 귀를 기울이시라 우리 아버지의 유언에
나는 당신이다!! 당신 또한 나다!! 하는 외침을 듣고
혼심의 힘을 다하여 최후의 힘으로
불체포의 특권을 벗어나 자유로워질 것을
당신의 그늘 어둠 속에서 빌 수 있는 행운을
어제로부터 오늘 그리고 내일로 이을 수
있도록 아아 당신 이대로
죽지는 말지어다
아이고!!

아사히저널, 1988년 10월 14일자, 21면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 노마 필드, 창비.
21~23페이지에서 재발췌.

옮긴이 박이엽의 주석 중 일부 추가.

1. 여기서 당신은 일본어 키미(君)의 번역인데 이는 단순한 너, 네 이놈에서 폐하라는 의미를 포괄한다.

2. 전농병하, 견분식위는 모두 창씨개명에 저항하기 위해 풍자조로 지은 이름의 유명 사례다. 전농병하는 덴노 헤이까, 즉 천황폐하로 읽히며 견분식위는 개똥이나 처먹어라 라는 뜻이다.

1902년의 히로히토

중일전쟁에서 무서웠던 것은 국부군도 팔로군도 아닌 종교군이었다. ㄴ중일전쟁

이번에 1982년 요미우리 신문에서 내놓은 일본군 병사들의 중일전쟁 참전 수기를 얻게 되었는데 이중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대목이 있기에 한번 발췌해봅니다.


"일본군은 장개석군과 공산군을 상대로 싸운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우리의 감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저 적군일 뿐이었지. 적군들 중에는 제복을 입은 사병도 있었고, 돈으로 고용된 자도 있었다. 맨 꼭대기에서 연결되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들은 같은 군대끼리도 싸웠고, 일본군을 향해서도 싸웠다. 마을을 습격하는 집단도 있었다, 그런 적군들이 저기서도, 여기서도 덤벼들었다. 저들에게 살해되면 눈알 뽑히는 것 쯤은 문제가 안 되었다. 이편에서도 그렇게 하니까 상대편에서도 증오로 똘똘 뭉쳐 있었지. 눈이고 코고 입이고 모두가 찢기우게 되고 보면 더 말할 필요도 없었지. 우리는 그저 살고 싶다. 목숨이 있고서야 일이 되지 않느냐면서 일본도로 마구 베면서 나갔고, 총을 계속 쏘아댔다. <점과 선>뿐인 우리로서는 도망갈 곳이 없었단 말이야... 쫓기는 짐승이 어떻게 된다는 것 쯤은 알만할 터인데."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서 "우리도 살아야 할 것 아닌가."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한참 쉬었다가 "난 저 잘랑잘랑하던 방울 소리가 잊혀지지 않아."라고 말하였다.

'잘랑잘랑'하는 방울 소리는 길이가 2m쯤 되는 청룡도에다 장식으로 방울을 단 종교군이 습격해 올때 듣던 소리였다. 최전선의 보병을 괴롭힌 것은 장개석의 정규군이라든가 팔로군보다도 이 종교군이라든가, 군과 구의 장이 조직한 군장군, 구장군이며, 지주가 자기 토지를 지키기 위해 돈을 모은 군단, 산적과 같은 비적, 마적 등의 그러한 군단이었다. 그 전투에서 일본군은 낙엽지듯이 죽어갔다. 최전선의 사병들로서는 큰 군대끼리의 충돌보다는 이러한 작은 집단과의 전투 쪽을 더 무서워했고, 또 사실 죽는 수효도 많았다. 그 중에서도 공포의 대상이 된 것은 홍류군이라고 하는 종교 신자의 일단이었다.

"어떤 종파였는지는 잘 기억되지 않지만 죽더라도 다시 살아돌아온다고 믿고 있던 집단이었다. 입고 있는 옷은 평복인데다가 가지각색. 총을 둘러멘 자세로 청룡도를 잘랑잘랑 소리내게 내저으면서 달려들었지. 그것도 그야말로 신출귀몰. 언제, 어디선지도 모르게 습격해왔어."

사내는 말을 이어나갔다.

"멀리 어둠 속에서 잘랑잘랑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죽음의 신의 예고 같은 소리였지. 가까이 다가올수록 잘랑잘랑하는 소리가 빨라졌지. 왔구나, 왔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허리가 빠졌는지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저런저런하고 몇마디 지르는 사이에 10명, 20명 씩 습격해왔지. 말도 안되는 소리지. 모두 죽였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침이 되고 보면 시체는 말끔히 없어져 버렸어. 그리고 다시 밤이 되면 잘랑잘랑하는 소리가 또 밀려오며 사람들을 쓰러뜨렸고, 그런 무서운 소리는 다시 없었다. 많은 사병들이 살해됐어요. 그 소리에. 눈을 도려낸 짓도 그 집단에서 한 일이었다. 옷가지 등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으니 그야말로..."

방울소리를 들으면 사내의 심장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보초를 서면 그 소리가 환각으로 들려왔고 몸이 떨렸다. 포탄이 터지는 소리에는 오금이 저려 왔지만, 신경을 위협하는 방울 소리도 사내가 기억하는 전쟁의 소리였다. 그런 일이 생각나게 되면, 지금도 마음이 여려져서 술이라도 마시고 싶어진다고 사내는 말하였다.


일본의 중국 침략, 요미우리 신문 사회부, 고려원.
140~141페이지.

보면 중국 공산당도 이런 종교 집단을 근절하는것은 신통치 않았다더라....

사실 맛을 모르는 엘프는 중국 공산당원인 것입니다! ㄴ공산중국

요즘들어 인터넷을 핫하게 한 문제의 만화.


공산주의는 획일화를 추구했다. 예를 들면 스징산 복무학교는 문화혁명 시대 중앙 조리학교였는데, 여기서 교육받은 요리사가 전국의 외국인용 호텔이나 음식점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이 학교는 효율적으로 요리하는 기술만을 가르쳤을 뿐 맛에 관해서는 가르치지 않았다. 또 태어났을 때부터 굶주리며 자란 세대의 학생들도 맛있다는 것이 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전 중국의 호텔은 호텔 바깥의 현지 전통 요리는 무시하면서 모두 똑같은 맛의 요리를 만들게 되고 말았다.

혁명의 맛, 가쓰미 요이치, 교양인.
252페이지.

사실 맛있다는 게 뭔지 모르던 유목민족 엘프들은 대약진과 문혁의 틈바구니 속을 헤쳐온 가엾은 인민들이었던 것입니다 ㅠㅠ 평생 동안 맛없는 죽과 빵만 먹어온 애들인데 좀 봐줍시다. ㅠㅠ

공산당도 맛있는걸 아는 사람들은 알았다는 건 안 비밀.

여러분들이 그토록 기다리시던 역개루의 이벤트를 확실하게 만나고 확인하시게 될 것입니다 블로그 운영

네이버 역개루 카페에서 박영준 교수님과의 대화 이벤트를 실시합니다.

님은 바로 역개루 사회 낙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부운!
그러니 친구와 동무들을 마아않이 데려오시오!

덩샤오핑이 장칭을 죽였는가? ㄴ공산중국

어쩌면 장칭이 중국 정부를 강하게 도발한 나머지, 그녀의 처리 문제를 두고 위기 상황이 발생했는지도 모른다. 장칭의 유서가 존재한다고 일본의 잡지 <주간문춘>이 보도했다. 하지만 이는 유서라기보다는 장칭이 1991년 봄에 당 지도부에 보낸 항의 편지였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큰 거짓말쟁이입니다."

장칭은 덩샤오핑에 대해 그렇게 썼다.

"그는 모든 사람을 기만했습니다. 마오 주석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는 권력을 잡자마자 모든 것을 다 바꾸어버렸습니다."

장칭은 자신의 오랜 적수인 덩샤오핑에게 직접 모욕적인 언사를 던지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당신이야말로 피고입니다! 당신은 결코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지 못할 것입니다!"

혹시 이런 장칭의 비난에 덩샤오핑이 분노했고, 또 죽은 마오쩌둥의 명성이 올라감에 따라 자신의 인기가 하락하는 것이 두려웠으며, 장칭이 혹시라도 덩샤오핑의 당내 활동 가운데 더러운 측면을 (예를 들어 1973년 권력을 다시 잡기 위해 마오쩌둥에게 아첨한 일) 전 세계에 알리지 않을까 두려워한 것일까? 그래서 덩샤오핑이 장칭의 살해를 지시했던 것이 아닐까? 이러한 설명은 중국의 유명한 망명 투쟁가인 옌자치가 주장한 바다.

"마오의 노년기에 덩샤오핑이 어떻게 마오의 신임을 얻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지켜본 가장 훌륭한 증인이 바로 장칭입니다."

옌자치의 설명이다. 하지만 살해 증거는 없다. 어쩌면 중국 정부의 자기 방어적 태도는 정부 측이 장칭의 자살 의도를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장칭이 자살하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것은 가능했다. 심지어 당국자가 장칭에게 자살 시도를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고 도구를 마련해주었다고도 볼 수 있다.

(...)

그러나 장칭 성격으로 볼때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덩샤오핑이 상당히 자유로워지는데 그렇게 했을 것 같지가 않다. 장칭의 자살은 목에 생긴 암이나 고립감, 딸과의 다툼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감시하고 감독하는 사람들의 행동에 충격을 받고 낙담하여 자살을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어쩌면 장칭은 이제 덩샤오핑이 배신하여 버린 마오쩌둥의 혁명 노선을 지킨 순교자로써 생을 마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한편 우울이 깊어지고 마오쩌둥에 대한 충성심에 불탔던 나머지 장칭은 자신의 개인적 이유와 정치적 이유를 하나로 묶어 결국 중국이나 자신에게 더는 희망이 없다고 결론지었을지도 모른다.

중국 정부는 공식 발표문만으로는 장칭의 죽음에 관련된 각종 의문을 잠재울 수 없었다. 정부 측은 질병 치료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내용을 발표문과 다른 언론 기사에 많이 실었는데, 이것은 장칭의 자살이 건강 상태 때문이었다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마오쩌둥의 계승자가 되려 했던 사람들은 누구도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지 못했다.

(...)

옌자치의 말을 따르자면, "덩샤오핑이 자신의 적에 대해 개방적이지 못했고 또 관대하지 못했기 때문에 장칭이 죽었다."는 것이다.

장칭 -정치적 마녀의 초상, 로스 테릴, 교양인.
642~644페이지.

6.4 천안문 항쟁에 대한 장칭의 반응 ㄴ공산중국

장칭과 덩샤오핑은 1989년 위기의 의미를 두고 견해를 달리했다. 덩샤오핑이 볼 때,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은 문화혁명과 비슷한 '소동'일 뿐이었으며 정부의 첫번째 과제는 민주화 운동을 신속하게 진압하는 것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유토피아를 향해 무작정 달려가는 세력이 '개혁'과 '개방'의 성과물을 파괴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장칭 역시 학생들이 '혁명적'이기보다는 자유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따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장칭은 자유주의가 인기를 얻게 된 데에는 덩샤오핑의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덩샤오핑이 '마오 노선을 변경'했으며 '온갖 종류의 서구사상'이 중국에 들어오게 방조했다고 보았다. 1989년 6월 4일 베이징에서 시위 진압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을 때 장칭은 '학생들을 살해'했다며 덩샤오핑을 비난했다. 장칭 자신과 마오쩌둥은 베이징 거리에서 군중을 살해하도록 군대에 지시를 내린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1989년 6월 4일 이후 그해가 끝날 때까지 장칭은 교도소에 있었다.

(...)

장칭은 자신의 잘못을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1990년 7월에 작성된 <인민일보> 기자들을 위한 비밀 문건에는 장칭이 여전히 정치적 상황 전개와 정치인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써 있다. "장칭의 야심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문건에서 내린 결론이다. 장칭을 감시하기 위해 여성 호위병들이 배치되었는데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앞으로 10년을 기다리면 너희들은 마오 주석의 혁명 노선이 다시 살아나고 진정한 혁명가들이 권력을 잡는 모습을 보게 될 거야."

장칭 -정치적 마녀의 초상, 로스 테릴, 교양인.
634~637페이지.

여담

1. 장칭은 수감 중 덩샤오핑과 후야오방에게 꼬박꼬박 편지를 썼고 장칭의 언급에 따르면 놀랍게도 그들은 그때마다 답장을 해주었다고 한다.

2. 장칭은 감옥 안에서 줄곧 덩샤오핑에게 공개토론을 제안하고 자신을 중난하이에서 살게 해달라고 했지만 당연히 덩샤오핑은 씹었다.

3. 1984년에 장칭은 처음으로 덩샤오핑과 후야오방이 합리적 지도자라는 호평을 남겼지만 결국 1991년 봄 덩샤오핑에게 보낸 편지에서 거짓말쟁이, 기만자, 진정한 피고라고 비난하며 편안하게 죽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했다.

마오쩌둥: 수호지는 수정주의 소설이다! 송강은 수정주의자다! ㄴ공산중국

1975년 8월 14일, 마오쩌둥은 그에게 옛 시와 산문을 낭독해주는 신변 종사자가 청구하자 중국고전 소설 <수호전>에 대한 견해를 말했다.

"<수호전>에서 투항을 다룬 것은 잘된 것이었다. 이 책을 반면선생으로 삼아 인민들로 하여금 투항파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야 한다. <수호전>은 탐관만 반대하고 황제는 반대하지 않았으며 조갤르 108명 밖으로 밀어냈다. 송강은 투항주의를 시행했고 수정주의를 시행했으며 조개의 취의청을 충의당으로 고쳤고 귀순을 받아들였다."

야오원위안은 그 소식을 들은 뒤 그날로 마오쩌둥에게 서신을 써서 <수호전>에 대한 논평의 의의를 잔뜩 늘어놓았다. 그는 <수호전>에 관한 논평은 "중국 공산주의자, 중국 무산계급, 빈하중농과 모든 혁명대중이 현재나 미래에, 현세기나 차세기에 마르크스주의를 견지하고 수정주의를 반대하며 마오 주석의 혁명 노선을 계속 견지하는 것에 대해 모두 중대하고 심각한 의으를 가지고 있다." "마땅히 이 '반면선생'의 작용을 남김없이 발쉬키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마오쩌둥의 담화와 자신의 서신을 인쇄, 발부하고 <수호전>에 대한 평론을 조직할 것을 건의했다. 마오쩌둥이 회시로 이에 동의한 후 당중앙위원회는 마오쩌둥의 <수호전> 논평담화와 야오원위안의 서신을 이첩했다.

그뒤 '4인 무리'는 그들이 통제하고 있던 언론수단을 이용하여 전국의 신문과 간행물에 <수호전>을 평론하고 '투항파'를 비판하는 글들을 연속 발표했다. <인민일보>는 글을 발표하여 '사회주의 역사 단계에서 수정주의를 반대하고 방지하며 무산계급 독재에서의 계속 혁명을 견지하려면 반드시 투항파를 알고 투항파를 식별하며 투항파를 반대해야 한다."고 했다. 8월 하순에 장칭은 측근들을 불러 회의를 열고 "<수호전>에 대한 주석의 회시는 현실적 의의를 갖고 있으며 <수호전>의 요해처는 조개를 배척하여 실권이 없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으며 지금 당내에서 어떤 사람들은 마오 주석을 허공에 올려놓으려 하고 있다."라고 했다.

9월 12일에 장칭은 다자이의 군중대회에서 한 연설에서 <수호전>에 대한 평론은 "실제와 연결시켜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호전>에 대한 평론을 단지 문예평론으로만 보지 말아야 한다. 단순한 문예평론이 아닐 뿐만 아니라 단순히 역사에 대한 평론도 아니다. 이에 대한 평론은 오늘날에도 현실적 의의가 있다. 그것은 우리 당내에 노선 착오가 10차례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선 착오는 오늘날에도 있을 수 있다. 적들은 정체를 감추고 우리 당내에 숨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국공산당역사 제2권 하, 서교출판사,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350~352페이지.

여담

1. 모든 걸 다 떠나서 저렇게 생각하면서 살면 일상생활 가능한가.

2. 문혁은 아무래도 1938년 모스크바 재판의 더 야만적인 확장판같다.

3. 나무위키에서 덩샤오핑과 류사오치가 마오쩌둥을 뒷방 늙은이로 만드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썰이 오랫동안 실렸었는데 그거 설마 4인방 주장 곧이 곧대로 들은건가(...)

최근 본 영화 영화(극장)

1. 앤트맨과 와스프
유쾌하게 시간 때울만한 영화.
★★★☆

2. 앤트맨과 와스프 2회차
친구놈이 아직 안봤다 해서 봄.

3.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본 프랑스 영화. 몰랐는데 장르가 공포영화 ㅎㄷㄷ
데뷔작이라고 들었는데 영화 만드는 맵시가 뛰어나다. 배우들 연기와 연출이 강렬하고 관객의 숨을 조이는데 탁월한 조합을 이루었다. 다만 기승전결은 좀 부족한 감이 있다. 전체 시나리오의 6,70%만 보여주고 일부 사건은 스크린 뒤에 묻어버렸다는 느낌이 든다. 러닝타임 90분의 한계일런지. 딸의 임신과 야반도주 서사가 그럴듯하긴 한데 군더더기란 생각이 든다. 이 부분만 해결됐어도 별 4개나 4개반도 노려봄직 했는데 러닝타임 한계가 좀 거슬린다.
★★★☆

댁은 누구슈? 저자가 바로 마오쩌둥 주석입니다! 어머니! ㄴ공산중국

어쩌다 그냥 생각나서 해보는 발췌 포스팅.



그(마오쩌둥)는 강의 중류까지 떠내려가서는, 어렸을 때 많이 가보았다는 작은 섬인 오렌지 섬에 올라섰다. 그 섬에 마오가 발을 내딛자마자 그를 경호하던 배 한척이 재빨리 닻을 내렸다. 그리고 보좌진들이 마오의 옷과 신발, 여러 갑의 담배를 그에게 가져왔다. 나머지 일행은 수영 팬티만 입은 채 맨발인 상태로 마오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섬 이름의 유래가 되었던 오렌지는 그 섬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오가 마을 입구로 들어서자 농촌 아이 몇명이 주석을 알아보고는 그의 곁으로 몰려들어 "주석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경호원들이 그 아이들을 쫓아 보내려고 하자, 마오는 그냥 내버려두라고 지시했다. 그는 이러한 <대중>과의 만남을 좋아했다.

그 섬에는 서너 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집들은 모두 허름했다. 마오는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는 노파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노파는 입고 있는 옷만큼이나 헤진 누더기 옷을 깁는데 열중해 있었다.

"여기서 사시기가 어떠세요?"

마오는 상냥하게 물었다. 그러나 그 노파는 중국 공산당 주석으로부터 질문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오가 다시 물었다.

"그럭저럭 살아가죠."

노인은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살아 있으니 사는 거죠."

그때 몇명에 불과한 섬 주민들이 마오 곁으로 모여들었으며, 마오는 어렸을 때 그 섬에 수영하러 왔었다는 이야기를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그때 그 섬은 황폐해 있었다. 그리고 몇년 뒤인 1959년 6월에 다시 왔을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마오의 비계획적인 방문으로 너무나 긴장했던 보안 요원들은, 마오가 그 섬을 떠난 후 즉시 지역 보안국과 인근 군부대 병사들을 동원하여 <악질 분자>를 색출하기 위해 섬을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섬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킨 후 8월이면 아름답게 꽃이 피는 오렌지 나무로 뒤덮인 공원으로 바꾸어 놓았다.

나는 그 후에 후난성의 보안국 국장인 리샹에게 그 노파 일가에게 무슨 일이 생겨 그 섬을 떠났는지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는 모른다고 했다. 물론 누구나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아무도 그 이유를 말하려 하지 않았다.

모택동의 사생활 1권, 리즈수이, 고려원.
268~270페이지.

잡설

1. 마오쩌둥의 수영쑈는 상당히 중요한 정치적인 여파를 가져오곤 했다. 마오쩌둥은 대약진 시기와 문혁 시기 모두 황화에서 무모한 수영을 함으로 의지력을 드러내곤 했다.

2. 근데 하는 김에 깨끗한 물에서 하지 인분이 떠다니는 더러운 물에서 왜....

3. 후난성 보안국장 리샹은 뱀에 물렸고 우한군구 사령관 천짜이다오는 마오쩌둥을 따라서 억지로 수영하다 익사할 뻔 했다. -ㅅ-

2년 뒤엔 저우언라이도 굶어죽을 것이다! ㄴ공산중국


당 부주석 겸 국무원 총리 주은래도 (1961년) 4월 하순부터 (유소기의 지방 시찰에 맞춰) 지방 시찰을 다니느라 분주했다. 아내 등영초와 함께 5월 3일, 하북성 무안현에 들어간 주은래는 백연촌의 인민공사를 시찰했다. 점심 식사 때, 공공식당에 들어서자 돼지고기와 달걀을 이용하여 만든 요리가 차려져 있었다. 주은래의 시찰에 맞춰서 인민공사 간부가 특별히 준비한 것이라는 것을 언뜻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자네들의 생활은 북경의 우리보다 훨씬 나은 것 같군. 하지만 나는 달걀도 돼지고기도 먹지 않겠네."

식사를 물린 주은래는 공공식당에서 농민들이 충분히 먹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

"공공식당은 좋군. 배불리 먹을 수 있으니까."

식당에서 나온 주은래는 농민 한 사람을 붙잡고서, "솔직한 의견이 듣고 싶다."고 물었다. 주은래의 진지함을 느낀 농민이 입을 열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공공식당이 좋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무장이나 취사원은 조금 많이 먹습니다. 그 가족이 또 조금 많이 먹을 겁니다. 우리들 입에 들어오는 것은 고작 200그램입니다. 그것으로는 배가 부를 리가 없지요. 총리, 이대로 가다가는 앞으로 2년 뒤에는 총리도 굶어 죽을 겁니다."

숙소에서 주은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새벽 3시, 주은래는 상해에 머물고 있는 모택동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석님, 식료 공급제는 지지받고 있지 않으며, 모두들 스스로 밥을 지어먹고 싶어 합니다. (백연촌의 인민공사에서는) 시험적으로 공공식당을 폐쇄시켰습니다. 게다가 가뭄으로 인한 피해가 최악의 상황입니다."

모택동 비록 상권, 산케이신문사특별취재반, 문학사상사.
298~299페이지.

여담

1. 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이는 대약진 운동의 막바지다.

2. 공공식당 제도는 마오쩌둥조차도 악성종양이라 부를 정도로 참담한 실패였음을 인정하였으며 대약진 말기에 즉각 폐기시킬 것을 지시했다.

3. 주은래가 기존 인식처럼 완전무결의 성인이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중공의 상식인 포지션이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듯 하다.

최근 감상 영화 영화(극장)

1. 파충류의 난 2회차.
역시 애새끼는 패면서 키워야 해.

2. 마녀
전혀 기대를 안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한국 영화치곤 꽤 볼만한 수준. 하지만 배우 연기가 잘하는 걸 넘어 나 미친년인거를 보아줘! 라고 광고하는 수준으로 오버하는 것 같고 얘기가 늘어진다. 전체적으로 스토리 전개가 나쁘진 않은데 덜 다듬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뒷부분은 확실히 정리가 깔끔하지 않았다.

그걸 떠나 박희순이라거나 여러 배우들 연기는 꽤 만족이고 누가 본다고 하면 한번 봐라고 할만한 수준. 2편을 봐야 추가평가가 가능하겠다.

★★★

3. 시카리오 2
묵직한 맛은 괜찮지만 전편만 못하다. 엄청 무게 잡고 시작한 카르텔간의 싸움 사주가 너무 허망하게 회수되는데 의도한 바인지 실패인진 모르겠지만 글쎄.... 결말은 3편을 봐야 더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뜬금없이 끝낸 감이 있다.
★★★☆

덩샤오핑과 히로히토의 만남 ㄴ공산중국


덩샤오핑은 황궁에서 두 시간 정도 천황과 오찬을 함께 했다. 천황이 손님과 사사롭게 담화를 나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일본 측은 담화 내용을 기록하지 않았다. 덩샤오핑이 나중에 한 말에 따르면, 당시 두 사람의 대화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황화 외교부장의 말에 따르면, 덩샤오핑은 "과거의 일은 지나가게 놔두고 우리는 적극적으로 미래를 보면서 여러 방면에서 우리 두 나라의 평화와 우호 관계를 건립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황화는 천황이 "불행한 일"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하면서, 이는 "전쟁으로 인한 손해에 대한 간접적인 사과에 해당한다."라고 말했다. 천황과 덩샤오핑은 모두 두 나라가 영원히 유지될 수 있는 평화롭고 우호적인 관계를 향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 동감을 표시했다.

그날 오후 덩샤오핑은 후쿠다 다케오와 90분 동안 회담했으며, 이후 후쿠다 다케오는 덩샤오핑을 위해 만찬을 준비했다. 만찬에는 대략 100여명의 일본 정계, 경제계, 학계 주요 인사들이 참여했으며, 그중에는 자민당 총재인 오히라 마사요시와 전 외상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그리고 정계의 떠오르는 별이자 이후 총리에 오르게 되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등이 있었다. 후쿠다 다케오는 만찬사에서 일중 양국의 2000년에 걸친 밀접한 교류 관계를 회고한 다음"본 세기에 들어와 불행한 관계로 인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라고 하면서 원고에 없던 내용을 덧붙여 "이는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중국 측은 이를 사과로 받아들였다. 후쿠다 다케오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일은 절대로 반복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번 일중평화우호조약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담아 서로 맹세하기 위함입니다." 

이에 덩샤오핑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양국 간에 비록 한때 불행한 과거사가 있었습니다만은 중국과 일본이 2000여년 동안 우호적으로 교류한 역사에서 이는 짧은 한순간에 불과합니다."

덩샤오핑 평전, 에즈라 보걸, 민음사.
409~410페이지.

고자가 된 마오 주석 ㄴ공산중국

현재 신변잡기로 정신이 없는데 생각난 김에 간단히 올리는 포스팅입니다.



나(리즈수이)의 임무는 단순히 마오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의 건강을 최고로 유지하는 일이었다. 혹시 마오가 예방이 가능한 병에 걸리거나 불필요한 고통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모두 내 책임이 되었다. 그래서 나의 직업과 생명은 항상 사선에 있었고, 나는 주석의 건강상태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나는 항상 그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늘 그와 함께 있어야 했다.

(...)

나는 항문과 치아, 기도, 전립선을 검사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검사는 30분 이내에 간단히 끝날 것이라고 그에게 확신시켜주었다. 그러자 마오는 동의했다.

(...)

나는 마오의 전립선을 검사했다. 포피가 몹시 팽팽해져 감염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마오는 중난하이로 옮겨온 이후로 한번도 목욕을 하지 않았다. 시간 낭비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매일 밤 수행원들이 그가 책을 읽고 서류를 검토하는 동안에 따뜻하게 적신 타월로 그의 몸을 문질렀다.

왼쪽 고환은 정상인보다 작았고, 오른쪽 고환이 음낭이나 서혜로 내려가지 않고 복강에 머무는 선천적인 결함은 성적기능과는 무관했지만 고환암이 발병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나는 이러한 비정상 상태를 더 자세히 검사하기 위해 마오의 정자를 추출했다. 그의 전립선은 작고 부드러웠다. 나는 실험용으로 그의 분비물을 추출하기 위해 그 부분을 마사지했다.

(...)

전립선 진찰 결과가 나왔다. 전립선은 정상이었으나 생식력이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마오는 세 부인들 사이에서 여러 자식들을 얻었고 당시에는 장칭이 낳은 딸 리나가 15세로 막내였다. 그러니까 아마도 중년 이후 생식력이 없어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원인은 알 수 없었고 치료도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내가 내시가 되었단 말인가?"

마오는 내가 불임이라고 말하자 이렇게 반응했다. 걱정이 많이 되는 눈치였다.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 정자에 이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생식불능의 원인이지요. 하지만 정자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성욕과 성기능에 장애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잠시 후 나는 마오가 생식 불능을 걱정하는게 아니라 성 불구자가 되지는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인간의 성생활이 12세부터 60세까지 한정되어 있다고 오랫동안 믿어온 터였다.

(...)

마오는 1953년 12월에 60세가 되었고 1955년부터 나는 마오를 위해 일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자신의 성기능이 끝나고 있지나 않을까 하고 두려워했다. 또한 성불구 증세를 여러차례 경험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성요과 건강과 결부시켰다. (마오의 생각으로) 성적 욕구가 있는 한 그는 건강했다.

모택동의 사생활 1권, 리즈수이, 고려원.
170~178페이지.

여담

1. 리즈수이의 견해에 따르면, 마오가 경험하곤 했던 성불구 증상은 그가 정치적 곤경에 처할 때마다 느낀 극심한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다.

2. 성기능이 건재함이 확인된 마오는 문혁 후반까지 수많은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훗날 마오쩌둥의 최측근 비서가 되는 장위펑도 문혁 시기에 만난 여자.

최근 본 영화 영화(극장)

1. 오션스 8
6월 14일 감상, 무난한 오락영화로 즐길만하다. 뭐랄까, 스토리가 지나치게 평이해서 그것 자체가 매력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시원시원한 영화. 영화 내부의 갈등이 의미가 없다. 대체 이걸 어떻게 해결하지? 싶은 것들은 하나도 없으며 불과 몇분 후의 다음 장면에서 죄다 해결. 이러다보니 긴장감은 없다. 어쨌거나 본인이 오션스 시리즈를 이거 말고 본것도 없고 이 영화 자체도 전혀 기대안하고 봐서 그런지 오히려 생각보다 꽤 재밌게 봤다.
★★★☆

2. 한솔로 2회차 감상
아는 동생이 아직 안 봤다고 해서 같이 봄.

3. 디트로이트
묵직한 걸작... 뒤에서 좀 늘어지는 감이 있긴 한데 잘 봤다.
★★★★☆

4.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
전기 영화와 암살 영화 사이에서 위태롭게 표류... 이도저도 아님. 하지만 누가 보겠다고 하면 말리진 않을 영화. 차라리 전기 영화에 더 집중했으면 좋았을건데 여러모로 아쉽다.
★★★


마오쩌둥으로부터 만나고 싶다는 소식을 접한 닉슨과 키신저의 반응 냉전사

간단한 잡글입니다.


6월 중순 백악관에서였다. 니카라과의 소모사 대통령을 위한 공식 만찬 자리를 마련한 뒤 닉슨 대통령은 불루룸에서 커피를 들고 손님들과 헤어져 링컨룸으로 갔다. 밤도 깊어 있었다. 그런데 5분이 채 안되어서 키신저가 다시 접근해 왔다. 백악관 서쪽 사무실에서 단숨에 달려온 그는 숨이 차 있었다. 타자된 두 장의 서류를 내밀며 키신저는 닉슨 대통령에게 말하였다.

"방금 파키스탄 주재 대사관의 우편 행낭 편으로 도착한 메시지입니다. 힐러리 대사가 가져왔는데 그는 너무 흥분하고 있어서 내가 전달하면서 두 손을 떨고 있었습니다."

키신저 자신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메시지에는 주은래가 닉슨 대통령의 1971년 4월 29일, 5월 17일 및 5월 22일자 서신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닉슨 대통령이 중국 지도자들과 직접 대화를 위하여 북경 방문의 제안을 수락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고 있었다.

중국의 모택동은 닉슨 대통령을 환영하고 직접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으며, 주은래 또한 닉슨 대통령의 북경 방문을 앞두고 고위급 비밀 외교 회담을 하기 위해 미국 정부 대표로서 키신저가 중국에 방문하는 것을 환영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러한 중국 측의 메시지를 다 읽고 났을 때 키신저는 "이것이야말로 제2차 대전이 끝난 후 미국 대통령에 온 가장 중대한 연락이오" 감격해서 말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 자리에서 키신저가 일어서려 하자 닉슨이 이를 만류했다.

"헨리, 우리가 아까 저녁 식사를 함께 한 뒤 이제 밤도 깊었소. 하지만 이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예외로 삼아야 할 그런 경우이니 여기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요."

그들은 잠시 후 복도를 거쳐 2층 끝에 있는 자그만 주방으로 내려갔다. 닉슨은 브랜디 한병을 찾아내, 두개의 커다란 술잔으로 키신저와 축배를 들면서 말하였다.

"헨리, 우리는 지금 우리들 개인이나 우리의 성공 혹은 이런 메시지를 가져오게 하고, 오늘밤을 가져오게 한 우리 행정부를 위하여 축배를 들고 있는 건 아니오. 우리가 하는 일로 해서 더 평화스럽게 할 수 있게 될 세대들을 위해 축배를 듭시다."

미중화해 -헨리 키신저와 주은래의 역할-, 이재방, 장덕환 공저, 법영사.
89~91페이지.

뇌물에 관대하신 대국적인 마오 주석 ㄴ공산중국

오랜만에 리즈수이의 모택동의 사생활을 읽던 중에 생각나서 간단한 발췌를 올립니다.


우리와 함께 홍콩에서 머물던 한 친구가 옌이라는 사람을 소개시켜주었다. 그는 지식인들의 귀국을 주선해 주는 임무를 띤 공산당 고위 간부라고 했다. 그 친구는 우리의 귀국길이 좀 더 평탄한 길이 되도록 엔에게 선물을 주라고 권했다.

"옌이 도와 준다면 자네는 베이징 의과 대학에서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구하게 될 거야. 그에게 롤렉스 시계를 선물하게나. 그러면 베이징으로 가는 배편까지 주선해 주니 자네는 그만큼 돈을 절약할 수도 있지."

나는 수천년 동안 중국의 공직 사회에서 만연해 온 뇌물을 혐오했다. 그리고 공산당은 수백만 민중이 국민당에 등을 돌리게 된 타락 같은 데에는 물들지 않았다고 믿었다. 나는 옌에게 뇌물을 주라는 친구의 권유를 거절했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공산당은 정직해! 그리고 나는 내 능력으로 생활을 책임 질 수 있어."

그후로 나는 옌을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민주당파의 공공연한 지도자로 중국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당 중앙정보기관의 요원으로서 정협에 소속된 대부분의 위원들처럼 민주당파의 일원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1956년, 나는 내 친구가 옌에게 뇌물성 선물을 주도록 권유했던 일을 마오쩌둥에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마오는 박장대소를 하면서 나에게 핀잔을 주었다.

"이 책상물림아. 왜 그렇게 소심해? 자네는 인간관계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증류수에서는 고기가 살지 못하는 법이야. 누구에게 선물을 준다는 것이 그렇게도 이상한 일인가? 국공합작 협상 때 궈머뤄(곽말약)도 나에게 시계를 줬다고."

모택동의 사생활 1권, 리즈수이, 고려원.
83~84페이지.


당대 중국인들 생각으로 특출난 생각은 아니지만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한 나라의 국가원수가 하기는 좀 -ㅅ-

천안문 사태 때 진압에 반대했다던 장군들에 관한 잡설 ㄴ공산중국

이미 하루 지나버렸지만 천안문 관련 포스팅 하나. 천안문 터지기 전에 장군들이 연명으로 반대했니 어쩌니 하던데 그 뒷 얘기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듯 해서 간단히 발췌합니다.



계엄을 실시하기 위한 병력 동원이 결정되었다. 5월 18일 오후에 중앙군위 회의가 개최되었다. 양상쿤이 중앙군위 부주석으로 이 회의를 주재했고, 덩샤오핑을 제외한 나머지 중앙군위 위원과 계엄군 관계자가 참석했다. 회의 결과는 덩에게 보고되었다. 먼저 계엄부대 지휘부는 류화칭, 츠하오톈, 저우이빙으로 구성하고, 중앙군위에 직접 보고한다. 병력은 베이징군구, 선양군구, 지난군구에서 동원하고, 중앙군위의 통일적인 지휘를 받는다. 계엄 부대는 인민해방군과 인민 무장경찰부대를 포함하여 총 18만명이다.

※실제 진압 참가는 5만명 규모.

(...)

그런데 이 무렵 군과 관련하여 두 가지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하나는 베이징군구 38집단군의 군장인 쉬친셴이 계엄 명령의 집행을 거부한 항명사건이다. 베이징군구 사령관인 저우이빙은 이를 양상쿤에게 긴급보고했고, 지시에 따라 그를 감금했다. 이것은 계엄 기간에 공식적으로 상부에 보고된 유일한 군 부대장의 항명 사건이다. 당시 소문으로는 여러가지 다른 사례가 있다고 했지만, <중국 6.4 진상> 등에서는 이것 외에 다른 것은 확인할 수 없다.

다른 하나는 왕핑, 예페이, 장아이핑, 쑤커 등 8명의 원로 장군들이 공산당 중앙과 중앙군위에 편지를 보낸 사건이다. 편지는 단 한 줄이다. "군대가 베이징에 진입하지 않기를, 베이징에 계엄을 실시하지 않기를 간구한다." 덩샤오핑과 양상쿤은 양아이빙, 츠하오톈 등을 이들에게 보내 상황을 설명했다. 일부에게는 양상쿤이 직접 전화를 걸어 설명했다. 이후 8명의 장군들은 계엄에 동의했다. 사실 이들이 계엄에 반대한 이유는 자신들에게 의견을 묻지도 않고 계엄을 결정한 조치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그 밖에도 원로 장군인 쉬상첸과 녜룽전도 계엄 발표 이후 "유혈 사건에 반대한다."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단 소문과 다르게, 이들이 공개적으로 계엄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3권(1988~1992) 톈안먼 사건, 조영남, 민음사.
155~157페이지.

3줄 요약.
1. 계엄에 공개적으로 저항한 장군은 쉬친셴 하나 밖에 없다.

2. 편지로 계엄에 반대한 장군들은 도로 계엄에 찬성했다. 처음에 반대한 이유조차 낭만적이지는 않다.

3. 중국 군부는 대체적으로 계엄에 동의했다.

식민지 독립에 대한 엘리자베스 2세의 입장 기타 근현대사

엘리자베스 2세의 통치 하에서 제일 큰 대외적인 문제라면 해외에서의 영국의 영향력이 쇠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2세는 언제나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현실에 알맞는 태도를 취해왔다. 정치가나 친구들과의 개인적인 대화에서 판단하더라도, 엘리자베스 2ㅔ삭 개인적으로 대영제국의 붕괴를 진심으로 아쉽게 여기고 있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여왕이 더욱 아쉽게 여긴 것은 단지 식민지 문제가 아니라 영국의 국제적인 위신이 상당히 광범위에 걸쳐 붕괴해가고 있다는 일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는 그 두 가지를 연관시켜 생각하고 있다. 여왕의 역사에 대한 사고 방식에서 보면 영국의 밖으로 향한 활력은 여왕 자신이 구현하고 있는 영국 국민성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따라서 대영제국의 상실과 서독 및 북아일랜드 파견 영국군의 삭감으로 영국의 에너지는 전통적인 배출구 두 군데를 잃은 것이 된다. 무역은 언제나, 영국 깃발이 펄럭이는 뒤를 쫓아서 발전했다. 그래서 지금 영국 깃발이 없어지자 무역업자들은 그네들이 나아갈 방향을 상실하고 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의 식민지가 차츰 없어진다는 것을 역사적인 필연으로 보고, 그것을 용인하고 있다. 그리고 식민지가 독립해가는 과정에서 가능한 한 많은 영국의 위신을 대여한다는 것이 엘리자베스 2에ㅢ 이무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2세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황태우 -일찍이 한 시기에는 왕비 외에 황후의 칭호도 가졌었다- 는 이것과는 극히 다른 견해를 취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황태후는, 로디지아의 백인들이 영국으로부터의 일방적인 독립 선언을 한 뒤에조차도 남부 아프리카의 백인들이 주장하고 있는 입장을 공공연히 지지하고 있다.

에든버러 공의 제3세계 지도자 대다수에 대한 의견은, 영국의 전투적인 노동 조합원들에 대한 사고 방식과 똑같이 매우 신랄한 것으로 식구들끼리의 저녁 식사 후의 대화 때에도 언제나 준엄한 의견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척도로 재보더라도 엘리자베스 2세는 현실주의자이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황태후나 에든버러 공에 비하면, 진보적이었다. 만약에 정치라는 것이 가능성을 추구하는 기술이라고 한다면, 엘리자베스 2는 완벽한 정치가이다.

엘리자베스 여왕, 로버트 레이시, 일신서적출판사.
328~329페이지.

최근 본 영화 영화(극장)

1. 데드풀 2
이 영화는 이로운 영화다.
매우 훌륭함 등급.
★★★★☆

2. 독전
....어휴.... 대가리 존나 빈 주제에 있어 보이려고 허세 개같이 부리는 쓰레기.
볼 가치 없음. 내가 웬만하면 보고 싶으면 보고...라고 하는데 이건 보지 말라고 못 박겠음.
★☆

3. 더 포스트
cgv 영상문학전인가 그거 개념 재개봉으로 봄. 재밌었음. 훌륭함 등급.
★★★★

4. 케이크 메이커
홀로코스트 이후 최대의 유대인 박해......는 개드립이지만 독일인 게이가 유대인의 가정과 직장을 잠식하는 무서븐 이야기... ㄲㄲ
★★★★

5. 한 솔로
애초에 이 시리즈의 광팬도 아닌지라 큰 기대도 안했고 재밌게 잘 봤음. 모난데 없이 볼만한 무난한 할리우드 영화. 훌륭함 등급.
★★★☆

6. 버닝
묵직하고 진중하고 섬세한 영화. 내리기 전에 한번 더 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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