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공지 군대 잡담

음 안녕하십니까. 블로그 주인장 전위대입니다. 지금껏 제가 연재하고 있던 장제스 일대기, 스페인 민주화 시리즈, 이라크 점령사 시리즈를 모두 연재중단합니다. 이 기간은 최대 2년 이상이 될 수 있으며 운이 좋다면 좀 더 빠르게 돌아올 수 있지만 어떻게 될 지 전혀 모르는 일이니 어떠한 확답도 드릴 수 없군요.


그러면 저는 왜 연재를 중단하는 것일까요? 여기저기서 떡밥은 흘렸지만 그렇습니다. 본인은 군대를 갑니다. 바로 내일 입영입니다. 사실 장제스 일대기는 이렇게까지 오래 끌 줄은 몰랐고(공부를 하면 할 수록 느껴지는 본인의 공부 부족으로 의욕이 사라진 것도 있습니다... 매일 연재하던게 한달 단위로 연재가 됐으니...) 스페인 민주화 시리즈도 군대 가기 전까진 다 끝날 생각이었는데 마지막 두편을 남기고 결국 이렇게 사라지게 되는군요.


뭐 구질구질하게 길게 쓸 것은 없겠고 2년간 몸 성히 다녀오겠다는 말씀 밖에 드릴게 없네요. 최대한 빨리 연재를 재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p.s 1. 장제스 일대기는 원래 국부천대까지만 다루려 했으나 대만 역사서를 몇권 구해서 장제스가 죽는 순간까지로 연장합니다. 그게 언제 재개될진 모르겠지만요 ㅠㅠ


p. s 2. 나무위키가 제가 없는 동안 반달들에게 함락되지 않길 바랄 따름입니다. 우리 역밸 동포 여러분들께옵서 나무위키를 하시는 분도 계시다면 부디 역사 관련 문서들을 지켜주소서.


공군 합격 군대 잡담

5.16절에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러 진주로 사라집니다.
그렇게 되면 2년간 빠빠이군요. ㅠㅠ

귄터 샤보프스키가 말하는 공산당원의 특권 냉전사

※질문을 하는 것은 zeit지 특파원 프랭크 지렌이고 답하는 것은 동독 전 정치원 국원이며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회 비서였던 귄터 샤보프스키.

問:당원들을 실망시키는 상징들 중 하나는 정치국원의 이전 주소지가 당 간부들의 호화 거주지인 반트리츠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당신도 살았습니다. 동독 인민에게 당 간부들의 호화 거주지인 반트리츠는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었습니까?

答:베를린의 스펙크 구역에 있는 북쪽 가장자리의 작은 마을은 동독의 종말시기에 분노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지배에 저항을 했던 인민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정치국원들이 사용했기 때문에 주위에 담을 쌓아놓았던 작은 마을의 숲속에 삼엄하게 감시하는 은밀한 국유의 은신처들이 25개나 있었다. 그리고 비밀주의, 인간의 소비열망, 공식적으로 맹세했던 평등잉념과 특권이 부여되는, 다시 말해서 '특별지위가 주어진다는 것'을 누설했던 정보 때문에 그 작은 마을은 무절제한 자에서부터 과도한 자에 이르는 향락을 쫓는 자를 구체적으로 생각나게 했다. 따라서 당 간부들의 호화거주지인 반트리츠는 사회주의 사회가 부추겼던 부패와 동의어가 되고 말았다.

問:특권들은 어떤 모습을 띠었습니까?

答:바나나와 오렌지가 항상 있었다. 원산지 카탈로그에서 서방의 상품들을 주문할 수 있었고, 서독의 1마르크 대 동독의 2마르크의 비율로 구입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서방의 상품들은 외국환이 없는 보통의 소비자들에게 판매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외환거래 수입 상품점에서 서방의 상품들이 자유로이 거래될 수 있는 경우에는 반트리츠에 조달될 수가 없었다. 상상했던 금수도꼭지는 욕실에 없었지만, 수도꼭지들은 특수강으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크롬으로 도금처리 되어 있었다. 동독에서 생산된 플라스틱 수도꼭지에 비해서 물이 뚝뚝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정치국 고관들은 간혹 목이 마를 경우에 '외국에' 있는 레데베르거 맥주와 베르네스그뤼거 맥주를 마음대로 마셨다. 물론 이와 같은 범위의 소비특권들이 즉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그렇지만 국가적으로 기초가 튼튼한 공산주의에서 당 간부들의 호화 거주지인 반트리츠는 엘리트들의 안전보장 노이로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물론 모든 사회주의 형제국에도 당간부들의 호화거주지인 반트리츠처럼 지도부의 친척들을 위해서 울타리가 처져있을 뿐만 아니라 관리인이 있는 지역들이 있었다. 그런 것을 만든 자는 소련이었다. 1950년대(1953년 6월 17일 이후와 1956년 헝가리에서 일어났던 봉기 이후) 소련에서 왔던 프리카스가 안전을 이유로 정치국원의 숙소를 베를린-니더쇈하우젠에 있는 전쟁 전의 고급저택들로 구성된 판케 지역에서 당 간부들의 호화거주지인 반트리츠의 혼합림으로 이전시키기 위해서 울브리히트에게로 왔다. 그렇게 되면 '반공산주의 혁명세력'이 요즈음 집단적으로 항의를 할 때 인민들이 높은 분들이 있는 지역에서까지 집단적으로 미친듯이 날뛰는 것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1960년에 소위 숲속마을에 숙소들이 생겨났다. 따라서 당 고관들은 우직하고 단단하게 실내장식을 했던 아주 초라하고 넓은 집들로 이사를 했다. 그 당시에 그곳에 특별 담당 관청들이 세워졌다. 그런데 특권성향들과 소비욕망 때문에 점증적으로 서방의 상품들을 그 관청들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관청들은 격려를 받았고 전체 공용시설에 방수시설을 처리함으로써 총애마저 받게 되었다.

당 간부들의 호화거주지인 반트리츠는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던 유토피아의 또 다른 상징으로 작은 마을이 있다. 그렇지만 민주사회국가가 제약을 저항할 수 없으면 없을수록 더 많이 퍼지고 있는 동독의 만성적인 미화의 관점에서 당 간부들의 호화거주지인 반트리츠에 대한 추억은 의미가 있다.

물론 당시에 많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던 정치국의 서방상품에 대한 탐닉을 묘사하였기 때문에 오래 전에 표준 소비자들에게 미쳤던 자극력이 감소되었다. 왜냐하면 표준 소비자가 크벨레와 네커만이라는 통신판매회사가 가지고 있는 매력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신분이 좋은 사람들이 모젤 포도주를 마실 수 있었다는 것이 누구를 여전히 자극하고 있는가? 오늘날 어느 곳의 모든 슈퍼마켓에는 수입해온 포도주병으로 진열장이 꽉 차 있지 않은가? 그리고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감사기관의 호화로운 생활에 대비하여 두드려졌고, 마찬가지로 동일한 것들 가운데 가장 동일한 것들에 대해 분노를 자아냈던 도시들과 소도시들에 있는 쇠퇴한 건물전면들도 그 이후로 포괄적으로 사라졌다.

이미 1989년과 1990년에 당 간부들의 호화거주지인 반트리츠를 처음 순례했던 순례자들을 실망시켰던 동독 지도자들의 삼류 사치에 대해서 보다 젊은 사람들은 오히려 깜짝 놀라거나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한바탕 웃었을 것이다.

동독 멸망 보고서, 프랭크 지렌, 귄터 샤보프스키, 하늘북.
118~121페이지.

3줄 요약

1. 당 간부들이 1950년대에 반공산주의 혁명이 무서워서 집단구역으로 달아남.

2. 근데 거기서 서방제품으로 사치를 했더랜다.

3. 근데 그것도 서방기준으로 헛웃음 나오는 삼류사치. -ㅅ-

감상.

1. 그러므로 우린 공산주의를 멀리하고 자본주의를 가까이 하는 것이 낫습니다.

2. 근데 번역이 영 시원치 않아 어색한 문장이라거나 외국 인명에 대한 괴상한 번역이 있습니다.(특히 러시아쪽)
ex) 주코프 - 슈크로프, 브레즈네프-브레쉬네프, 흐루쇼프-흐루쉬쵸프

봉천군벌의 재정적 몰락과 그 영향 중국 근현대사

그냥 삘 받혀서 간략히 쓰는 잡글.
비웃으시면 됩니다.


장쭤린의 봉천군벌이 만주를 장악한 이후, 그는 다른 군벌들처럼 만주 지역에서는 동삼성관은호라 하는 지폐발행기구를 통해 소위 봉표라 하는 독자적 지폐를 발행했습니다. 전에 군벌 통치가 중국경제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간략히 언급한 바가 있는데, 당시 군벌들의 행태 중 하나가 담보없는 지폐의 남발을 통해 백성들의 고충을 가중시키는 한편, 지폐의 신뢰성을 하락시키는 것이었는데 장쭤린 역시 이러한 행태로부터 자유로운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장쭤린은 관내로의 진출을 위해 많은 군비를 필요로 했는데 막대한 군비 지출 때문에 군비가 세수를 크게 초과하는 상황에 이릅니다. 즉 적자가 난 것이죠. 장쭤린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지폐를 대량 발행합니다. 이 때문에 봉표는 "발행 종류와 수량이 많고 게다가 당시 사회 정세의 영향으로 인해 화폐 가치의 변동이 잦"은 지폐가 되었는데 다시 말해서 이거 쓰레기 돈 아닙니까. -ㅅ-

허나 장쭤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봉표 발행을 지속적으로 증가하면서 군비를 펑펑 낭비하곤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자살행위라는 충고가 있어왔지만 장쭤린은 이런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2차 직봉전쟁-궈쑹링의 반봉사건 등 이어지는 군사적인 위기와 충돌은 군비의 증가로 이어졌고 장쭤린은 봉표 발행으로 이를 때웠지만 경제를 눈곱만큼 알면 필요에 따라 마구 돈을 찍어내는 행위는 결국 돈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경제위기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사회불안이 겹치면서 봉표의 가치는 땅을 치기 시작합니다. 

1925년 10월 17일 봉표와 현양 1원의 교환비는 2.29에서 12월 15일 2.81로 30% 폭락했고 5.8을 거쳐 11까지 하락했습니다. 장쭤린 암살 이후 동북역치가 단행되는 기간 동안 안국군정부의 봉표 지불보증이 공수표가 되면서 봉표는 더욱 개판이 되었습니다. 1928년 1월 봉표와 현양의 교환비가 16대 1로 하락했고 봉천군벌이 베이징을 버리기로 결정하면서 60대 1까지 폭락했습니다. 봉표는 1928년, 32대 1로 (상대적이긴 하지만) 일시적으로 안정되었으나 1929년의 경제위기가 오면서 3월까지 32대 1이었던 교환비가 4월에 42대 1, 5월에 49대 1, 6월말에 72대 1로 폭락했습니다. 결국 봉천군벌은 파산하게 됩니다.

이런 경제적 위기를 겪게 된 장쉐량의 선택이 무엇이었는가? 소련을 공격한다 였습니다. -ㅅ-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장쉐량은, 적백내전으로 맛간 소련이 감히 봉천군벌과의 전쟁을 감수하지 못할 것이라 여겨 소련과 공유하던 중동로를 일방적으로 회수했는데 이는 중동로가 올리던 막대한 이익에 군침을 흘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장쉐량의 예상과 달리 소련은 외교적 교섭이 결렬되자 가차없이 무력 옵션을 선택했습니다. 바실리 블류헤르 장군 휘하의 소련 극동군은 장쉐량과의 전쟁에 돌입했고 장쉐량 군대는 박살났습니다. 여기에 소련의 철도 차단으로 중동로가 적자만 내는 똥으로 변하면서 장쉐량은 중동로를 도로 소련에 바치고 항복합니다. 여기서 중동로 회수에 소극적이던 만주 구파와 장쉐량이 틀어지죠. 게다가 전쟁 기간 내내 소련군에게 두들겨 맞은 건 만주 구파였습니다. 결국 만주 구파는 만주사변 이후에 친일의 길로 가게 되고 소련군에게 두들겨맞은 트라우마로 열강에 소극적이 된 장쉐량은 부저항을 취하다가 영지에서 쫓겨난 이후 시안사건을 일으키게 되는데.... 


참고문헌 

북양정부의 재정적자와 군벌통치에 미친 영향, 성시일
장학량과 중동로 사건, 송한용
만주사변기 중일외교사, 유신순


좀 그럴듯하게 쓰려고 했는데 무슨 조잡한 레포트만도 못하게 된 개똥글
-ㅅ-

코르테스의 복수 (39) 말리날코 원정 코르테스 정복기

한동안 코르테스는 부상당한 병사들을 치료하고 무기를 확보하면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그동안 테노치티틀란의 전령들이 자신들을 버리고 코르테스에게 붙은 지역으로 달려가서 자신들의 대승을 알리고 머지않아 스페인인들을 궤멸시킬 것이니 어떤 일이 있어도 스페인인들과 상종하지 말라는 요구를 전달했다. 그리고 그 증거로 그들이 죽인 두필의 말과 스페인 병사들의 머리를 보냈다. 전령들은 머리들을 보여주면서 그것으로 더욱 저항의지를 곧추세웠다. 이런 식으로 아즈텍인들이 기세등등해지는 것을 눈치챈 코르테스는 이를 저지하고 자신들의 약점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매일 여러 기병과 보병을 보내 동맹군들과 함께 싸우게 했다. 하지만 매일 거두는 전과는 대단치 않아서 첫번째 거리에서 다리 몇개를 점령하는 것에 그치곤 했다.

패배 이틀 후, 콰르나과라스라고 하는 도시의 원주민들이 코르테스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과 인접한 말리날코의 주민들이 공격해와 밭을 파괴하는 등 자신들을 심하게 괴롭혔으며 더 큰 지역인 쿠이스코와 동맹을 맺고 콰르나과라스가 스페인과 동맹을 맺었단 이유로 그들을 죽이려 한다고 했다. 만약 쿠이스코와 말리날코가 콰르나과라스를 파괴하면, 그들의 다음 목표는 스페인 원정대가 될 것이라는 것이 콰르나과라스 전령들의 설명이었다. 코르테스는 자신들의 사정이 좋진 않지만 그들의 요청이 간곡하였기에 심한 반대를 물리치고 안드레스 데 타피아에게 80명의 보병과 10명의 기병을 주어 콰르나과라스를 돕게 했다. 당연하지만 이는 코르테스가 인디오 동맹군들의 반란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정한 결정이었다. 고마라는 군대 내에서 인디오들의 반란을 우려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실제로 이뤄지진 않았다고 적었다. 허나 베르날 디아스는 실제로 동맹군이 이탈했다고 적었는데 동시에 많은 인디오들이 타피아와 행동을 같이 했다고 적는 등 모순된 기술을 했다. 각설하고 코르테스는 자신들의 사정도 급하니 일을 신속히 처리하고 10일 안에 돌아올 것을 타피아에게 지시했다. 7월 3일 수요일 출병한 타피아는 말리날코와 콰드노아카드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에 도착, 적의 공격을 패주시키고 말리날코로 쫓아냈다. 말리날코는 스페인 기병들이 오를 수 없는 험한 언덕 꼭대기에 있었는데 이 때문에 타피아는 말리날코 공격을 포기하고 대신에 주변 평야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7월 11일에 돌아왔다.

그 사이에 코르테스는 광장 입구에 설치된 운하와 바리케이드를 탈취하기 위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때 알바라도 진영에 머물던 틀락스칼라의 치치메카테클레는 스페인인들의 전과가 신통찮은 것을 보고 분노, 직접 400명의 궁수를 비롯한 병사들을 거느려서 단독 공격에 나섰다. 치치메카테틀레와 그의 전사들은 틀락스칼라와 수장의 이름을 크게 외친 다음에 시내로 진격하였다. 치치메카테클레가 앞장섰으며 그들은 가공할만한 소리를 지르며 쇄도, 매우 용맹히 싸웠는데 쌍방에서 많은 전사자가 났다. 테노치티틀란 시민들은 치치메카테클레를 함정에 몰아넣어 몰살시킬 계획을 꾸몄는데, 치치메카테클레가 철수할 때 그들을 추격하여 강가에서 전멸시킨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치치메카테클레가 배치한 400명의 궁수들이 제때 추격해오는 테노치티틀란 전사들을 요격했고 덕분에 틀락스칼라 병사들은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 예상치못한 결과에 테노치티틀란인들은 당황했다.

7월 13일, 우투미 인디오 10명이(고마라는 16명, 모톨리저는 15명이라 기술) 코르테스를 찾아와 우투미 인근의 마탈싱고 수장들이 쳐들어와 우투미를 파괴하고 있으며 머지않아 테노치티틀란과 협공하여 코르테스마저 공격할 계획이라고 알려왔다.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 사람들이 곧 마탈싱고 사람들이 자신을 구하러 올 것이라 위협한 걸 들은 기억이 있기 때문에 이 말이 사실이라 여겼다. 하지만 마탈싱고에 대해 아는 것이 없던 코르테스는 비록 지금이 최악의 시기지만 우투미를 도와 테노치티틀란의 날개를 꺾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 산도발에게 18명의 기병과 100명의 보병, 1명의 석궁병을 주어 우투미를 돕기로 하였다. 산도발은 휘하의 우투미 전사 일부를 거느려 우투미로 출병했다.

코르테스의 복수 (38) 스페인인들의 심장이 꺼내지다 코르테스 정복기

승리를 거둔 아즈텍인들은 스페인인들을 겁주기 위해 생포한 포로들과 확보한 스페인인들의 주검을 모두 시장으로 데리고 가서 가장 높은 피라미드 위에서 옷을 벗기고 칼로 심장을 꺼내 신들에게 제물로 바쳤다. 알바라도의 막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볼 수 있었으며 스페인인들의 흰 피부가 인디오들과 대비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스페인인임도 알 수 있었다. 사아군은 그 의식이 무무스코의 피라미드에서 행해졌다고 했으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거기에서 그들은 포로들을 한명씩 죽이고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냈다. 먼저 에스파냐인들을, 이어서 우리의 인디오 친구들을 죽였다. 포로들을 죽이고 나서 그들은 망자들의 머리를 우상 앞의 기둥들에 매달아놓았는데, 그 머리들은 모두 관자놀이가 꼬챙이로 꿰어져 있었으며, 에스파냐인들의 머리를 맨 위에, 그 밑에 인디오들의 머리를, 그리고 그 밑에 말의 머리가 놓여 있었다."

베르날 디아스는 당시 알바라도의 진영에 있었는데 스페인인들이 모두 그 제사 의식에 몸서리쳤다고 기록했다. 막사로 돌아온 지휘관들 사이에선 큰 논쟁이 벌어졌다. 산도발과 책임소재에 대해 논쟁하던 코르테스는 이것이 알데레테의 잘못이라고 주장하면서 그가 전투 경험이 없어 둑길을 메워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참혹하게 패배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분노한 알데레테가 코르테스가 후위를 충분히 지키지 않은 상태에서 승리에 눈이 멀어 무리한 공격을 해서 진 것이라고 반박했다. 베르날 디아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코르테스)의 부주의로, 그리고 우리 주님이 그것을 허락하셔서, 그와 그의 중대장들, 그리고 병사들은 그들이 탈취한 다리를 메우지 않았다."

코르테스도 황제에게 보내는 보고서에서 신을 언급했다.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가 지은 죄를 물어 그런 큰 벌을 허락하지만 않으셨더라면 시장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을 것입니다."

그는 교묘하게도 패배의 원인에 대해 신을 언급하였으나, 신이 그들의 패배를 원한 것이 아니라 패배의 원인을 스페인인들이 제공한 것을 보고 신이 패배를 '허락'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이 참패는 슬픔의 밤이 일어난지 꼭 1년만에 일어난 일이라서 스페인 진영에는 불길함이 퍼졌다. 설상가상으로 막사에 돌아온 스페인 병사들 사이에서 적의 카누들이 후방을 습격해 브리간틴 함대가 전멸했다는 소문이 퍼졌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동맹군의 카누와 브리간틴 함대가 적의 공격으로 큰 위기에 처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브리간틴 한 척이 침몰 직전까지 갔으며 선장 후안 포트리요가 사망하고 사무장 페드로 바르바가 큰 부상을 입었다. 그날 내내, 그리고 그 다음날 밤까지 아즈텍인들은 북을 두드리며 승리를 축하했다. 그 소리가 매우 커서 코르테스는 마치 세상의 종말이 다가오는 것같았다고 평했다. 아즈텍인들은 도로와 다리를 다시 파괴하고 코르테스의 막사에서 석궁 사거리 두배 거리까지 접근하여 불을 피우고 보초를 배치하는 대담한 행동을 보였다.

사실 이 참담한 결과를 낳은 공격에 대해서도, 코르테스는 주변 인물들의 강요로 싸우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베르날 디아스는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코르테스가 평소에 결정을 내리기 전에 중대장들의 의견을 많이 구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시장 공격에 대해서는 자기 자신이 제일 먼저 제시했단 것이다. 그리고 베르날 디아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 공격이 슬픔의 밤의 재림이 될 것이라고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코르테스는 6월 30일 공격을 강행했다는 것이다. 만약 베르날 디아스의 기술이 맞다면, 코르테스는 모든 책임을 주변에 전가하는 매우 교활한 행각을 보인 것이다.

곤짱이또? 트롤열전

https://namu.wiki/topic/77090

#1 111.118.53.25

500년 조선의 심장 타령 하시는 분들은 대체 공화국의 신민인지, 아직도 봉건국가의 신민인지 모르겠네요. 아시다시피 종묘, 4대문, 5대궁은 봉건 시대의 압제 계급들이 그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민중을 착취해서 세운 흉물입니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그 잔재를 청산해야함에도, 중국과는 달리, 우리는 여러모로 미진하여 아직까지도 그것들이 서울에 버젓이 존재해있고 유교 성리학은 여전히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남아있게 된 거죠... 제발 이씨 조선이라는 더러운 과거의 굴레와 이별을 고하셨으면 합니다.


종북이또 트롤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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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엑따

왕씨를 위해 조선왕조의 심장 숭례문을 태워야 한다. 트롤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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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런 병신 왜 이리 많냐.

군벌통치가 중국경제에 미친 영향 중국 근현대사

군벌은 대체적으로 1개 혹은 몇개의 성을 지배하면서 그 지역의 민정을 담당했는데, 군벌은 백성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그 수입을 군대의 양성에 사용했으며 대부분 군비로 이용했다. 일반적으로 군벌들이 취한 재원 확보조치는 군표와 지폐 등의 화폐를 발행하거나 각종 세금을 강제로 부과하는 등 다양했으며 심지어 교통요지에 임의로 관문을 설치하여 일종의 통과세를 부과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군대가 통과하는 지역에서 일반 백성들의 가축, 의복, 식량 등의 물자를 강제로 조달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군벌들의 재원 확충 노력은 많은 세금과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기업 혹은 상공인 등의 자본가 계급을 보호 내지 옹호하면서 이들과 결탁하는 형태로 이어졌으며, 반면에 일반 백성들은 군벌에 의한 과중한 세금부담으로 인한 착취와 압박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북양정부 시기 재정적자 원인과 군벌통치에 미친 영향, 성시일
93페이지.

관련 사례들

1. 1924년 광서군벌들은 담보없는 지폐 50억원을 강제 유통시키고 대량의 세금을 착취.

2. 1933년 쓰촨 군벌들은 일부 지역에서 1968년까지의 세금을 예징.

3. 일부 군벌들은 아편 재배를 강요.

결과적으로 경작면적이 줄어들고 농민의 생산능력이 황폐화.

운송은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였고 그나마 철도는 내전으로 대부분 파괴되었다. 많은 차량들은 군수용으로 징용되었다. 도시로 수송하지 못한 농산품은 밭에서 썩어갈 수밖에 없다. 농촌에서부터 주요시장으로 운송되는 주요 농산물은 면, 밀, 땅콩 등인데 도시로의 공급은 감소되었고 생산기업의 설비는 2분의 1, 심지어는 3분의 1만 가동되었다. 

군벌들의 부도덕한 화폐정책은 계속적으로 화폐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렸고 인민을 빈곤으로 내몰았다. 공상업 부문이 입는 피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군벌 통치지역마다 각자 발행한 신뢰가 거의 없는 화폐는 지역 간 상품교역에 장애가 되었다. 그 예로 동북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신뢰에 봉표를 사용했지만 동북과 상하이 간 거래에는 금괴나 신뢰도가 높은 외환을 사용해야 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세원을 확보하기 위한 각종 정책이 투자환경을 악화시켰단 것이다. 재산권이 보장되지 않아 모험심이 강한 투자자들도 투자를 꺼리게 되었다. 중국 민족공업은 군벌들의 희생물이 되어갔다. 공업 자본가들은 군벌의 약탈에서 살아남는다 해도 여전히 혼란한 화폐제도가 그들을 괴롭혔다. 중국에서 장기적인 투자를 통해 공업을 발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북양정부 시기 재정적자 원인과 군벌통치에 미친 영향, 성시일
93~94페이지.

그러니까, 내전질 때문에 운송이 퇴갤해서 생산을 해도 공급이 안되고 공장들이 작동을 못하고 화폐가 병신되서 국내 교역도 망가지고 투자자들이 회피를 하는 암울한 상황.

중국인들의 심정:
농업이 무너지고! 공업이 무너지고! 투자가 황폐화되는! 이러한 현실 속에!


다음엔 봉천군벌의 재정 파탄에 대해 써야 할듯.

북양정부의 빚내기 놀이 중국 근현대사

위안스카이가 집권한 1912년부터 1916년까지 중앙과 지방은 총 68회에 걸쳐 5만 5646여 만량에 달하는 외채를 조달하였다. 50회의 외채는 주로 군비지출에 사용되었고 그밖에 철도, 전신 건설 등에도 사용되었다. 1912년에서 1927년으로 시기를 확대해보면 외채를 468회 빌렸고, 총대출금은 13억 4800만 원에 달했다.(청나라는 208회, 국민정부는 108회) 대부분은 국내 전쟁의 군비로 쓰였는데 일부분은 전쟁의 배상금로 바뀌었다. 이 때문에 국가의 주권을 담보로 돈을 빌렸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 당시 중국의 외채 규모는 사실상 청 정부를 넘어선 것이다. 이 시기에는 주로 일본에서 돈을 조달하였는데 총 부채의 70% 이상을 차지하였다. 이 부채를 통해 제국주의 열강은 중국의 관세를 장악하게 되었고 엄격한 대출조건을 통해 북양정부에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중국에 대한 유럽 열강의 관심과 여력이 줄어들면서 북양정부에 대한 차관도 줄었다. 북양정부가 외채를 통한 자금조달을 의도대로 하지 못하게 되면서 대량의 국채를 발행하게 된다. 1912-1926년간 재정부는 27종의 국내 채권을 발행했다. 그 채권규모는 6억 1400만원에 달했다. 채권은 할인되어 유통되었는데 가장 낮게는 20%까지 할인되어 정부의 실제 수입이 발행액보다 적은 상황도 나타났다.

북양정부의 재정적자 원인과 군벌통치에 미친 영향, 성시일, 영남대학교 중국연구센터
중국과 중국학 25집, 86~87페이지


3줄 요약

1. 북양군벌은 468회에 걸쳐 13억 4800만원의 빚내기를 함. 그 이유는 전쟁놀음 때문.

2. 그게 안 먹히니까 국채로 6억 1400만원 빚내기를 함.

3. 그 똥은 국민정부가 치움. -ㅅ-

코르테스의 복수 (37) 포로가 된 코르테스 코르테스 정복기

엄청난 숫자의 아군이 달려오는 모습을 본 코르테스는 경악하였다. 그 상태로 그들이 밀려오면 재난이 초래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코르테스는 병사들에게 "멈춰! 멈춰!"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하지만 병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둑길의 갈라진 틈으로 몸을 던졌고 순식간에 갈라진 틈엔 스페인 병사들과 인디오 동맹군들로 가득해졌다. 이때 아즈텍인들이 맹렬히 공격해왔고 스페인인들을 죽이기 위해서 물속으로 뛰어들어 허우적대는 스페인인들을 공격했다. 카누들이 몰려와 여러 스페인 병사들을 생포했다. 코르테스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이때 코르테스는 자신이 취할 수 있던 최선의 행동은 "빠져 죽어가는 비참한 상태의 에스파냐인"들을 구하는 것 뿐이었다고 했다. 이때 여러 스페인 병사들이 누구는 익사 직전의, 누구는 부상을 당한 상태의, 누구는 무기를 잃어버린 상태에 놓여서 무방비 그 자체였다.

하지만 스페인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든 코르테스도 순식간에 위기에 빠졌다. 수많은 적들이 몰려왔고 코르테스는 12~15명의 병사들과 함께 포위되었다. 코르테스는 허우적대는 스페인 병사들을 구하는데 정신이 팔려서 적들이 접근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인디오들이 코르테스를 생포하기 위해 달려들었고 코르테스가 신전에 끌려가 제물로 바쳐지기 일보 직전에 이르렀다. 이때 항상 코르테스를 수행하던 젊은 중대장이 50명의 병력을 이끌고 코르테스를 구하기 위해 달려왔고 그 덕분에 코르테스는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때 코르테스를 구한 중대장은 크리스토발 데 올레아란 젊은 중대장으로, 전에도 코르테스를 한번 구한 적이 있었다. 올레아의 병사들 중에서는 레르마란 병사의 공이 매우 혁혁했다. 이 병사는 코르테스를 구하는 과정에서 중상을 입기도 했으나 정작 코르테스는 보고서에서 그의 이름을 적지 않았다.

한편 겨우 목숨을 구한 스페인 병사들은 도로를 따라 정신없는 퇴각길에 올랐다. 도로가 폭이 좁고 물의 높이와 거의 낮을 정도로 낮았기 때문에, 도로는 순식간에 엄청난 숫자의 스페인 병사들과 인디오 동맹군으로 가득해져서 발을 디딜 수도 없게 되었다. 코르테스는 보고서에서 아즈텍인들을 미친개라고 욕하면서 도로를 이렇게 만든 자들이 바로 그들이라고 저주했다. 이런 상황에서 양쪽 물가에서 카누들이 몰려와 병사들을 닥치는대로 죽이거나 생포했고 안토니오 데 키뇨네스란 중대장이 코르테스에게 코르테스만이라도 탈출해야 한다고 간청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코르테스는 이 제안을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자 키뇨네스는 코르테스의 팔을 잡고 억지로 그를 탈출시키기 시작했고 결국 코르테스도 그와 그의 병사들의 강요에 칼과 방패로 아즈텍의 공격에 맞서 싸우면서 퇴각하기 시작했다.

아즈텍인들은 악착같이 그들을 추격했고 코르테스 일행중 일부가 부상을 입기도 했다. 이때 코르테스의 하인 한명이 말을 타고 나타나 적들을 공격해 공간을 텄다. 하지만 그도 지붕 위에서 쏟아지는 공격에 부상을 입고 퇴각해야 했다. 잠시 후 또 다른 하인이 말을 타고 나타나 코르테스에게 말을 타고 달아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길은 병사들의 발에 짓밟혀 진흙투성이었으며 도망가려는 사람들로 가득하여 정신없었다. 코르테스는 말에 탔지만 적과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달아나기 위해서였다. 길의 상황이 너무도 개판이라 후방에 남긴 8명의 기병도 전혀 쓸모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달아나는 것도 너무도 힘들어서 암말 두필이 둑길에서 호수로 굴러떨어져 한마리는 인디오들에게 죽고 한마리만 보병들이 구출할 수 있었다. 이때 코르테스의 하인 크리스토발 데 구스만이 코르테스를 구하려고 말을 타고 달려오다가 포로로 잡혀 코르테스를 슬프게 했다. 구스만은 18일 후에 제물로 바쳐졌다.

코르테스는 죽기 살기로 겨우 타쿠바에 이르는 둑길에 도착했고 그 둑길은 길이 넒어 퇴각이 용이했다. 코르테스는 부하들을 집결시키고 9명의 기병과 함께 방어를 맡았다. 아즈텍인들은 승리에 고무되어 너무도 자신감이 넘쳤던지라 스페인인들 중 누구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코르테스는 알데레테에게 대오를 갖추어 광장으로 퇴각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알바라도와 산도발에게도 퇴각명령을 내렸다. 코르테스와 달리 알바라도와 산도발은 매우 순조롭게 싸워서 여러 다리와 바리케이드를 점령했고 도로 보수를 끝내서 피해없이 퇴각할 수 있었다. 알데레테가 퇴각을 시작하자 인디오들이 몰려와 생포되었던 스페인 병사들의 목을 잘라 던져주었다.

병사들이 광장에 집결한 후에도 아즈텍의 공격은 거셌다. 아즈텍 병사들이 너무도 많아 모든 병사들이 힘을 합쳐도 가까스로 저지할 판이었고 코르테스가 차마 상상하지도 못했던 지점까지도 퇴각해야했다. 승리에 고무된 아즈텍인들은 피라미드에서 서인도 제도 특산 몰약인 '아니메'로 향을 피우는 것을 보았고 분노한 코르테스는 이것을 중단시키고 싶었으나 모든 병사들이 달아나기에 정신이 없던 터라서 그렇지 못하였다. 이 싸움에서 35~40명의 스페인 병사들과 1천명 이상의 인디오 동맹군이 전사했으며 20명의 스페인 부상자가 발생했고 코르테스도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또 1문의 소형 야포와 여러 화승총, 석궁, 여러 무기들을 잃었다.

베르날 디아스는 스페인 전사가 70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세르반테스 데 살라사르는 45명이라고 쓰고 있다. 고마라는 40명의 스페인 병사들과 2천명의 동맹군이, 사아군은 53명의 스페인 병사들과 여러 동맹군이 희생당했다고 쓰고 있는데 브리간틴에서 싸우다 전사한 선원들의 수는 집계되지 않은 것이다.











심심해서 해보는 제목낚시^^

북양정부의 재정상황 중국 근현대사

연도/세입/세출/수지
1913/41267/48787/-7520
1914/25474/22926/+2548
1915/13067/13904/-847(원문은 -2547로 적혀있던데 오타인듯 하여 수정)
1916/31578/31517/+61
1919/49042/49576/-534
1925/46164/63436/-17272

북양정부 군대 규모
1914/45만 7천
1918/85만
1919/138만
1923/160만

군비지출
1916/1억 4200만원
1918/2억원
1925/6억원
1927/7억원
1928/8억원
(청조는 1억 2천만 이상 쓴 적 없음)

군비지출 비중
1913/26.9%
1917/31.17%
1919/43.8%
1925/46.9%

여기에 외채상황까지 합치면 최대 73.7%.

채무비용 비중
연도/채무비 지출/비중
1913/3억/46%
1914/9800만/28%
1915/1억 3700만/29%
1919/1억 2800만/26%
1925/1억 6600만/32%

왜 이 꼴나느냐? 내전+돌려막기 외채 도입(청나라와 군벌 모두)+중앙 세수 감소

청나라와 북양군벌이 싼 똥은 장제스가 치워주다가 일본이 다 엎어버렸다더라...

출처
북양정부 시기 재정적자 원인과 군벌통치에 미친 영향, 성시일, 영남대학교 중국연구센터
중국과 중국학 25집.


제국주의의 침투는 중국 경제를 낙후시켰는가? 중국 근현대사

근대화론자들에 따르면, 서구의 제국주의 침략은 경제적인 차원에서만 고려해볼 때 시기적으로나 지역적으로 제한된 것이었기 때문에 중국경제의 위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즉 중국에 대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제적인 침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895년의 청일전쟁 이후이며 이때에도 서구의 경제적 영향은 개항도시와 양자강 유역지방, 그리고 일부 해안 지방에 국한되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서구의 영향으로 근대화가 상당히 진척된 1930년대에도 근대적인 산업부분이 국민총생산량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4.3%에 불과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서구의 영향 특히 경제적 영향으로 중국경제의 위기가 초래되었다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라는 것이다.

또한 근대화론자들은 외국상품의 유입으로 말미암아 중국의 전통적 수공업이 파산하고 중국경제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일부지방에서 서구의 면방직공업제품의 수입으로 말미암아 전통적인 수공업이 도산하는 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지방에서는 근대적인 산업과 관련된 새로운 수공업과, 연관 업종이 발전함으로써 중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잉여수탈이란 측면에서 중국으로부터의 자본유출은 그렇게 심각한 정도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재투자를 통해 중국의 근대산업 발전에 기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체로 근대화론자들은 서구의 역할이란 전체적으로 보아 제한적인 것이었으며 중국의 전통적 경제질서가 빠져 있었던 고도의 평형함정을 파괴함으로써 오히려 중국경제의 근대화를 촉진하는데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아카데미
38페이지.

3줄 요약

1. 서구 자본 침투는 시기적, 지역적으로 제한적이며 중국 전체에 큰 영향을 못 미침.

2. 일부 전통산업의 도산도 있으나 오히려 근대산업에 연관된 새 산업의 발전이 있었으며 자본유출만 있는게 아니라 재투자를 통한 자본유입도 있었음.

3. 이러한 면을 종합할 시에 서구와의 접촉은 오히려 중국경제 발전에 도움이 됨.

이에 대한 맑스주의적 비판도 있긴 한데 자본주의 맹아의 기회를 잃게했단 식의 주장을 본인은 동조하지 못함으로 실을까 고민하다가 그냥 뺌.

중화민국 시기 중국 농촌 상황 (1) 서론 중국 근현대사

1. 들어가며

안녕하십니까. 전에 예고했던 중국 현대사 집필 계획의 3번안이었던, 공산화 이전 중국 농촌 상황 프로젝트가 드디어 시작되었습니다. 왜 3번이 먼저이냐? 제일 먼저 생각해두었던 프로젝트이기도 하고 필요한 참고문헌 중에서 그나마 가장 많은 수의 정보에 접근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어떻게 써야 되겠다 전혀 계획 없이 쓰고 있으며 쓰는 사람이 저같은 무식한 좆문가이기 때문에, 내용은 매우 형편없고 편향적이며 두서없을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양해바랍니다. 전에 썼던 중공 토지개혁사처럼 프로토타입의 일환으로 쓰기 때문에, 나중에 지금보다는 더 쓸모있는 인간이 되어서 지금보다는 여유가 있을 때에 업그레이드 버전을 내놓을 것입니다. 서론은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2.
중화민국 시기까지만 해도 중국은 농업국가였고, 전국민의 80%가 농촌에 거주하는 농민이었습니다. 청말~민국초의 중국 경제왜곡의 결정적 요인이 제국주의 열강의 경제적 침투에 있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 중화민국의 1930년대 국민총생산량의 근대적 산업부분은 14.3%밖에 지나지 않는단 점에서 제국주의 열강의 경제적 침투의 규모에 대한 회의였을 정도니 말 다했습니다.

2.1 전통사회의 위기

전통적으로, 공산화 이전 중국 농촌은 참담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따라서 공산당은 농촌을 바탕으로 혁명을 하여 정권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한 것으로 인식됩니다. 마오쩌둥은 집권 이후에 인민민주전정론이란, 중국 공산당 창당 28주년 기념 논문을 내놓아서 중국 공산당의 승리 원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1. 아편전쟁 패배 이후 선진적 중국인들은 서방국가로부터 진리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제국주의 때문에 서구로부터 학습한 것은 실현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신해혁명 등이 실패하면서 중국은 더욱 고통받게 되었다.

2. 1차 대전 발발 이후 소련이 등장함에 따라 중국인들은 새 사상과 생활에 직면했다. 중국인들은 맑스-레닌주의를 접하여 중국 문제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3. 공산당은 창당 이후 쑨원과 협력해 혁명을 하려 했는데 장제스의 배신으로 중국이 절망에 빠진 것이다. 하지만 공산당이 일본도 물리쳐주고 반동 장제스도 타도해줌으로 중국혁명이 승리한 것이다.

4. 위의 전개를 종합해볼때 서구 부르주아 문명과 부르주아민주주의는 모두 중국에 적합하지 않으니 인민민주주의와 인민공화국이 필요한 것이다. 오로지 중국 공산당과 공산당이 영도하는 노동자, 농민들이 신중국을 건설할 수 있다.

즉 중국은 위기에 처했는데 공산당이 잘나서 위기를 극복해줘서 승리했단 소리가 되겠습니다. 여기서 좀 더 뒤로 돌아가서 그 '참담한 농촌'이란 것 말인데요, 이것은 바로 청말, 민국초에 중국이 직면했던 '혁명적 위기 상황'의 일부라고 하겠습니다. 맑스주의자들은 중국의 전통사회의 위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1. 주나라~19세기까지 3천년은 봉건사회다. 

2. 중국 전통사회는 소농경제를 바탕으로 한 지주경제+중앙집권 정치체제를 유지하는 특징이 있다.

3. 즉 중국 전통사회는 지주-향신-관료들이 농민-수공업자를 착취하는 양분된 계급사회다. 지배계급의 수탈과 착취로 전통사회는 발전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서 중국 공산당은 이러한 논리를 수정, 자본주의 맹아론을 주장했습니다. 송, 명, 청 시대에 공장제 수공업과 상품경제가 발전하였고 외국자본주의의 영향이 없었으면 알아서 자본주의 사회가 될 수 있었을 것이란 것입니다. 마오쩌둥도 1939년 논문 <중국혁명과 중국공산당>에서 자본주의 맹아론을 긍정했고 이후 중국 공산당은 자본주의 맹아론을 공식 견해로 채택했습니다. 여기서 중국이 왜 자본주의를 만개시키지 못했느냐? 중국 공산당은 그게 다 지주들의 수탈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계급혁명을 해야 한다는 논리는 덤입니다.

이러한 맑스주의자들의 주장은, 너무 구닥다리 이론이라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만, 청말의 농촌 사회가 큰 위기에 처해있었단 점은 긍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 관해서 서진영 교수는 <중국혁명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19세기의 중국경제는, 특히 농촌경제는 새로운 과학기술이나 자본의 집중적인 투자가 이루어지거나 또는 농촌 경제구조의 근본적인 변혁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벗어날 수 없는 '고도의 평형함정'에 빠져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절대 경작면적의 부족에서 파생되는 냉혹한 '맬더스적 악순환'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었다."

맬서스 트랩+부재지주의 증가를 비롯한 토지소유 불균형+축적된 부의 비생산적 분야로의 유출 등이 중국 농촌사회의 불안정으로 귀결되었다는 설명입니다. 일단 기존의 설명이긴 한데 청말 중국 농촌 위기에 관해서 이보다 더 진전된 논의에 관한 정보는 얻지 못하였기에 일단은 이를 배이스로 삼아서 계속 논의를 진전시키겠습니다. 여기에 확실하게 추가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아편전쟁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과의 충돌에서 청나라는 박살났고 결국 자체적 개혁에 실패하여 1912년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었고 그 뒤를 이은 위안스카이가 중화제국 선포라는 무리수를 수습하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중국이 군웅할거의 난세에 돌입,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중앙권력이 부재하게 되었단 것입니다.

2.2 중국농촌 상황에 대한 심화 -토지 분배의 문제-

위의 논의 중, 토지 소유의 불균등에 관한 것에 대한 문제가 이 글을 쓰게 된 시초나 다름없으니 이에 관해서 논의하겠습니다. 기존의 시각은, 농촌인구에 3%에 달하는 향신, 지주 계급이 불균등하게 토지를 소유하고 빈부격차가 심했으며 이것이 혁명의 위기를 제공했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관해, 청말 시기는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어서 언급하지 않겠으며 중화민국 시기만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오쩌둥의 흥국현 조사에 따르면 1%에 불과한 지주들이 전체 토지의 40%를, 5%에 불과한 부농이 30%의 토지를 차지하고 있으며 20%의 중농이 15%를 차지하고 60%에 달하는 빈농이 5%의 토지를 보유한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마오쩌둥의 조사가 객관적이었는가? 하는 비판과 더불어 각 지방마다 형편이 달랐단 지적이 있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중국 농촌 사회의 심각한 계급적 갈등을 기본 전제로 깔고 들어갔습니다. 따라서 중국 농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토지개혁만이 근본적 해결책이란 것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생각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집필 방향 연구를 위해 일단 여기서 끊고 다음편은 농촌 계급문제에 대한 반박, 보충, 국민당의 농업정책의 방식과 그 비판, 재평가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누누이 말하지만, 이건 프로토타입입니다.

코르테스의 복수 (36) 틀라텔롤코 시장 전투 코르테스 정복기

이후에도 수차례 전투가 벌어졌고 그때마다 스페인 병사들과 동맹군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코르테스는 더 이상 깊숙히 전진하지 않았는데 이는 아즈텍이 저항을 멈추고 강화를 요청해올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다른 참모들은 지난 20여일간 싸워온 여세를 몰아 시장을 점령해야 한다고 코르테스를 독촉했다. 만약 시장이 점령된다면 인디오들은 최후의 방어 구조물을 잃게 되며 호수의 짠물을 빼면, 어떠한 먹을 것도 마실 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코르테스는 계속 거부했으나 재정관 훌리안 데 알데레테까지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니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고 하자 마지막으로 한번 더 거절한 다음에 진격을 결정한 것은 당신들 때문이라고 못박은 다음에 그 다음날부터 중대장들과의 회의에 들어갔다. 

이후 코르테스는 알바라도와 산도발에게 시장을 탈취하기로 했다고 알리고 그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해 자세한 내용의 서신을 작성했다. 서신 내용엔 산도발이 10명의 기병만 막사에 남기고 나머지 10명의 기병과 100명의 보병, 15명의 석궁병과 화승총병을 거느려 알바라도의 막사에 간 다음에 몇채의 가옥에 매복을 한 후 마치 철수하는 것처럼 꾸민 다음에 적들이 추격하면 습격하란 것이었다. 또한 산도발의 배 3척과 알바라도의 배 3척을 합쳐 알바라도가 참패했던 위험한 틈새를 탈취하고 메운 다음에 다리를 잘 보수하라고 했다. 코르테스의 하인 두명이 서신을 전달했으며 산도발과 알바라도에게 계획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들은 한 지점에서 싸우지만 코르테스는 여러 지점에서 싸워야 한다면서 7,80명의 보병을 코르테스에게 보내란 코르테스의 지시를 전달했다. 보병들은 코르테스의 하인들과 함께 코르테스의 막사에 배치되었다. 코르테스는 다음날인 6월 30일 일요일에 공격하기로 하였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자 코르테스는 미사를 마치고 7척의 브리간틴 선과 3천 척 이상의 동맹군 카누, 25명의 기병과 보병 전원, 그리고 타쿠바에서 온 70명의 보병을 거느리고 도시에 배치했다. 코르테스는 알데레테에게 1만 5천~2만의 동맹군 병력과 70명의 보병을 주어 가장 큰 길로 진격하게 했고 7~8명의 병력이 후방수비를 맡게 했다. 그리고 갈라진 틈을 메우기 위해 여러 병사들에게 곡괭이를 지급했다. 그리고 중간 넓이의 길에는 두명의 중대장에게 80명의 보병과 1만명의 동맹군을 주어 진격하게 했고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8명의 기병과 2문의 대포를 배치했다. 코르테스 자신은 8명의 기병과 25명의 석궁병과 화승총병을 포함한 100명의 보병, 그리고 다수의 동맹군을 거느려 가장 폭이 좁은 길로 진격했다. 코르테스는 적습을 우려해 매우 신중히 전진했고 한 지점에서는 기병들을 멈추게 하여 천천히 가게 했다.

코르테스는 야포와 석궁, 화승총의 힘으로 손쉽게 첫 바리케이드를 점령했고 깊이 시내로 들어갔다. 코르테스의 병력 수가 엄청나서 아무도 코르테스를 당해낼 수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코르테스가 20명의 병력을 이끌고 작은 섬에 머무르고 있을 때, 동맹군들이 보호를 받지 않는 상태에서 길을 따라 올라갔다. 이는 둑길을 장악하기 위한 전투를 돕기 위해서였다. 이 때문에 코르테스는 적이 스페인군대의 후방을 습격하지 못하는데에 많은 신경을 할애해야 했다. 이때 시장에서 가까운 지역까지 진출했단 보고가 들어왔고 산도발과 알바라도의 병사들의 함성이 들린다면서 독촉하는 요구들이 들어왔다. 코르테스는 퇴각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서 다리를 완전히 메워야 한다고 했지만 그들은 다리가 이미 잘 보수되었다면서 믿을 수 없으면 직접 보라고 했다. 이에 코르테스는 직접 가서 확인했는데 병사들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갈대나 나뭇가지로 매우 대충 메워져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많은 수의 스페인 병사들과 동맹군이 허둥지둥 달려오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리고 마치 사냥개와도 같은 적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사드 경제 피해 관련해서 나대던 다중이 중빠 나가리 트롤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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ㄲ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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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 사드 배치의 찬성란의 중국 경제제제 비현실성 문단 부분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찬반론)lifego
#269 사드 배치의 찬성란의 중국 경제제제 비현실성 문단 부분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찬반론)lifego
#265 사드 배치의 찬성란의 중국 경제제제 비현실성 문단 부분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찬반론)lifego
#263 사드 배치의 찬성란의 중국 경제제제 비현실성 문단 부분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찬반론)lifego
#259 사드 배치의 찬성란의 중국 경제제제 비현실성 문단 부분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찬반론)lifego
#252 사드 배치의 찬성란의 중국 경제제제 비현실성 문단 부분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찬반론)lifego
#246 사드 배치의 찬성란의 중국 경제제제 비현실성 문단 부분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찬반론)lifego
#240 사드 배치의 찬성란의 중국 경제제제 비현실성 문단 부분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찬반론)lifego
#237 사드 배치의 찬성란의 중국 경제제제 비현실성 문단 부분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찬반론)lifego
#234 사드 배치의 찬성란의 중국 경제제제 비현실성 문단 부분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찬반론)lifego
#233 사드 배치의 찬성란의 중국 경제제제 비현실성 문단 부분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찬반론)lifego
#229 사드 배치의 찬성란의 중국 경제제제 비현실성 문단 부분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찬반론)lifego
#226 사드 배치의 찬성란의 중국 경제제제 비현실성 문단 부분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찬반론)lifego
#223 사드 배치의 찬성란의 중국 경제제제 비현실성 문단 부분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찬반론)lifego
#219 사드 배치의 찬성란의 중국 경제제제 비현실성 문단 부분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찬반론)lif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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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사드 배치의 찬성란의 중국 경제제제 비현실성 문단 부분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찬반론)lif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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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사드 배치의 찬성란의 중국 경제제제 비현실성 문단 부분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찬반론)lifego
#52 사드 배치의 찬성란의 중국 경제제제 비현실성 문단 부분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찬반론)lifego
#50 사드 배치의 찬성란의 중국 경제제제 비현실성 문단 부분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찬반론)lifego
#28 "박정희/평가"에 1964년 산재보험, 1977년 국민건강보험의 내용을 추가 부탁합니다. (박정희/평가)lifego
#26 "박정희/평가"에 1964년 산재보험, 1977년 국민건강보험의 내용을 추가 부탁합니다. (박정희/평가)lifego
#48 사드 배치의 찬성란의 중국 경제제제 비현실성 문단 부분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찬반론)lifego
#82 토론으로 해결하시죠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찬반론)lifego
#76 토론으로 해결하시죠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찬반론)lifego
#71 토론으로 해결하시죠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찬반론)lifego
#431 특정 대통령에 주석과 이름에 줄을 긋는 것을 토론했으면 합니다. (틀:역대 대한민국 대통령)lifego
#426 특정 대통령에 주석과 이름에 줄을 긋는 것을 토론했으면 합니다. (틀:역대 대한민국 대통령)lifego
#208 특정 대통령에 주석과 이름에 줄을 긋는 것을 토론했으면 합니다. (틀:역대 대한민국 대통령)lifego
#205 특정 대통령에 주석과 이름에 줄을 긋는 것을 토론했으면 합니다. (틀:역대 대한민국 대통령)lifego
#87 이들을 폭도로 분류해야 하는게 아닙니까? (박근혜 탄핵 반대 집회)lifego
#78 이들을 폭도로 분류해야 하는게 아닙니까? (박근혜 탄핵 반대 집회)

코르테스의 복수 (35) 알바라도의 패배 코르테스 정복기

다음날, 코르테스는 같은 방법으로 공격했다. 어제 진격한 지점까지 도달하는데 아무 저항이 없어 코르테스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큰 승리를 허락하시었다고 생각했다. 적들은 계속 퇴각했고 코르테스와 알바라도는 도시 깊숙히 진격하여 테노치티틀란의 75%를 점령했다. 코르테스는 이제 테노치티틀란이 항복해올 것이라 기대했지만 테노치티틀란의 강화 요청은 없었다. 이 때문에 코르테스는 약간 슬픈 마음이 들었으나 곧 승리에 대한 즐거움으로 가득해진 상태로 막사로 돌아왔다.

이후 며칠간 알바라도는 여러 다리를 점령하고 그곳에 보병과 기병으로 이루어진 수비대를 남긴 후, 자신은 막사로 돌아오는 전법을 계속 구가했다. 그런데 알바라도는 이것을 매우 귀찮게 여겨, 자신의 막사를 테노치티틀란의 시장으로 통하는 둑길 끝으로 옮길 생각을 하였다. 이를 위해선 다리 2,3개만 더 점령하면 됐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다리가 파괴된 자리의 운하들을 통과하여야 했기 때문에 매우 위험했다. 허나 알바라도는 지금껏 자신이 거둔 승리와 코르테스의 승리, 그리고 약해진 적을 보고 고무되어 적들을 얕잡아보고 다리들을 탈취할 생각을 하였다. 그 다리들은 길이가 70보나 되고 수심이 8~9피트나 되었다.

그날 바로 알바라도가 공격을 개시했고 알바라도의 병력은 브리간틴의 도움을 받아 물을 건너고 다리를 점령했으며 도망가는 적들을 추격했다. 알바라도는 말을 건너게 하기 위해 재빨리 운하를 돌과 벽돌로 메우게 했다. 이는 코르테스가 기병 없이 한치의 땅을 확보하지 말라고 내린 지시를 이행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테노치티틀란의 전사들은 알바라도의 병력들이 대부분 운하를 메우고 있으며, 자신들 쪽엔 고작 40~50의 스페인 병사들과 약간의 인디오 동맹군만 있으며 그중엔 기병이 없다는 걸 알고 기습을 감행했다. 3~4명의 스페인 병사들이 포로로 잡혀 제물로 바쳐졌고 여러 인디오 동맹군이 죽었다. 알바라도는 가까스로 자신의 막사로 달아났다. 코르테스는 이 사건이 아즈텍인들의 사기를 크게 높혀주었을 것이라고 비통해했다. 코르테스는 알바라도의 성급한 공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제 사견이기는 하지만, (공격을 한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그(알바라도)가 그 전에 적군에 대해 대승을 거둔 적이 있고, 그로 인해 적의 사기가 상당히 떵러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그런 결정을 한 것은 그의 부하들이 시내에 있는 시장을 점령하면 거의 모든 인디오 병력이 거기에 집결해 있고, 적군의 모든 희망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시 전체를 점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면서 그를 꼬드겼기 때문입니다. 알바라도의 부하들은 제가 계속해서 인디오들에 대한 승리를 거두는 것ㅇ르 보고 자신들보다 제가 먼저 시장을 절명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고, 그리고 그들이 우리보다 더 시장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으므로 자기들이 먼저 그곳을 점령함으로써 그 영예를 자신들이 차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페드로 데 알바라도의 부하들은 자기네 대장을 끈질기게 설득하고 재촉해서 그로 하여금 그런 결정을 내리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코르테스는 이렇게 평가하면서 사실 같은 상황이 자신의 막사에서도 벌어졌음을 인정했다. 코르테스의 부하들은 비슷한 논리를 내세우며 코르테스에게 시장의 점령을 독촉하고 있었던 것이다. 코르테스는 이에 관해 여러가지 설명을 했는데, 이는 모두 거짓변명으로 실제로는 코르테스가 시장을 점령하는 무모한 작전으로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코르테스는 알바라도에 대한 책임추궁도 할 겸, 그가 무엇을 얻었는지, 그리고 그가 자신의 막사를 어디로 옮겼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그리고 방어계획과 공격계획에 대한 충고를 하기 위해 알바라도의 막사를 찾아갔다. 그 과정에서 코르테스는 그가 탈취한 위험한 다리와 통로들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코르테스는 그를 '마땅히 야단쳐야 했으나' 그러지 않고 어떻게 해야 할지만 논의하고 막사로 돌아왔다.

코르테스의 복수 (34) 호수도시들이 복종해오다 코르테스 정복기

3번째 공격에서도 코르테스는 여러 주요 지점을 장악하고 다시 집들을 불태운 후 다시 철수해야 했다. 그럼 아즈텍인들은 어김없이 쫓아오다 기병 돌격에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만 했고 그럼에도 스페인 군대가 도시를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악착같이 추격해왔다. 막사에 돌아온 코르테스는 알바라도에게서 두세개의 다리를 점령했으며 그가 테노치티틀란 시장에서 타쿠바로 향하는 둑길 위에 있다는 보고를 들었다. 알바라도는 브리간틴의 호위 덕분에 전보다 훨씬 덜 위험한 상태임을 알려왔다. 알바라도가 공격하는 쪽은 다리도 많고 갈라진 틈도 더 많았으나 옥상이 적어 아즈텍이 방어하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코르테스의 공격에 대단한 힘을 실어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시기까지 이스타팔라파, 우칠루부스코, 멕시칼싱고, 미스케케, 쿠이타과카 등의 여러 호수도시들은 코르테스를 확실히 적대하지도 않았으나 그러나 분명한 호의를 보이지도 않고 있었다. 그런데 코르테스에게 충성하는 칼코의 주민들이 코르테스에게 충성하지 않는 여러 도시에 대한 공격을 가하자 이 도시들은 코르테스와 테노치티틀란의 싸움에서 명백히 코르테스가 승기를 보이고 있다고 판단, 지금까지 입은 피해와 앞으로 입을 피해를 고려하여 코르테스에게 복종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사절단을 보내 지금까지 보인 어정쩡한 태도에 용서를 구하며 칼코와 그 동맹으로부터 보호해줄 것을 요청했다. 코르테스는 그들을 환영하며 자신은 테노치티틀란의 주민을 빼면 누구에게도 노여움이 없다고 하였고 자신이 테노치티틀란이 항복할때까지 공격할 것이며 자신에게 우정의 표시로 많은 카누와 전사들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막사를 짓기 위한 목재와 석재를 요청했다. 코르테스는 조만간 비가 올 것임을 알았고 비가 오면 기병들의 활동에 애로사항이 꽃피기 때문에 전쟁을 끝내는 것을 매우 서두르고 있었다.

그러자 도시의 대표들은 이미 자신들이 병력과 함대를 대기시키고 있다고 대답했으며 매우 열성적으로 코르테스의 막사를 지었는데 그들이 어찌나 열심히 일했는지 순식간에 석궁 사거리의 3~4배에 달하는 거리를 메울 정도의 집이 지어졌다. 이 막사에는 스페인 병력과 더불어 그들에게 봉사하는 인디오 2천명 이상이 거주했다. 그외 다른 병력은 쿠요아칸에 있었다. 또한 새로 복종해온 도시들은 병사들을 먹이기 위한 많은 양의 물고기와 체리를 제공했다. 테노치티틀란에 이들 도시들이 제공하던 식량과 식수의 공급이 중단되어 테노치티틀란에 치명타를 가한 것은 덤이었다. 이후 코르테스는 2~3차례 공격을 더 가해 도시에 큰 피해를 입혔고 엄청난 수의 적을 죽였다.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이 입은 막대한 피해 때문에 그들이 평화 조약을 간청해오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테노치티틀란은 굶주림과 엄청난 사상자에도 불구하고 완강했다. 결국 코르테스는 이들에게 더한 곤경이 필요하다고 여겨 매일 도시로 들어가 서너 지점에서 협공하기로 했고 호수도시들의 병력을 요청했다. 코르테스의 명령에 따라 집결한 동맹군의 수는 10만이 넘었다.

코르테스는 4척의 브리간틴과 1500척의 카누를 한편으로, 나머지 세척과 또 다른 1500척의 카누를 또 다른 한편으로 나누어 섬을 돌며 보이는 모든 집을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코르테스 자신은 대로를 따라 시내로 진격했는데 중앙 광장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저항도 없었다. 코르테스가 메워놓은 둑길도 그대로였다. 코르테스는 타쿠바로 이어지는 거리로 진격했고 6~7개의 다리와 조우했다. 코르테스는 중대장 한명에게 6,70명의 병력을 주어 다른쪽 거리로 들어가게 했고 6명의 기병에게 1만에서 1만 2천에 달하는 인디오 동맹군을 주어 코르테스의 후위를 지키게 했다. 그리고 다른 중대장에게도 비슷한 수의 병력을 주어 다른 길로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 코르테스 본인은 나머지 병력과 함께 타쿠바로 통하는 길로 진격했다. 그 과정에서 코르테스는 세개의 다리를 점령하고 틈을 메웠다. 그 작업이 끝났을 때는 이미 매우 늦어 다른 다리들을 점령할 수가 없었고, 코르테스는 그일을 다음날로 미뤄야 했다. 이날 알바라도와 산도발도 대승을 거두었다.

...몸이 안 좋다. 잡상

감기인가
알레르기인가
과로인가

매우 좋지 않다.

코르테스의 복수 (33) 3차 공격 코르테스 정복기

작업을 하는 와중에도 전투가 벌어져 코르테스는 다수의 적을 죽였다. 작업이 완료되자 코르테스는 기병들을 거느리고 시내 가운데로 진격하여 적들을 창으로 공격하고 구석으로 몰아넣어 땅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했다. 이때 코르테스는 치열하게 저항하는 적들을 보고 두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한다. 첫째는 슬픔의 밤 때 잃은 재물을 찾기는 힘들겠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아즈텍인들이 치열하게 저항함으로 자신들에게 아즈텍을 멸망시킬 명분을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믿기 힘든 일이지만 코르테스는 두번째 생각 때문에 매우 슬퍼하고 마음에 무거워졌다고 한다. 수백년이 지나 스페인의 정복을 위대한 사업으로 보지 않는 우리들에겐 적반하장의 생각으로 보일법하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였고 이 때문에 아즈텍인들이 자신들이 입은 피해를 인식하게 하여 스스로 항복하게 만드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다 한다.

코르테스는 아즈텍인들을 동요시키기 위해서 신전과 피라미드를 불태우고 파괴했다. 슬픔의 밤 이전에 스페인 군대가 머물렀던 저택들도 모두 파괴했다. 코르테스가 600명 이상의 식솔을 거느린 군주도 편안히 지낼 수 있을법했다고 서술했던 아름답고 훌륭한 저택들이 모조리 허물어졌다. 몬테수마의 동물원과 별장도 사라졌다. 코르테스는 이에 대해 몹시도 가슴 아파 했다고 쓰고 했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적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할 것이라면서 이를 합리화했다. 코르테스의 예상대로 테노치티틀란의 명물들이 파괴되는 모습에 아즈텍인들은 탄식과 슬픔을 금치 못했으며 그들의 동맹들도 비탄해했다. 그들은 스페인 군대가 이렇게 깊이 쳐들어올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또한 매우 당황해했다.

파괴 작업을 수행하고 퇴각한 후에는 이미 날이 저물고 있었고 코르테스는 부하들을 집결시켜 막사로 철수시켰다. 이를 본 테노치티틀란 주민들이 엄청난 무리를 지어서 몰려와 반격했다. 하지만 어김없이 기병들이 출격하여 이들을 격퇴했다. 그때마다 엄청난 수의 아즈텍인들이 죽어 길거리 위에 쓰러졌으며 아즈텍인들은 스페인인들이 이토록 깊이 진격하여 그들의 도시를 파괴한 것을 보고 매우 낙담했다. 반면 고무된 코르테스의 동맹은 틀락스칼라, 칼코, 테수이코, 수치밀코, 우투미를 연호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코르테스의 동맹군들의 흥분한 모습을 보며 아즈텍인들은 더욱 좌절했다. 특히 틀락스칼라인들은 아즈텍인들에게 그들을 모두 토막내서 저녁과 아침으로 잡아먹을 것이라 소리를 질러 도시에 충격을 주었다.

몹시도 피곤해진 스페인 병사들과 동맹군은 막사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날 코르테스의 병사들은 엄청난 가옥을 부수고 코르테스가 말하길 "모두 큰 승리를 거두었고, 큰 피해 없이 각자의 막사로 귀환했다."

다음날 코르테스는 아즈텍인들이 어제 입은 피해를 복구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서둘러 미사를 올리고 같은 방법으로 공격했다. 하지만 굉장히 이른 시간에 공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아즈텍인들은 두개의 운하를 파헤쳐 장애물을 만든 후였다. 코르테스는 매우 힘겹게 이를 탈취했고 전투는 8시에서 오후 한시까지 이어졌다. 전투가 격려하여 보유한 모든 탄환과 석궁화살이 소모되었다. 다리를 탈취할 때마다 스페인 병사들은 엄청난 고생을 해야 했는데 이는 아즈텍인들이 칼과 창을 들어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저항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붕이 모두 파괴되어 아즈텍인들은 전매특허인 지붕 위의 사격을 할 수 없었고 석궁병들의 사격으로 엄호를 받은 스페인인들의 용기는 증대되고 있었다.

코르테스의 복수 (32) 2차 테노치티틀란 공격 코르테스 정복기

한편 테수이코와 아쿨라아칸의 지배자 돈 페르난도가 코르테스를 도울 것을 선언하며 페르난도 익스틀릴소치틀, 혹은 이스틀리수칠이란 사람을 보내왔다. 그는 23,4세의 용맹한 젊은이로 모든 사람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한다. 그는 3만명의 전사를 거느리고 막사에 도착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고유한 복장과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코르테스는 고마움을 표시하며 황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의 행동을 칭송했다.

"폐하, 돈 페르난도의 도움과 우정이 제게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테믹스티탄(테노치티틀란)의 주민들이 전에는 자신들의 신민이자 친구로, 친척이며 형제로, 심이저는 아버지와 아들로 생각했던 사람들이 이제 적이 되어 자기들에 맞서 싸우러 오고 있는 것을 보고 느꼈을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을지 폐하께서는 잘 모르실 것입니다."

이로부터 이틀 후, 전화에 설명했던 시가전이 벌어졌으며 수치밀코의 인디오들이 테노치티틀란을 배신하고 코르테스에게 붙었다. 사아군의 언급에 따르면, 수치밀코 사람들은 테노치티틀란의 편에 서겠다고 약속하며 그 대가로 많은 선물을 받은 후에 다시 코르테스 편에 붙어 많은 멕시코인들을 노예로 삼았다는 것이다. 물론 멕시코인들도 가만 있진 않아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하지만 수치밀코 인디오들의 상당수가 살아서 코르테스 편에 붙었음은 이후 1563년 황제에게 수치밀코 지도자들이 논공행상을 요구했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각설하고 이외에 6월 11일엔 우투미족이란 산악부족이 새로 코르테스에게 합류하면서 늦게 합류한 것에 대한 용서를 빌었다. 코르테스는 그들을 반갑게 맞으면서 만약 그들이 테노치티틀란을 공격하는 것에 대해 더 많은 대가가 들었을 것이라면서 그들의 합류에 대해서 매우 높게 평가했다.

한편 브리간틴 선이 테노치티틀란 외곽을 모두 불태웠기 때문에 적들은 감히 코르테스에 맞서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이에 코르테스는 막사를 방어하는데는 7척의 배로 충분하다 여겨 산도발과 알바라도에게 각각 3척의 배를 보내기로 하였다. 코르테스는 선장들에게 테노치티틀란에 공급되는 과일, 물을 비롯한 생필품을 차단하고 순찰을 강화하록 지시했다. 코르테스의 명령대로 배들이 출발했고 이들은 밤낮으로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여 많은 적을 죽이고 카누를 파괴했다.

그 다음에 코르테스는 자신들에게 합류한 여러 부족들에게 이틀 후에 테노치티틀란을 공격할 것인데 앞으로 그들이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보고 그들이 진짜 친구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겠다고 하였고 여러 부족은 코르테스에게 복종할 것을 약조했다. 다음날 코르테스는 부하들을 준비시키고 각 막사와 브리간틴 선에 서신을 보내 자신이 취한 조치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다시 다음날 아침, 공격의 날이 밝자 코르테스는 미사를 올리고 다시 계획을 확인한 다음에 15~20명의 기병과 300명의 보병, 그리고 엄청난 숫자의 동맹군을 거느려 출전했다. 석궁 사거리의 세배를 전진하자 테노치티틀란에서 우렁찬 함성이 울려 그들도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그동안 코르테스가 파괴한 모든 방어 구조물을 더욱 강화하여 더욱 공격을 어렵게 한 상태였다. 하지만 둑길 양쪽으로 함대가 접근하여 대포, 석궁, 화승총을 퍼부어 적들은 더욱 큰 타격을 입어야만 했다.

보병들이 돌격했고 토루와 다리가 함락되었다. 적들은 다른 토루에 몸을 숨기고 반격했으나 코르테스는 여세를 몰아 다시 적들을 주요 광장과 거리에서 몰아냈다. 하지만 코르테스는 여기서 진격을 멈추고 갈라진 틈을 메우고 점령지를 굳히기 시작했다. 테노치티틀란 인들이 워낙에 장애물을 많이 만들어 놓은 상태라서 1만명의 인디오들이 동원되었음에도 그 작업이 끝나자 해가 지고 있었다.

최근 본 영화들 영화(dvd)

1. 쿵푸허슬
다시 보기 생겼길래 잘 감상함.

2. 007 북경특급 2
주성치가또. 다만 1이 더 재밌는듯.(근데 1과 2가 상관없는 영화인데 제목으로 농간질인듯)

황고둔 문서 완성 중국 근현대사

https://namu.wiki/w/%ED%99%A9%EA%B3%A0%EB%91%94%20%EC%82%AC%EA%B1%B4

결국 쓰긴 다 씀... 근데 존나 부실하네... 그냥 가십거리 중심으로 막 갈긴 느낌이고 거시적이지 못함...
잘 아시는 분들의 도움을 그저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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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loos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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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테스의 복수 (31) 격렬한 시가전 코르테스 정복기

스페인인들은 가장 넓은 길에 설치된 바리케이드를 점령했고 거리를 따라 다른 다리가 나타날 때까지 적을 추격했다. 다리는 파괴되어 있었고 아즈텍인들은 건너편에 토루를 쌓아 저항했다. 물에 뛰어들지 않고서는 그곳을 건널 수 없었고 그렇다고 정말로 물을 건너서 공격하는 것은 적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고 있어 너무도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거리 양편에 수많은 적들이 지붕과 길에서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석궁병과 화승총병의 적절한 투입과 더불어 대포 두방에 적들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아즈텍인들이 당황하는 사이에 스페인인들이 물에 뛰어들어 건너려고 했고 2시간 동안의 사투 끝에 운하 건너편에 스페인인들이 도달했다. 아즈텍인들은 이에 겁을 먹고 도시 안으로 달아났다. 덕분에 스페인인들은 손쉽게 운하를 건널 수 있었다. 코르테스는 토루를 파괴하고 운하를 메우게 했다. 

스페인인들과 인디오 동맹군은 석궁 사거리의 두배 거리를 진군해 주요 건물이 집결해있는 광장 옆의 또 하나의 다리에 다다랐다. 이 다리는 제거되지 않았고 토루도 없었다. 아즈텍인들이 스페인인들이 이렇게까지 깊게 전진해올 줄은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코르테스는 광장 입구에 대포를 설치했고 적에게 쏘아 많은 타격을 주었다. 적의 수가 엄청나 아즈텍인들이 설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코르테스는 물이 없는 걸 알고 더 깊이 전진하기로 했다. 테노치티틀란 주민들은 코르테스와 엄청난 숫자의 인디오 동맹군들을 보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피라미드 사원에 포위되었고 그곳은 400명 규모의 마을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컸다. 아즈텍인들은 그곳도 버리고 달아났으며(포위되었다면서 어떻게 달아난건진 모르겠음) 코르테스는 그곳을 점거하고 잠시 머물렀다.

하지만 아즈텍인들은 코르테스가 기병을 얼마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을 보고 다시 공격해서 사원에서 스페인인들을 몰아냈다. 코르테스는 사원 안에 머물렀다간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여겨 후퇴를 명령했다. 적의 공격이 너무 거세서 코르테스는 대포까지 버리고 큰 길로 겨우 달아났다. 코르테스는 이 상황을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라 불렀고 적시에 3명의 기병이 지원을 오지 않았으면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 적었다. 아즈텍인들은 더 많은 기병이 있을 것이라 여겨 다시 달아났고 기병들이 추격하여 많은 적을 죽이고 잃어버린 사원을 탈환했다.

테노치티틀란의 지위 높은 수장 10여명이 도시에서 가장 크고 높은 피라미드에 올라 바리케이드를 치고 스페인인들을 저지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4~5명의 스페인인들이 적진을 뚫고 피라미드에 올라가 그들을 모조리 죽였다. 기병 5~6명이 가세했고 30명 이상의 적을 죽였다. 시간이 늦은 상황인지라 코르테스는 부하들을 집결시킨 후에 퇴각시켰다. 철수하는 동안에도 엄청난 숫자의 적이 공격해왔는데 만약 기병이 없었다면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코르테스의 지시로 위험한 교차지점들이 모두 돌멩이와 벽돌로 메워져 테노치티틀란 시내는 기병이 활약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기병들은 신출귀몰하며 많은 적을 죽였지만 아즈텍인들은 자신의 피해를 보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친 개처럼' 덤벼들었다. 적들은 다시 지붕을 탈취해 위에서 공격했고 이 때문에 코르테스는 기병의 피해를 막기 위해 둑길을 따라 막사가 있는 곳까지 퇴각했다. 이 과정에서 부상자 몇사람이 발생했으나 중상자는 없었다.

코르테스는 시내 노변의 잘 지어진 가옥 몇채를 불태워 적들이 더 이상 지붕에서 공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날 곤살로 데 산도발과 페드로 데 알바라도도 치열히 싸웠고 동맹군들도 용맹히 싸웠다. 결과적으로 코르테스의 피해는 대단치 않은 수준이었다.

황고둔 문서 작성 중 중국 근현대사

https://namu.wiki/w/%ED%99%A9%EA%B3%A0%EB%91%94%20%EC%82%AC%EA%B1%B4

어 피곤해.
이건 자료가 너무 많아서 어떻게 정리할지가 문제인듯. 게다가 일본 정치 쪽은 일단 히로히토 평전에 의존하는 중이라서 평향성 문제도 두드러질 듯. 일본 정치사의 밝은 분의 도움을 구하면 최고겠지만 어려울듯하고 일단 다른 책을 더 구해야 할듯.

중동로 사건 문서 완성 중국 근현대사

https://namu.wiki/w/%EC%A4%91%EB%8F%99%EB%A1%9C%20%EC%82%AC%EA%B1%B4

이건 위키에 분류해야 하나 중국 근현대사에 분류해야 하나... 여튼 그렇다.

키신저가 평가하는, 스탈린의 정세 인식과 세계전략 냉전사

오랜만에 돌아온 세계질서 관련 포스팅.


스탈린의 세계 전략은 복잡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는 필연적으로 전쟁을 야기한다고 확신했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것은 기껏해야 휴전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히틀러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벗어난 일탈자가 아니라 그 체제를 대표하는 특이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히틀러가 패배한 이후에도 자본주의 국가들은 그 국가 지도자들이 뭐라고 말하고 무슨 생각을 하든 관계없이 여전히 소련의 적대국이었다. 그는 1920년대의 영국, 프랑스 지도자들을 업신여기며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평화주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은 유럽 국가들 간의 평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브리앙과 체임벌린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다. (...) 이 모든 것이 허튼 짓이다. 우리는 유럽 역사를 통해 새로운 전쟁이 이러나 새로운 세력 배열을 구상하는 조약이 체결될 때마다 이 조약이 평화 조약으로 불렸음을 알고 있다. (...) 그 조약들이 다가올 전쟁의 새로운 위험 요소를 나타낼 목적으로 체결되었는데도 말이다."

스탈린의 세계관에서는 개인적인 관계가 아니라 객관적인 요인들이 결정을 내렸다. 따라서 전시 동맹국들 간의 친선은 '주관적인' 것이며 승리라는 새로운 상황에 의해 대체되었다. 소련 전략의 목표는 불가피한 최종 결말을 위해 최대한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는 비밀 작전과 공산당을 통해 러시아의 안보 경계선을 가능한 멀리 서쪽으로 밀어붙힌단 의미였다.

(...)

(전 소련 외무부 장관 안드레이 그로미코에 따르면) 스탈린은 미국이 그렇게 지엽적인 문제(예컨대 베를린 봉새)에 핵무기를 사용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만약 서방 세계 동맹국들이 베를린 진입로를 따라 지상군 정찰에 착수한다면, 소련군은 스탈린에게 대응 조치를 묻지 말고 바로 저항하라고 명령받았다. 스탈린은 미군이 전선 전체를 따라 군대를 동원하는 경우에는 "내게 오라"고 말했다. 달리 말하면 스탈린은 국지전은 충분히 치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미국과의 전면전은 무릅쓰려 하지 않았다.

세계질서, 헨리 키신저, 민음사
307~308페이지, 316페이지.

3줄 요약

1. 스탈린은 자본주의 체제는 필연적으로 전쟁으로 귀결된다고 여김. +지들끼리 싸움.
-이에 관한 추가 서술.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블록과 영국과 독일의 블록이라는 두개의 동맹체제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들 사이에 말다툼이 커지면 커질수록, 소련에게 더 좋습니다. 우리는 양측 모두에 빵을 팔 수 있고, 그래서 그들은 계속 싸울 것입니다."
-라자리 카가노비치에게 보낸 스탈린의 편지.(근데 이거 영국-프랑스의 블록과 독일-이탈리아의 블록이란 걸 오타낸게 아닐까?)

2. 그래서 최종전쟁을 대비하여 동유럽을 위성국화함.

3. 하지만 비관주의 성향이 강했던 스탈린은 미국과의 전면전 자체는 피하려 함.

※ 블라디슬라프 주보크에 따르면, 키신저는 스탈린의 구상을 과거 수세기 동안 러시아 정치가들이 행한 구세계 현실정치의 구상이라고 평가한다고 한다. 이에 대해 주보크는 '현실주의의 망토'를 걸치고 위성국을 대했지만 자신들을 과거의 차르들과 동일시하며(흐루쇼프는 스탈린이 자신을 알렉산드르 1세처럼 여겼다 한다) 사회주의 제국을 건설하려 했다고 평가한다. 이에 관한 것도 있고 위에 언급된 여러 요소들에 관해 추가 포스팅을 할 예정.

※ 다음 휴가 땐 존 루이스 개디스의 냉전의 역사를 꼭 가져와야 할듯.

실패한 제국 1권 완독 책 이야기

재밌게 잘 읽었다. 이젠 다시 중국 근현대사로 좀 돌아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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