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본 영화 영화(극장)

1. 오션스 8
6월 14일 감상, 무난한 오락영화로 즐길만하다. 뭐랄까, 스토리가 지나치게 평이해서 그것 자체가 매력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시원시원한 영화. 영화 내부의 갈등이 의미가 없다. 대체 이걸 어떻게 해결하지? 싶은 것들은 하나도 없으며 불과 몇분 후의 다음 장면에서 죄다 해결. 이러다보니 긴장감은 없다. 어쨌거나 본인이 오션스 시리즈를 이거 말고 본것도 없고 이 영화 자체도 전혀 기대안하고 봐서 그런지 오히려 생각보다 꽤 재밌게 봤다.
★★★☆

2. 한솔로 2회차 감상
아는 동생이 아직 안 봤다고 해서 같이 봄.

3. 디트로이트
묵직한 걸작... 뒤에서 좀 늘어지는 감이 있긴 한데 잘 봤다.
★★★★☆

4.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
전기 영화와 암살 영화 사이에서 위태롭게 표류... 이도저도 아님. 하지만 누가 보겠다고 하면 말리진 않을 영화. 차라리 전기 영화에 더 집중했으면 좋았을건데 여러모로 아쉽다.
★★★


마오쩌둥으로부터 만나고 싶다는 소식을 접한 닉슨과 키신저의 반응 냉전사

간단한 잡글입니다.


6월 중순 백악관에서였다. 니카라과의 소모사 대통령을 위한 공식 만찬 자리를 마련한 뒤 닉슨 대통령은 불루룸에서 커피를 들고 손님들과 헤어져 링컨룸으로 갔다. 밤도 깊어 있었다. 그런데 5분이 채 안되어서 키신저가 다시 접근해 왔다. 백악관 서쪽 사무실에서 단숨에 달려온 그는 숨이 차 있었다. 타자된 두 장의 서류를 내밀며 키신저는 닉슨 대통령에게 말하였다.

"방금 파키스탄 주재 대사관의 우편 행낭 편으로 도착한 메시지입니다. 힐러리 대사가 가져왔는데 그는 너무 흥분하고 있어서 내가 전달하면서 두 손을 떨고 있었습니다."

키신저 자신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메시지에는 주은래가 닉슨 대통령의 1971년 4월 29일, 5월 17일 및 5월 22일자 서신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닉슨 대통령이 중국 지도자들과 직접 대화를 위하여 북경 방문의 제안을 수락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고 있었다.

중국의 모택동은 닉슨 대통령을 환영하고 직접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으며, 주은래 또한 닉슨 대통령의 북경 방문을 앞두고 고위급 비밀 외교 회담을 하기 위해 미국 정부 대표로서 키신저가 중국에 방문하는 것을 환영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러한 중국 측의 메시지를 다 읽고 났을 때 키신저는 "이것이야말로 제2차 대전이 끝난 후 미국 대통령에 온 가장 중대한 연락이오" 감격해서 말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 자리에서 키신저가 일어서려 하자 닉슨이 이를 만류했다.

"헨리, 우리가 아까 저녁 식사를 함께 한 뒤 이제 밤도 깊었소. 하지만 이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예외로 삼아야 할 그런 경우이니 여기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요."

그들은 잠시 후 복도를 거쳐 2층 끝에 있는 자그만 주방으로 내려갔다. 닉슨은 브랜디 한병을 찾아내, 두개의 커다란 술잔으로 키신저와 축배를 들면서 말하였다.

"헨리, 우리는 지금 우리들 개인이나 우리의 성공 혹은 이런 메시지를 가져오게 하고, 오늘밤을 가져오게 한 우리 행정부를 위하여 축배를 들고 있는 건 아니오. 우리가 하는 일로 해서 더 평화스럽게 할 수 있게 될 세대들을 위해 축배를 듭시다."

미중화해 -헨리 키신저와 주은래의 역할-, 이재방, 장덕환 공저, 법영사.
89~91페이지.

뇌물에 관대하신 대국적인 마오 주석 ㄴ공산중국

오랜만에 리즈수이의 모택동의 사생활을 읽던 중에 생각나서 간단한 발췌를 올립니다.


우리와 함께 홍콩에서 머물던 한 친구가 옌이라는 사람을 소개시켜주었다. 그는 지식인들의 귀국을 주선해 주는 임무를 띤 공산당 고위 간부라고 했다. 그 친구는 우리의 귀국길이 좀 더 평탄한 길이 되도록 엔에게 선물을 주라고 권했다.

"옌이 도와 준다면 자네는 베이징 의과 대학에서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구하게 될 거야. 그에게 롤렉스 시계를 선물하게나. 그러면 베이징으로 가는 배편까지 주선해 주니 자네는 그만큼 돈을 절약할 수도 있지."

나는 수천년 동안 중국의 공직 사회에서 만연해 온 뇌물을 혐오했다. 그리고 공산당은 수백만 민중이 국민당에 등을 돌리게 된 타락 같은 데에는 물들지 않았다고 믿었다. 나는 옌에게 뇌물을 주라는 친구의 권유를 거절했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공산당은 정직해! 그리고 나는 내 능력으로 생활을 책임 질 수 있어."

그후로 나는 옌을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민주당파의 공공연한 지도자로 중국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당 중앙정보기관의 요원으로서 정협에 소속된 대부분의 위원들처럼 민주당파의 일원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1956년, 나는 내 친구가 옌에게 뇌물성 선물을 주도록 권유했던 일을 마오쩌둥에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마오는 박장대소를 하면서 나에게 핀잔을 주었다.

"이 책상물림아. 왜 그렇게 소심해? 자네는 인간관계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증류수에서는 고기가 살지 못하는 법이야. 누구에게 선물을 준다는 것이 그렇게도 이상한 일인가? 국공합작 협상 때 궈머뤄(곽말약)도 나에게 시계를 줬다고."

모택동의 사생활 1권, 리즈수이, 고려원.
83~84페이지.


당대 중국인들 생각으로 특출난 생각은 아니지만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한 나라의 국가원수가 하기는 좀 -ㅅ-

천안문 사태 때 진압에 반대했다던 장군들에 관한 잡설 ㄴ공산중국

이미 하루 지나버렸지만 천안문 관련 포스팅 하나. 천안문 터지기 전에 장군들이 연명으로 반대했니 어쩌니 하던데 그 뒷 얘기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듯 해서 간단히 발췌합니다.



계엄을 실시하기 위한 병력 동원이 결정되었다. 5월 18일 오후에 중앙군위 회의가 개최되었다. 양상쿤이 중앙군위 부주석으로 이 회의를 주재했고, 덩샤오핑을 제외한 나머지 중앙군위 위원과 계엄군 관계자가 참석했다. 회의 결과는 덩에게 보고되었다. 먼저 계엄부대 지휘부는 류화칭, 츠하오톈, 저우이빙으로 구성하고, 중앙군위에 직접 보고한다. 병력은 베이징군구, 선양군구, 지난군구에서 동원하고, 중앙군위의 통일적인 지휘를 받는다. 계엄 부대는 인민해방군과 인민 무장경찰부대를 포함하여 총 18만명이다.

※실제 진압 참가는 5만명 규모.

(...)

그런데 이 무렵 군과 관련하여 두 가지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하나는 베이징군구 38집단군의 군장인 쉬친셴이 계엄 명령의 집행을 거부한 항명사건이다. 베이징군구 사령관인 저우이빙은 이를 양상쿤에게 긴급보고했고, 지시에 따라 그를 감금했다. 이것은 계엄 기간에 공식적으로 상부에 보고된 유일한 군 부대장의 항명 사건이다. 당시 소문으로는 여러가지 다른 사례가 있다고 했지만, <중국 6.4 진상> 등에서는 이것 외에 다른 것은 확인할 수 없다.

다른 하나는 왕핑, 예페이, 장아이핑, 쑤커 등 8명의 원로 장군들이 공산당 중앙과 중앙군위에 편지를 보낸 사건이다. 편지는 단 한 줄이다. "군대가 베이징에 진입하지 않기를, 베이징에 계엄을 실시하지 않기를 간구한다." 덩샤오핑과 양상쿤은 양아이빙, 츠하오톈 등을 이들에게 보내 상황을 설명했다. 일부에게는 양상쿤이 직접 전화를 걸어 설명했다. 이후 8명의 장군들은 계엄에 동의했다. 사실 이들이 계엄에 반대한 이유는 자신들에게 의견을 묻지도 않고 계엄을 결정한 조치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그 밖에도 원로 장군인 쉬상첸과 녜룽전도 계엄 발표 이후 "유혈 사건에 반대한다."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단 소문과 다르게, 이들이 공개적으로 계엄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3권(1988~1992) 톈안먼 사건, 조영남, 민음사.
155~157페이지.

3줄 요약.
1. 계엄에 공개적으로 저항한 장군은 쉬친셴 하나 밖에 없다.

2. 편지로 계엄에 반대한 장군들은 도로 계엄에 찬성했다. 처음에 반대한 이유조차 낭만적이지는 않다.

3. 중국 군부는 대체적으로 계엄에 동의했다.

식민지 독립에 대한 엘리자베스 2세의 입장 기타 근현대사

엘리자베스 2세의 통치 하에서 제일 큰 대외적인 문제라면 해외에서의 영국의 영향력이 쇠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2세는 언제나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현실에 알맞는 태도를 취해왔다. 정치가나 친구들과의 개인적인 대화에서 판단하더라도, 엘리자베스 2ㅔ삭 개인적으로 대영제국의 붕괴를 진심으로 아쉽게 여기고 있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여왕이 더욱 아쉽게 여긴 것은 단지 식민지 문제가 아니라 영국의 국제적인 위신이 상당히 광범위에 걸쳐 붕괴해가고 있다는 일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는 그 두 가지를 연관시켜 생각하고 있다. 여왕의 역사에 대한 사고 방식에서 보면 영국의 밖으로 향한 활력은 여왕 자신이 구현하고 있는 영국 국민성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따라서 대영제국의 상실과 서독 및 북아일랜드 파견 영국군의 삭감으로 영국의 에너지는 전통적인 배출구 두 군데를 잃은 것이 된다. 무역은 언제나, 영국 깃발이 펄럭이는 뒤를 쫓아서 발전했다. 그래서 지금 영국 깃발이 없어지자 무역업자들은 그네들이 나아갈 방향을 상실하고 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의 식민지가 차츰 없어진다는 것을 역사적인 필연으로 보고, 그것을 용인하고 있다. 그리고 식민지가 독립해가는 과정에서 가능한 한 많은 영국의 위신을 대여한다는 것이 엘리자베스 2에ㅢ 이무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2세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황태우 -일찍이 한 시기에는 왕비 외에 황후의 칭호도 가졌었다- 는 이것과는 극히 다른 견해를 취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황태후는, 로디지아의 백인들이 영국으로부터의 일방적인 독립 선언을 한 뒤에조차도 남부 아프리카의 백인들이 주장하고 있는 입장을 공공연히 지지하고 있다.

에든버러 공의 제3세계 지도자 대다수에 대한 의견은, 영국의 전투적인 노동 조합원들에 대한 사고 방식과 똑같이 매우 신랄한 것으로 식구들끼리의 저녁 식사 후의 대화 때에도 언제나 준엄한 의견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척도로 재보더라도 엘리자베스 2세는 현실주의자이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황태후나 에든버러 공에 비하면, 진보적이었다. 만약에 정치라는 것이 가능성을 추구하는 기술이라고 한다면, 엘리자베스 2는 완벽한 정치가이다.

엘리자베스 여왕, 로버트 레이시, 일신서적출판사.
328~329페이지.

최근 본 영화 영화(극장)

1. 데드풀 2
이 영화는 이로운 영화다.
매우 훌륭함 등급.
★★★★☆

2. 독전
....어휴.... 대가리 존나 빈 주제에 있어 보이려고 허세 개같이 부리는 쓰레기.
볼 가치 없음. 내가 웬만하면 보고 싶으면 보고...라고 하는데 이건 보지 말라고 못 박겠음.
★☆

3. 더 포스트
cgv 영상문학전인가 그거 개념 재개봉으로 봄. 재밌었음. 훌륭함 등급.
★★★★

4. 케이크 메이커
홀로코스트 이후 최대의 유대인 박해......는 개드립이지만 독일인 게이가 유대인의 가정과 직장을 잠식하는 무서븐 이야기... ㄲㄲ
★★★★

5. 한 솔로
애초에 이 시리즈의 광팬도 아닌지라 큰 기대도 안했고 재밌게 잘 봤음. 모난데 없이 볼만한 무난한 할리우드 영화. 훌륭함 등급.
★★★☆

6. 버닝
묵직하고 진중하고 섬세한 영화. 내리기 전에 한번 더 보고 싶다.
★★★★☆

영국 국왕 조지 6세의 마지막 나날들 기타 근현대사

얼마 전에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우연히 구한 책에서 본 대목 하나 발췌해봅니다.


조지 6세는 버킹엄 궁전에서 가족들과 함께 만 56세의 생일을 조용히 축하한 뒤 (1951년) 12월 21일에 온 가족이 샌드링검 궁전으로 갔다. 이 해에는 조지 6세가 크리스마스 방송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가슴과 목 진찰 떄문에 맑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말을 할 수 가 없었다. 그래서 조지 6세는 토막 토막의 연설을 녹음 테이프에 녹음을 하고 그것을 편집해서 내보내기로 했다. 조지 6세는 크리마스 날 오후에 가족들과 함께 자기의 녹음 연설을 천천히 들을 수가 있었다. 조지 6세는 남아프리카로부터 따뜻한 남국에 와서 요양을 하면 어떻냐는 초청을 받았다. 국와 잇종무관 피터 타운젠트가 국왕의 요영지가 될 더번 근교의 정부 영빈관을 살피러 가기로 되었다.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왕비가 떠날 날짜는 1952년 3월 10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그때에 국왕의 친척들은 조지 6세의 목숨이 길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쪽 폐를 떼어냈다고 해서 완전히 암이 치료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으며 조지 6세에게는 또 혈전증이라는 병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시의들은 국왕에게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기간은 앞으로 2,3년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보다도 더 짧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실히 비쳤던 것이다.

그 이튿날 밤에 조지 6세는 병을 앓아온 이래 처음으로 영화 구경을 위해 외출을 했다. 가족들과 함께 모두가 좋아하는 로저스 앤드 해머스타인의 뮤지컬 '남태평양'을 보기 위해서였다. '남태평양'은 런던의 드루리 레인 극장에서 계속 만원의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왕실 일가가 영화 관람에 나선 것은 두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조지 6세의 건강이 회복된 것을 축하하는 뜻이었고 또 하나는 조지 6세를 대신해서 엘리자베스 공주와 에든버러 공이 머지 않아 떠날 동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순방 길을 앞둔 가족 모임이라는 뜻이었다.

1952년 1월 31일 아침에 국왕 조지 6세는 런던 공하에서 외유를 떠나는 엘리자베스 공주와 에든버러 공을 전송하고 샌드링검 궁전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몇 사람의 친구들이 국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지 6세는 최근에 와서 수렵의 마지막 철을 즐겼다. 즉 보통의 수렵이 끝나고 난 뒤에 남아 있는 새와 짐승들을 추적하는 것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그 수확물들은 대개 히크링 호수에 사는 큰 물닭과 샌드링검에 사는 산토끼들이었다.

2월 5일은 하늘이 푸르고 햇살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진 날씨였다. 약간 춥긴 했으나 늦겨울의 좋은 날씨였다. 목표물은 산토끼였다. 조지 6세는 앞으로 뛰어나오는 산토끼를 보기 좋게 명중시켰다. 그날 사냥이 끝났을 때에 총 수확물은 180마리나 되었다. 사냥에 참가한 사람 전원이 기뻐했다. 조지 6세는 그날 밤 푸근한 마음으로 만족감을 느끼며 잠자리에 들었다. 시종이 핫초콜릿을 컵에 따라 가지고 침실에 들어갔다. 그 후 조지 6세는 1시간 반 가량 책을 읽었따. 자정이 가까웠다. 마당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한 병사는 국왕이 손수 창문을 잠그는 것을 보았다.

조지 6세는 그날 밤에 수렵 기록장에 그날 잡은 산토끼 180마리의 숫자를 적어넣지 않고 있었다. 그날의 페이지는 공백인 채로 남아 있었다. 1952년 2월 6일 새벽에 국왕 조지 6세의 심장은 멈춰 있었다. 1952년 2월 6일 수요일 아침에 평소와 같이 조지 6세의 시종은 국왕의 침실로 홍차를 들고 들어갔다. 그때에 비로소 그는 국왕의 죽음을 알았다. 암을 수술한 이래, 계속 국왕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던 심장 혈전증이 마침내 국왕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엘리자베스 여왕, 로버트 레이시, 일신서적출판사.
185~187페이지.

북한 외교관이 거추장스럽다고 김일성 뱃지를 떼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 북괴 이야기

현재 북괴의 외상을 지내고 있는 리수용 아조씨에 관한 잡글..... 

리수용 아조씨는 2014년부터 북괴의 8대 외상을 지내고 있다. 1973년부터 북괴 외무성 의례국장, 국제기구 국장 등을 지내다가 1980년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 서기실 책임비서에 임명, 1980년부터 스위스 제네바 대표부 공사, 스위스 대사를 역임해왔고 김정은, 김정철 형제가 스위스 유학을 할 시에 후견인 노릇을 하며 김정은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얼마 전 탈북하여 <3층 서기실의 암호>라는 회고록을 저술한 태영호 공사는 리수용 아조씨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면서 젊은 외교관들의 의견도 경청하고 사고가 유연하고 온건하며 빈틈없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필자가 보기에 꽤나 특기할만 것은 리수용이 죽기 딱 좋은 제안을 하면서도 처벌은 고사하고 오히려 그 제안이 받아들여졌다는 얘기였다. 리수용이 김정일에게 올렸던 제안은 다음과 같다.

1. 고난의 행군 시기에 서방에 원조 요청을 제안.

2. 외교상의 편의를 위해 김일성 뱃지 패용 의무 폐지 제안.

3. 룡천역 폭발 사고 이후 금지된 핸드폰의 사용 재개 제안.

1번이야 그렇다 치고 2,3번은 제안을 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인데 더 놀라운 것은 김정일은 리수용을 처벌하기는커녕 오히려 리수용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이후로도 리수용을 중용하여 리수용이 현재 북한 외무상으로 재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태영호씨의 책에 따르면 리수용이 이런 위험한 제안을 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북괴 지도부의 자존심을 철저히 유지시키는 방법을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다.


1. 식량이 부족하니 서방에 원조를 요청하자 → 소련 붕괴 이후로 사회주의 맹방들이 대거 붕괴해서 현재 공화국의 외교적 고립이 심각하다. 따라서 외교적 고립을 타개하기 위해 서방 국가들과의 교류를 확장할 필요가 있는데 서방에 구호물자를 요청하자는 구실로 서방과의 외교적 접촉을 확대하자.(본질이 원조가 아니라 외교적 고립 타개에 있는 걸로 포장)

2. 김일성 뱃지 걸리적거리니 떼자 → 현재 외교관들에 지급되는 월급이 적어서 외교관들이 부득이하게 눅은(싸구려) 상점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헌데 형편없는 상점에 수령님의 존안이 새겨진 뱃지를 달고 들어가는 것은 수령님에 대한 모독이다. 수령님 혐오를 멈추기 위해 김일성 뱃지 패용 의무를 폐지하자.

뭐 대충 이런 식. 이러다보니까 자기 자존심 건드리는 일에는 허구한날 빼애액하던 뽀그리우스도 리수용 제안은 잘 수용했다더라... 룡천역 폭발 사고를 자신에 대한 암살 시도로 간주해 핸드폰 사용도 금지했던 김정일이 핸드폰 사용을 다시 허락한 것도 리수용의 제안 덕분. 이때 리수용은 핸드폰을 체제 유지와 테러 방지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면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나.(사실 목적은 이동통신사업을 활성화하여 경제에 도움을 주기 위한 큰 그림) 그래서 들어온 것이 오라스콤.


뭔가 그럴듯한 글을 쓰고 싶었는데 또 약에 쓸려 해도 못쓰겠는 똥글만 양산.
모두 비웃고 침을 뱉어주십시오.

평양 함락 후 김점곤 대령이 목격한 평양 기생집의 모습 기타 근현대사

오늘도 가십성 잡글입니다.


지프를 타고 평양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시가지 표정은 내가 5년 전 떠날 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군의 폭격도 그때까지는 별반 없었다. 단지 평양역이 공중 폭격으로 부서진 모습을 봤다. 그렇게 평양은 생각보다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여담이자, 역시 나중에 들은 이야기다. 내가 늘 신뢰했던 12연대장 김점곤 대령이 전해준 내용이다. 우리가 평양에 입성한 날 밤 내 부하 중의 일부는 호기심이 동했다고 한다. 김점곤 대령이 선교리에 도착한 날 작전을 펼쳐 남아 있던 적군을 모두 소탕했다. 밤이 되자 부하 하나가 간청을 하더랜다. "평양에 왔으니 그 유명한 기생집이 어떻게 변했는지 가보자."는 것이었다.

작전 중이었지만 부하의 요청이 너무 간곡해 김 대령 일행은 선교리와 능라도 사이에 있던 유명한 기생집 촌락을 찾아갔다고 했다. 보잘것없는 식사와 건빵만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먼길을 이동해 평양에 선착한 1사단의 부대원들답게 그들은 먼저 기름진 음식을 시켰다고 한다. 평안도 음식이 올라오는데, 맛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는 충분했다고 한다. 잠시 후에 기생들이 들어서는 순간 그들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까만 저고리, 치마, 거기다가 버선까지 까만색을 착용하고 기생들이 들어섰다. 기생치고는 매우 초라한 행색이었다. 술을 시켜 몇잔 돌렸더니 취기가 오른 기생들이 하나같이 하소연을 하더라는 것이다. 기생들은 "공산당 놈들 정말 나쁘다."면서 속내를 털어놓더란다. 이유를 물었더니 한 기생이 "공산당 간부놈들이 실컷 먹고 마시고 나서는 돈도 주지 않았다."고 했다. 기생들이 검은색 옷으로 차려 있은 것도 "자기네들이 와서 놀려고 그냥 영업을 하게 해놓고서는 일반 시민들 눈치 때문에 이런 복장을 입게 했다."는 설명이었다.

평양 기생은 자고로 셈이 밝기로 유명하다. 그런 그들로부터 돈을 내지 않고 고기를 먹고 술을 마셨으니, 공산당 간부라는 사람들은 배짱이 두둑하고 염치라는 것을 아예 발아래에 짓밟아버린 사람들일 것이다. 김 대령은 그날 평양의 기생들을 '대접'했다고 했다. 기생들이 같이 간 부대원들보다 훨씬 많은 술을 들이켜더라는 것이다. 먹고 마시면서 즐기려고 갔던 김 대령의 일행이 거꾸로 억울함에 젖어있던 평양 기생을 접대한 셈이다.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1128일의 기억, 백선엽, 중앙일보.
408~409페이지.

백선엽이 회고한 평양 함락의 순간 기타 근현대사

오랜만입니다. 1주일 이상 지독한 편도선염으로 투병 중입니다. 이렇게 심하게 부은 적이 없는데 곤욕스럽군요. 이젠 좀 몸을 추스른 것 같아서 워밍업이라도 할겸 간단한 글을 하나 발췌해보겠습니다.


사단 통신참모인 윤혁표 소령이 나를 급하게 불렀다. 윤 소령이 전화선을 들어 보였다.

"적군 통신선을 잡았습니다. 평양의 인민군 총사령부 교환대를 호출했는데, 아무래도 제가 평양말을 몰라 들킬 것 같습니다."

평양에 남아 있는 적군과 통신을 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대신 우리를 북한군으로 위장해야 했다. 평양 출신인 사단장이 직접 이들에게 말을 걸어보라는 뜻이었다. 나는 전화기를 받아 들어 평양 말투로 물었다.

"동무,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인가?"

그들은 내게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다.

"미 제국주의자들이 지금 전차 수백대를 몰고 쳐들어온다."

숨이 넘어갈 듯한 분위기였다. 아주 다급한 어투였다. 나는 내친 김에 김일성에 대해 물었다. 내 기억으로는 다른 호칭 없이 물었던 것 같다.

"김일성이는 어디 있는가?"

인민군 총사령부 교환대의 교환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상대방은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도 가야 한다."면서 끊으려고 했다. "동무, 최후까지 저항해야 하지 않는가?"라고 말하자, 그는 "빨리 후퇴해서 우리라도 살아야겠다."라고 전화를 끊었다. 그들은 무너지고 있었다. 그런 느낌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내가 생각했던 수준보다 더 훨씬 빠르게 북한군이 붕괴하고 있었던 것이다.

(...)

나는 오전 10시쯤 (대동)강을 넘었다. 강 건너편은 이미 국군과 미군에 의해 대부분 정리가 된 상태였다. 전날 저녁까지 일부 벌어지던 시가전은 모두 사라졌다. 북한군은 평양에서 거의 물러난 상태였다. 먼저, 김일성의 흔적을 찾았다. 만수대 인민위원회라고 하는 곳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사무실에는 집기만이 그대로 있었다. 김일성의 집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스탈린의 초상이었다. 그 초상이 정무 맞은편 벽에 걸린 채 있었다. 사람의 온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텅 비어 있는 사무실에 잠깐 서 있었다. 그리고 정면에 놓여 있는 김일성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의 의자에 앉았다. 김일성이 남침을 계획하고 실행하면서 이 자리에 앉았을 것이다. 그는 무슨 생각에서 이 전쟁을 일으킨 것일까. 한반도에 엄청난 피비린내를 풍겼던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이란 인물은 지금 어디 있을까? 그를 어디로 가서 잡은 뒤 이 심각한 전쟁의 죄과를 물을 수 있을까? 잠시 상념에 젖었다. 그러나 부질 없었다. 그는 이미 도주했고, 지금쯤 평안분도 산천의 험한 계곡을 이리저리 헤집으면서 북상하고 있을 것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는 우리가 평양에 도착하기 사흘 전쯤에 평양을 떠났다고 한다.


백선엽 회고록을 다시보면 참 재밌는 내용이 많습니다.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1128일의 기억, 백선엽, 중앙일보.
391~407페이지.

님은 바로 역개루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련사

네이버 역개루 카페에서 류한수 교수님과의 대화 이벤트를 실시합니다.

역덕들은 조국의 미래요! 그러니 친구와 동무들을 많이 데려오시오!
입장료 걱정은 할 필요 없소! 누구든 도와주겠소!

일본군:대소련 방비를 위해서 중국을 공격한다! ㄴ중일전쟁

생각나서 간단히 써보는 잡글.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의 발생으로 중일전쟁이 발생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 일본군 참모본부는 이시와라 간지를 비롯한 불확대파와 무토 아키라, 스기야마 하지메를 비롯한 확대파로 분열되었는데 작전과장 무토 아키라 대좌의 회고에 따르면 참모부 제1부장(작전부장) 이시와라 간지 소장은 다음과 같은 논리로 대중 확전을 반대했다고 한다.

"바로 지금 만주국 건설 완성에 전념하고 대 소련 군비를 완성해 이것에 의해 국방의 안고를 도모하지 않으면 안될 시기에, 만약 지나에 손을 대어 이 계획을 지리멸렬하게 해서는 안된다. 지금 지나는 옛날의 지나가 아니라, 국민당의 혁명이 성취되어 국가가 통일되고 국민의 국가의식은 각성하고 있다. 중일 전면전쟁이 된다면 지나는 광대한 영토를 이용하여 대 지구전에 돌입함으로써 일본의 힘으로는 굴복시킬 수 없다. 일본은 수렁에 빠진 꼴이 되어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일본의 국력도 군사력도 지금 빈약하다. 일본은 당분간 절대로 전쟁을 피하고 국력, 군사력의 증대를 도모해 국방국책의 완수를 기약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무토 아키라 대좌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지나는 통일 불가능한 분열적 약국으로 일본이 강경한 태도를 내보이면 즉시 굴종한다. 이때 지나를 굴복시켜 대체로 북지나 5성을 일본의 세력 하에 넣어 만주와 더불어 대 소련 전략태세를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루거우차오 사건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더 바랄 나위 없는 좋은 기회의 도래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사건은 낙관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힘을 기르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거기에는 북지나에 병력을 증파하여 상황에 따라서는 기회를 잃지 않고 일격을 더한다. 이것에 의해서만이 시국을 수습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시와라 간지도 베이핑 전투 이후 일시적으로 대중 확전을 지지했고 중일전쟁은 일본 국방력과 경제력을 흔들어놓는 전면전으로 이어져 중국 뿐만 아니라 일본도 괴롭게 했고 1941년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져 황국을 요단강 건너게 했다고 한다...

남경사건, 가사하라 도쿠시, 어문학사.
57~58페이지 참조.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이민을 환영한 하심 왕가 기타 근현대사

아랍 민족주의는 아랍 군대가 연합국과 주축국(추축국의 오타로 추정... 근데 1차 대전이면 동맹국이란 표현이 낫지 않나 싶은디...) 양쪽으로부터 참전 요청을 받고 양쪽에서 전쟁을 수행한 세계대전 기간에 역동성을 발휘했다. 연합국은 자기들 편에서 전쟁을 지원해줄 무수한 민족에게 어음을 남발했다. 펴화가 찾아오자 그 어음 중 일부는 부도가 났다. 특히 아랍인은 자기드이 위조 어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 보호령이 되었고 팔레스타인과 트란스요르단, 이라크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평화에 오점을 남긴 교섭과 투쟁으로 최종적인 승리를 거머쥔 아랍인은 아라비아 반도의 사우디족 뿐이었다. 

영국의 후원을 받은 하심 가문의 수장 파이살 1세는 트란스 요르단을 손에 넣은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가 유대인의 정착에 호의적이었던 이유는 유대인이 정착하면 아랍의 생활수준이 올라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파이살 1세는 1919년 3월 3일에 펠릭스 프랑크퍼터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우리 아랍인, 특히 우리 중에 학식을 겸비한 이들은 시온주의 운동에 호의를 보이고 있소. (...) 우리는 고향을 찾으려는 유대인의 소망을 뜨겁게 환영하는 바이오."

그러나 파이살은 유대인과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는 아랍인 온건파의 수와 용기를 과대평가했다.

(...)

아랍인을 진정시키기 위해 영국 당국이 무진 애를 썼고 이 때문에 일부 유대인으로부터 반유대주의 행태라는 비난까지 받았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쟁이 끝나자 많은 유대인이 이집트에서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백러시아인이 자행한 대학살을 피해 더 많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피난을 왔다. 아하드 하암의 말을 빌리자면, 아랍인은 이 시점부터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유대인의 역사, 폴 존슨, 포이에마.
733~735페이지.


굉장히 흥미로운데 간단히 정리하자면 초기 유대인 이민의 갈등 발전 양상은 이런 듯 합니다.

1. 유럽의 상황이 나빠지자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하려 했고 일부 아랍 엘리트들이 이를 환영.

2. 하지만 유대인들에게 비싼 값으로 땅을 판매하려는 아랍인 지주들의 욕심+아랍인을 굳이 몰아낼 필요는 없지만 당연히 유대인이 사는 곳에서 아랍인은 2등 시민의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는 시온주의자들이 대다수.

3. 갈등이 첨예화되면서 1920년 예루살렘 폭동을 비롯한 유혈사태 발생이 시작.

4. 일부 시온주의자들이 유대-아랍의 공존을 추구했지만 결과는 시궁창...

앞으로 시간 날때마다 틈틈이 포스팅 해보겠습니다.

팔레스타인 정착 초기 현지 아랍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은? 기타 근현대사

헤르츨이 이끄는 시온주의자 조직은 언제나 아랍인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런던을 처음 방문했을 때 헤르츨은 팔레스타인을 잘 아는 윌리엄 홀먼 홀트가 한 말을 믿었다.

"아랍인은 그저 나무나 하고 물이나 긷는 존재다. 유대인에게 유용할 것이다. 그러니 굳이 내쫓을 필요 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랍인도 유대인처럼 민족주의 정신을 드높이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조직화 작업이 유대인보다 20년 늦었다는 점이다.

(...)

에레츠 이스라엘을 방문한 아하드 하암은 헤르츨이 시온주의 운동을 전개하기 6년 전인 1891년에 "팔레스타인이 전하는 진실"이라는 글을 썼다. 이 글에서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미개인이 아랍인이라고 가볍게 치부하는 것은 시온주의자의 큰 실수라고 경고했다.

"사실 다른 셈족과 마찬가지로 아랍인은 날카로운 지성과 위대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 (...) 그 지역에서 우리가 하는 일과 목적을 꿰뚫어보면서도 침묵을 지키는 것은 자기들의 미래에 닥칠 어떤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 우리 민족의 삶이 그 토착 민족이 느끼기에 위협적인 수준에 도달하면, 그들은 쉽게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 거하고 싶어하는 이방민족을 다룰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을 존중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 만약 우리의 활동이 자기들의 권리를 압제하고 탈취하는 행위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면, 비록 침묵하며 때를 기다린다 할지라도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분노가 끓어오를 것이다."

대부분의 시온주의자가 이 경고를 무시했다.

유대인의 역사, 폴 존슨, 포이에마.
730~733페이지.


한 몇년전에 추천받은 폴 존슨의 유대인의 역사를 이제야 좀 훑어보고 있는데 드레퓌스 사건부터해서 재밌는 얘기가 많군요. 특히 관심이 있던 20세기 초반 유대인의 아랍 이민에 대해 살펴보고 있는데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오늘 폐량개원 문서나 쓰려 했는데 군대 잡담

개같은 리캡챠가 안 떠서 포기.
요즘들어 구글 계열 사이트 접속이 매우 좆같이 안된다. -ㅅ-
어휴 24일 후면 이런 일도 없겠지.

시골로 내려간 홍위병 소녀들의 운명에 대해 ARABOJA ㄴ공산중국

요즘들어 문혁관련 서적들을 들춰보고 있는데 상산하향 운동에 대해서 살펴보다가 알아낸 사실에 대해 하나 썰풉니다. 나무위키에서는 상산하향 운동에 대해서 마오 주석께옵서 홍위병들에게 이제 시골에서 혁명하라니까 순진무구한 홍위병들이 우루루 낚여서 시골에서 삽질한 것 정도로 묘사하는데... 우선 그렇지가 않습니다.

실제로 다이나믹 로동!을 외치면서 시골로 내려간 골빈 애들도 있었지만서도... 상당수 홍위병들은 시골로 가라는 명령을 생깠습니다. 왜냐? 시골로 한번 가면 도시 거주권을 박탈당해서 죽을 때까지 거기 살아야 하거든요. =ㅅ= 예컨대 호남성의 경우, 25~50%에 달하는 홍위병들이 상산하향 운동을 무시했습니다. 당연히 홍위병들의 부모는 뇌물을 뿌리고 당중앙에 편지를 써가면서 저항하고 호적을 조작하기까지 했습니다. 심지어 당간부들도 문명의 이기는 고사하고 입을 옷에 먹을 죽도 없는 시골로 어린 학생들을 보내라는 지시에 "징병 업무라면 열번이라도 수행하겠지만 이딴건 못한다."고 집행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어쨌거나 가엾고 딱한 수백만 홍위병들이 우루루 시골로 끌려갔는데 집도 없고 밥도 없고 질병과 해충과 폭력만 난무했다는 거야 안 말해도 비디오올시다. 아사, 익사, 폭행치사 사건이 수두룩했는데 특히 부르주아물이 든 홍위병들이 자신들을 노예처럼 부려먹으려는 군인들에게 논리로 대응하려다가 처참하게 맞아죽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사설이 길어지는데 그래서 이 글의 주제에 대해 이제야 썰을 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철모르는 소녀 홍위병들도 엄청 많았는데 제가 공산 중국 치하의 여권이 어땠는지 과거에 포스팅했다는 것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기억하실 겁니다. 도시에서 소녀 홍위병들이 몰려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 아해들에 대한 성적 착취가 시작되었습니다. 상급기관에는 소녀 홍위병들이 쓴 수많은 투서들이 날아와 자신들의 처지를 호소하곤 했는데 디쾨터의 서술을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안후이성 푸양현의 한 생산대에서는 여섯명의 젊은 여성들이 성희롱을 당했다. 그들 중 두명이 자살했고 한명은 정신이 이상해졌다. 일부 희생자들은 그들이 당한 일을 혼자서 또는 단체로 상급기관에 고발했다. 후베이성 황강시에서 한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에 서명한 열명의 젊은 여성들은 그들 모두가 농촌에 도착한 순간부터 괴롭힘과 희롱을 당했다고 설명했다. 몇명은 임신한 것도 모자라서 자신을 강간한 사람과 강제로 결혼까지 해야 했다."
문화대혁명 316페이지.

하지만 이렇게 고발하는 일은 적었습니다. 왜냐. 우선 당국에서 홍위병들이 뭔 꼴 당하는지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당국은 강간과 강제 결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했습니다.

"정상적인 성적 관계의 일부다." -ㅅ-

아마 이것이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짖는 신도덕의 위엄이 아닐런지요? 오히려 고발을 했더니 그깟 일 가지고 소란을 피운다고 무시 당하거나 배척당하거나 린치당하거나 심지어 "저년이 날 유혹해놓고 적반하장으로 고발한다."는 식으로 역고소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당국에서 이런 상황을 방관하는 것은 당연히 홍위병들을 시골에 처넣은게 마오쩌둥이니 감히 마오쩌둥을 아무도 깔 수 없어서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73년 복건성에서 살던 리칭린이란 교사가 편지를 써서 자신의 아들이 농촌에서 끔찍한 학대를 당하고 있다고 알려왔습니다. 이에 마오 주석은 친절하게도 친히 답장을 써주었습니다.

"리칭린 동지, 당신이 언급한 문제는 전국 곳곳에서 만연하고 있는 듯 보이며 일률적으로 해결될 필요가 있다. 동봉한 300위안을 받아달라. 이 돈이 얼마라도 당신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놀랍게도 마오쩌둥이 시골로 내려간 홍위병들의 처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1973년이 되어서야 당국은 시골로 내려간 홍위병들의 처지에 대해서 대대적인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조사 결과 1969년부터 1973년까지 호북성 천문현에서만 200명의 소녀들이 강간, 희롱을 당했다는 결과가 나왔고 그것도 모자라 '파괴'당했다는 내용까지 올라왔습니다. 14살짜리 소녀들도 가리지 않고 모조리 유린당했고 호북성 서기 출신인 부총리 리셴녠은 경악하여 다른 현의 사례들도 조사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호북성에서 천문현만 그런게 아닌 것 같다. 다른 현의 상황들은 어떤가?"

이어 요녕성에서도 3400건의 강간이 적발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강간마들에 대한 소식이 쏟아져들어왔습니다. 중국 지도부는 분노로 미쳐 날뛰었습니다.

저우언라이:"공안은 행동에 나서야 한다! 절대로 물렁하게 대처하지 말라!"

리센녠:"이 빌어먹을 종자들을 죽여라!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사람들을 달랠 수 없다!"

그리고 한동안 대대적인 체포와 총살 행렬이 이어졌고 시골에 있는 홍위병들의 처지는 좀 나아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최소 한해에 100만명 이상의 홍위병들이 시골로 보내졌고 최종적으로 1800~2000만명의 홍위병들이 시골에 보내졌는데 일부는 주석님이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건너고 나서도 돌아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ㅅ-

그러니까 다 좋은데 모택동이 없었으면 좋겠군.

참고문헌
문화대혁명,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보아라 상하이 매판자본가들의 흉악무도한 매국행위를! ㄴ민국시대

1926년에 들어서 전국의 혁명적 정세가 높아지는 속에 상해상공계층은 반제국주의적 요구를 강하게 주장한다. 반제국주의적 요구는 관세 자주, 최혜국 대우의 폐지 등 상공계층과 직접 관계되는 요구 뿐 아니라, 영사재판권과 조계의 폐지까지 주장하기에 이른다. 관세자주는 <독립국가의 주권이므로 외국인이 간섭해서는 안되므로 관관(關款)은 당연히 외국은행이나 서양 총세무사에게 맡겨서는 안된다>는 원론적 주장뿐 아니라 중국의 상공업이 발달하지 못한 원인을 불평등조약의 속박에서 찾았다. 1926년 2월 상해총상회는 총세무사 아그렌이 광저우 해관으로 하여금 광저우 항구를 봉쇄토록 한 것에 항의전문을 보냈다.

상해상공계층의 이러한 반제적 움직임은 상해총상회 회장이었던 우흡경의 발언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부일(赴日)참관단의 단장으로서 일본을 방문한 우흡경은 1926년 6월 5일 도쿄일화실업협회 주최 일화간담회의 오찬석상에서 양국의 관계에 대해 발표하였다. 우흡경은 "불행히도 십수년 이래 중일 양국은 호감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악감이 존재했는데 이러한 상황 하에서 무역을 발전시키려 한다면 이는 마치 녹무구어격"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악감은 정치방면에서 발생한 것으로 정치방면의 개변이 없이는 풀 수 없다고 하였다. 또 그는 중국의 정치상 두 가지 곤란 중 첫째가 불평등조약의 속박, 예컨대 영사재판권, 조계, 관세협정, 외국 육해군의 자유로운 상륙 등이 중국을 속박하고 있다면서 이런 상황 하에서 일본이 중일친선을 거론하는데 자못 회의가 크다고 말했다.

(...)

중국공산당은 상해총상회를 비롯한 대자산계급을 매판적이고 결국 민족해방투쟁에 장애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도, 우흡경 등 상해상공계층을 <민족자산계급>, <비교적 좌경적> 계급으로 평가하였던 것이며, 상해총공회도 관세자주, 불평등조약철폐, 조계회수 등 외교문제는 노동자만으로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상정 각계의 합작으로 가능하다고 한다든가, 실업진흥은 감원, 임금인하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관세자주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상해상공계층의 이러한 경향에서 기인한 것이라 하겠다.

중국국민혁명운동의 구조분석, 민두기 등 공저.
-북벌기 상해상공계층의 정치적 대응, 이승휘
84~86페이지.

이 얼마나 매국적이고 매판적인가!
카악 퉤!

암, 장개석은 매판자본가들과 열강의 사주로 쿠데타를 일으켰제 ㄴ민국시대

오랫동안 좆좆위키에 중독되어 블로그를 방치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삘이 받쳐서 쓰는 잡글 하나.

이전까지는 흉악무도한 반동우파의 수괴 장개석이가 열강과 상하이 자본가들의 사주를 받아서 순진무구한 공산당 친구들의 뒤통수를 후려 쳐갈기고 30만명의 공산당 혁명열사들을 살육했다~ 가 정설이었다. 물론 한 몇십년전 얘기긴 하지만서도...

하지만 이러한 테제는 단계적으로 짚어볼 시에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다. 우선 '열강과 결탁한 상하이 매판자본가 세력'이 존재했다고 가정하고 이들이 장개석을 사주해서 공산당을 숙청하기 위한 쿠데타를 획책했다면 이들이 최소 3가지의 믿음이 있었다는 것이 된다.

1. 장개석은 반공우파다.

2. 장개석은 국민당 좌파를 박살내고 독립정권을 수립할 정도의 힘이 있는 반공우파다.

3. 장개석은 국민당 좌파에 이어 장작림의 북양군벌까지 박살낼 힘이 있다.

우선 2번 전제에 따지면 1927년 4월 시점의 장개석은 직계 하응흠이 지휘하는 1군과 계계의 이종인, 백숭희가 지휘하는 7군을 제외하고는 국민혁명군 8대 군장의 미움을 동시에 사고 있던 왕따 of 왕따였으며 그나마 7군조차도 공산당이 싫어서 장개석과 전략적 연대를 하고 있던 상황이지 군비 문제 때문에 그리 사이 좋던 판은 아니었다. 게다가 1927년 3월 3전대회에서 국민당 상무위원회 주석 자리 날아가고 4월 시점에서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자리도 박탈, 집단군 총사령관으로 격하되는 판국이었는데 만약에 '상하이 매판 자본가와 열강'들이 장개석을 그 시점에서 국민당 좌파를 박살낼 수 있는 강력한 반공우파로 보았다면 시력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차라리 이 시점에서는 3개 군을 지휘하며 우한을 장악했던 당생지가 더 쓸만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1번으로 돌아가 볼때 이미 보로딘이나 장국도 회고록에서 숱하게 언급된 내용이고 지금은 다 깨진 내용이지만서도 이 당시의 국민당 우파, 좌파의 분류 자체가 공산당 입맛대로 아무렇게나 분류한 자의적 도식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들이랑 친하면 좌파고 안 친하면 우파라는 것인데 그나마 장개석은 중산함 사건 이전까지는 확고한 좌파로 분류되었고 중산함 사건 때 공산당 한방 팬 다음에도 북벌 시기 내내 중간파로 분류되었다. 반면 공산당이 극우파로 분류했던 손과는 연석회의 참석 이후로 갑자기 좌파로 분류가 변경되는 등 이 시기의 좌우파 구분은 솔직히 공산당이 느끼는 친밀감 순위 이상의 의미는 없다. 애초에 맑시즘 공부했던 호한민, 대계도도 계급투쟁 반대했다고 극우파로 찍히는 와중에(그나마 이 분들도 서산회의파에게는 빨갱이를 국민당 내부에 들여놓은 극좌파로 욕먹은건 함정 -ㅅ-) 여기에 의미부여하는 것이 코미디.

사실 장개석은 중산함 사건 이전에 하응흠 이하 1군 장교들에게 너 빨갱이인지 아닌지 당장 사상을 밝히라고 압박을 받는 등 국민당 내부의 대표적인 용공세력, 좌파세력으로 분류되고 있었고 장개석의 정치적 이념에 대해서도 1927년 3월 우한 방문의 발언을 보면 국민당의 영도를 전제로 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민중운동의 강조, 반제투쟁의 칭송을 말하고 있다. 장개석이 국민당 가입을 요구한 것 때문에 삔또 상해서 나온 핑계에 가깝긴 해도 장작림은 4.12 정변 터지고 나서조차 장개석의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합작을 거부했다. 양계초의 4.12 이전 국민당에 대한 평가 역시 비슷하다.(국민당 = 소련 주구. 중국은 이제 소련 노예가 될 거니 망명이나 가자, 참고로 양계초는 4.12 이후에도 장개석이 공산당을 이길 수 있을지를 염려)

그리고 일단 공산주의를 추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세트로 묶인 상하이 상공회와 열강을 한번 살펴보도록 한다. 당시 열강에서는 국민당 내부에서는 그나마 말이 통하는 것으로 보이는 장개석과 접촉하여 장개석의 세력을 지원, 연석회의를 비롯한 국민당 급진좌파들이 국민당을 적화시키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물들이 있긴 했다. 예컨데 당시 일본 외상 시데하라 기주로같은 양반들인데 얘들도 장개석이가 공산당 때려잡아줄 반공우파의 기수로 본 것 때문이 아니라 그나마 말 통하는 친구, 즉 온건파 정도로 본 것에 불과하지 장개석의 사상을 확고히 신봉한 바가 없다. 오죽했으면 장개석이 1927년 8월에 하야하고 나서 일본 건너가서 다나카에게 소련 대신에 일본과 친해지고 싶다고 똥꼬쇼까지 했을까.

또한 상하이 상공회는 열강의 주구가 아니라 공산당 제외하고 나면 가장 활발히 반제투쟁을 전개하던 세력 -ㅅ- 당시 상하이의 재계의 인식은 오히려 종속이론의 그것에 가까워서 열강의 경제적 침략 때문에 자기네들 산업이 발전 못한다고 관세자주권 회복, 군벌타도를 외치던 좌파 세력에 가깝고 당시 공산당조차도 우흡경이 주도한 상하이총상회를 '민족자산계급', '비교적 좌경적 계급'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난징 국민정부 참여한 순간에 제국주의 열강의 주구로 평가 전환 -ㅅ-

여기까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장개석이 반공우파라는 믿음 따윈 없었다.

2. 장개석이 공산당을 까부술 수 있는 반공우파라는 믿음 따윈 더욱 없었다.

3. 장개석이 장작림까지 까부술 수 있는 슈퍼파워라는 믿은 따윈 더더욱 없었다.

4. 상하이 자본가들하고 열강은 친하긴 개뿔 적대관계였다. -ㅅ-

그러므로 우리는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 중국편을 까야 한다.

다음에 기회되면 상하이의 공산당 친구들이 '순진무구한 국민당의 맹우'였는지에 대해서 분석하는 2편을 올릴 계획.

참고문헌 

1. 중국공산주의운동사, 벤자민 슈워츠, 형성사.
2. 중국공산주의운동사, 신상초, 집문당.
3. 중국국민혁명운동의 구조분석, 민두기 등 공저, 지식산업사.
4. 중국국민혁명운동의 분석적 연구, 민두기 등 공저, 지식산업사.
5. 중국국민혁명 지도자의 사상과 행동, 민두기 등 공저, 지삭산업사.
6. 중국공산당역사 1권, 중국중앙공산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7.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레빈, 민음사.
8.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아카데미.

나무위키 탄옌카이 문서 작성 나무위키 똥꼬쇼

https://namu.wiki/w/%ED%83%84%EC%98%8C%EC%B9%B4%EC%9D%B4
또 어쩌다 삘 받아서 작성해버렸습니다. 이것으로 남경 국민정부 역대 주석 문서가 모두 생겼군요.

따뜻한 중국 군벌 단기서? 중국 근현대사

원세개 사후 정국을 장악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인물은 단기서와 풍국장이었다. 그러나 풍국장은 단기서와 더불어 북양삼걸 중 하나로 군사력과 실력을 갖춘 인물이었지만 그 영향력은 단기서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인품면에서 단기서는 풍국장보다 명망이 높았다. 풍국장은 '북양의 개'라고 불리듯이 재물욕이 많고 탐욕스러운 성격의 소유자인데 반해 단기서는 검소하고 청렴결백한 성격의 소유자였을 뿐 아니라 소신있고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다.

단기서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그 목적을 이루려고 하였고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중의(衆議)라도 배척할 정도로 소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들도 그를 의지가 굳은 사람으로 평가하였으며 미국 공사 라인쉬도 게으르지만 지혜와 성실성, 부하에 대한 보호, 강한 책임감을 가졌기 때문에 중국 군인 가운데 뛰어난 인물이며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

(...)

(원극정이 제제의사를 타진하자)

"나는 일찍이 공화를 채택하라는 전(電)을 발표하였는데 지금 또 원세개가 황제에 즉위하려는 것을 옹호한다면 나라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하겠는가? 또 24史중에서도 역시 이러한 인물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하여 명분상 제제를 찬성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

양계초와 채악은 시국을 수습하기 위해 단기서를 총리로 임명할 것을 적극 주장하였다. 양계초는 원세개 사망 직후 여원홍에게 "단기서와 더불어 중앙질서를 유지하도록 힘을 다할 것"을 요청하는 한편 독립을 선포한 각성도독에게도 "북방의 수습은 오직 단기서에게 맡겨야 한다"고 통전하여 이를 강력히 주장했다. 채악도 6월 22일 "시사(時事)가 몹시 어려우니 단기서가 아니면 총리를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라고 국무원에 통전하여 단기서 적임자임을 강조했다. 이와 더불어 운남의 당계요, 광서의 육영정, 광동의 용제광 등도 단기서의 조각을 지지함으로써 단기서는 북양집단에서 뿐만 아니라 남방 측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았다.

(...)

손문도 (...) 단기서의 총리 취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점은 손문이 1916년 6월 23일 단기서에게 보낸 서한에서 신해혁명 때 공화를 찬성하여 대국을 안정시켰고 제제시에도 대의를 견지하여 시국을 구했다고 단기서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천하가 흉흉한 오늘날의 혼란을 바로 잡는 것은 오직 단기서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나쁜 말에 현혹되어 다시 천하가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하길 바란다 라고 말한데서 잘 나타난다.

‘臨時約法’體制下의 段祺瑞軍閥政權, 박준수, 동양사학연구 53권, 동양사학회.
145~150페이지.

사실 원세개 아저씨도 한때 중국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평가가 좋던 시절이 있답니다 ㅠㅠ

나무위키 북경정변 문서 작성

https://namu.wiki/w/%EB%B6%81%EA%B2%BD%EC%A0%95%EB%B3%80
풍옥상이 오패부 뒤통수를 갈긴 쿠데타 되시겠습니다. 이 사건으로 조곤도 물러나고 선통제도 쫓겨나죠.

어쩌다보니 중화민국 역대 대총통 문서들을 작성하고 말았습니다 나무위키 똥꼬쇼

2대, 5대 리위안훙
https://namu.wiki/w/%EB%A6%AC%EC%9C%84%EC%95%88%ED%9B%99

3대 펑궈장
https://namu.wiki/w/%ED%8E%91%EA%B6%88%EC%9E%A5

4대 쉬스창
https://namu.wiki/w/%EC%89%AC%EC%8A%A4%EC%B0%BD

6대 차오쿤
https://namu.wiki/w/%EC%B0%A8%EC%98%A4%EC%BF%A4

임시집정 돤치루이
https://namu.wiki/w/%EB%8F%A4%EC%B9%98%EB%A3%A8%EC%9D%B4

돤치루이 문서는 일단 좀 보충이 필요할듯 하고, 배경설명을 위해 1,2차 직봉전쟁, 강절전쟁, 회선사건, 북경정변 문서 등도 써야겠습니다. 공부는 해도 해도 참 끝이 없으니 원... 그나마 고려원 중국학 총서들의 도움을 엄청 받고 있습니다. 동포 여러분들께서도 기회가 되신다면 한번 구해보시길.

나무위키 광저우 상단 사건 문서 작성 나무위키 똥꼬쇼

https://namu.wiki/w/%EA%B4%91%EC%A0%80%EC%9A%B0%20%EC%83%81%EB%8B%A8%20%EC%82%AC%EA%B1%B4
요즘들어 쑨원 시기 문서 작성에 너무 맛이 들린듯... 이것도 생각보다 자료가 많아서 새로 썼습니다.

나무위키 홍콩 선원 대파업 사건 문서 작성 나무위키 똥꼬쇼

https://namu.wiki/w/1922%EB%85%84%20%ED%99%8D%EC%BD%A9%20%EC%84%A0%EC%9B%90%20%ED%8C%8C%EC%97%85
1922년 홍콩 선원 노동자들이 영국 식민당국에 맞서 일으킨 파업입니다. 놀랍게도 이겼죠.
정작 같은 민족인 오패부는 참혹하게 짓밟았지만 말입니다.

나무위키 군민재정 통일선언 문서 작성 나무위키 똥꼬쇼

https://namu.wiki/w/%EA%B5%B0%EB%AF%BC%EC%9E%AC%EC%A0%95%20%ED%86%B5%EC%9D%BC%EC%84%A0%EC%96%B8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군민재정 통일선언과 양희민, 유전환 토벌은 별개의 사건에 가깝긴 한데 둘 다 자료가 드럽게 부족해서요(...) 오죽했으면 공산당 공식 자료 뒤적이면서 겨우 쓰고 있는 판이니 말입니다.

차차 자료를 수집해서 개선을 해야겠습니다.

나무위키 2.7 사건 문서 작성 나무위키 똥꼬쇼

https://namu.wiki/w/2.7%20%EC%82%AC%EA%B1%B4
오패부와 소련의 합작 가능성을 완전히 쫑내버린 노동운동 탄압입니다. 계획에 없었는데 상세히 다룬 자료들을 찾아서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소련은 왜 카라한 선언을 번복했는가? 소련사

1919년, 소련 외무인민위원회 부위원 이자 위원대리인 레프 카라한은 소위 <카라한 선언>이라 불리는 대중국 선언 1호를 발표하여 러시아 제국이 그간 가지고 있던 모든 밀약을 폐기하고 중국에 가지고 있던 특수 권익을 반환하며 영사 재판권을 포기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 카라한 선언은 중국인들로부터 대단한 환영을 받았으며 중국 내부의 친소 분위기의 조성과 공산주의의 육성에 큰 기폭제로 작용했다. 실제로 카라한 선언 이후, 북양정부는 러시아 제국에 대한 승인을 철회하고 소련을 승인하여 국교 체결에 대해 논의했다.

하지만 1921년 12월, 첫 공식 사절단이자 주중국전권대표인 파이케스 사절단이 중국에 도착했을 때, 파이케스 사절단은 기존의 대중국 선언을 확인하면서도 무상으로 모든 것을 돌려주는 것은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으며 중국 내부의 러시아 재산을 실질적으로 상당수 회수하고 있던 북양정부는 이에 대해 반발했다. 파이케스는 국교 수립에 실패하고 1922년 8월 귀국했고 그의 후임 아돌프 요페는 카라한 선언의 준수를 주장하며 1922년 9월 27일 외몽골 문제, 중동로 문제에 대해서 정치국 중앙의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 카라한,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라데크에게 편지를 보내 항의했다.

"나는 알 수 없다. 우리의 1919년과 1920년 선언 중에서 인용할 구체적인 지시란 무엇인가? (...) 물론, 모종 '수완'을 써서 이런 선언을 한장의 백지로 만들어 버릴 수 있지만, 이는 중국에 대한 우리의 정책의 파멸일 것이고, 최종적으로 우리의 전면적인 멸망의 시작이다. 왜냐하면 대외정책에서 우리는 가장 일반적인 제국주의자가 될 것이고, 상당한 정도에서 세계혁명보루의 작용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손실은, 대내정책에서 중대한 경제적 양보를 하는 것과 비교해서 훨씬 엄중할 것이다. (...) 신경제정책의 적극적인 옹호자로서 나는 우리의 대외정책을 '상업목적'에 이용하면 우리의 철저한 와해를 조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허나 정치국 중앙은 몽골에서의 붉은 군대 주둔과 몽골에 대한 중국의 주권 승인은 모순되지 않는 것이라고 요페의 항의를 일축했다. 요페는 당중앙이 구상하는 러중몽 삼국회의는 중국인들에게 '불량한 인상'을 조성할 것이며, 우페이푸를 자극하여 중국군이 다시 한번 외몽골 출병을 단행할 수 있을 것이라 경고했다.

"치체린의 통보가 정확하다 하여도, 몽골 문제에서 하나의 주요한 점을 소홀히 하였는데, 즉 우리의 세계정책이다. (...) 몽골의 200만 주민들이 모두 우리를 옹호하고 중국에 반대한다면, 치체린의 관점이 원칙적으로 정확하여도 전략적으로는 틀린 것이다. 물론, 우리가 소민족이 대민족에 반대하는 폭력을 지지하지만, 만일 몽골인의 투쟁이 아무런 반향도 일으키지 못하고 중국인의 투쟁이 전 세계에서 거대한 반향을 불러일으킨다면, 세게에서 아무런 작용도 없는 200만 몽골인을 위하여 거대한 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4억의 중국인과의 관계와 모든 정책에 손상 줄 필요는 없다. (...) 그러므로 나는 당신들에게 나의 계획과 책략에 동의할 것을 다시 한번 부탁한다."

하지만 소련은 외몽골과 중동로 이권을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 때문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자', '혁명적 부르주아'와의 통일전선을 구축하여 중국 내부에서의 혁명을 추진한다는 코민테른의 방침에 대해서도, 외몽골에 대한 주권을 강경히 주장하는 우페이푸는 그가 노동운동을 탄압한 2.7 참안 이후로 완전히 합작 대상에서 배제되었다. 기존에 우페이푸에 대해서 중국의 확고한 지배자이며 이상적인 합작 대상이라고 고평가하던 소련은 우페이푸에 대해서 사리사욕에 매몰된 군벌에 불과하다고 평가를 뒤집었다. 따라서 소련은 쑨원이 영도하는 중국 국민당과의 합작에 매진하게 되었다.

과연 소련이 카라한 선언을 번복한 이유는 무엇인가? 민국사관이나 중국의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관점에서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소련이 공산주의 전파를 위해 간교한 술책을 부리면서 입으로는 특권 반환을 비롯한 달콤한 말을 하고 실질적으로는 제국주의 정책을 행했다고 비난한다. 결과적으로 피해자인 중국인들 입장에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 무리만은 아닐 것이다. 본고에서도 딱히 소련의 입장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다만 지적하고 싶은 것은 소련이 단순한 음험한 제국주의적 음모론 계산 하에서 행했다기 보다는, 나름의 내부적 맥락이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는 것이다. 1923년 1월 20일 트로츠키는 요페에게 카라한 선언을 준수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중동철도문제에 대해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왜 제국주의를 포기하는 것이 우리의 재산권 포기를 선결조건으로 하는지 지금까지도 이해할 수 없다. (...) 우리는 중국 농민이 왜 러시아 농민에 의거하여 철도를 소유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당신은, 중국은 어찌되었든 지불할 수 없다고 말했다. (...) 왜 쑨원 혹은 다른 사랑미 부분적으로 점차적으로 우리에게 중국 인민이 이 철도를 사용하는 비용을 갚지 못하는가? 왜 이를 제국주의라 하는가?
당신은 중국이 가난하다고 반복적으로 말하였다. (...) 친애하는 아돌프 아블라모비치, 내가 당신을 일깨워주는 것을 허락해달라. 러시아도 매우 가난해서, 근본적으로 주위의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의 인민을 원조할 능력이 없다. 두말할 것도 없이, 중국에 대한 중동철도의 재산을 포기하는 것은 8억 루블을 증정하는 것과 같다. 이외에 또 4000만 루블의 대출을 제공하는 것은 아주 사람을 유혹하는 조치이다. 중국인은 철도를 얻고 4000만 루블도 곧 다 써버릴 것이며, 이러고 나서 계속 대출을 요구할 것이다. 만일 이런 것들을 얻지 못한다면 그들은 미국으로 향할 것이고, 자기의 호감을 그곳에 돌릴 것이며 이 점은 우리가 이미 터키의 예에서 보아왔다."

트로츠키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우리 코가 석자다.

2. 중국에 철도를 반환하면 중국의 추가적 요구를 들어줄 역량이 없는데 그렇게 되면 중국은 미국에 붙을 것이다.

단순히 제국주의적, 전통적 민족주의와 자국이익에 입각한 외교를 행했다고 폄하하기만은 어려운 맥락이 존재하는 것이다. 실제로 소련은 어려운 경제 사정 속에서도 1923년 1월 26일 쑨원에게 200만 루블의 지원금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중국 공산당에게 지급한 1만 2천 루블의 200배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이후 다이지타오는 국공합작을 공산당의 국민당 기생정책 정도로 폄하했고 이는 민국사관이나 일부 강경한 반공서적에서 정설로서 기재되어 있다. 하지만 국민당에 대한 소련의 정책을 단순히 국민당을 내부에서 엎어버리기 위한 음모로 폄하하는 것은 진실에 접근하기 좋은 방법은 아닐 것이다.

물론 필자는 확고한 반공주의자고, 4.12 사건이나 국공결렬을 단순히 반동적이고 매판적인 국민당 우파의 '반혁명적 배반행위'로 매도하는 혁명사관에 대해 극도의 혐오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타파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한가지 극단적으로 매몰된 관점을 타도하기 위해 다른 방향으로 매몰된 관점을 동원하는 것이 현명한 길은 아니라고 본다. 자신이 동조하지 않은 세력, 사상의 내부적 맥락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솔직히 표현하자면 괴로운 일이고자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내부적 맥락을 이해하려는 것과 그것을 동조, 옹호하는 것을 혼동하면 안될 것이며 자신이 동조하지 않는 것이라 하여 그것을 악마적인 술수로 치워버리는 것은 역사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닐 것이다. 글을 쓰면서 오늘도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 오늘도 정진, 내일도 정진, 모레도 정진.

참고문헌

1. 본문에 인용된 요페와 트로츠키의 서한, 우페이푸에 대한 평가 등은 대부분 <국공합작과 孫文·요페공동선언 : 몽골문제와 중동철도문제를 중심으로, 이승휘, 중국근현대사연구 29권 29호, 중국근현대사학회>에서 인용하였다.

2. 소련과 중국의 초기 외교적 접촉 및 중국 공산당의 국공합작에 대한 초기 견해와 수용 과정에 대해서는 신승하의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대명출판사에서 소상하게 다루고 있다.

3. 카라한 선언에 관련된 소련의 태도 변화와 중소 교섭의 난황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객관적인 설명은 가와시마 신의 <중국 근현대사 2권 근대국가의 모색(1894~1925)>, 삼천리를 간단히 참조하는 것이 좋다.

4. 쑨원과 소련의 접촉에 대해서는 해롤드 시프린의 <손문평전>, 지식산업사에서도 자세히 다루고 있다.

5. 코민테른의 국공합작 추진 배경과 초기의 합작 대상 물색 과정 및 중국 공산당 내부의 논의에 대해서는 <政治勢力 간 통일전선 측면에서 본 제1차 國共合作의 고찰, 이준태, 아태연구 15권 1호, 경희대학교아태지역연구원.>

6. 그외에 벤자민 슈워츠의 중국 공산주의 운동사, 신상초의 중국 공산주의 운동사 등을 부가적으로 참고하는 것이 좋으며 국공합작 과정에서 쑨원과 랴오중카이 등의 활동에 대해서는 민두기 교수가 편집한 <중국국민혁명 지도자의 사상과 행동>, 지식산업사와 <중국국민당 좌파의 기수 랴오충까이(寥仲愷)와 국민당 개조작업, 장공자, 글로벌정치연구 2권 2호, 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정치연구소.>를 참고하는 것이 좋다.

7. 민국사관의 소련과 중국 공산당에 대한 태도, 즉 기생정책이나 내부 적화 야욕이라는 관점은 장개석비록이 잘 다루고 있다. 이건일 교수의 <모택동 VS 장개석> 역시 민국사관을 따른 대표적인 책 중 하나이다.

나무위키 랴오중카이 문서 작성 나무위키 똥꼬쇼

https://namu.wiki/w/%EB%9E%B4%EC%98%A4%EC%A4%91%EC%B9%B4%EC%9D%B4
오랜만에 좀 만족스러운 질을 갖춘 문서가 나온 것 같아 기쁩니다. 민두기 교수가 편집한 중국국민운혁명 지도자의 사상과 행동과 김문희 박사의 하향응 관련 연구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나무위키 부원지쟁 문서 작성 나무위키 똥꼬쇼

https://namu.wiki/w/%EB%B6%80%EC%9B%90%EC%A7%80%EC%9F%81
1차 호법운동에서 큰 뼈대를 가져오긴 했는데... 뭐 일단 완성입니다.

나무위키 외몽골 출병 문서 작성 나무위키 똥꼬쇼

https://namu.wiki/w/%EC%99%B8%EB%AA%BD%EA%B3%A8%20%EC%B6%9C%EB%B3%91
계획하지 않은 상태에서 또 문서를 싸고 말았습니다. 관련 연구가 많아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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