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우언라이는 5.4운동의 주도자인가? 중국 근현대사

간단히 써보는 잡글.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식적인 출판물들은 저우언라이가 1919년 4월 일본 유학을 끝내고 톈진으로 귀국하여 5.4 운동 초기부터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저우언라이 평전을 저술한 바르바라 바르누앙은 이에 대해 반대하는 견해를 소개한다.

이채진 교수는 이에 대해 다른 견해를 내놓고 있다. 저우에 대한 전기에서 저우가 그 당시 "분명히 없었으며" 5월과 6월 활동에 대한 "광범위한 기록에서 저우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고 적었다. 이채진 교수는 저우가 톈진의 여러 대학과 학교조직의 연합체인 텐진 학생운동 결성에 참여했다는 데도 의혹의 눈길을 보낸다. 이 조직은 대규모 집회를 개최하고 일본상품 불매운동을 펼치며 정치 개혁과 민주화를 지지해 5.4 운동의 지속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저우언라이 평전,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베리타스 북스, 36~37페이지.

하지만 초창기의 주도적 역할은 없었지만 톈진 연합학생회보 등을 발간하는 등 저우언라이가 5.4 운동에 참여한 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을 듯 하다. 허나 중국 공산당의 공식 기록들을 의심해야 할 또 하나의 사례임에도 분명해보인다.

모두 새 시대의 새 질서에 복종하라 위키 이야기

거짓과 기만으로 점철되어 폭도들에게 권력을 넘겨주던 추악한 선거제도는 종말을 고했다.
모두 나무위키 관선의 위대한 역사적 선택에 찬탄을 보낼지어다.

알렉세이 스타하노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 소련사

스타하노프란?: 기록적인 생산성을 보여주어 소위 소련 정신의 횃불이라 불리며 모범 노동자로 뽑혔던 소련의 로동자 동무. 스타하노프 운동의 모델이 되었다.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좋은 차 한대를 주시면 당신의 신뢰에 값하겠습니다. 저는 곧 스타하노프 운동 10주년을 맞아 돈바스로 가서 다시금 일하는 법을 시연할 예정입니다. 그동안 수도없이 요청했지만 계속 다 부서진 전리품 고물차만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딱 한번만 좋은 차를 주시면 더 이상 귀찮게 굴지 않겠습니다.

(...)

또 아파트와 관련하여 (...) 여태껏 한번도 수리를 하지 못했습니다. 벽은 지저분하며 가구는 너덜너덜해지고 부서졌습니다.

(...)

어떤 사람들은 한달에 두번씩 비단으로 벽을 도배하고 온갖 가구를 들여놓습니다. 이는 옳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아파트로 초대하기 부끄럽지 않도록, 집수리와 새 가구를 부탁드립니다."

흘레브뉴크는 스타하노프가 노멘클라투라 취미에 맛을 들였다고 평가한다.

스탈린 평전, 올레크 흘레브뉴크, 삼인.
540페이지.

그린존 감상 영화(dvd)

단순하지만 깔끔하고 박진감있게 잘 만들었다.
생각외로 여러 시선들을 담고 있다는 것이 인상적. 상급의 꽤 볼만함.

스탈린-몰로토프 관계의 퇴행 (4) 지도체제의 개편(1945~1946) 냉전사

스탈린은 런던 회담에서의 몰로토프의 태도를 문제 삼아 모스크바로 돌아온 몰로토프에게 외무 인민위원부의 부하들 앞에서 자아비판을 하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몰로토프의 불운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는데, 서방 언론에서 스탈린의 후계에 대해서 끝없이 추측성 기사를 쏟아낸 것이었다.

1945년 12월 1일 영국 <데일리 헤럴드>가 스탈린이 인민위원회 의장 직에서 물러나고 그 후임이 몰로토프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보도하면서 몰로노프는 또 다시 궁지에 몰렸다. 타스 통신은 이 보도를 요약하며 소련 정치 지도부가 정치국의 총괄적 지침에 따라 몰로토프의 수중에 있다는 특파원의 말을 인용했는데 이것이 치명타였다. 당시 스탈린은 9년 만에 휴가를 받아서 흑해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는데 스탈린이 부재한 동안 몰로토프의 의장 복귀 가능성이 타진된 것은 스탈린의 의심이라는 화약고에 심지불을 당긴 꼴이었다. 12월 2일 스탈린은 격노하여 외국 특파원이 송고하는 기사를 엄중히 검열하라고 지시했다. 

몰로토프가 이 지시를 불응하고 외국 언론을 이용하여 권좌를 노리는 미친 짓을 시도하진 않았겠지만 얄궂게도 스탈린의 지시가 집행되기 전에 12월 1일자 뉴욕타임스 기사가 12월 3일 타스 통신에 보도되고 말았다. 뉴욕타임스 역시 소련 지도부 내에 불화가 있으며 스탈린의 지휘가 약화되고 있음을 암시했는데 이 보도문은 12월 5일 스탈린에게 배달되었다. 이는 어느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관료적 실수에 따라 미처 기사를 검열하지 못한 것이었지만 스탈린에게는 충분히 계회적인 음모의 증거로 다가올 수 있었다. 실제로 스탈린은 측근들이 더 이상 자신의 지도력을 필요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등 뒤에서 영미와 화해하고 싶어 한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몰로토프의 불운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12월 3일 로이터 통신은 몰로토프가 소련 정부의 검열에 서방 언론인들이 항의하자 11월 7일 리셉션을 가지고 미국 기자에게 "특파원 여러분이 러시아의 검열을 없애고 싶어 한다는 걸 압니다. 만약 내가 상호주의적 조건 하에 이에 동의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로이터 통신은 소련 정부의 검열이 며칠 뒤에 실제로 느슨해졌다고 보도했다. 12월 5일 스탈린은 즉각 몰로노프, 베리야, 미코얀, 말렌코프에게 이 문제를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12월 6일 4인방은 스탈린에게 문제의 기사는 11월 30일에 검열된 것으로 이는 스탈린의 검열 강화 지시가 내려지기 전임을 설명했다. 또한 11월에 몰로토프가 정말로 검열 완화를 지시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는 낱낱의 어구와 표현을 불필요하게 삭제하는 관행에 대한 것이었고 몰로토프는 로이터 통신의 보도에 대해서 자신이 하지도 않은 말을 자신이 한 말인 것처럼 왜곡한 기보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이 설명에 수긍하지 않고 매우 화난 어조의 전문을 즉각 모스크바로 보내 외국 언론이 소련 정부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에 대해 몰로토프가 책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스탈린은 외국 특파원에 대한 몰로토프의 '자유주의적인 태도'와 즉흥적 언행이 소련 정부의 정책 방향성을 바꾸려는 의도적인 노력을 증명하는 일이라고 몰로토프가 계획적인 음모를 꾸몄다고 공격했다. 그는 몰로토프가 외국인들에게 정부 및 스탈린과 별개의 독자적인 정책을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미국과 영국에게 양보함으로 서방이 몰로토프와 거래할 수 있는 인상을 주려 한다고 맹비난했다.

"나는 몰로토프가 외국의 특정 패거리에게 인기를 끌기 위해서라면 우리나라의 이익과 정부의 명예 따위는 내버린다고 확신합니다. 나는 그런 동지를 더 이상 나의 수석 대리로 여길 수 없습니다."

이는 극도로 모욕적인 언사일뿐더러 몰로토프를 지도 그룹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스탈린은 이 전문을 말렌코프, 베리야, 미코얀에게만 보여주고 몰로토프에겐 보여주지 않고 그저 낭독해주기만 하라고 했다. 스탈린은 이에 대해서 몰로토프의 측근들이 의심스럽게도 몰로토프에게 전문을 보내지 않은 탓이라고 주장함으로 몰로토프에게 더한 모욕을 주었다. 이는 지금까지 스탈린이 그들에게 가한 가장 공격적인 비난이었고 그가 이보다 더 가혹하게 대한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 뿐이었다. 따라서 측근들은 겁에 질렸다. 12월 7일 베리야, 미코얀, 말렌코프는 자신들이 몰로토프에게 단호한 행동을 취했음을 보여주는 암호 전문을 스탈린에게 보냈다.

"우리는 몰로토프를 불러서 전보문 전문을 읽어주었습니다. 몰로토프는 잠시 생각한 뒤, 자기가 많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자기에 대한 불신은 부당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흘레브뉴크는 이 전문을 스탈린 한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한 개인 극장이라고 묘사하는데 같은날 몰로토프 역시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내 용서를 빌었다.

"당신의 암호전문은 볼세비키이자 한 인간으로서의 저에 대한 깊은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저는 이를 그 어디에서든 제가 앞으로 행할 모든 일에 대한 가장 엄중한 당의 경고로서 받아들입니다. 저는 제 행동으로써 당신의 신뢰를 얻으려 노력할 것입니다. 모든 정직한 볼셰비키에게 당신의 신뢰는 단순한 개인적 신뢰가 아닌 당의 신뢰이며 제게는 생명보다 더 소중합니다."

바짝 엎드린 측근들을 본 스탈린은 자신의 원하던 정치적 성과를 얻었다고 판단하고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스탈린은 몰로토프를 잠시 근신에 처한 후 계속 번스와 협상하도록 허락했다. 12월 29일 스탈린은 몰로토프를 공격함으로써 얻은 성취를 즉각 활용, 안드레이 즈다노프를 지도그룹에 편입시켰고 46년 10월에 니콜라이 보즈네센스키도 합류시킴으로 지도부를 개편했다. 스탈린은 몰로토프 뿐만 아니라 모든 측근을 대상으로 채찍을 휘둘렀다.

"지금 처칠네, 트루먼네, 번스네의 칭찬을 들으면 아이처럼 기뻐 어쩔 줄 몰라하고, 거꾸로 이네들로부터 싫은 소리를 들은 뒤에 용기를 잃어버리는 많은 이들이 권위 있는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이것은 우리 대열 속에 외국인들에게 무조건 비굴하게 구는 노예 근성을 낳기 때문에 위험한 태도입니다. 외국인들에게 굽실거리는 이 노예근성에 맞서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싸워야 합니다."

스탈린은 46년 5월 말렌코프가 항공산업의 부조리를 은폐했다고 비난하며 그를 당중앙위원회 서기에서 해임시켰고 즈다노프에게 그 자리를 맡겼다. 베리야 역시 스탈린의 공격을 받았는데 베리야의 심복 프세볼로트 메르쿨로프 국가보안부 장관이 불명예 퇴직된 것이었다. 메르쿨로프의 후임으로는 베리야와 사이가 좋지 않은 빅토르 아바쿠모프가 임명되었는데 이는 겐리흐 야고다와 니콜라이 예조프의 숙청의 전례를 상기시키는 매우 불길한 징조였다. 하지만 스탈린의 목적은 오로지 자신이 최고 지도자임을 재확인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에 베리야는 스탈린 생전에 그리 혹독한 시련을 겪지는 않았다.(하지만 베리야는 메르쿨로프 때문에 자신이 스탈린과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고 메르쿨로프를 탓했다.)

그 외에 군부에도 숙청의 칼바람이 불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쓰겠지만 일단은 이 글의 주제가 몰로토프와 스탈린의 관계를 다루고 있으므로 자세히 다루진 않겠다. 한가지 언급할 사실은 주코프 역시 위험에 처하고 좌천당했다는 것이다. 1946년 말 스탈린은 2차 세계대전으로 확립된 과두정 체제를 완전히 청산하고 다시 절대적인 수령으로 부상했다.

참고문헌
-스탈린 평전, 올레크 흘레브뉴크, 삼인.
-실패한 제국 1권, 블라디슬라프 주보크, 아카넷.

국공내전기 중화민국의 반소시위 중국 근현대사

얄타 회담 1주년 기념일인 2월 11일, 세계의 신문들은 스탈린과 루스벨트 사이의 상세한 비밀 협정을 폭로했다. 이 비밀 협정으로 소련은 만주에서 신식민주의적 특권을 얻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다른 나라가 중국의 주권국으로서의 자존심을 빼앗아가는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하던 많은 중국인들을 화나게 했다. 31년 전인 1915년, 분노하고 정치적으로 각성된 중국 학생들은 일본이 중국에 제기한 21개조 요구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었다. 이 요구에는 남만주 철도 운영권과 다롄항과 뤼순항의 조차 기간 연장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얄타에서 소련이 가지기로 한 특권과 사실상 같은 것이었다. 21개조 요구에는 만주에서 일본의 "우월적 위치"를 확립한다는 문구가 있었고, 얄타에서는 소련의 "우선적 이익"이 보장되었다.

(...)

<뉴욕 타임스>는 충칭에서, 공산계 <신화일보>을 제외한 도시의 모든 신문들의 일치된 논조를 이렇게 보도했다.

과거 공산당에 동조적이었던 많은 신문들을 포함한 도시의 신문들은 소련의 정책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할 뿐만 아니라, 만주에서 얼이나고 있는 사건들을 뒤에 숨기고 있는 장막을 걷어치우도록 중국 정부를 압박하는 캠페인에도 합류했다.

2월 22일, 1만 명의 충칭 학생들이 거리로 나가서 대중시위에 참여했다. 하너우, 베이징, 청두, 난징, 칭다오에서도 동시에 시위가 벌어졌다. 일부에서는 그들을 행동에 나서게 한 것이 아마도 CC파였을 것이라고 하지만, 1915년 시위자들의 애국심에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이 시위자들의 진정성을 의심할 이유는 없다. 충칭의 학생들은 이런 슬로건을 들었다.

소련=일본+독일
스탈린=히틀러+히로히토

상하이에서는 학생들이 소련 영사관 앞에 모여 이렇게 외쳤다.

"만주에서 나가라!"

적어도 한 사람 이상의 시위자가 스탈린의 대형 초상화에 '뱀'을 뜻하는 한자를 써넣어서 들고 있었다.

1945년 중국, 미국의 치명적 선택, 리처드 번스타인, 책과함께.
566~568페이지.

그리고 중국공산당은 소련과의 관계를 이때 부정했다고 합니다^^

???:파업은 해로운 행위다! ㄴ공산중국

중국 정부는 소련과 그 위성 국가들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외국 정부에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냈다. 해외 무역은 이제 정부기관의 소관이었고 런민비의 환율은 인위적으로 높게 책정되었다. 중국의 수출품이 국제 시장에서 매력적이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장제스의 해군에게) 봉쇄당하지 않은 항구 도시에서조차 해안을 따라 늘어선 복잡하고 복합적인 산업체들은 자금난에 허덕였다. 한때 국가 총생산물의 절반을 담당하던 상하이의 제조업체들은 일부만 가동되었다. 한 외국인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방적 공장들은 일주일에 3일만 가동하며, 내륙에서 정크선을 통해 들여오는 중국산 면화로 미국산을 대체하려는 열띤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유한 재고가 6개월 치밖에 없는 실정이다. 신뢰할만한 한 소식통에 의하면 1945년에 러시아의 징발로 큰 타격을 입은 만주의 산업체들은 일제 하에 생산하던 양의 30%를 생산하고 있다.>

그럼에도 공산주의자들은 제국주의의 착취를 상징하는 외국 자본에 의지하는 것에 단호하게 반대했으며 충분한 자금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곧 모든 것이 서서히 멈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소련에게 거액의 대출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노동자들은 공산당이 약속했던 물질적인 보상을 받기는커녕 생산성을 더 높이라는 독촉을 받았다. 아울러 전체 인구를 놓고 보았을 때 얄궂게도 가장 껄끄러운 집단이기도 했다. 그들은 혁명의 선두에 서길 바라면서 임금 인상과 보다 나은 근로환경을 요구했다.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 커지자 공산당은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새로운 노동법을 발표했다.

해방의 비극,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100~101페이지.

이후 모택동과 중공은 노동자들의 근로환경 개선과 안전기준을 우파 보수주의자의 횡포라 부르면서 노동자의 죽음 따윈 알바 아니라고 하셨다더라^^

응급실 다녀왔습니다... 군대 잡담

3주동안 감기가 지속되는 증상이 이상하다고 여겼는데, 병이 감기가 아니었습니다.
하긴 대개 1주일이면 떨어지는 감기가 3주일 동안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 싶었죠. 결국 어제 근무 서다 말고 실려가고 말았습니다. 원인은 장염이더군요.


여러분, 님이 무엇입니까? 언제나 그리운 이름입니다. 우리들의 가슴입니다.
우리가 사모하고 눈물 흘리며, 오랜 세월을 목말라 외어온 이름입니다!
님은 바로 건강한 육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트리 오브 라이프 감상 영화(dvd)

한 며칠에 걸쳐 봤는데... 라크리모사 씬에서 맛가서 그것만 한 며칠 다시 보다가 어제밤에야 완주....
이사가는 부분까지야 뭔 소린지 알아먹겠던데 결말은 그냥 본인의 무식으로 인해 해독불가.... -ㅅ-

과거 기록들 트롤열전


이 양반 예의주시 중. [[https://namu.wiki/topic/45621]]

출처 반달꾼도 예의주시 [[https://namu.wiki/topic/46529]]

[[https://namu.wiki/topic/47302]]

[[https://namu.wiki/topic/47611]]

[[https://namu.wiki/topic/48001]]

[[https://namu.wiki/topic/49757]]

[[https://namu.wiki/topic/50256#1]]

https://namu.wiki/thread/5hArp1fY8thLKghEnrAiMG
이젠 이게 진짜인듯

1989년 5월 19일 자오쯔양이 학생들에게 한 연설 ㄴ공산중국

실로 오랜만에 올리는 조영남 교수의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관련 포스팅.

5월 19일 새벽 4시, 계엄령 선포를 저지하는데 실패한 자오쯔양은 리펑, 원자바오 공산당 중앙 판공청 주임, 뤄간 국무원 비서장을 대동하고 광장으로 가서 학생 시위대를 설득하기로 하였다. 사람들은 자오쯔양에게 광장에 가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자오쯔양은 단호하게 나섰고 리펑은 자오쯔양의 완고한 태도 때문에 마지못해 그를 따라나서게 되었으나 자오쯔양에 따르면, 광장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겁을 먹고 달아났다고 한다.

자오쯔양은 메가폰을 잡고 학생들에게 연설을 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학생 여러분, 우리가 너무 늦게 왔다. 학생들에게 미안하다. 여러분은 우리에게 말하고 우리를 비판했는데, 당연한 것이다. 나는 여러분의 용서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니다.

(...)

현재 가장 중요한 일은 빨리 이번 단식을 중단하는 것이다. 나는 안다. 여러분의 단식은 당과 정부가 여러분이 제시한 문제에 만족할 답을 제시하기를 바라는 것임을.

(...)

그러나 여러분은 알아야 한다. 상황이 매우 복잡하여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단식이 이미 7일째에 접어드는 상황에서, 여러분이 반드시 만족할 답을 얻어야만 단식을 중단하겠다고 고집하는 것은 안된다.

(...)

여러분은 아직 어려서 앞날이 길다. 여러분은 건강하게 살아서 중국이 네가지 현대화를 실현하는 그날을 보아야 한다. 여러분은 우리와 다르다. 우리는 이미 늙었고,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국가와 여러분의 부모가 여러분을 길러 대학에 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

현재의 상황은 이미 매우 엄중하다. 여러분도 안다. 당과 국가는 매우 조급하고, 전체 사회는 모두 매우 우려한다. 게다가 베이징은 수도다. 각 방면의 상황이 발생하여 통제를 잃으면, 각 방면에 엄중한 영향을 조성할 것이다.

(...)

결론적으로 나는 이 바람 뿐이다. 만약 여러분이 단식을 중단하면, 정부는 이로 인해 여러분과의 대화 문을 닫지 않을 것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

마지막으로, 학생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간청한다. 냉정하게 금후의 일을 생각하라고. 매우 많은 일은 결국 해결될 수 있다. 여러분이 단식을 빨리 종결하기를 바란다. 학생 여러분 감사한다.

연설을 끝낸 자오쯔양은 학생들에게 절을 올렸고 학생들은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쳤다. 일부 학생들은 자오쯔양에게 사인을 요청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인하여 덩샤오핑과 당 지도부는 자오쯔양이 공산당 지도부가 분열된 모습을 보이고 총서기로서 위엄을 갖추지 못했다고 분노할 뿐이었다. 5월 19일 오전 자오쯔양은 3일간의 병가를 신청했으나 5월 21일 원로회의에서 모든 직위가 박탈당하였고 5월 22일에 출근한 자오쯔양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3권, 조영남, 민음사.
157~159페이지 참조.

1957년 허베이 성의 풍경 ㄴ공산중국

1956년 집단화가 전면 실시된 이후, 농촌의 지방 간부에게 권력이 독점된 가장 무서운 결과는 부녀자 능욕과 재해의 범람이었다. 랴오양 현의 촌 간부들은 극악무도한 사람들이 되었다. 지방문화의 부정적인 것에는 폭력과 부권제의 만연이 있는데, 그것이 비밀스럽고 무책임한 국가권력제도와 한데 뒤섞여 강간범에 대한 기소를 불가능하게 했다. 성폭력에 관한 소문이 분분해졌고, 상황이 가장 최악이었던 지역 농민들은 만약 내막이 공개된다면 모든 마을 처녀들의 정결과 혼인이 문제가될 것이라고 걱정하였다. 권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 모두 서로의 이해 관계로 진상을 은폐했다.

(...)

빈곤한 농촌지역의 간부와 군중 사이에서 부와 특권의 큰 격차가 나타났다. 생활이 가장 어려운 부녀자들이 농장의 밭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집에서 닭을 기르는 것이 죽어라 밭일을 하는 것보다 수입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결혼 상대나 남자친구를 얻으려는 미혼 여성들만이 밭일을 하였다. 지방 간부들은 국가의 부를 얻는 특권을 가졌지만, 보통 사람들은 시장이 문을 닫아서 실물 교역으로 돈을 대신했기에 몸에는 동전 한푼도 없었다. 1957년 허베이성의 부업 수입은 1949년에 비해 25% 하락하였고, 목축업 수입은 거의 반으로 줄었다. 현금은 더 적어졌다.

(...)

합작사 사람들은 부를 통제하는 사람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었고, 명령경제에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가 없었다. 불만 속에서 분노가 터져 나왔고, 그 창끝은 부를 통제하면서 자기들끼리 거래하려는 사람들에게로 겨누어졌다.

<중국 농촌, 사회주의 국가>, 에드워드 프리드먼 등.
망각을 거부하라, 1957년학 연구기록, 첸리췬, 그린비.
56~57페이지에서 재인용.

1. 당시 유행하던 민요는 <일등 공민은 집으로 배달되고, 이등 공민은 남에게 부탁하지만, 삼등 공민은 가망도 없어>였다나...

2. 디쾨터 연구의 교차검증을 요즘 시도하는데 의외로 교차검증되는 내용이 많아서 충격적이다. 특히 지방 간부들의 봉건영주화나 토지개혁의 급진화라거나 홍위병 만행같은 매우 민감한 부분들이...

3. 첸리췬의 망각을 거부하라가 상당한 명저다.

1956년 하얼빈의 풍경 ㄴ공산중국

항미원조가 끝나고 계급투쟁이 희미해짐에 따라, 전에는 상당히 효과가 있었던 정치선전선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냉랭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노동자들의 인간으로서의 각종 요구와 욕망도 중요한 위치로 부상되었다. 그러나 물질적인 생활 개선은 오히려 아주 느렸다.

(...)

하얼빈의 물가지수는 그 몇년간 매년 15%씩이나 높아졌지만, 노동자들의 월급은 몇년 동안 조금도 오르지 않았다. 2,3급 노동자 월급으로 4,5급 노동자 일을 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몇년간은 수입은 오르지 않았고, 심지어는 임시노동자로 7년을 일했음에도 정식노동자로 바꿔주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음식 수준을 낮출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이들은 밥만 먹을 뿐 반찬이나 요리는 먹지 못했다.

(...)

하얼빈의 젊은 여성 노동자들은 몇개월 동안 돈을 모아야만 꽃무늬 천 한 폭을 살 수 있었다.

(...)

"우리도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기술학교를 졸업한지 이미 2년이나 지났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공장에 200여명이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공장은 저희에게 정식적인 업무를 주지 않습니다. 늘 잡일만 줍니다. 심지어는 청소일을 하게 합니다. 간부에게 사실 공장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으니, 우리를 랴오닝으로 가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쪽 공장은 인력이 부족하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공장은 우리를 놓아주었다가 만일 내년에 공장일이 많아지면 어디서 사람들을 찾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만일 일이 많아지지 않으면요? 그들은 우리같이 살아 있는 사람들을 물건으로 보는 겁니다. 장기간 창고에 쌓아 둔다는 거지요. 고정적인 일이 없으니 등급을 올리는 일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늦어지는 거지요. 예를 들면 결혼도요..."

-1956년 7월 중국청년보 기자 류빈옌이 고향인 하얼빈으로 내려가 본 하얼빈의 모습.

망각을 거부하라, 1957년의 연구학 기록, 첸리췬, 그린비.
72~75페이지.

1. 이 도시 노동자들의 삶은 량수밍이 마오쩌둥 앞에서 농민들의 삶에 비교하면 '천국의 아홉번째 수준'이라고 외쳤던 그 수준이다.

2. 당시 중국의 기업들은 노동자들의 월급을 높일 순 없었지만 낮추는 것은 자유로웠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하여 상품 원가를 낮추어 상부의 칭찬을 받는 것을 선호했다. 노동자들 대다수는 주택을 얻을 수 없었고 결혼 상대를 구할 수도 없었다. 처우개선이나 직장 이동, 대학 진학을 요구하는 모든 목소리들은 개인주의, 부르주아지 사상으로 몰려서 혹독한 비판과 탄압을 받았다.

3. 한편 농촌에서는 집산화와 전매제 실시 이후 사실상 봉건영주로 격상된 공산당원들의 착취와 만행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인민공화국이 세워졌지만 공산당은 어디에도 없다는 원망이 천지를 진동하고 있었다. 간부들은 여자들을 함부로 강간했고 국가권력을 내세워 자신들을 고발하는 일을 막았다. 주먹구구식의 사업으로 인해 피해도 속출하고 경제는 날이 갈수록 악화됐다. 공산당은 이를 국민당과 지주들의 잘못으로 몰아 죄없는 사람들을 고문하여 죽이는 것으로 수습했다.

팩스턴의 <파시즘>에 대한 비판 (3) 전체주의 연구

팩스턴 관련 오늘의 마지막 포스팅.


이러한 팩스튼의 주장(비교사 연구에 입각한 5단계론) 역시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파시즘에 대한 기능적 접근은 파시즘의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여러 조건들을 뚜렷이 부각시킬 수 있는 반면 파시즘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겨두기 때문이다.

1930년대 프랑스 파시즘에 대한 논쟁, 김용우, 서양사론 제68호.
249페이지.

아주 짧은 내용이라 발췌하기가 좀 그래서 팩스턴에 대한 비판 2편에 합쳐버릴까도 생각했지만 그냥 넘길 수 없는 매우 핵심적인 문장이라서 일단 따로 발췌합니다. 파시즘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지 못했다는 비판에 대해서 과거 이글루스의 키케로님께서 한번 제 블로그에 댓글로 지적해주신 적이 있는데 이에 관해서도 공부해야겠습니다.... 언젠가는요 -ㅅ-;;

팩스턴의 <파시즘>에 대한 비판 (2) 전체주의 연구

(코스타 핀투 등의 고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팩스턴의 파시즘을 5단계론까지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파시즘의 발전을 5단계로 나누는 것은 자의적이다. 왜 3단계는 안되고, 7단계는 안되는가? 이보다 더 큰 문제는 팩스턴이 탄생, 성장, 발전, 쇠퇴, 소멸의 주기를 모두 겪은 이탈리아와 독일의 경우를 모형으로 삼았기 때문에 파시즘의 발전을 지나치게 사후적으로, 목적론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5단계까지 발전하지 못한 여타 나라들의 경우에 파시즘과 유사해 보이는 어떤 현상을 파시즘의 1단계 혹은 2단계라고 규정할만한 근거는 충분치 않다. 단지 파시즘과 유사한 맹아적 이념들이 등장했다고 해서 이를 파시즘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초기에 파시즘과 유사해 보이는 현상이 반드시 파시즘으로 발전하리라는 보장도 없거니와, 초기에 파시즘과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현상이 결국 파시즘으로 변형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파시즘의 발전을 단계적 과정보다는 불연속적이고 불확정적인 과정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파시즘의 알리바이?, 장문석, 영국연구 제29호, 2013년 6월.
228~229페이지. 49번 주석.

팩스턴의 <파시즘>에 대한 고평가 (2) 전체주의 연구

프랑스에서 파시즘 논쟁이 여전히 차분한 분석의 대상이 되기에는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듯하다. 파시즘이란 현상이 갖는 극도의 부정적인 인상 때문에 때로는 감정적 반발이 냉정한 역사적 성찰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불의 십자가 논쟁의 경우처럼 프랑스 파시즘 논쟁은 파시즘 자체의 정의에 관한 논란으로 변질되기 쉽다. 파시즘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조차도 여전히 합의가 어려운 실정임을 고려할 때 프랑스 파시즘 논쟁이 각자의 파시즘 정의의 타당성만을 강변하는 귀머거리 사이의 대화로 끝날 가능성 또한 없지 않다.

독일의 역사가 뮐러,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국의 역사가 팩스튼의 시도가 주목을 끄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

팩스튼의 경우 뮐러처럼 일반적인 파시즘 개념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뮐러와 마찬가지로 파시즘의 기능적 측면에 주목한다. 팩스튼이 볼 때 문제는 만족스러운 파시즘 정의에 도달하기 어렵다고 하여 그 개념 자체를 용도폐기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각도에서 접그하는 일이다.

(팩스턴의 파시즘 5단계 발전론 및 비교사 연구 전략 소개와 팩스턴 연구의 한계 언급.)

그러나 팩스튼의 시도는 그 공과를 떠나 프랑스 파시즘 연구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먼저 그것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사례들에 압도되어 파시즘의 일반적 성격을 외면하고 무솔리니와 히틀러보다는 스탈린과 히틀러를 비교하는 오류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그것은 올바른 비교사의 방법을 통해 보다 만족스러운 파시즘 정의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말아야 한다는 충고이기도 하다.

1930년대 프랑스 파시즘에 대한 논쟁, 김용우, 서양사론 68호.
246~249페이지.

팩스턴의 <파시즘>에 대한 고평가 (1) 전체주의 연구

배경:1968년 S.J 울프의 파시즘의 본성 출간을 시작으로 파시즘의 본질에 대한 연구가 이어짐. 1991년 조지 모스의 파시즘=정치문화혁명론에 영향을 받은 그리핀이 역시나 파시즘의 본성이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파시즘을 민족 재생 신화를 중핵으로 하는 혁명적 대중 정치 운동으로 합의를 보나 했는데 20년 후 도브리나 패스모어 등이 파시즘의 본성 재고라는 책을 내놓으면서 파시즘의 고정된 핵심이라는 것이 있는지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


파시즘의 '본성'이 혁명의 추구인지, 권력의 추구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고정된 '핵심'을 버리고 파시즘을 '관계'와 '과정' 속에서 볼 필요가 있다.

(...)

(도브리는) 파시즘과 유사 파시즘의 성공/실패의 결과와는 별개로 그 결과가 예정되지 않은 "과정들 혹은 사건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코스타 핀투도 파시즘을 5단계의 연속적 발전으로 설명한 팩스턴의 성과에 대해 파시즘을 '관계'와 '과정'으로 분석한 모범으로 여긴다. 그에 따르면, 팩스턴의 분석이 보여주는 힘은 "파시즘이 권력을 향해 부상하는 과정과 맥락에 대한 수준 높은 분석"에 있다.

팩스턴은 "파시스트와 보수주의자, 지도자와 당원, 당과 국가 사이의 '줄다리기'"가 파시즘 고유의 긴장을 야기하며 전개되는 과정을 탁월하게 설명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코스타 핀투는 파시즘의 고정된 '본질'을 얻기 위해 파시즘의 변화 과정을 끊지 말고 파시즘 내부의 긴장을 없애지 말라고 조언하는 것이다.

파시즘의 알리바이?, 장문석, 영국 연구 제29호, 2013년 6월.
227~229페이지.

제가 굉장히 주요 소스로 차용하는 팩스턴의 파시즘이 학계에서 어느 정도 위상을 차지하는지에 대한 개인적인 궁금즘+최근에 팩스턴의 분석을 알못의 뒷북 연구라고 주장하는 글을 보았기에 한번 써보았습니다. 요즘들어 3주째 이어지는 감기 때문에 대단히 몸이 좋지 않아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군요. 환절기에 여러분 모두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한동안 활동이 어렵지 싶네요. (훌쩍)

테런스 멜릭의 트리 오브 라이프를 보다가 영화 이야기

라크리모사에 이르르는 순간... 그냥 가슴이 너무 먹먹해서 더 시청할 수가 없었다.
지금 느낀 충격이 엄청나서 잠시 쉬는 중...

6.25 전쟁 때 한국 정부 망명지로 고려된 곳들 냉전사


1. 제주도
1950년 12월 28일 미국 국무성의 이전 계획과 1951년 1월 15일의 국가안전보장 문서 101/1에서 언급.
대한민국 영토를 사수한다는 상징적인 의미와 반격의 거점이 된다는 이점은 있는데 존나 쪼매난 곳이라 유지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음.

2. 일본 야마구치 현
한 3년 전인가 2년 전인가 논란이 된 그곳. 미국 외무성 자료에 따르면 6.25 초반에 최악의 경우에 이곳으로 옮기는 것이 어떻냐고 논의된 적은 있는 수준. 일본 측 주장에 따르면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일본으로 옮겨가고 싶다고 요청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문제는 일개 현 지사가 대한민국 정부를 대상으로 거의 정부 수준의 활동을 했다는 정황이 이상할 뿐더러 결정적으로 일본 측에서조차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폐기됐다고 인정. 일단은 실재했는 계획인지 의심받는 중.

3. 일본 본토 혹은 일본의 부속 도서들.
소위 NSC 101/1(위에도 언급한 국가안전보장 문서)에서 만약 제주도가 안될 시에 거론한 후보들. 일단 해당 문서는 제주도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는데 만약 제주도가 아니면 최대 100만명의 이주를 상정한 제주도 계획보다도 적은 인원을 일본으로 옮기는 계획이 있었음. 만약 일본 계획이 성사된다면 그 규모는 그 수는 2만명도 안될 듯. 일단 극동사령부는 한국 정부의 일본 이전을 반대함. 하지만 1952년 합동참모본부는 일본과 오키나와가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 하지만 이 논의에서도 인종적 차이가 우려되니까 사이판과 티니안이 그런 면에서 낫다고 여김.

4. 오키나와
동일 문서에서 일본의 본토와 부속도서도 안된다면 옮길 곳으로 거론한 곳. 오키나와는 잔존한 한국군을 주둔시킬 기지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음.

5. 사이판
1951년 3월 미국 극동사령부가 계획한 Operation Plan CINCFE 4-51에 따른 계획. 소련군이 대거 참전해 3차 대전이 발생할 시에 한국 정부, 한국군, 선별된 포로 등 50만명을 이송한다는 계획임. 정부가 고려하던 일본 이전 계획에 대한 반대 제안으로 나옴. 하지만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군대와 민간인을 소개하기에도 바쁜 미 육군이 이를 반대. 그리고 정부와 피난민을 수용할 공간은 있지만 너무 멀어서 고려하기 어렵다고 판단됨. 이후 1952년 합동참모본부 계획에서 티니안과 함께 유력 후보지로 거론.

6. 티니안
5와 동일 계획의 후보. 1952년 합동참모본부 계획의 유력 후보지.

7. 서사모아 제도
5와 동일 계획의 후보. 하지만 미 육군은 한국 정부는 제주도에 남더라도 한국 민간인들을 서사모아에 보내는 계획은 가지고 있었음.

8. 팔라우
5와 동일 계획의 후보. 7에서 언급된 육군의 한국 민간인 피난 계획의 후보지.

9. 얍
5와 동일 계획의 후보. 7에서 언급된 육군의 한국 민간인 피난 계획의 후보지.

10. 포나베 열도
5와 동일 계획의 후보. 7에서 언급된 육군의 한국 민간인 피난 계획의 후보지.

11. 괌
5와 동일 계획의 후보. 

12. 파푸아 뉴기니
5와 동일 계획의 후보. 7에서 언급된 육군의 한국 민간인 피난 계획의 후보지.

13. 하와이
5에서 언급한 계획에서 거론은 됐는데 너무 멀다고 고려 가치가 없다고 판단.

14 미국 본토
13과 동일.

15 대만
1952년 합동참모본부 계획에서 언급은 되는데 인종적 차이가 우려되서 배제됨.

출처는 국방부 전략연구소에서 편찬한 이상호의 한국전쟁기 미국의 한국정부 해외 이전 계획, 군사 101호, 2016년.


중화민국의 화폐개혁에 대한 상반된 평가 ㄴ민국시대

오늘을 마무리하는 발췌 포스팅.


국민정부는 은본위제를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다는 판단 위에, 1935년 11월 4일 (...) 폐제개혁을 급히 선포하였다.

(...)

종래 폐제개혁과 미국 은구입 정책에 대한 평가로는 영미일의 중국 화폐권 쟁탈의 결과라는 견해가 대부분이었다. 즉 미국의 은구입 정책은 중국 폐제개혁에 대한 영국의 주도적 역할을 의식하여, 국민정부로 하여금 영국이 아닌 장국에 의존케 하려는 목적에서 의도적으로 실시하였고, 결과 미국이 중국의 금융을 장악하게 되었다는 해석이 그것이다.

반면 국민정부가 폐제개혁 실시를 선포하기 이전 미국은 전혀 중국의 금융정책에 관여하려는 의도가 없었으며, 폐제개혁은 오히려 미국의 소극적인 불개입 태도의 결과라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미국정부가 중국에 대한 은정책을 수정하여 중미은협정을 체결한 이유에 대해서는, 상품 자본의 수출시장 확보와 달러 블록권을 창출하려는 미국 재계의 이해관계, 법폐를 달러에 연계시켜 금융적으로 국민정부를 지배함과 동시에 일본에 대한 억제력을 강화시킨다는 명확한 경제목표를 지닌 미국 재무부 노선의 산물이라는 평가가 있다.

한편 중미은협정에 대한 평가는 국민정부의 종속성에 대한 비판적 입장과 동시에 주도적 역할에 대한 긍정적 견해가 서로 엇갈리고 있다. 우선 비판적 평가로는 국민정부의 법폐 정책이 은협정 이후 미국에 의존하게 되었다는 지적이다. 또한 영국의 차관은 실현되지 않은 미국의 은 매각 교섭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폐재개혁 직후 실현되었으므로, 중국이 점차 미국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중미은협정이 결과적으로 항전초기 국민정부의 재정경제를 유지하고 나아가 중국의 항전력을 지원하였다는 점을 강조하는 긍정적 평가도 있다. 특히 미국이 은구입의 조건으로 법폐의 달러 연계를 주장하였지만 국민정부가 이를 거절하고 독립된 통화가치를 유지하는 정책을 실시한 점으로 볼때, 폐제개혁은 입안과정에서부터 국민정부의 손으로 만ㄷ르어졌고, 법폐는 어떠한 통화에도 연계되지 않았으며, 제국주의국의 대립과 모순을 뚫고 자주적인 정책으로 추진된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이와 같이 폐제개혁과 중미은협정에 대한 평가가 다양한 이유는, 그것이 전개되는 과정이 단순한 통화문제를 넘어 국민정부의 국가건설에 중요한 시점이면서 동시에 대외관계에서도 중대한 구조적 변화가 동반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 국민정부의 통화정책은 이와 관련한 미국의 입장 및 그 배경이 되는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변화를 함께 고려하면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국민정부의 폐재개혁과 중미은협정의 의미, 김정현, 동아시아연구, 1999년.
35~38페이지.

감상

1. 경제학에 무지하여 길게 평가는 못하겠지만 부정적 평가에는 너무 종속이론 냄새가 난다 -ㅅ-

2. 이게 1999년이고 이후에 나온 저서에서 화폐개혁 까는 걸 못봤으니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려나...

스탈린-몰로토프 관계의 퇴행 (3) 런던 회담 소련사

9월 11일 런던 회담이 개최되었다. 이 회담에 있어 스탈린의 목적은 소위 '얄타 회담의 논리 고수'였는데 스탈린이 생각하기에 얄타의 논리란 강대국들은 서로의 영향권에 간섭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관철시키는 것이었다. 즉 소련의 영향권인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등지에 서방 연합국이 간섭하는 것을 중지시키는 것에 있었다. 스탈린은 9월 12일 다음과 같이 몰로토프에게 교시했다.

"연합국이 우리 없이 이탈리아와 강화 조약을 맺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떻단 말입니까? 우리는 선례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차례가 되면 연합국 없이 (중부유럽과) 강화 조약을 맺을 가능성을 얻을 것입니다. (...) 우리는 그런 결과(회담 교착)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 시작과 함께 번스 미 국무장관은 몰로토프에게 강화 조약 체결을 논의하는 자리에 프랑스와 중국을 초대할 것을 제안했다. 원래는 프랑스는 이탈리아와의 협상에만, 중국은 일본과의 협상에만 참여하기로 합의되어 있었다. 몰로토프는 자신의 재량권을 행사하여 이 문제를 스탈린에게 묻지 않고 승낙했다. 이는 몰로토프가 이 제안이 별것 없으며 미국의 제안에 어떤 음모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국제연합의 역할을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흘레브뉴크는 실제로 몰로토프의 합의는 문제가 없고 합리적이라 평가하고 있다.

허나 스탈린이 무리한 요구를 잇달아 내놓으면서 회담은 난항에 빠졌다. 스탈린은 9월 20일 번스가 제안한 20~25년간 독일을 비무장화한다는 조약을 거부했다. 몰로토프는 미국이 소련의 발칸 정책을 좀 더 존중한다는 전제 하에 이를 받아들일 것을 제안했었으나 스탈린은 단호하게 거부하며 이는 미국의 음모라 주장했는데 스탈린의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미국이 장차 일본의 친구 역할을 맡을 극동으로부터 우리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고 그럼으로써 극동에서는 모든 것이 괜찮다는 인식을 만들어내는 것. 
둘째, 미국이 유럽 문제에서 소련과 똑같은 역할을 하는 것을 소련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가받고 그럼으로써 향후 미국이 영국과 연합하여 유럽의 장래를 자기 수중에 두는 것. 
셋째, 소련이 이미 유럽 국가들과 맺었던 동맹 조약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
넷째, 소련과 루마니아, 핀란드 등 사이에 맺어질 어떤 미래의 동맹 조약도 망쳐놓는 것."

스탈린은 번스의 제안에 대해 의제를 무시하고 일본에 독일에서처럼 연합국 통제위원회를 설치함으로 소련에게 일본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나누어 줄 것을 요구하는 역제안을 보냈으며 북아프리카의 이탈리아 식민지 중 일부를 소련의 신탁통치령으로 제공하고 터키의 영토를 소련에 할양하며 터키의 군사기지를 소련에게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몰로토프는 터키와 북아프리카에 관하여 서방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진언했지만 스탈린은 막무가내로 밀어붙혔다.

"그대로 진행해. 가서 압력을 넣고 공동소유하자고 해! (...) 다그치란 말이야!"

몰로토프는 스탈린이 시킨대로 했지만 그의 예상대로 어니스트 베빈 장관은 리비아 제안에 대해서 몰로토프의 면전에서 벌컥 화를 냈으며 영국의 지지를 받는 번스는 당연히 일본에 대해 논의하기 조차 거부했다. 스탈린은 이에 대해 격노하여 몰로토프에게 전보를 보내 "그것은 영국과 미국이 보이는 뻔뻔스런 태도의 극치입니다. (...) 그들은 동맹국에 대한 일말의 존중심도 없습니다."라고 분노를 표출했다. 어쨌거나 스탈린은 북아프리카와 터키에 대한 요구가 터무니없었음을 알고 이를 철회했다.

또한 스탈린은 자신이 위성국으로 여긴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에 대해 서방이 자신이 수립한 친소, 친공 정부들을 승인할 것을 원했지만 미국과 영국은 완고하게 신 불가리아, 루마니아 정부의 승인을 거부했다. 회담에서 소득이 보이지 않자 스탈린의 분노는 폭발했다. 스탈린은 미국에서 요구한 프랑스와 중국 참여가 사실 미국의 음모라 여기기 시작했다. 이는 얄타와 포츠담에서 합의된 소련의 배타적 영향권을 손상시키려는 미국의 '좀 더 큰 계획'의 일부라는 것이 스탈린의 생각이었다. 이에 스탈린은 9월 21일 몰로토프에게 전보를 보내 질책하며 프랑스와 중국의 참여에 대한 합의를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연합국은 당신에게 의지를 꺾으라고 압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끝까지 버텨야 합니다."

몰로토프는 즉각 수령에게 참회의 뜻을 올렸다.

"제가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음을 인정합니다. 즉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9월 22일 몰로토프는 합의를 파기했고 영미는 이에 분노했다. 스탈린은 여전히 미국과 거래하긴 원했으나 핵으로 소련을 위협하려는 원흉으로 간주된 번스의 제안에는 완강하게 나오면서 '누가 끈질긴지 보여주는' 태도를 고수했다. 9월 27일 스탈린은 몰로토프에게 '절대적으로 굳센 의지'를 보이며 타협에 대해 아예 잊어버리라고 지시했다.

"회담의 실패는 번스의 실패를 의미하고, 우리는 그것을 전혀 후회하지 말아야 합니다."

몰로토프는 스탈린과 달리 서방 연합국과 적절한 타협이 이루어지길 희망했으나 스탈린의 태도가 변하지 않음에 따라 런던 회담은 10월 2일 결렬되었다. 소련의 완고한 태도에 놀란 번스는 중부유럽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후퇴시켰으며 소련과 교착 상태를 풀기 위한 정책으로 전환했다. 허나 몰로토프가 스탈린의 의도대로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몰로토프에게 분노와 의심을 품게 되었다. 몰로토프가 겨우 중국과 프랑스의 참여를 합의한 것을 시작으로 주보크는 스탈린이 몰로토프를 서방 유화론자로 의심하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게다가 서방에 대한 강경한 투사 입장은 몰로토프에게 맡기고 자신은 서방에 온건한 지도자로 남고 싶었던 스탈린은 몰로토프가 9월 22일의 합의 파기가 스탈린의 지시라는 것을 밝히자 격노하여 몰로토프가 '경직된' 자신에 대한 '합리적 대안'으로 나서려 한다고 비난했다. 이 사건은 이후 스탈린이 몰로토프를 오랫동안 비난하는 구실이 되었다.

참고문헌
-스탈린 평전, 올레크 흘레브뉴크, 삼인.
-스탈린 평전, 로버트 서비스, 교양인.
-실패한 제국 1권, 블라디슬라프 주보크, 아카넷.
-냉전의 역사, 존 루이스 개디스, 에코리브르.

스탈린을 좆문가라고 까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 소련사

두통이 심한데 머리도 식힐 겸 발췌해보는 우스갯소리.


로버트 서비스는 한가지 재밌는 일화를 소개한다. 스탈린의 차남 바실리 스탈린은 소련 공군에 들어갔는데 당시 소련 공군은 정치국원의 자식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부문이었다. 그런데 바실리가 사관학교 졸업이 남들보다 늦어지자 스탈린은 아들을 꾸중했다.

"넌 진작에 사관학교 졸업장을 땄어야 했어."

그러자 바실리는 불만스레 대꾸했다.

"그럼 아버지는요?"

서비스는 이 일화가 출처가 의심스럽다고 인정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스탈린은 늘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군과 군사 전략을 잘 아는 듯한 인상을 주려고 했다. 감히 그의 군사 지식이 아마추어적인 토대밖에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 사람은 그의 아들 뿐이었을 것이다.'
-스탈린 평전, 로버트 서비스, 교양인, 658페이지.


추가

이후 바실리 스탈린은 공군 중위로 임관했으며 생도 시절부터 아버지의 후광을 빌어 망나니 생활을 했다. 그는 부화방탕한 생활을 자제하지 못했고 다른 군인들에겐 있을 수 없는 특권을 누리며 승진을 거듭하여 20대에 장성이 되었다. 올레크 흘레브뉴크의 스탈린 평전에 따르면, 그는 부인과 애인들을 갈아치웠고 아버지의 이어지는 경고를 무시했다. 결국 스탈린은 아들의 방탕함을 비판하며 그를 해임시켰고 스탈린이 죽은 후 흐루쇼프에게 대들었던 바실리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2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은 어디인가? 2차 대전

간단히 발췌해보는 잡글.


유럽은 1939년 9월 1일까지도 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있었다. 일부 사학자는 제1차 세계대전을 '재앙의 시초'로 보고 1914년부터 1945년까지를 '30년 전쟁'이라 말하기도 한다. 다른 학자들은 1917년 볼셰비키 쿠데타를 기점으로 '장기전'을 치르면서 1945년 '유럽 내전' 내지는 1989년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는 결코 깔끔하지 않다. 마이클 하워드 경은 1940년 유럽 서부에서 히틀러가 프랑스와 영국을 맹공격한 것을 두고 여러 면에서 제1차 세게대전의 연장이었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게르하르트 바인베르크 역시 1939년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이 전쟁을 히틀러의 가장 큰 목표였던 동부 생활권 운영의 신호탄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사실이지만, 1917년과 1939년 사이에 일어났던 혁명과 내전들이 패턴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예를 들어 좌파는 늘 스페인 내전이 제2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라고 둑데 믿는 반면, 우파는 그것을 공산주의와 '서구 문명' 간 제3차 세계대전의 서막을 알리는 첫번째 무대였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서양 사학자들은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치러진 중일전쟁과 더불어 어떻게 그것이 세계대전으로 바뀌었는지를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아시아 사학자들 중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1931년 일본의 만주 침공으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 주제에 관한 논쟁은 끝이 없겠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갈등의 결합체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갈등은 대부분 국가 간에 발생했지만 한편으로는 좌파와 우파 간의 내전이 국제적으로 번지면서 수많은 국가를 지배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전 세계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가장 파괴적인 갈등을 빚어낸 요인들을 다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 일일 터이다.

-제2차 세계대전, 앤터니 비버,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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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중일전쟁 기원설은 어쩌다 들어봤는데 러시아 혁명과 스페인 내전 기원설은 어찌 여기서 처음 들어봤군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영화(dvd)

걸작...

호전되지 않는 감기 잡상

아픔...

오늘 본 영화 영화(dvd)

1. 12몽키즈.
테리 길리엄의 후기 커리어를 생각하면 꽤 볼만하다. 결국은 타임 루프물이고 브래드 피트는 페이크 보스였다는 건데... 뭐 꽤 볼만함.

2. 어 퓨 굿맨
잭 니컬슨의 연기에 지리것소.... 훌륭함. 데미 무어는 참 예뻤다.

베토벤 소나타

https://www.youtube.com/watch?v=Bo1uygwCnrE

미 국무부가 파악한 제주도 천도 계획의 장점과 단점 냉전사

장점

1. 많은 인원을 공산 측의 보복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

2. 공산 측의 완전한 승리를 저지할 수 있다.

3. 미국과 유엔의 반격에 지속적인 상징을 가질 수 있다.

4. 자유 한국정부가 한국 영토에 존재한다는 점을 국민들에게 알릴 수 있는 상징이 된다.

5. 게릴라 지원과 심리전을 위한 이점이 있다.

6. 한국정부의 해외 이전의 어려움을 피하면서 지속적인 한국 정부의 의지를 보여줄 수 있다.

단점

1. 피난민들에 대한 보호와 원조가 언제까지 계속 되어야 하는지가 불분명하다.

2. 제주도에 대한 유엔의 지속적인 지원을 확보하기 쉽지 않으며 이를 둘러싼 연합국들 사이의 견해 차이가 증대될 수 있다.

3. 만약 공산 측과 타협이 이루어질 경우 공산측이 제주도의 항복을 요구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정부 이전에 제주도를 포기하는 것보다 미국과 유엔의 위신에 더 큰 재앙이 된다.

4. 기본적인 구호에 있어 다수 인구를 유지하는 것이 심리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5. 어쨌거나 제주도는 대만꼴이 될 것이다.


※이러한 분석의 결과, 미 국무부는 어찌되었건 간에 제주도를 확보하는 거이 상징성 면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 무초 한국 대사를 통해 정부를 이전하려면 제주도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줄 것을 주문했다. 미 국무부는 동시에 정부 이전 계획의 누설을 매우 두려워하였고 결국 1월 15일 뉴욕타임스가 한국 정부의 제주도 철수 계획을 보도하면서 현실화되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한국전쟁기 미국의 한국정부 해외 이전 계획, 이상호, 군사 제101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6년 12월) 참조.

1950년 12월 28일의 한국정부 제주도 철수계획 냉전사

우연히 구한 군사 101호에서 본 흥미로운 대목 발췌.


1951년 1월 중국군의 제3차 공세에 따라 유엔군은 다시 38선 이남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미국과 유엔군은 한국정부의 해외 이전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하였다. 대체로 대략적인 구체안은 12월 28일 미 국무부에서 마련되었다. 당시 계획에서는 철수시킬 한국인들의 예상인원을 대략 5만여명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철수시킬 한국인들의 예상인원(57,700명)
1) 국회의원, 중앙 및 지방경찰의 고위직과 가족(3,500여명)
2) 대한미국의 고위 장교단(1000명)
3) 민간분야의 저명한 지도자 및 기독교 인사, 교육자 등 향후 공산주의와의 투쟁에서 유용할 것으로 보이는 인사들(3000명)
4) 한국군(약 5만명)
5) 저보수집 및 심리전 수행에 필요한 북한포로(500명)
6) 유엔군 사령부는 일반 민간인의 철수를 지원할 수 없음.

이 당시 계획에서 선정된 철수지역은 물자공급과 방어에서 불리한 점은 있지만 제주도가 가장 적합한 지역으로 간주되었다. 그 이유는 한국정부가 여전히 한국의 영토에서 기능할 수 있으며 한국군 역시 수비대의 형태로 주둔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계획의 내용은 이것이 전부였고, 이에 따른 세부적인 계획은 아직 준비되지 못했다.

한국전쟁기 미국의 한국정부 해외 이전 계획, 이상호, 군사 제101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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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몰로토프 관계의 퇴행 (2) 종전과 서방과의 대결 소련사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스탈린은 다시 몰로토프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은 몰로토프에 대한 공격을 가하는 것은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고착화된 정치 체제에 대한 재편의 구실이 될 수 있었다. 흘레브뉴크는 스탈린, 몰로토프, 베리야, 말렌코프, 미코얀으로 구성된 5인방의 지배체제가 '불편할 정도로 오래' 유지되었다고 쓰고 있다. 이미 몰로토프는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그런 점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 1945년 4월 23일 처음 트루먼과 처음 대면한 몰로토프는 굉장히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이 폴란드에 관한 얄타 협정을 위반했다고 비난을 퍼부은 다음에 몰로토프가 반박할 시간도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회담을 중단시킨 것이었다. 몰로토프는 '좌절'과 '괴로움'에 빠졌다. 회담에 동석했던 안드레이 그로미코에 따르면, 몰로토프는 스탈린이 자신을 이 일을 구실로 희생양으로 삼을까봐 두려워했다. 결국 고민하던 몰로토프는 이 사실을 은폐했다.

또 하나의 이유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5년 10월 9일, 정치국이 9년 만에 스탈린의 휴가를 주는 결의안을 채택하자 외국 언론에서 입방아가 무성하여 스탈린의 의심을 자극하였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을 수행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종전 직전 병으로 사망했고 윈스턴 처칠은 선거에서 패배해서 물러났다. 이런 와중에 서방 세계는 스탈린의 행보에 관해서 스탈린이 노할 정도의 관심을 보였다. 10월 11일 스탈린은 타스 통신을 통해 시카고 트리뷴이 군의 지지를 받는 주코프와 당의 지지를 받는 몰로토프가 스탈린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보도를 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10월 18일에는 타스 통신을 통해 주불 소련 대사가 "지난 10개월간 우리는 스탈린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확인해달라는 요청을 15차례나 받았다."라고 발언한 정보가 전해졌고 노르웨이에서 서방 시민들이 몰로토프를 "세계 열강들 사이에서 동등한 지위를 요구하는 새롭고 강한 소련을 대표"하는 인물로 보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당연하지만 스탈린은 대노했다.

그리고 악화되고 있는 서방과의 외교 관계에 몰로토프는 희생양이 되기 시작했다. 소련이 폴란드 국내군을 쓸어버리고 공산주의자들을 앉히기 시작하자 미국과 영국은 격렬히 분노했다. 대일전에 소련의 도움이 필요했던 미국은 일단 강경노선으로 선회하진 않았으나 영국의 경우, 윈스턴 처칠과 클레멘트 애틀리가 공통적으로 소련의 정책에 항의하며 대소 강경노선으로 선회했다. 패권을 쥐고자 하는 것은 소련만이 아니었고 직접적인 통제를 선호하는 소련의 방식은 서방에게 격렬한 반발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1945년 4월의 국제연합 창설 협상에서 몰로토프는 스탈린의 의지대로 소련에게 상임이사국 지위를 부여하기 위한 역할을 맡았으나 미국의 태도는 더 이상 스탈린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이 사실은 몰로토프에게 '썩 기분 좋은 경험'이 되지 못했다. 이후 서방과 소련은 일본 점령과 동유럽 문제로 충돌했다.

1945년 8월 만주작전이 시작된 이후 스탈린은 줄기차게 홋카이도를 점령하고 싶다는 욕구를 표시했으나 트루먼은 이를 묵살했으며 맥아더는 일본 통치에 소련을 개입시킬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고 일본의 최고 권력자로 등극했다. 미국의 태도를 확인한 스탈린은 8월 22일 홋카이도 점령 계획을 취소했다. 또한 8월 20일과 21일에 걸쳐 미국과 영국은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새 정부에 친서방 후보들이 포함되지 않으면 신정부를 승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통고했다. 제임스 번스 신임 미국 국무장관은 유럽 해방 선언의 위반에 대한 투쟁을 연합국이 지원할 것이라며 지원사격을 하였다. 이에 부화뇌동한 불가리아 외무장관은 불가리아의 선거는 세 강대국 대표들로 이루어진 연합국 통제 위원회의 감시를 받을 수 있을 때까지 연기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2월부터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의 공산화를 위해 노력하던 소련은 당연히 반발하며 이를 '영국, 미국인들의 무자비한 압력'이라고 표현했다.

스탈린은 서방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스탈린은 불가리아에 있던 세르게이 비류조프 장군에게 어떠한 양보를 해서는 안된다는 지시를 내렸다. 스탈린은 동유럽과 일본에서의 서방의 견제를 소련에 대한 서방의 정치적 공세로 인식하였고 서방에 대한 의구심을 표현했다. 볼코고노프에 따르면,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 불만을 표시하면서도 그리스에서 일방적인 한 세력을 지원하는 서방의 태도는 스탈린으로 하여금 서방을 '파이의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려는' 숙적으로 보이게 하였다. 더군다나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과 일본의 조기 항복은 소련과 미국의 힘의 균형이 바뀌었다고 느껴지게 했고 이는 스탈린과 소련 엘리트들의 태도에 영향을 미쳤다.(여기에 주보크는 소련인들이 미국인들의 동등한 대우를 받고 '버릇 없어'졌다고 표현한다.) 

다만 스탈린은 서방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취할 때 직접 나서는 일은 꺼렸다. 그는 미국의 엄청난 국력을 인식했고 전후 소련이 얼마나 파괴되었는지 잘 알았기 때문에 미국과 직접 충돌, 특히 무력으로 충돌하는 일을 매우 꺼렸다. 또한 그는 전후 조국의 재건과 새롭게 건설된 소련 제국의 유지를 위해 서방의 호의를 필요로 했다. 개디스는 스탈린이 심지어 미국과의 '냉전'조차도 원하지 않았다고 파악한다. 어차피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새로운 대공황이 닥칠 것이고 '붕괴 직전의 노후한 제국'인 영국과 미국의 싸움이 시작될 것이라는 것이며 소련은 미국에게 제품을 팔 수 있는 유일한 시장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스탈린의 관측이었다. 따라서 서방에 대한 투사는 몰로토프에게 맡기는 것이 적격이었고 스탈린은 '이따금씩 끼어들어' '체면을 세워주거나' '과시적 양보를 베푸는' 일을 맡곤 했다. 따라서 9월 11일 열린 런던 회담에서 몰로토프는 미국 국무장관 번스와 영국 외무장관 어니스트 베빈을 상대해야 했다.

참고문헌
-스탈린 평전, 올레크 흘레브뉴크, 삼인.
-스탈린 평전, 로버트 서비스, 교양인.
-스탈린 평전, 드미트리 볼코고노프, 세경사.
-실패한 제국 1권, 블라디슬라프 주보크, 아카넷.
-냉전의 역사 -거래, 스파이, 거짓말, 그리고 진실, 존 루이스 개디스, 에코리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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