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폐량개원 문서나 쓰려 했는데 군대 잡담

개같은 리캡챠가 안 떠서 포기.
요즘들어 구글 계열 사이트 접속이 매우 좆같이 안된다. -ㅅ-
어휴 24일 후면 이런 일도 없겠지.

시골로 내려간 홍위병 소녀들의 운명에 대해 ARABOJA ㄴ공산중국

요즘들어 문혁관련 서적들을 들춰보고 있는데 상산하향 운동에 대해서 살펴보다가 알아낸 사실에 대해 하나 썰풉니다. 나무위키에서는 상산하향 운동에 대해서 마오 주석께옵서 홍위병들에게 이제 시골에서 혁명하라니까 순진무구한 홍위병들이 우루루 낚여서 시골에서 삽질한 것 정도로 묘사하는데... 우선 그렇지가 않습니다.

실제로 다이나믹 로동!을 외치면서 시골로 내려간 골빈 애들도 있었지만서도... 상당수 홍위병들은 시골로 가라는 명령을 생깠습니다. 왜냐? 시골로 한번 가면 도시 거주권을 박탈당해서 죽을 때까지 거기 살아야 하거든요. =ㅅ= 예컨대 호남성의 경우, 25~50%에 달하는 홍위병들이 상산하향 운동을 무시했습니다. 당연히 홍위병들의 부모는 뇌물을 뿌리고 당중앙에 편지를 써가면서 저항하고 호적을 조작하기까지 했습니다. 심지어 당간부들도 문명의 이기는 고사하고 입을 옷에 먹을 죽도 없는 시골로 어린 학생들을 보내라는 지시에 "징병 업무라면 열번이라도 수행하겠지만 이딴건 못한다."고 집행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어쨌거나 가엾고 딱한 수백만 홍위병들이 우루루 시골로 끌려갔는데 집도 없고 밥도 없고 질병과 해충과 폭력만 난무했다는 거야 안 말해도 비디오올시다. 아사, 익사, 폭행치사 사건이 수두룩했는데 특히 부르주아물이 든 홍위병들이 자신들을 노예처럼 부려먹으려는 군인들에게 논리로 대응하려다가 처참하게 맞아죽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사설이 길어지는데 그래서 이 글의 주제에 대해 이제야 썰을 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철모르는 소녀 홍위병들도 엄청 많았는데 제가 공산 중국 치하의 여권이 어땠는지 과거에 포스팅했다는 것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기억하실 겁니다. 도시에서 소녀 홍위병들이 몰려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 아해들에 대한 성적 착취가 시작되었습니다. 상급기관에는 소녀 홍위병들이 쓴 수많은 투서들이 날아와 자신들의 처지를 호소하곤 했는데 디쾨터의 서술을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안후이성 푸양현의 한 생산대에서는 여섯명의 젊은 여성들이 성희롱을 당했다. 그들 중 두명이 자살했고 한명은 정신이 이상해졌다. 일부 희생자들은 그들이 당한 일을 혼자서 또는 단체로 상급기관에 고발했다. 후베이성 황강시에서 한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에 서명한 열명의 젊은 여성들은 그들 모두가 농촌에 도착한 순간부터 괴롭힘과 희롱을 당했다고 설명했다. 몇명은 임신한 것도 모자라서 자신을 강간한 사람과 강제로 결혼까지 해야 했다."
문화대혁명 316페이지.

하지만 이렇게 고발하는 일은 적었습니다. 왜냐. 우선 당국에서 홍위병들이 뭔 꼴 당하는지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당국은 강간과 강제 결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했습니다.

"정상적인 성적 관계의 일부다." -ㅅ-

아마 이것이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짖는 신도덕의 위엄이 아닐런지요? 오히려 고발을 했더니 그깟 일 가지고 소란을 피운다고 무시 당하거나 배척당하거나 린치당하거나 심지어 "저년이 날 유혹해놓고 적반하장으로 고발한다."는 식으로 역고소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당국에서 이런 상황을 방관하는 것은 당연히 홍위병들을 시골에 처넣은게 마오쩌둥이니 감히 마오쩌둥을 아무도 깔 수 없어서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73년 복건성에서 살던 리칭린이란 교사가 편지를 써서 자신의 아들이 농촌에서 끔찍한 학대를 당하고 있다고 알려왔습니다. 이에 마오 주석은 친절하게도 친히 답장을 써주었습니다.

"리칭린 동지, 당신이 언급한 문제는 전국 곳곳에서 만연하고 있는 듯 보이며 일률적으로 해결될 필요가 있다. 동봉한 300위안을 받아달라. 이 돈이 얼마라도 당신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놀랍게도 마오쩌둥이 시골로 내려간 홍위병들의 처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1973년이 되어서야 당국은 시골로 내려간 홍위병들의 처지에 대해서 대대적인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조사 결과 1969년부터 1973년까지 호북성 천문현에서만 200명의 소녀들이 강간, 희롱을 당했다는 결과가 나왔고 그것도 모자라 '파괴'당했다는 내용까지 올라왔습니다. 14살짜리 소녀들도 가리지 않고 모조리 유린당했고 호북성 서기 출신인 부총리 리셴녠은 경악하여 다른 현의 사례들도 조사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호북성에서 천문현만 그런게 아닌 것 같다. 다른 현의 상황들은 어떤가?"

이어 요녕성에서도 3400건의 강간이 적발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강간마들에 대한 소식이 쏟아져들어왔습니다. 중국 지도부는 분노로 미쳐 날뛰었습니다.

저우언라이:"공안은 행동에 나서야 한다! 절대로 물렁하게 대처하지 말라!"

리센녠:"이 빌어먹을 종자들을 죽여라!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사람들을 달랠 수 없다!"

그리고 한동안 대대적인 체포와 총살 행렬이 이어졌고 시골에 있는 홍위병들의 처지는 좀 나아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최소 한해에 100만명 이상의 홍위병들이 시골로 보내졌고 최종적으로 1800~2000만명의 홍위병들이 시골에 보내졌는데 일부는 주석님이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건너고 나서도 돌아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ㅅ-

그러니까 다 좋은데 모택동이 없었으면 좋겠군.

참고문헌
문화대혁명,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보아라 상하이 매판자본가들의 흉악무도한 매국행위를! ㄴ민국시대

1926년에 들어서 전국의 혁명적 정세가 높아지는 속에 상해상공계층은 반제국주의적 요구를 강하게 주장한다. 반제국주의적 요구는 관세 자주, 최혜국 대우의 폐지 등 상공계층과 직접 관계되는 요구 뿐 아니라, 영사재판권과 조계의 폐지까지 주장하기에 이른다. 관세자주는 <독립국가의 주권이므로 외국인이 간섭해서는 안되므로 관관(關款)은 당연히 외국은행이나 서양 총세무사에게 맡겨서는 안된다>는 원론적 주장뿐 아니라 중국의 상공업이 발달하지 못한 원인을 불평등조약의 속박에서 찾았다. 1926년 2월 상해총상회는 총세무사 아그렌이 광저우 해관으로 하여금 광저우 항구를 봉쇄토록 한 것에 항의전문을 보냈다.

상해상공계층의 이러한 반제적 움직임은 상해총상회 회장이었던 우흡경의 발언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부일(赴日)참관단의 단장으로서 일본을 방문한 우흡경은 1926년 6월 5일 도쿄일화실업협회 주최 일화간담회의 오찬석상에서 양국의 관계에 대해 발표하였다. 우흡경은 "불행히도 십수년 이래 중일 양국은 호감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악감이 존재했는데 이러한 상황 하에서 무역을 발전시키려 한다면 이는 마치 녹무구어격"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악감은 정치방면에서 발생한 것으로 정치방면의 개변이 없이는 풀 수 없다고 하였다. 또 그는 중국의 정치상 두 가지 곤란 중 첫째가 불평등조약의 속박, 예컨대 영사재판권, 조계, 관세협정, 외국 육해군의 자유로운 상륙 등이 중국을 속박하고 있다면서 이런 상황 하에서 일본이 중일친선을 거론하는데 자못 회의가 크다고 말했다.

(...)

중국공산당은 상해총상회를 비롯한 대자산계급을 매판적이고 결국 민족해방투쟁에 장애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도, 우흡경 등 상해상공계층을 <민족자산계급>, <비교적 좌경적> 계급으로 평가하였던 것이며, 상해총공회도 관세자주, 불평등조약철폐, 조계회수 등 외교문제는 노동자만으로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상정 각계의 합작으로 가능하다고 한다든가, 실업진흥은 감원, 임금인하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관세자주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상해상공계층의 이러한 경향에서 기인한 것이라 하겠다.

중국국민혁명운동의 구조분석, 민두기 등 공저.
-북벌기 상해상공계층의 정치적 대응, 이승휘
84~86페이지.

이 얼마나 매국적이고 매판적인가!
카악 퉤!

암, 장개석은 매판자본가들과 열강의 사주로 쿠데타를 일으켰제 ㄴ민국시대

오랫동안 좆좆위키에 중독되어 블로그를 방치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삘이 받쳐서 쓰는 잡글 하나.

이전까지는 흉악무도한 반동우파의 수괴 장개석이가 열강과 상하이 자본가들의 사주를 받아서 순진무구한 공산당 친구들의 뒤통수를 후려 쳐갈기고 30만명의 공산당 혁명열사들을 살육했다~ 가 정설이었다. 물론 한 몇십년전 얘기긴 하지만서도...

하지만 이러한 테제는 단계적으로 짚어볼 시에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다. 우선 '열강과 결탁한 상하이 매판자본가 세력'이 존재했다고 가정하고 이들이 장개석을 사주해서 공산당을 숙청하기 위한 쿠데타를 획책했다면 이들이 최소 3가지의 믿음이 있었다는 것이 된다.

1. 장개석은 반공우파다.

2. 장개석은 국민당 좌파를 박살내고 독립정권을 수립할 정도의 힘이 있는 반공우파다.

3. 장개석은 국민당 좌파에 이어 장작림의 북양군벌까지 박살낼 힘이 있다.

우선 2번 전제에 따지면 1927년 4월 시점의 장개석은 직계 하응흠이 지휘하는 1군과 계계의 이종인, 백숭희가 지휘하는 7군을 제외하고는 국민혁명군 8대 군장의 미움을 동시에 사고 있던 왕따 of 왕따였으며 그나마 7군조차도 공산당이 싫어서 장개석과 전략적 연대를 하고 있던 상황이지 군비 문제 때문에 그리 사이 좋던 판은 아니었다. 게다가 1927년 3월 3전대회에서 국민당 상무위원회 주석 자리 날아가고 4월 시점에서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자리도 박탈, 집단군 총사령관으로 격하되는 판국이었는데 만약에 '상하이 매판 자본가와 열강'들이 장개석을 그 시점에서 국민당 좌파를 박살낼 수 있는 강력한 반공우파로 보았다면 시력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차라리 이 시점에서는 3개 군을 지휘하며 우한을 장악했던 당생지가 더 쓸만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1번으로 돌아가 볼때 이미 보로딘이나 장국도 회고록에서 숱하게 언급된 내용이고 지금은 다 깨진 내용이지만서도 이 당시의 국민당 우파, 좌파의 분류 자체가 공산당 입맛대로 아무렇게나 분류한 자의적 도식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들이랑 친하면 좌파고 안 친하면 우파라는 것인데 그나마 장개석은 중산함 사건 이전까지는 확고한 좌파로 분류되었고 중산함 사건 때 공산당 한방 팬 다음에도 북벌 시기 내내 중간파로 분류되었다. 반면 공산당이 극우파로 분류했던 손과는 연석회의 참석 이후로 갑자기 좌파로 분류가 변경되는 등 이 시기의 좌우파 구분은 솔직히 공산당이 느끼는 친밀감 순위 이상의 의미는 없다. 애초에 맑시즘 공부했던 호한민, 대계도도 계급투쟁 반대했다고 극우파로 찍히는 와중에(그나마 이 분들도 서산회의파에게는 빨갱이를 국민당 내부에 들여놓은 극좌파로 욕먹은건 함정 -ㅅ-) 여기에 의미부여하는 것이 코미디.

사실 장개석은 중산함 사건 이전에 하응흠 이하 1군 장교들에게 너 빨갱이인지 아닌지 당장 사상을 밝히라고 압박을 받는 등 국민당 내부의 대표적인 용공세력, 좌파세력으로 분류되고 있었고 장개석의 정치적 이념에 대해서도 1927년 3월 우한 방문의 발언을 보면 국민당의 영도를 전제로 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민중운동의 강조, 반제투쟁의 칭송을 말하고 있다. 장개석이 국민당 가입을 요구한 것 때문에 삔또 상해서 나온 핑계에 가깝긴 해도 장작림은 4.12 정변 터지고 나서조차 장개석의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합작을 거부했다. 양계초의 4.12 이전 국민당에 대한 평가 역시 비슷하다.(국민당 = 소련 주구. 중국은 이제 소련 노예가 될 거니 망명이나 가자, 참고로 양계초는 4.12 이후에도 장개석이 공산당을 이길 수 있을지를 염려)

그리고 일단 공산주의를 추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세트로 묶인 상하이 상공회와 열강을 한번 살펴보도록 한다. 당시 열강에서는 국민당 내부에서는 그나마 말이 통하는 것으로 보이는 장개석과 접촉하여 장개석의 세력을 지원, 연석회의를 비롯한 국민당 급진좌파들이 국민당을 적화시키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물들이 있긴 했다. 예컨데 당시 일본 외상 시데하라 기주로같은 양반들인데 얘들도 장개석이가 공산당 때려잡아줄 반공우파의 기수로 본 것 때문이 아니라 그나마 말 통하는 친구, 즉 온건파 정도로 본 것에 불과하지 장개석의 사상을 확고히 신봉한 바가 없다. 오죽했으면 장개석이 1927년 8월에 하야하고 나서 일본 건너가서 다나카에게 소련 대신에 일본과 친해지고 싶다고 똥꼬쇼까지 했을까.

또한 상하이 상공회는 열강의 주구가 아니라 공산당 제외하고 나면 가장 활발히 반제투쟁을 전개하던 세력 -ㅅ- 당시 상하이의 재계의 인식은 오히려 종속이론의 그것에 가까워서 열강의 경제적 침략 때문에 자기네들 산업이 발전 못한다고 관세자주권 회복, 군벌타도를 외치던 좌파 세력에 가깝고 당시 공산당조차도 우흡경이 주도한 상하이총상회를 '민족자산계급', '비교적 좌경적 계급'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난징 국민정부 참여한 순간에 제국주의 열강의 주구로 평가 전환 -ㅅ-

여기까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장개석이 반공우파라는 믿음 따윈 없었다.

2. 장개석이 공산당을 까부술 수 있는 반공우파라는 믿음 따윈 더욱 없었다.

3. 장개석이 장작림까지 까부술 수 있는 슈퍼파워라는 믿은 따윈 더더욱 없었다.

4. 상하이 자본가들하고 열강은 친하긴 개뿔 적대관계였다. -ㅅ-

그러므로 우리는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 중국편을 까야 한다.

다음에 기회되면 상하이의 공산당 친구들이 '순진무구한 국민당의 맹우'였는지에 대해서 분석하는 2편을 올릴 계획.

참고문헌 

1. 중국공산주의운동사, 벤자민 슈워츠, 형성사.
2. 중국공산주의운동사, 신상초, 집문당.
3. 중국국민혁명운동의 구조분석, 민두기 등 공저, 지식산업사.
4. 중국국민혁명운동의 분석적 연구, 민두기 등 공저, 지식산업사.
5. 중국국민혁명 지도자의 사상과 행동, 민두기 등 공저, 지삭산업사.
6. 중국공산당역사 1권, 중국중앙공산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7.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레빈, 민음사.
8.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아카데미.

나무위키 탄옌카이 문서 작성 나무위키 똥꼬쇼

https://namu.wiki/w/%ED%83%84%EC%98%8C%EC%B9%B4%EC%9D%B4
또 어쩌다 삘 받아서 작성해버렸습니다. 이것으로 남경 국민정부 역대 주석 문서가 모두 생겼군요.

따뜻한 중국 군벌 단기서? 중국 근현대사

원세개 사후 정국을 장악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인물은 단기서와 풍국장이었다. 그러나 풍국장은 단기서와 더불어 북양삼걸 중 하나로 군사력과 실력을 갖춘 인물이었지만 그 영향력은 단기서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인품면에서 단기서는 풍국장보다 명망이 높았다. 풍국장은 '북양의 개'라고 불리듯이 재물욕이 많고 탐욕스러운 성격의 소유자인데 반해 단기서는 검소하고 청렴결백한 성격의 소유자였을 뿐 아니라 소신있고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다.

단기서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그 목적을 이루려고 하였고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중의(衆議)라도 배척할 정도로 소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들도 그를 의지가 굳은 사람으로 평가하였으며 미국 공사 라인쉬도 게으르지만 지혜와 성실성, 부하에 대한 보호, 강한 책임감을 가졌기 때문에 중국 군인 가운데 뛰어난 인물이며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

(...)

(원극정이 제제의사를 타진하자)

"나는 일찍이 공화를 채택하라는 전(電)을 발표하였는데 지금 또 원세개가 황제에 즉위하려는 것을 옹호한다면 나라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하겠는가? 또 24史중에서도 역시 이러한 인물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하여 명분상 제제를 찬성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

양계초와 채악은 시국을 수습하기 위해 단기서를 총리로 임명할 것을 적극 주장하였다. 양계초는 원세개 사망 직후 여원홍에게 "단기서와 더불어 중앙질서를 유지하도록 힘을 다할 것"을 요청하는 한편 독립을 선포한 각성도독에게도 "북방의 수습은 오직 단기서에게 맡겨야 한다"고 통전하여 이를 강력히 주장했다. 채악도 6월 22일 "시사(時事)가 몹시 어려우니 단기서가 아니면 총리를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라고 국무원에 통전하여 단기서 적임자임을 강조했다. 이와 더불어 운남의 당계요, 광서의 육영정, 광동의 용제광 등도 단기서의 조각을 지지함으로써 단기서는 북양집단에서 뿐만 아니라 남방 측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았다.

(...)

손문도 (...) 단기서의 총리 취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점은 손문이 1916년 6월 23일 단기서에게 보낸 서한에서 신해혁명 때 공화를 찬성하여 대국을 안정시켰고 제제시에도 대의를 견지하여 시국을 구했다고 단기서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천하가 흉흉한 오늘날의 혼란을 바로 잡는 것은 오직 단기서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나쁜 말에 현혹되어 다시 천하가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하길 바란다 라고 말한데서 잘 나타난다.

‘臨時約法’體制下의 段祺瑞軍閥政權, 박준수, 동양사학연구 53권, 동양사학회.
145~150페이지.

사실 원세개 아저씨도 한때 중국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평가가 좋던 시절이 있답니다 ㅠㅠ

나무위키 북경정변 문서 작성

https://namu.wiki/w/%EB%B6%81%EA%B2%BD%EC%A0%95%EB%B3%80
풍옥상이 오패부 뒤통수를 갈긴 쿠데타 되시겠습니다. 이 사건으로 조곤도 물러나고 선통제도 쫓겨나죠.

어쩌다보니 중화민국 역대 대총통 문서들을 작성하고 말았습니다 나무위키 똥꼬쇼

2대, 5대 리위안훙
https://namu.wiki/w/%EB%A6%AC%EC%9C%84%EC%95%88%ED%9B%99

3대 펑궈장
https://namu.wiki/w/%ED%8E%91%EA%B6%88%EC%9E%A5

4대 쉬스창
https://namu.wiki/w/%EC%89%AC%EC%8A%A4%EC%B0%BD

6대 차오쿤
https://namu.wiki/w/%EC%B0%A8%EC%98%A4%EC%BF%A4

임시집정 돤치루이
https://namu.wiki/w/%EB%8F%A4%EC%B9%98%EB%A3%A8%EC%9D%B4

돤치루이 문서는 일단 좀 보충이 필요할듯 하고, 배경설명을 위해 1,2차 직봉전쟁, 강절전쟁, 회선사건, 북경정변 문서 등도 써야겠습니다. 공부는 해도 해도 참 끝이 없으니 원... 그나마 고려원 중국학 총서들의 도움을 엄청 받고 있습니다. 동포 여러분들께서도 기회가 되신다면 한번 구해보시길.

나무위키 광저우 상단 사건 문서 작성 나무위키 똥꼬쇼

https://namu.wiki/w/%EA%B4%91%EC%A0%80%EC%9A%B0%20%EC%83%81%EB%8B%A8%20%EC%82%AC%EA%B1%B4
요즘들어 쑨원 시기 문서 작성에 너무 맛이 들린듯... 이것도 생각보다 자료가 많아서 새로 썼습니다.

나무위키 홍콩 선원 대파업 사건 문서 작성 나무위키 똥꼬쇼

https://namu.wiki/w/1922%EB%85%84%20%ED%99%8D%EC%BD%A9%20%EC%84%A0%EC%9B%90%20%ED%8C%8C%EC%97%85
1922년 홍콩 선원 노동자들이 영국 식민당국에 맞서 일으킨 파업입니다. 놀랍게도 이겼죠.
정작 같은 민족인 오패부는 참혹하게 짓밟았지만 말입니다.

나무위키 군민재정 통일선언 문서 작성 나무위키 똥꼬쇼

https://namu.wiki/w/%EA%B5%B0%EB%AF%BC%EC%9E%AC%EC%A0%95%20%ED%86%B5%EC%9D%BC%EC%84%A0%EC%96%B8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군민재정 통일선언과 양희민, 유전환 토벌은 별개의 사건에 가깝긴 한데 둘 다 자료가 드럽게 부족해서요(...) 오죽했으면 공산당 공식 자료 뒤적이면서 겨우 쓰고 있는 판이니 말입니다.

차차 자료를 수집해서 개선을 해야겠습니다.

나무위키 2.7 사건 문서 작성 나무위키 똥꼬쇼

https://namu.wiki/w/2.7%20%EC%82%AC%EA%B1%B4
오패부와 소련의 합작 가능성을 완전히 쫑내버린 노동운동 탄압입니다. 계획에 없었는데 상세히 다룬 자료들을 찾아서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소련은 왜 카라한 선언을 번복했는가? 소련사

1919년, 소련 외무인민위원회 부위원 이자 위원대리인 레프 카라한은 소위 <카라한 선언>이라 불리는 대중국 선언 1호를 발표하여 러시아 제국이 그간 가지고 있던 모든 밀약을 폐기하고 중국에 가지고 있던 특수 권익을 반환하며 영사 재판권을 포기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 카라한 선언은 중국인들로부터 대단한 환영을 받았으며 중국 내부의 친소 분위기의 조성과 공산주의의 육성에 큰 기폭제로 작용했다. 실제로 카라한 선언 이후, 북양정부는 러시아 제국에 대한 승인을 철회하고 소련을 승인하여 국교 체결에 대해 논의했다.

하지만 1921년 12월, 첫 공식 사절단이자 주중국전권대표인 파이케스 사절단이 중국에 도착했을 때, 파이케스 사절단은 기존의 대중국 선언을 확인하면서도 무상으로 모든 것을 돌려주는 것은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으며 중국 내부의 러시아 재산을 실질적으로 상당수 회수하고 있던 북양정부는 이에 대해 반발했다. 파이케스는 국교 수립에 실패하고 1922년 8월 귀국했고 그의 후임 아돌프 요페는 카라한 선언의 준수를 주장하며 1922년 9월 27일 외몽골 문제, 중동로 문제에 대해서 정치국 중앙의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 카라한,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라데크에게 편지를 보내 항의했다.

"나는 알 수 없다. 우리의 1919년과 1920년 선언 중에서 인용할 구체적인 지시란 무엇인가? (...) 물론, 모종 '수완'을 써서 이런 선언을 한장의 백지로 만들어 버릴 수 있지만, 이는 중국에 대한 우리의 정책의 파멸일 것이고, 최종적으로 우리의 전면적인 멸망의 시작이다. 왜냐하면 대외정책에서 우리는 가장 일반적인 제국주의자가 될 것이고, 상당한 정도에서 세계혁명보루의 작용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손실은, 대내정책에서 중대한 경제적 양보를 하는 것과 비교해서 훨씬 엄중할 것이다. (...) 신경제정책의 적극적인 옹호자로서 나는 우리의 대외정책을 '상업목적'에 이용하면 우리의 철저한 와해를 조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허나 정치국 중앙은 몽골에서의 붉은 군대 주둔과 몽골에 대한 중국의 주권 승인은 모순되지 않는 것이라고 요페의 항의를 일축했다. 요페는 당중앙이 구상하는 러중몽 삼국회의는 중국인들에게 '불량한 인상'을 조성할 것이며, 우페이푸를 자극하여 중국군이 다시 한번 외몽골 출병을 단행할 수 있을 것이라 경고했다.

"치체린의 통보가 정확하다 하여도, 몽골 문제에서 하나의 주요한 점을 소홀히 하였는데, 즉 우리의 세계정책이다. (...) 몽골의 200만 주민들이 모두 우리를 옹호하고 중국에 반대한다면, 치체린의 관점이 원칙적으로 정확하여도 전략적으로는 틀린 것이다. 물론, 우리가 소민족이 대민족에 반대하는 폭력을 지지하지만, 만일 몽골인의 투쟁이 아무런 반향도 일으키지 못하고 중국인의 투쟁이 전 세계에서 거대한 반향을 불러일으킨다면, 세게에서 아무런 작용도 없는 200만 몽골인을 위하여 거대한 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4억의 중국인과의 관계와 모든 정책에 손상 줄 필요는 없다. (...) 그러므로 나는 당신들에게 나의 계획과 책략에 동의할 것을 다시 한번 부탁한다."

하지만 소련은 외몽골과 중동로 이권을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 때문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자', '혁명적 부르주아'와의 통일전선을 구축하여 중국 내부에서의 혁명을 추진한다는 코민테른의 방침에 대해서도, 외몽골에 대한 주권을 강경히 주장하는 우페이푸는 그가 노동운동을 탄압한 2.7 참안 이후로 완전히 합작 대상에서 배제되었다. 기존에 우페이푸에 대해서 중국의 확고한 지배자이며 이상적인 합작 대상이라고 고평가하던 소련은 우페이푸에 대해서 사리사욕에 매몰된 군벌에 불과하다고 평가를 뒤집었다. 따라서 소련은 쑨원이 영도하는 중국 국민당과의 합작에 매진하게 되었다.

과연 소련이 카라한 선언을 번복한 이유는 무엇인가? 민국사관이나 중국의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관점에서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소련이 공산주의 전파를 위해 간교한 술책을 부리면서 입으로는 특권 반환을 비롯한 달콤한 말을 하고 실질적으로는 제국주의 정책을 행했다고 비난한다. 결과적으로 피해자인 중국인들 입장에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 무리만은 아닐 것이다. 본고에서도 딱히 소련의 입장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다만 지적하고 싶은 것은 소련이 단순한 음험한 제국주의적 음모론 계산 하에서 행했다기 보다는, 나름의 내부적 맥락이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는 것이다. 1923년 1월 20일 트로츠키는 요페에게 카라한 선언을 준수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중동철도문제에 대해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왜 제국주의를 포기하는 것이 우리의 재산권 포기를 선결조건으로 하는지 지금까지도 이해할 수 없다. (...) 우리는 중국 농민이 왜 러시아 농민에 의거하여 철도를 소유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당신은, 중국은 어찌되었든 지불할 수 없다고 말했다. (...) 왜 쑨원 혹은 다른 사랑미 부분적으로 점차적으로 우리에게 중국 인민이 이 철도를 사용하는 비용을 갚지 못하는가? 왜 이를 제국주의라 하는가?
당신은 중국이 가난하다고 반복적으로 말하였다. (...) 친애하는 아돌프 아블라모비치, 내가 당신을 일깨워주는 것을 허락해달라. 러시아도 매우 가난해서, 근본적으로 주위의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의 인민을 원조할 능력이 없다. 두말할 것도 없이, 중국에 대한 중동철도의 재산을 포기하는 것은 8억 루블을 증정하는 것과 같다. 이외에 또 4000만 루블의 대출을 제공하는 것은 아주 사람을 유혹하는 조치이다. 중국인은 철도를 얻고 4000만 루블도 곧 다 써버릴 것이며, 이러고 나서 계속 대출을 요구할 것이다. 만일 이런 것들을 얻지 못한다면 그들은 미국으로 향할 것이고, 자기의 호감을 그곳에 돌릴 것이며 이 점은 우리가 이미 터키의 예에서 보아왔다."

트로츠키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우리 코가 석자다.

2. 중국에 철도를 반환하면 중국의 추가적 요구를 들어줄 역량이 없는데 그렇게 되면 중국은 미국에 붙을 것이다.

단순히 제국주의적, 전통적 민족주의와 자국이익에 입각한 외교를 행했다고 폄하하기만은 어려운 맥락이 존재하는 것이다. 실제로 소련은 어려운 경제 사정 속에서도 1923년 1월 26일 쑨원에게 200만 루블의 지원금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중국 공산당에게 지급한 1만 2천 루블의 200배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이후 다이지타오는 국공합작을 공산당의 국민당 기생정책 정도로 폄하했고 이는 민국사관이나 일부 강경한 반공서적에서 정설로서 기재되어 있다. 하지만 국민당에 대한 소련의 정책을 단순히 국민당을 내부에서 엎어버리기 위한 음모로 폄하하는 것은 진실에 접근하기 좋은 방법은 아닐 것이다.

물론 필자는 확고한 반공주의자고, 4.12 사건이나 국공결렬을 단순히 반동적이고 매판적인 국민당 우파의 '반혁명적 배반행위'로 매도하는 혁명사관에 대해 극도의 혐오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타파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한가지 극단적으로 매몰된 관점을 타도하기 위해 다른 방향으로 매몰된 관점을 동원하는 것이 현명한 길은 아니라고 본다. 자신이 동조하지 않은 세력, 사상의 내부적 맥락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솔직히 표현하자면 괴로운 일이고자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내부적 맥락을 이해하려는 것과 그것을 동조, 옹호하는 것을 혼동하면 안될 것이며 자신이 동조하지 않는 것이라 하여 그것을 악마적인 술수로 치워버리는 것은 역사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닐 것이다. 글을 쓰면서 오늘도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 오늘도 정진, 내일도 정진, 모레도 정진.

참고문헌

1. 본문에 인용된 요페와 트로츠키의 서한, 우페이푸에 대한 평가 등은 대부분 <국공합작과 孫文·요페공동선언 : 몽골문제와 중동철도문제를 중심으로, 이승휘, 중국근현대사연구 29권 29호, 중국근현대사학회>에서 인용하였다.

2. 소련과 중국의 초기 외교적 접촉 및 중국 공산당의 국공합작에 대한 초기 견해와 수용 과정에 대해서는 신승하의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대명출판사에서 소상하게 다루고 있다.

3. 카라한 선언에 관련된 소련의 태도 변화와 중소 교섭의 난황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객관적인 설명은 가와시마 신의 <중국 근현대사 2권 근대국가의 모색(1894~1925)>, 삼천리를 간단히 참조하는 것이 좋다.

4. 쑨원과 소련의 접촉에 대해서는 해롤드 시프린의 <손문평전>, 지식산업사에서도 자세히 다루고 있다.

5. 코민테른의 국공합작 추진 배경과 초기의 합작 대상 물색 과정 및 중국 공산당 내부의 논의에 대해서는 <政治勢力 간 통일전선 측면에서 본 제1차 國共合作의 고찰, 이준태, 아태연구 15권 1호, 경희대학교아태지역연구원.>

6. 그외에 벤자민 슈워츠의 중국 공산주의 운동사, 신상초의 중국 공산주의 운동사 등을 부가적으로 참고하는 것이 좋으며 국공합작 과정에서 쑨원과 랴오중카이 등의 활동에 대해서는 민두기 교수가 편집한 <중국국민혁명 지도자의 사상과 행동>, 지식산업사와 <중국국민당 좌파의 기수 랴오충까이(寥仲愷)와 국민당 개조작업, 장공자, 글로벌정치연구 2권 2호, 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정치연구소.>를 참고하는 것이 좋다.

7. 민국사관의 소련과 중국 공산당에 대한 태도, 즉 기생정책이나 내부 적화 야욕이라는 관점은 장개석비록이 잘 다루고 있다. 이건일 교수의 <모택동 VS 장개석> 역시 민국사관을 따른 대표적인 책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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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좀 만족스러운 질을 갖춘 문서가 나온 것 같아 기쁩니다. 민두기 교수가 편집한 중국국민운혁명 지도자의 사상과 행동과 김문희 박사의 하향응 관련 연구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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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호법운동에서 큰 뼈대를 가져오긴 했는데... 뭐 일단 완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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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하지 않은 상태에서 또 문서를 싸고 말았습니다. 관련 연구가 많아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난징 국민정부는 지주들의 천국이었나? ㄴ민국시대

오랜만에 올려보는 연구 포스팅.
본인이 흥미를 가지는 20~30년대 중국 농촌에 관한 내용입니다.

1930년대 강남의 지주는 그렇게 강력하지 못했으며 지주도 대지주는 소수였고 대부분 중소지주였다. 강남 농촌에서 소작농도 생활이 곤란했지만 지주 역시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1920년대 강남 지주의 토지 수익률은 급락했고 지주는 높은 세금과 낮은 소작료로 인해 끊임없이 압박받아 1920~1930년대 중국 농촌 사회에서 지주의 영향력은 크게 쇠퇴했다. 근대 이후 지주의 물리력 남용이 줄어들었는지 아니면 증가했는지는 여러 자료로 볼때 확실하게 단언하지 못한다. 이것은 오히려 지주 개개인의 문제일 수도 있었다. 지주의 가혹행위는 현저히 줄어들었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행해졌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행위가 더 이상 국가의 용인이나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특히 난징국민정부는 지주의 권한을 법적으로 제한하여 지주의 입장을 크게 약화시켰다.

(...)

강남의 지주층은 근대 이후 계속 쇠퇴하였으며 특히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더욱 위축되었다.

근대농촌사회연구, 박정현, 고려대학교출판부.
98~99페이지.

보충

1. 기존의 연구들은 중국의 지주들은 중국 근대화의 장애물로 해석하며 이들이 봉건적 지주제를 유지시켜 중국 농촌을 쇠퇴시켰다고 지적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들은 표본이 화북지역에 집중되어있으며 지주들의 실질적인 영향력이 약화되었다는 역사적 현상을 도외시하였다.

2. 중국 지주들의 수익률은 지속적으로 낮아져서 20년대 이후에는 상당히 처참한 수준이었는데 난징대학의 존 벅 교수는 지주의 수익률을 8.5%로 잡았지만 퍼킨스의 경우, 2.5%에 지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이는 농촌의 쇠퇴의 원인이 지주라기보다는 지주 역시 농촌 쇠퇴의 피해자였다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주들의 경제적 손해가 심해져서 30년대에는 지주들이 늘어가는 자신의 토지를 한탄하며 토지 매매에 열심이었다는 기록조차 있다.

3. 단순히 지주들의 수익률이 악화된 것 뿐 아니라 지주들의 사회적 영향력 역시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부재지주들의 증가와 소작료 수취를 위한 '조잔'의 설치는 지주들의 횡포로 해석되곤 하였으나 거꾸로 말해서는 대리인의 고용과 관청과의 결탁 없이는 소작료 수취가 불가능해질 정도로 지주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약화되었다는 한가지 증거인 것이다. 또한 부재지주의 증가는 지주들을 봉건적 농촌의 지배층에서 자본주의적 투자가로 변모시켰다. 이에 따라 20년대부터 소작쟁의는 대부분 지주와 농민의 다툼이라기보다는 지주와 농민 사이의 대리인들의 농간에서 기인한 일이 많았으며 대리인들의 농간에는 지주 역시 피해자 반열에 들었따. 특히 국민정부가 감조정책을 도입, 소작농을 옹호하면서 지주 세력은 계속 약화되었고 조잔의 영향력도 약화되었다. 1949년 중국의 공산화 이후 조잔은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본 영화들 영화(극장)

1. 코코

매우 훌륭함.
역시 콧수염쟁이들이 세상을 망친다.

2. 올 더 머니

훌륭함. 리들리 스콧 요즘 괜찮네.

최근에 중고장터를 열심히 뒤진 성과 책 이야기

장개석 연구, 배경한, 일조각.

중일전쟁과 중국혁명, 윤휘탁, 일조각.

코민테른과 중국혁명 관계사, 향청, 고려원.

중국혁명과 가정윤리, 조용관, 고려원.

중국 당대 40년사, 신승하, 고려원.

홍수전 평전, 고지마 신지, 고려원.

중국 공산주의 운동사, 벤자민 슈워츠, 형성사.

중국 공산주의 운동사, 신상초, 집문당.

중국 국민혁명 지도자들의 사상과 행동, 민두기, 지식산업사.

중국현대정치사상사, 체스터 탄, 지식산업사.

근대중국농촌사회연구, 박정현, 고려대학교출판부.

전후 중국 경제사(1945~1949), 김지환, 고려대학교출판부.

코민테른과 세계혁명 1,2권, 김성윤, 거름.


이제 코민테른과 고려원에서 내놓은 화북사변만 구한다면 어느 정도 원하던 자료를 확보할 수 있을듯...

최근 본 영화 영화(극장)

1. 다키스트 아워
개리 올드만이 처칠이라니... 분장 참 잘했네... 연기력도 좋고.
훌륭함.

2. 메이즈 러너: 데스큐어
어쩌다보니 싹 다 극장에서 보게 된 시리즈인데 나름 잘 봤음. 애초에 머리 비우고 보는 시리즈에서 기대하는 것도 없음.
훌륭함. 다만 1,2편 안보고 보면 좀 문제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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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간단하게 썼습니다.
대충 이런 일이 있었구나... 정도나 소개하려고요.

나무위키 안직전쟁 문서 완성 나무위키 똥꼬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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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에 쓰다가 때려친 이후로 거의 2년 만입니다. 에고고. 1차 직봉전쟁, 2차 직봉전쟁은 언제 쓸까요.

나무위키 영풍함 사건 문서 작성 나무위키 똥꼬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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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6.16 사변이라고도 불리는 그 사건입니다. 진형명과 손문이 결렬되고 2차 광동 정부가 붕괴된 원인이었죠. 예전에는 배은망덕한 군벌놈들의 반란으로 욕했지만 지금은 좀 재평가되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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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호법운동은 대충 공부했군요. 이제 군벌들간의 아귀다툼만 좀 공부한다면 원세개 사망~1925년 국민정부 수립까지의 중국 역사가 좀 정리되겠습니다.

이제 영풍함 사건 문서를 써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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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쓴 호법전쟁 문서의 배경을 무지막지하게 끌어다 쓰긴 했는데 여튼 뭐 그렇습니다. 언제 두 문서 분리하나 했더니 이제야 분리하는군요. 사실 말이 호법운동이지 실제로는 원세개 사망~호법전쟁까지의 중화민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서술한 것에 가까워 보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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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몇년 전에 레지날드 존스턴의 자금성의 황혼을 주 배이스로 삼아서 쓴 문서인데 지금 보니 빠진 내용이 많고 부실해서 좀 보강했습니다. 공부의 길은 멀고 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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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침에 썼는데 이제야 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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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화민국군 사망자 130만이라고 나오는데... (중일전쟁)118.139.22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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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민당군대 사망자는 130만 아닌가요? (태평양 전쟁)118.139.22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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