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공지 블로그 운영


이제야 공지를 쓰게 되네요.
본인의 신변에 각종 테러를 감행하려는 금치산자, 정신병자, 좌경맹동주의자, 우경기회주의자, 반혁명종파분자, 주자파들이 날로 늘어가는 관계로 블로그 청소를 실시했습니다.

몇차례 테러로 인하여 비로긴 댓글을 도로 막아버릴까 고민했지만 한동안은 허용으로 방침을 유지하겠습니다. 테러는 가차없지만 정론공격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백화제방! 백가쟁명!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분들께 사딸라가 함께하길.

황장엽이 회고하는 대약진운동 북괴 이야기

1958년 11월, 나는 김일성을 수행하여 서기실장과 함께 중국과 베트남을 방문했다. 나로서는 베트남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 본토 방문도 처음이었다. 중국은 대약진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중국 측에서는 김일성을 마중하기 위해 간부들이 단둥까지 나와 있었다. 간부들 가운데는 외교계에서 일하는 조선 동포들도 섞여 있었다. 11월 말경인데도 밭에 추수하지 않은 옥수수와 수수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서 내가 물어보았다.


"왜 저 옥수수와 수수는 추수하지 않습니까?"
"아, 저거 말입니까? 저것들은 추수를 하나마나입니다. 내년부터는 1정보부터 200톤 내지 600톤의 소출을 내는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농민들이 추수를 서두르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 중국은 심경밀식(소위 빽빽이 심기...)의 방법으로 엄청난 수확을 올릴 수 있다고 떠들어댔다. 우리가 중국으로 향하기 전에 중앙당에서도 소문이 돌기를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소련이 인공위성을 쏘아올린 것에 비할 데 없이 큰 사변이라고들 했다. 그들은 벼를 빽빽이 심은 논의 벼이삭 위에 아이가 올라앉아 있는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열차가 산해관을 지나자 밤이 깊어졌다. 그런데 철길 옆으로 불빛이 이어졌다

"저 불빛은 뭡니까?"

동행한 중국 관리가 대답했다.

"예, 저건 토법으로 강철을 생산하는 불빛입니다. 우리 중국은 앞으로 15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기 위해 대약진을 하고 있습니다. 강철도 전체 인민이 현대식 용광로를 쓰지 않고 저렇게 재래식으로 생산하고 있습니다."

(...)

다음날 김일성이 돌아와 말했다.

"마오쩌둥을 만났는데, 중국에서는 앞으로 경지면적을 3분의 1로 줄이고 나머지는 목장과 공원을 조성한다고 하는군. 3분의 1에만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남아돈다는 거야."

우리는 다음날 저우언라이 총리의 안내로 무한의 어느 인민공사를 방문했다. 도중에 목화밭을 지날 때였다. 김일성이 갑자기 차를 세우더니 수행하는 인민공사 사장에게 목화를 1정보당 얼마나 따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사장은 15톤을 딴다고 대답했다. 또 밀밭에서는 1정보당 70톤을 수확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시 북한에서는 3톤을 겨우 수확하는 정도였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전국에서 올해 5억톤의 양곡을 생산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그 이듬해 가을, 중국에서 우리를 안내했던 교포가 평양의 친척집을 방문했다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중국의 1958년 양곡 총 생산고는 5억 톤이 아니라 1억 8천만 톤이라면서 식량이 모자라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다고 했다.

황장엽 회고록, 시대정신, 145~148페이지, 

여담.
대약진운동은 김일성의 외국 의심병이 좋은 결과를 낳은 얼마 안된 사례가 될 것 같은데 3분의 1의 경작지만 재배해도 대성공할 수 있다는 중국의 주장에 혹한 국가계획위원장 이종옥 등이 북한에서도 대약진을 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김일성은 외국 방식을 기계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교조주의적인 일이라고 주장하며 평양에서 20킬로미터 떨어진 중화 시험재배장에서 중국에서 하는 것처럼 빽빽하게 농작물을 재배해보았다. 중국의 이론대로라면 400톤을 수확했어야 했지만 4톤 밖에 수확량이 나오지 않았고 김일성은 당연히 대약진운동을 따라하지 않았다.

김일성 의문의 1승....

스탈린 격하에 대한 김일성의 반응 북괴 이야기

1956년 2월, 20차 소련공산당 대회에서 니키타 흐루쇼프가 <개인숭배와 그 결과물에 대하여>를 발표하여 스탈린 격하를 시도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그로 인하여 전 공산권이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는 것 역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북한은 2월 2일부터 3월 13일까지 최용건을 대표로 하는 조선노동당 대표단을 20차 당대회에 파견한 상태였는데 김일성의 목적은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소련으로부터 차관상환유예 등을 얻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소련 측은 비밀보고 전에 문건을 최용건에세 사전에 전달하면서 스탈린의 죄는 조선의 잘못이 아니라고 하였으나 북한의 충격은 문자 그대로 대단한 것이었다. 1956년 3월 13일 귀국한 최용건은 3월 20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개최하여 3시간에 걸쳐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에 대하여 보고한 후 소련과 달리 조선노동당은 창립 이래 일관적으로 집체적 영도의 원칙을 준수해왔다고 하였다. 이어 김일성도 조선노동당 내부에서 개인숭배란 박헌영 숭배를 말한다고 주장했으며 개인숭배는 오로지 소련의 현상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효순이 흐루쇼프의 <개인숭배와 그 결과물에 대하여>를 번역한 문건을 낭독하면서 회의 분위기는 표변했다. 청취회 이후 김일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흐루쇼프 동지의 보고를 통해 개인숭배가 얼마나 유해하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알 수 있다. 당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를 잘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발언하고 회의를 종결하였다. 이후 김일성은 북한에는 오로지 박헌영 숭배만이 있음을 강조하며 소련의 개인숭배 비판 풍조를 기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교조주의라는 입장을 보이며 저항했다. 1956년 4월 23일부터 4월 29일까지 열린 조선노동당 3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은 박헌영 비판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우리나라 실정에 맞건 안 맞건 덮어놓고 남의 것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여 통체로 삼키는 교조적인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라고 비판하였다.

허나 당대회에 소련 대표로 참여했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김일성의 중공업 우선정책에 대해 비판하며 코메콘 가입, 집단지도체제 개편을 촉구하였고 집단적 지도원칙을 '유일하게 올바른 길'로 강조했다. 그리고 각 당 기관이 "집체적 영도의 레닌적 원칙을 완전히 수립하도록 원조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중국대표로는 국방위원회 부주석 섭영진이 참여한 상태였는데 중국의 영향력을 경계한 김일성은 중국인민지원군 철수를 주장하는 등 중국의 영향력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내었다. 회의 직후 군에서 연안파가 대거 제거되었고 중앙위원 중 갑산파와 만주파가 약진했으나 여전히 중국의 지지를 받는 연안파가 가장 많은 중앙위언을 확보한 상태였다.

대회 직후 김일성은 간부들이 개인적으로 외국인과 만나지 말 것을 촉구하는 한편 6월 1일 소련의 초청을 받아 외유를 떠나게 된다. 하지만 김일성의 우려는 나름대로 적중하여 연안파가 들고 일어나게 되는데.... 이거 언젠가 한번 8월 종파투쟁 주제로 연재 한번이라도 해야 하는거 아닌가 모르겠다.

3줄 요약

1. 김일성은 쇼크를 먹었다.
2. 김일성은 개인숭배=박헌영 숭배라고 물타기를 했지만 소련에게 진압당했다.
3. 김일성은 연안파와 소련파 숙청의 당위성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소련과 중국의 태도에 고무된 연안파가 선빵을 쳤다?

뭔가 개판인... 이도 저도 아닌 글이 되버렸네....

참고문헌
북한 현대사, 와다 하루키, 창비.
북한의 종파사건과 중국, 박종철,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김일성의 '반종파투쟁'과 북한 권력구조의 형성, 이종석, 역사비평사.


스탈린은 중국 인민의 벗이다! ㄴ중일전쟁

중국과 소련의 우애를 과시하는 중공 선전포스터

금년(1939년) 12월 21일은 스탈린 동지의 60세 탄신일이다. 전 세계에서 이날을 알고 있는 혁명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 속으로 열렬한 축하의 뜻을 표하리라 짐작된다.

스탈린은 축하한다는 것은 그저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니다. 스탈린을 축하한다는 것은 곧 그를 지지하며, 그의 사업, 사회주의의 승리, 그가 인류에게 지시한 방향, 자신의 친근한 벗을 지지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전 세계 대다수의 인류가 수난자들인 상황에서 오직 스탈린이 가리키는 방향만이, 오직 스탈린의 원조만이 인류를 재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중국 인민은 역사상 가장 심각한 재난을 겪는 시기에 처해 있으며, 다른 국가의 원조를 가장 절실히 바라는 시기에 처해 있다. <시경>에 "새가 우는 것은 그 벗을 찾음이라."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는 바로 그러한 시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우리의 친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일부 국가의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중국 인민의 친구라고 자칭하고 있고, 중국 사람들 중에서도 일부 사람들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그들을 친구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친구는 당나라 때의 이림보와 같은 자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림보는 당나라 때의 재상인데 '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하나 마음 속에는 칼을 품은' 사람으로 이름난 자였다. 지금 '친구'라고 하는 자들은 바로 '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하나 마음 속에는 칼을 품은' 친구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것은 입으로만 중국을 동정한다고 하는 제국주의자들이다.

그러나 다른 한 부류의 친구들은 이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진심으로 우리를 동정하며 우리를 형제처럼 대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소련 인민이며, 스탈린이다.

어느 한 나라도 중국에서 자신들의 특권을 포기하지 않았으나, 오직 소련만이 포기하였다.

제1차 대혁명 시기에 모든 제국주의자들은 모두가 우리를 반대하였으나, 오직 소련만이 우리를 원조하였다.

항일전쟁 이래 어느 한 제국주의 국가의 정부도 진정으로 우리를 원조해주지 않았으나 오직 소련만은 공군과 물자를 원조해 주었다.

이래도 분명하지 않단 말인가?

중화민족과 중국 인민의 해방사업은 오직 사회주의적 국가, 사회주의적 수령, 사회주의적 인민, 사회주의적 사상가, 정치가, 근로자만이 진정으로 원조해 줄 수 있으며, 우리의 사업은 그들의 원조가 없이는 최후의 승리를 달성할 수 없는 것이다.

스탈린은 중국 인민 해방사업의 충실한 벗이다. 스탈린에 대한 중국 인민의 경애하는 정, 소련에 대한 중국 인민의 우의는 완전히 이러한 성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며, 그에 대한 그 누구의 도발, 이간, 요언, 중상도 결국에 가서는 아무 소용 없을 것이다.

1939년 12월 30일, 마오쩌둥의 교시
<스탈린은 중국 인민의 벗이다>
모택동 선집 2권, 범우사, 366~367페이지에서 재인용.


여담

1. 천하의 모택동도 스탈린 앞에서는 설설 기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930년대 모택동의 독자 노선을 정당화시키는 근거조차도 코민테른 요원인 오토 브라운보다도 모택동 자신이 코민테른의 노선을 잘 이해한다는 주장에 있었다.

2. 모택동이 말하는 저 '이권 포기'란 것은 카라한 선언을 말하는 모양인데 실질적으로는 매우 기만적인 선언이었고 소련은 국민정부와 중공에게 일관적으로 러시아 제국 시절의 이권을 강압적으로 요구하였다.

3. 1960년대에 이르러 중국은 소련을 사회주의적 제국주의 국가로, 소련은 중국을 모험주의에 빠진 불량국가로 규정한다.

1942년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성스차이에게 보내는 편지 ㄴ중일전쟁

때는 바야흐로 1942년. 신강성의 지배자 성스차이는 독일군이 기세등등하게 소련 안으로 진격하는 것을 보고 앞으로 소련 지원을 받기는 글러먹었다고 생각했더랬습니다. 1942년 4월, 성스차이의 넷째 동생 성스치가 암살당하자 성스차이는 이것이 소련의 짓이라고 비난하면서 소련과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소련은 성스차이가 뭘 잘못 먹었나 싶어서 너네 내부 사정을 우리탓하지 말라고 답변했습니다.

얼마 안가서 소련 외무인민위원장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성스차이를 훈계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우리는 각하의 좌우에 제국주의 간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중소관계와 신강성을 파괴하려고 하면서 각하를 꼭두각시로 만들려 하고 있다. 1941년 1월 각하는 우리 사람에게, 중국에서 이탈하여 신강에 신강소비에트공화국을 세우고 소련에게 가입하겠다고 이야기하였다. (...) 또한 신강을 소비에트화하는 것은 전 중국을 소비에트화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소련 정부는 그 말을 듣고 수년 전부터 말했듯이 각하의 의견을 반대하였다.>










그리고 이 편지는 1942년 7월 16일, 충칭의 장제스에게 갔습니다.

이 새끼들이??

뒷 얘기는 다음 기회로...

1971년, 중공의 유엔 가입을 반대한 35개국 ㄴ공산중국

1971년 26차 유엔총회의 광경

1. 오스트레일리아

2. 볼리비아

3. 브라질

4. 중앙아프리카공화국

5. 차드

6. 콩고

7. 코스타리카

8. 베냉(당시 명칭은 다호메이)

9. 도미니카

10. 엘살바도르

11. 가봉

12. 감비아

13. 과테말라

14. 아이티

15. 온두라스

16. 코트디부아르(당시 명칭은 아이보리코스트)

17. 일본

18. 캄보디아(당시 명칭은 크메르)

19. 레소토

20. 라이베리아

21. 마다가스카르

22. 말라위

23. 몰타

24. 뉴질랜드

25. 니카라과

26. 니제르

27. 파라과이

28. 필리핀

29. 사우디아라비아

30. 남아프리카공화국

31. 스와질란드

32. 미국

33. 부르키나파소(당시 명의는 오트볼타)

34. 우루과이

35. 베네수엘라

오승희, 중국의 대 일본 배상청구 포기 요인 연구 : 타이완 문제와 중일 경제협력을 중심으로, 이화여대 석사학위 논문.
21페이지.

이야 신난다!!!

하지: 38선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운데 행정구역을 경계로 한반도 나누는건 어떰? 기타 근현대사

하지는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에서 38선 철폐론을 주장한 한편으로 38도선을 행정구역별로 재조정하자고 제안했다. 38도선의 행정구역별 조정안은 원래 미 국무부에서 나온 것이었다. 국무부는 1945년 11월 주소대사 해리만에게 소련과 협상할 주제 중 하나로 이 문제를 거론했다. 국무부는 "(7) 두 지역 간에 분쟁적인 영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경기도는 전체 미국 지역으로, 황해도는 전체 소련 지역으로 조정함"이라는 조항을 주문했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하지는 슈티코프에게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38선 분할 대신 정치적 계선을 따라 미소 간의 군사분계선을 조정하자고 제안했다. 하지의 제안은 다음과 같았다.

1. 38도선 이남에 위치한 황해도 지역을 소련군 사령관에게 이양한다.

2. 38도선 이북에 위치한 경기도 지역을 미군 사령관에게 이양한다.

3. 강원도 지역은 행정군계에 따라서 다시 조정한다.

강원도 지역의 조정은 군 단위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었으며 세부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분할방안이 제안되었다.

1. 소련 통제하의 지역: 통천, 평강, 철원, 고성, 인제, 회양, 이천, 김화, 양구, 양양.

2. 미국 통제하의 지역: 화천, 홍천, 평창, 삼척, 정선, 원주, 춘천, 횡성, 강릉, 울진, 영월.

(...)

이 제안은 강원도 철원-김화-양구-인제-양양의 남측 외곽선을 소련의 새로운 남방 경계선으로, 화천-춘천-홍천-강릉의 북측 외곽선을 미군의 새로운 북방 경계선으로 선정하자는 것이었다. 38선을 따라 부분적으로 혹은 현지 사정에 따라 경계선을 조정하는 문제에 대해 소련대표단은 본국 고위당국자와 협의한 뒤 이 문제를 의제에 삽입하기로 합의했다.(의제 제14사항) 그러나 슈티코프는 이에 대해 답변을 제출하지 않아, 결국 38선의 행정구역별 재조정안은 무산되었다.

미국무부, 하지의 38선 행정단위별 재조정은 현존하는 도군 단위의 행정계선을 기준으로,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38선 설정이 초래할 어려움을 덜 수 있는 효과가 있었다. 38선은 어떠한 지형학적 근거도 없이 정치적 이유로 그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만약 이러한 행정구역별 재조정이 이루어졌다면, 상상의 경계선인 38선의 정확한 위치판정의 어려움에서 비롯된 38선 충돌의 상당부분은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행정단위별 재조정은 종국적으로 한반도의 분단을 보다 자연스럽고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 위험성이 충분했다. 맥큔 역시 만약 행정구역에 근거해 38선을 재조정한다면 결과적으로 한반도의 분할을 고착화할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정병준, 돌베개.
171~174페이지.

하지만 그거 없이도 고착화되었으니 후새드,...

현실주의적 국제정치학이란 무엇인가? 기타 근현대사

학문의 발전단계에 있어 최초의 환상이 깨어지고, 유토피아적인 시기의 끝을 기록하게 되는, 즉 사고가 소망에 미치는 영향을 흔히 현실주의라고 한다. 초기 단계의 소망과 꿈에 대한 반발을 의미하는 현실주의는 비판적이고 때로 냉소적 측면을 지니게 마련이다. 사고의 영역에서 현실주의는 사실을 사실로 수용하고 그 인과관계의 분석에 초점을 둔다. 따라서 현실주의는 목적의 역할을 평가절하하고 묵시적 혹으 명시적으로 사고의 기능이 사태의 진전을 연구하는 것이지 이에 영향을 미치거나 혹은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행위의 영역에서 현실주의는 현존하는 세력의 힘에 저항하는 무모하며, 현존하는 추세는 불가피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최고의 지혜란 이들 세력과 추세를 수용하고 이에 적응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객관성"이라는 이름 하에 주장되는 이러한 태도는 결국 사상을 무력화시키고 행동을 부정하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한다. 그러나 학문의 발전단계에서 현실주의는 유토피아주의의 지나침을 교정하기 위해 필요하다. 이상주의가 현실주의의 모자람을 교정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과 같다.

(...)

현실주의자들은 스스로 변경할 수 없는, 주어진 발전단계를 분석한다. 이들이 볼 때 철학이란 언제나 세상을 변경하기에 너무 늦게 온다. 철학이란 기왕의 질서를 변경하는 수단이 아니라 알기 위한 수단이다. 이상주의자들은 미래를 쳐다보며 창조적 자율성으로 사고한다. 현실주의자들은 과거를 돌아보며 인과적으로 사고한다. 모든 건전한 인간의 행동과 사상은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자유의지론과 결정론 사이의 균형 위에 서야 한다. 사건의 인과적 전개를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절대적 현실주의자는 현실을 변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적으로 부인한다. 인과적 전개를 부정하는 절대적 이상주의자는 자신이 변경코자 하는 현실과 그 변경방법을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이상주의의 결점은 순진함이다. 현실주의자의 결점은 황페함이다.

(...)

현실주의자들은 이러한 이상주의자적인 명제가 사실이 아니라 의욕에 불과하며, 직설법이 아닌 소망법으로 기술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인식한다. 나아가 그들은 이상주의의 명제가 선험적이 아니라 이상주의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현실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현실주의자들의 눈에 '인간평등론'은 '잘나고 싶어 하는 못난이들'의 이데올로기요, '평화의 불가분성'이란 타국의 공격에 취약한 국가가 자국에 대한 공격은 다른 모든 국가의 관심사라고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이며, '주권국가의 부조리성'은 주권의 원칙이 자국의 이익에 반한다고 여기는 지배국가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이처럼 이상주의적 이론의 숨은 배경을 폭로하는 것은 진지한 정치학 논의에 필요불가결한 조건이다.

20년의 위기, E.H. 카, 녹문당.
30~34페이지.

국제정치학은 왜 이상주의적으로 시작되었는가? 2차 대전

본격적으로 국제정치학에 대해 공부하면서 공부삼아 써보는 포스팅.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과 마찬가지로) 국제정치학의 경우도 처음부터 목적론적 측면이 두드러졌다. 그것은 (1차) 세계대전의 참화에서 비롯되었다. 이 새로운 학문의 창시자들의 한결같은 목적은 국제정치라는 육체에 전쟁이라는 질병이 도지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전쟁을 방지하자는 열정이 이 학문의 방향과 내용을 지배했다. 다른 모든 유치학문과 마찬가지로 국제정치학은 솔직히 유토피아적인 성격이 두드러졌다. 초기 단계에는 소망이 사고를, 이론화가 관찰을 앞섰다. 있는 사실과 쓸 수 있는 사실 수단에 대한 분석은 거의 없었다. 거의 전적으로 목표에만 매달렸다. 목표의 중요성을 강조한 나머지 수단에 대한 분석적 비판은 파괴적이거나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출발하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한 보좌관이 <국제연맹>에 대한 그의 복안이 성공할 것이라고 믿느냐고 묻자 윌슨은 이렇게 대답했다.

"안되면 되게 하라!"

국제경찰, 혹은 집단안전보장이나 기타 국제질서에 대한 여러 복안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비판론에 대응하는 방식은 대개 그 복안이 왜, 그리고 어떻게 작동할 것이라고 설명하는 대신 그것이 실패할 경우 초래될 결과를 강조하면서 반드시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아니면 대안을 내어 보라는 식이었다. 연금술사들이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들도 누가 납이 어떻게 금이 되는가, 혹은 인간이 어떻게 사회주의 모델 사회에서 살 수 있는가 물으면 아마 그런 식으로 대답했을 것이다. 비판적 사고는 무시되었다.

1919~39년간 국제정치에 대한 저작들은 경제학자 마셜이 성급한 유토피아적 주장의 무책임한 신경질을 마치 실력없는 장기꾼이 혼자 초와 한 말을 다 움직여 장기를 두는 것에 비유한 것과 같았다. 이와 같은 지적 실패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이 시기 초기에는 장기꾼의 실력이 워낙 형편없어 실력 있는 훈수꾼조차 게임이 어렵다는 사실을 거의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1931년 이후 드러난 일련의 사태로 인해 의욕만으로 국제정치학의 기반을 삼을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났다. 국제문제에 대한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생각이 발붙일 수 있는 여지가 겨우 마련된 것이다.

20년의 위기, E.H 카, 녹문당.
12~13페이지.

여담

1. 실제로 국제정치학이 태동하던 1910년대는 낙관적이기 그지 없었다. 1차 세계대전 직전에 더 이상은 전쟁은 불가능하다는 노먼 에인절의 <거대한 환상>이 출간될 정도였으니.

2. 고전적 현실주의 이론가 키신저 역시 자신의 저작인 <세계질서>에서 윌슨의 전후 구상에 대해 경직된 강국과의 동맹으로 유지되던 질서를 불안정한 집단안보로 바꾸었을 뿐이라고 혹평한다.

3. 본문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카는 1910~30년대의 이상주의적 국제정치학 학풍을 들어 연금술이나 플라톤의 철인정치론에 비유한다.

1925년 시점에서 공산당이 판단한 국민당 좌파의 주요 인사들 ㄴ민국시대

나무위키에서 인생을 낭비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자료에서 발췌.



1. 왕징웨이(왕정위): 아직까지도 친일파 이미지 빼면 그나마 좌파 이미지가 남긴 했지만 1927년 7월 분공을 결정한 당사자이며 서안사건 이후 공산당과 합작하느니 일본에 붙는게 낫다는 입장을 견지.

2. 장제스(장개석):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3. 후한민(호한민): 4.12 상하이 정변을 지지하였으며 난징 국민정부의 수장으로 일시 추대되었다. 국민정부 수립 이후 입법원장을 지냈다.

4. 탄옌카이(담연개): 상하이 정변 시기 우한 국민정부 편에 서 있었으나 영한합작 과정에서 장제스 측에 가담, 난징 국민정부 주석, 행정원장을 역임했다.

5. 우징헝(오경항): 국민정부 내부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감찰위원을 지냈으며 1927년 4월, 공산당 탄핵안을 제출하였으며 상하이 정변을 지지. 국부천대 후 대만으로 이주.

6. 리스쩡(이석증): 오경항과 더불어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감찰위원을 지냈으며 오경항의 공산당 탄핵안을 지지. 국공내전 후 스위스, 파라과이를 거쳐 대만으로 귀국.

7. 청첸(정잠): 호남군벌. 군사위원회 참모총장을 지냈으며 북벌 시기 반장군벌이었지만 반장전쟁 후 장제스 편에 합류. 국공내전 후 중공에 합류.

8. 위유런(우우임): 국민정부 감찰원장을 지냈고 국부천대 후까지 대만에 잔류.

9. 쉬쳰(서겸): 광저우 국민정부 사법원장. 국민당 좌파의 대표기수이지만 1927년 분공 이후 완전히 몰락.

10. 구멍위(고맹여): 왕징웨이의 측근. 개조파의 좌장으로 반장전쟁 시기 내내 장제스 타도를 시도했으나 1932년 장왕합작 이후로는 국민정부에 합류. 헌정 실시 이후 웡원하오 내각 하에서 행정원 부원장을 지냄. 국공내전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대만으로 귀국.

이상의 명단은 1925년 12월 3일, 중국 공산당 총서기 천두슈가 작성한 명단 중에서 주목되는 인물들.
이중에서 중공 합류는 청첸 1인, 1927년 이후에도 친공좌파로 분류가능한 인물이 추가로 쉬쳰 1인.....

이들의 공통점은 1925년 12월 시점에서 공산당과 친했다는 것... 그리고 불과 4개월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하면 중국 현대사가 얼마나 개판인지를 가늠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문화대혁명으로 알아보는 성교육의 필요성 ㄴ공산중국

1972년의 어느 여성 홍위병


사랑은 퇴폐적이고 부르주아적인 감정으로 간주되었으며 섹스는 금기시되었다. 많은 학생들이 가장 기초적인 생리학적 지식도 없이 성장했다. 예컨대 줘페이는 한 남학생의 자전거를 얻어탄 뒤로 혹시 임신한 것은 아닐지 너무 무서웠지만 가족은 물론이고 누구에게도 물어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만주로 갈 기회를 얻고 기뻐했던 베이징의 홍위병 양레이는 다음과 같이 같단히 정리했다.

"우리는 섹스를 하지 않았을뿐더러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섹스는 부르주아적인 행위였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내가 알기로 매우 더럽고 추잡한 짓이었다. 몹시 위험하기까지 했다. 그동안 읽은 책이나 보았던 영화에 따르면 오직 나쁜 사람들만 섹스에 관심이 있었다. 혁명가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혁명가들은 사랑할 때 마음으로 사랑했다. 그들은 손도 잡지 않았다."

(...)

하지만 도시에서 온 학생들과 달리 대다수 시골 사람들은 섹스를 별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자신이 머물 농부의 집에 처음 도착한 학생들은 집주인 부부의 노골적인 애정 표현을 보고 충격을 받기 일쑤였다. 네이멍구로 보내진 열여섯살 소녀 왕위안위안이 어느날 배수로 옆에서 사랑을 나누는 남녀를 목격하고 해당 사실을 생산대 대장에게 신고했다. <하지만 나이 든 농민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냥 웃어 넘겼다.> 민속 문화의 다른 많은 분야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기에서도 문화 대혁명의 영향은 매우 피상적인 수준이 그쳤다.

문화대혁명,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461~462페이지.



그리고 이 시각 중국에서는?

뭐 둘이 큰 연관관계가 있다는 건 아니고 저 기사를 보니 생각나서 올리는 포스팅. 우스갯소리로 보시면 됩니다.

소련 덕분에 잠시 부활한 토법고로 ㄴ공산중국

이 행님 하는 거 보고 잘 배우라 해~


(1969년, 중국과 소련의 긴장 상태가 고조되자) 도시에 남은 사람들에게는 전쟁에 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상하이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 소책자가 배포되어 사람들에게 포탄 궤적이 그냥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행기의 진행 방향으로 사선을 그린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핵공격이 가해질 경우에 대피하는 요령, 참호를 파는 요령, 소총을 이용한 대공사공요령, 건물의 안전한 쪽에 대피하는 요령, 응급 처치 요령, 화재 진압 요령, 외국 전투기 식별 요령 등을 설명했다. 소련과 미국의 항공기와 헬리콥터에 부착된 표식과 전체적인 형태를 설명하는 광고판도 등장했다.

(...)

헌혈을 부추기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무엇보다 참호와 방공호를 파서 국가에 기여하도록 요구했다. 주석은 <동굴을 깊게 파고 최대한 많은 곡물을 저장하라>라고 독려했다. 이미 1965년 6월에 마오쩌둥은 <집 아래에 대략 1미터 깊이로 대피소를 파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모든 집을 땅굴로 연결한다면 그리고 집집마다 각자 대피소를 구축한다면 국가로서는 어떠한 비용도 부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라고 제안했던 터였다. 독일군이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며 거리의 모든 집에서 러시아인들과 싸워야 했던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연상시키는 종말론적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그는 모든 도시가 시가전에 대비하여 준비를 갖추길 바랐다.

(...)

적어도 수도에서 주석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건설 광풍이 불면서 베이징은 1년 이상 흙더미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벽돌로 뒤덮였다. 백화점과 정부 청사 내부에 깊은 땅굴이 파였으며 이 땅굴은 좁은 터널과 벙커를 바탕으로 엘리베이터까지 갖춘 거대한 규모의 지하 세계와 연결되었다. 한편 톈안먼 광장에는 군이 인민 대회당을 미로 같은 터널과 연결하는 막대한 임무를 맡으면서 기중기과 파일 드라이버를 가리기 위해 거대한 광고판이 등장했다.

(...)

사람들은 또 벽돌을 기증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강철 생산량을 부대로 늘리라는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토법고로를 만들었던 대약진 운동이 떠오를 정도로 모든 마을과 도시에 벽돌을 굽는 임시 가마가 등장했다. 땅을 팔 때 나오는 진흙으로 벽돌을 만들어서 지하 대피소를 보강하는데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베이징에서는 거대한 흙더미 주변에 진흙 가마들이 등장했고 1인당 벽돌 서른개씩 할당량이 주어졌다. 어쩌면 이미 예상했겠지만 벽돌에는 반소 구호가 새겨졌다. 

한 보고서가 열변을 토했듯이 상하이에서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집에 있는 닭장과 수도를 허물어서 벽돌을 가져왔다. 심지어 침대와 가구를 괴거나, 담장을 보강하거나, 난로를 받치거나, 바닥에 깔았던 벽돌을 가져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사람들은 임시 가마에 사용할 석탄을 기증했다. 이들 임시 가마를 통해 기존의 건물에서 회수하거나 찾아낸 것을 제외하고도 700만 개에 달하는 벽돌이 생산 된것으로 알려졌다.

사망자 수는 벽돌 개수만큼 꼼꼼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모래나 돌, 점토, 벽돌 등으로 제작한 일부 가마가 무너지거나 폭발한 사례를 고려하면 그 수가 결코 적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상하이에서 1971년 국경절을 맞이하여 벽돌 생산량 신기록을 달성하고자 했을 때 푸퉈 구역의 가마 중 하나가 무너지면서 열두명이 매몰되거나 부상을 당했다. 임시 가마는 1970년대 중반까지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했다.

(...)

무지막지한 공을 들였음에도 대부분은 쓸데없는 짓에 불과했다. (...) 결과적으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토끼 굴같은 지하 시설은 완성과 동시에 빠르게 사람들에게서 잊혀갔으며 곰팡이와 해충에게 점령당했다. 머지 않아서 많은 땅굴이 폐쇄되었다. 지하 연결망은 군사 기밀로 간주되었고 맨손으로 그처럼 엄청난 일을 해낸 당사자들에게 출입이 금지되었다.

문화대혁명,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332~339페이지.

여담

1. 당연하지만 주석님께서 전문가들을 머리에 마구니가 가득 찬 부르주아라고 비난해주신 덕분에 공사에 전문가들의 개입은 없었고 많은 공사장이 부실공사로 매몰되거나 지반 째로 함몰되어 수많은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2. 나중에 이런 짓은 북한에서도 하는데 미친 놈들 특징은 이런 짓을 기술에 의존하는 나약한 부르주아지들에 대비되는 사회주의 로력 영웅이라고 칭송한다는 점이다.

3. 결국 마오가 잘못했네.

박영준 교수님의 역개루 이벤트 답변 기타 근현대사

박영준 교수님께서 친절하시게도 본인의 우문에 일일히 매우 알찬 답변을 보내주셨습니다. 이글루스의 동포 여러분들도께서도 한번 조람하소서.

 

1. 최근 일본 제국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가토 요코 씨의 저작을 몇권 읽은 바가 있는데 가토 요코씨의 책을 번역하신 경력이 있으시므로 감히 질문합니다. 가토 요코 씨의 저작의 신뢰도와 그 논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여쭙고 싶습니다.

 

->가토 요코 교수는 일본 근대역사 전공 학자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리버럴에 속합니다. 같은 동경대의 미타니 히로시 교수 등이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적 경향을 갖고 있다면, 근대 일본 정치외교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지요. 그런 시각에서 일본의 군대, 징병제, 중견 간부, 전쟁에 대한 연구들을 주도하고 있지요. 그같은 일본 학자들의 연구 경향을 소개하고 싶어 그녀의 책을 번역, 출판한 것이구요.

다만 가토 교수가 정치외교 분야에 대한 사회과학적 지식이 충분치는 않아서, 서술상 균형을 잃고 있는 부분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실증적인 사료 발굴은 장점이라고 봅니다만, 일본의 군국주의, 전쟁에 대한 구조적인 설명을 기대한다면, 실망하는 점도 있을 거라고 봅니다. 같은 주제를 다룬 마크 피티(Peattie)나 이리에 아키라 등의 저술과 비교하면 가토 요코 교수의 약점이 보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2. 1930~40년대 일본 육군의 소련의 극동 군사력에 대한 경계심과 소련을 주적으로 설정한 전략에 대해 대략적으로 어떤 인식을 가지고 계신지를 여쭙고 싶습니다.

 

->일본 육군이 러시아(1918년 이후 소련)를 가상적으로 설정한 최초의 공식 문서는 1907년 제국국방방침이었고, 이러한 주적인식은 1918, 1923, 그리고 1936년 제국국방방침 개정에서도 이어집니다. 아무래도 일본 육군은 중국 대륙과 만주에서 소련을 제압하고, 이어 미국과의 최종 전쟁에 임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극동 지방 군사력을 염두에 두면서 대소 전략과 전력증강 계획을 수립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이 계획대로 이행되지는 않았습니다. 일본은 중일전쟁을 벌이면서 육군 주력을 중국 대륙에 투입하는 우를 벌입니다. 그리고 중일전쟁 과정에서의 장고봉 사건과 노몬한 전투를 통해 소련군과 교전을 벌였는데, 특히 노몬한 전투에서 일본 육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습니다.

일본 육군이 소련을 가상적으로 설정하면서도 중일전쟁에서 육군 주력을 소모하고, 실제 소련과의 전투에서는 취약성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일본 육군의 전략 이행에서 문제가 나타났다고 봅니다.

 

3. 1920~30년대 심화된 일본 사회의 모순과 이로 인해 촉발된 군부의 급진화 및 의회정치의 붕괴 과정에 대한 일본 국민의 책임은 어느 정도로 책정하시는지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 1920년대까지 일본에는 민정당과 정우회 등 정당세력이 번갈아 가며 정권을 담당하였고, 이 정당들에 의해 군부의 움직임도 제어됩니다. 그러나 1930년대 이들 정당들에 의해 런던군축회의가 체결되고, 군비축소가 진행되면서, 게다가 대공황까지 겹치면서 육해군 소장파 장교들이 반발하기 시작합니다. 소장파 장교들에 의해 수상이 저격되고(1931), 연이어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면서(19362.26 사건), 천황과 원로 정치인들은 민간 정당들에서 수상을 선출하지 못하고, 군부 인사에게 수상을 맡기게 됩니다.

문민통제 제도의 미비, 그리고 군부 세력의 하극상 등에 의해 군부의 대두가 결정적이 되었다고 보여집니다. 일본 국민들은 1925년 보통선거 실시에 의해 다수가 정치에 참가하게 됩니다만, 천황의 대권을 인정한 메이지 헌법 하에서 아직 국민주권의 힘은 미약하였고, 국민 참

가를 담아낼 정치제도도 성숙하지 않아, 군부의 대두를 제어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4. 일본 학계에서 주장하는 <위로부터의 파시즘>담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여쭙고 싶습니다.

 

-> <위로부터의 파시즘론>이란 일본의 파시즘, 군국주의가 일반 국민들의 의사나 희망과는 무관하게 상층 군부, 정치인들의 일방적 의도에 의해 비롯되었다는 시각이지요? 분명히 그런 측면은 있습니다. 1920년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에 시민들의 자유로운 의사표현이나 정치참여가 가능했던 양상은 있었지요. 그러던 것이 1930년대 군부 대두에 의해 사상과 언론 탄압이 따르면서, 일반 국민들의 정치참여나 의사표현이 제약받기 시작하지요. 더 검토가 필요하지만, 군국주의 혹은 파시즘이 자생적으로 아래로부터 성장한 것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5. 마루야마 마사오 씨 등이 제기한 <8.15 혁명론> 테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여쭙고 싶습니다. 제가 듣기로 1945815일은 단순한 일본 제국의 패망이 아닌 일본국민을 압제하던 군부 독재와 파시즘 세력의 패망으로 일본 국민에 있어서도 해방이었으며 이를 혁명으로 보아야 한다는 시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 1930년대 일본 군부와 군국주의 집권이 일부 리버럴 지식인들의 의사에 반하는 것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들 입장에서 보면 1945년 패전은 군국주의 세력의 퇴장과 자유주의 세력의 복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성향의 국민들이 군국주의 세력에 대해 조직적인 저항을 한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패전은 의도적인 변혁 추진의 산물이 아니었구요, 주어진 것이었다고 보입니다. <8.15 혁명론>은 결과론적인 발상에 불과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6. 1930년대 일본 군부의 화북분리공작에 있어서 일본 외교부는 일본 군부의 폭주를 제어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의 폭주를 사후승인하는 등 결과적으로 방조, 협조하는 모습을 보인바가 있는데 중일전쟁 개전 이전 1930년대 중반의 일본 외교부의 대중 스탠스를 대륙쪽 학자들은 그저 일본 군부가 무력으로 침략하려고 시도한 것이면 외교부는 외교력으로 침략하려한 것 정도로 폄하하는 것을 본 바가 있습니다. 교수님은 이러한 시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흥미로운 질문이군요. 외무성 내에도 두가지 흐름이 병존 혹은 대립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1920년대 시데하라 기주로 외상의 전통을 이어받아, 중국에 대해서는 간섭 최소화, 영미와 협조주의를 취하는 노선이 그 하나구요. 다른 하나는 군부와 비슷하게 아시아에서 영국 및 미국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일본의 독자적 세력 확대를 추구하는 노선이지요.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후자의 혁신세력 영향력이 더 강해지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아요. 1934년 외무성 정보국장 아모우 에이지의 성명, 즉 동아에 있어서의 먼로 선언 발표가 이를 보여줍니다. 그런 점에서 중국측 연구자들의 관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7. 6번에서 조금 더 나아가 소위 협화외교라 불리는 히로타 고키의 대중 유화정책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것의 '진의'라 불릴만한 것은 어떤 것이었겠습니까?

->히로타 코키(廣田弘毅)는 제가 보기에 다른 외상 출신인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郎), 사토 나오다케(佐藤尙武) 와 달리, 대륙팽창주의에 경도된 인물이라고 봅니다. 히로타가 외상이나 수상 재임 시절에 특히 대륙팽창적 정책을 취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미국의 일본사학자 이리에 아키라도 이 점을 강조했지요.

 

 

 

8. 히로타 3원칙을 국민정부가 승인하였다면 국민정부와 일본 제국 사이에는 항구적이라 부를 만한 우호관계가 구축되는 것이 가능했겠습니까?

 

->히로타 3원칙이라면 1935년 히로타 외상 시기에 제안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 시기 히로타 외상의 대중 정책은 1934년 아모우 에이지 성명에 준해 진행된 것으로, 중국 대륙에서 영국 및 미국의 영향력을 배제하는 것에 중점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중국이 받아들이기에도 곤란하고, 영국 및 미국이 동조하기에도 곤란한 것이어서, 국제협력과 중일 우호와는 거리가 있는 성격의 정책이 아니었나 보여집니다.

 

 

 

9. 만약 노구교 사건이 외교적인 해결이든 아님 당고정전협정과 같이 현지 군사협정과 같은 방식으로 소규모 국지전 상태로 종전되었다 하더라도 향후에 중일전쟁과 같은 전면전이 발생했을 가능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시 말해 중일전쟁이 필연이었다고 보십니까?

 

-> 중요한 질문이군요. 전쟁이 발발하려면 군사 혹은 정치지도자의 군사전략, 부대 및 무기체계의 증강 및 배치, 그리고 양국간 정치 군사관계의 대립 등의 조건이 부합되어야지요.

1937년 노구교 사건은 최초에는 우발적인 사건이었는데, 만일 일본 정부가 3개 사단 증파의 결정을 내리지 않았으면, 저는 확대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수상 고노에 후미마로가 영국 및 미국에 대해 대립 의식을 강하게 가진 점, 관동군이나 중앙 육군성 내의 군부 소장파를 중심으로 대중 전쟁 불가피론이 강했다는 점, 1936년 제국국방방침에 의해 중국도 소련, 미국, 영국 등과 더불어 가상적의 하나로 제기되고, 그에 따른 육, 해군 군사력 증강이 추진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우발적 사건이 전쟁으로 비화되었다고 봅니다.

 

10. 외상 및 수상 재임 시절 협화외교를 주장했던 히로타가 1차 고노에 내각 시점에서 트라우트만 공작을 거부하는 등 중국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견지한 것은 히로타의 스탠스 변화로 보는 것이 옳겠습니까? 아니면 일본 군부를 의식한 정치적 행동이라고 보십니까?

->히로타를 평가하시는 것 같군요. 저는 히로타가 일본 외상 가운데에서 가장 군부의 생각에 가까웠던 인물이 아닌가라고 평가해요. 대중 강경 정책, 혹은 영국과 미국의 배제 정책이 그의 근본적 생각이 아니었던가 해요. 그러한 히로타를 수상 고노에 후미마로 등이 중용하구요. 스탠스 변화라기 보다는 그의 정책론은 비교적 일관된 것이 아니었을까요?

 

 

 

11. 태평양 전쟁 직전까지 영국과 미국은 일본에 대해 진정으로 유화정책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분석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9405, 독일이 프랑스를 침략하면서, 영국은 처칠 내각이 성립되면서 본격적으로 대독전에 돌입하지요. 그리고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무력 진주하면서, 미국은 일본에 대한 경계태세를 강화합니다. 그리고 19418, 처칠 수상은 루즈벨트 대통령과 대서양 헌장을 공동발표하면서, 독일 및 그 동맹국들과의 대결 자세를 선명하게 보입니다. 이 상황에서 미국과 일본의 화평 성립 가능성은 거의 사라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12. 1930년대와 1941년까지 일본 군부 및 외교부가 영미에 대해 가졌던 인식은 어떤 것이라고 보면 되겠으며 영미의 대일정책의 성격은 어떻게 규정하는 것이 맞다고 보십니까?

->큰 질문이네요.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1936년 제국국방방침에서 일본 육해군과 정부는 미국, 소련, 중국, 영국을 가상적으로 설정하면서, 그에 대한 전쟁 준비를 보다 구체화합니다. 이것이 영미에 대한 일본의 기본 정책입니다.

영국과 미국 측에서는 잠재적으로 일본을 위협으로 생각하면서도, 본격적으로는 19405, 독일의 대불 공격 이후에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군사 진주하면서 전쟁을 고려했던 것 같아요. 미국은 중립주의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19418월 대서양 헌장에 이르러서야 유럽과 아시아에서의 전쟁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앞으로도 추가 이벤트가 있기를 고대할 뿐이오.


다른 질문들은 역개루 카페 참고!

https://cafe.naver.com/historyarchive/11210


현재 오항녕 교수님과의 이벤트도 진행 중이라오.

https://cafe.naver.com/historyarchive/11065


린뱌오:미국과의 화해? 인정할 수 없어. ㄴ공산중국

고전짤로 시작하는 하루


1969년 (중소 국경분쟁) 사태로 마오와 저우언라이가 배운 교훈은 확실히 (당내에서 군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린뱌오의 입장과) 그 반대였다. 즉 소련이 국경에서 훨씬 강경한 노선을 취했고, 중국이 거기에 아무리 단호히 대처하더라도 소련의 가공할 공격을 인민해방군이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베이징이 닉슨 행정부의 (데탕트) 제안을 수용한 것이었다. 워싱턴에 대한 개방은 러시아인들이 중국을 공격했을 때 미국이 무시해도 좋을지 계산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중미관계의 개선 이전에도, 닉슨 행정부는 소련의 침공에 대해 미국이 자비로운 중립을 취하지 않을 것을 모스크바가 알 것이라고 지적했다.

(...)

당연히 린뱌오는 아시아에서 나치-소비에트 협약에 비견되는 격변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중국이 두 강대국의 동시적인 위협 앞에서 진정으로 홀로 설 수 없다면, 제국주의 미국보다는 수정주의 소련과의 타협이 더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이 문제에서 린의 입장이 분명하게 밝혀진 적은 없었다. 후에 그는 '고립주의자'와 '대국 쇼비니즘'으로 비난받았으며, 이 점은 그가 미국이나 소련 어느 쪽과의 타협에도 반대했고, 중국이 자신을 보호할 만큼 충분히 강하다고 주장했음을 의미한다. 마오는 닉슨과 다른 외국 방문자들에게 린뱌오가 미국과의 접촉을 반대했다고 전했다.

만약 마오의 보고가 정확하다면, 그의 동기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인민해방군은 중국이 예전보다 더욱 고립되고 위협받고 있는 것으로 느꼈다. 마오의 정신을 물려받은 위대한 혁명군이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개인의 권리를 논할 수는 없었다. 저우언라이의 영역인 평화외 외교적 기술은 덜 중요해 보였을 것이다.

린에게는 불행했지만 마오는 외교로 시간을 벌 생각이었고, 10월 7일 신화통신은 중소 국경협상이 시작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

(린뱌오가 소련의 기습에 대비한) 명백한 전쟁준비는 러시아인들이 국경에서 더 많은 군사적 행동을 할 구실을 제공했을 수도 있다. 린의 명예가 실추되자 마오는 명백히 자신이 유발한 행위에 대해 그를 비난했다.

(...)

린이 비군사적으로 권력을 잡는 일은 가망이 없음이 증명되었고, 그는 더 위험한 방식에 착수했다.

중국현대정치사, 로더릭 맥파커 등 공저, 푸른길.
제4장 마오의 후계와 마오주의의 종결(1969~1982), 370~373페이지.

주석님 꼬라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은 부주석 동지 ㅠㅠ


여담

1. '더 위험한 방식'에 착수한 결과 린뱌오는 일가족과 몰살당했다더라...

2. 1971년 린뱌오가 소련으로 도주하고 있을때 인민해방군 공군은 린뱌오가 탄 비행기를 야간에 추격할 능력도 없었다더라. -ㅅ-

3. 결과적으로 1972년은 저우언라이의 해로 떠올랐고 저우언라이는 마오가 싼 똥을 상당수 치웠지만 1973년부터 마오가 장칭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다시 혼돈! 파괴! 망가!

존 매케인 의원 별세 늬우스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8&no=534942
https://news.joins.com/article/22914688

이분도 가는구나.

스탈린그라드의 패배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반응 2차 대전


독일 국민들은 파울루스가 불멸의 영웅으로 남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는지에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6군 장교들과 병사들이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독일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죽었다"는, 끝까지 믿고 싶지 않았던 비보를 2월 3일 접했을 때 독일 국민이 생각한 것은 참극이 일어났다는 것이었고 참패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었다. 친구와 가족들을 잃은 사람들에게 '영웅적 희생''은 위로가 안 되었다. 뉘른베르크의 여인들도 6군의 남편과 아버지와 아들과 형제를 수많은 사람에 속했다.

2월 3일 보도를 접하고 그들은 판매원의 손에서 신문을 빼앗아 갈기갈기 찢으면서 비통함에 울부짖었다. 남자들은 나치 지도부를 욕했다.

"히틀러는 석달 동안 우리한테 거짓말을 했다."

사람들은 소리 질렀다. 게슈타포가 군중 속으로 섞여 들었지만 분노와 비탄에 젖은 사람들을 체포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상부에서 자제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보안국은 6군의 비극으로 온 국민이 '깊은 충격'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국민은 깊은 슬픔에 잠겼고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지원군을 보내거나 철수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도 많았다. 사람들은 얼마 전까지도 어떻게 그런 낙관적 보고를 할 수 있었는지를 따졌다. 지난 겨울과 마찬가지로 소련의 전력을 과소평가했다고 비난했다. 이제 전쟁에서 이기기는 틀렸다면서 패전 뒤에 닥칠 결과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스탈린그라드 전까지 사람들은 정권은 욕해도 히틀러는 웬만하면 비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전멸이 히틀러의 책임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했다. "처음으로," 울리 폰 하셀은 목격했다.

"사람들이 히틀러를 직접 겨냥하여 수군거린다. 지도부가 제대로 위기를 맞은 것이다. ....쓸데없는 체면, 범죄적 체면 때문에 그 아까운 피가 희생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했다."

사람들은 1월 30일 연설에서 히틀러의 해명이 나올 줄로 알았다. 그런데 국민에게 분명하게 말하기를 꺼려하자 비난이 고조되었다. 반체제 세력은 고무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살인마'로 히틀러를 공격하는 낙서가 적힌 것은 지하 저항세력이 소멸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심상치 않은 사태에 놀라서 상당수 장교와 고위 관리들은 1938년과 1939년에 세웠던 음모 계획을 되살렸다.

히틀러 평전 2권, 이언 커쇼, 교양인.
676~677페이지.

여담

1. 야코프 주가시빌리와 파울루스의 교환 건을 뒤져보다가 우연히 찾은 대목... 이언 커쇼의 히틀러 평전을 아직도 덜 읽었으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2. 얼마 후 백장미단의 의거가 있었고 나중에 슈타우펜베르크의 암살 시도도 있었습니다. 이쯤되면 차라리 빌헬름 2세가 나았다는 주장이 바이에른에서까지 나옵니다.

3. 전혀 딴 얘기지만 푸이의 동생인 아이신기오로 푸제의 회고록을 구했습니다. 흥미로운 내용이 가득하네요.

아무리 일본군이라 해도 후임을 함부로 패면 이렇게 됩니다. 2차 대전

밤, 고타쓰에 들어가 책을 읽는데 구니오가 불쑥 찾아왔다. 앞서 신이치로한테서 구니오가 사라졌다는 말을 듣고 내내 걱정했는데 얼굴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

"도대체 어디 갔다 온 거야? 그것도 보름 씩이나."
"그냥 답례 인사를 좀 다니느라고..."

구니오는 화롯불에 손을 쬐면서 여느 때처럼 자포자기한 사람이 지을법한 엷은 웃음을 입가에 띄웠다. 나는 '답례 인사'가 무슨 뜻인지 대번에 알아듣지 못했는데, 알고보니 군대에 있을 때 이유없이 괴롭히거나 떄린 선임병들의 집을 한곳한곳 찾아다니면서 그때의 보답이라면서 기분이 풀릴 때까지 흠씬 패주고 왔다는 말이었다. 서쪽으로 야마구치현의 이와쿠니로부터 북쪽으로 아오모리현까지 돌아다녔다는데, 주소는 전역할 떄 확실히 적어뒀고 열차표 대신 사용할 전역 증명서까지 몇장 마련해뒀다고 하니 일찍부터 답례인사를 하기로 계획한 모양이었다.

"보고 싶어서 찾아왔다는 식으로 둘러대고 한놈 한놈 바깥으로 꾀어내서는, 아주 뒈지게 패버렸어. 군에 있을 땐 이놈이고 저놈이고 으스대는 꼴이 눈에 거슬렸는데, 사회에 나오니까 다들 부처님처럼 얌전해졌더라. 우리가 '수염 도깨비'라고 불렀던 햐쿠리하라 항공대의 선임반장 놈은 나가노현 오카야에 사는데, 2주 전에 식을 올리고 한창 신혼 재미에 빠져 있더라고. 끼니를 챙기는 것보다 우릴 패는 게 더 좋다고 떠벌리는 자식이었는데 말이지. 찾아갔을 때가 마침 저녁이라 색시와 둘만 있었는데, 그 자식은 그냥 집 안에서 패버렸어. 브래스너클을 낀 주먹으로 다짜고짜 코뼈를 날려버렸더니 그 자식 마누라가 꺄꺅 난리를 치기에, 내친김에 그 여자도 두세대 쥐어박아줬지. 뭐, 남편이 원한을 샀으니 부창부수지. 

제일 꼴사나웠던 건 이와쿠니 항공대의 분대장 놈이야. 그 자식은 사관학교 출신 중위였는데 말이지, 아주 미친놈처럼 날뛰었다고. 그놈한테서 맞아서 병원에 실려갔다가 나흘 만에 죽은 동기도 있고, 나도 앞니가 두대나 부러졌을 정도니까. 교묘하게 아부쿠마 강변으로 꾀어내서 흠씬 패주긴 했는데, 그 자식 글쎄 땅바닥에 엎드려서 고개를 처박고 우는 소리를 늘어놓는 거야. ....그때는 계급상 어쩔 수 없었다, 용서해라, 이렇게 사과할 테니 좀 봐달라... 그래서 내가 한마디 했지, 그딴 우는 소리 들으려고 후쿠시마현까지 일부러 찾아온게 아니라고. 그러고는 동기들 몫까지 해서 초주검이 되도록 패고 피범벅이 될 때까지 자근자근 밟아줬더니 강변에 두꺼비처럼 널브러지더라."

구니오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손가락 마디를 눌러서 우둑우둑 소리를 냈다. 녀석이 흥분했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예정대로라면 답례할 상대는 일곱 명이었던 모양이지만, 그중 셋은 공습을 당해서 아예 집이 사라졌거나 타지로 일을 나가고 없었기 때문에 만난 사람은 넷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말이지, 이제 원한은 조금 풀렸는데 기분은 별로 개운치가 않아. 왠지 묘하게 쓸쓸한 기분도 좀 들고. 복수란게 원래 이런 걸까..."

구니오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마쓰에가 갖다준 탁주를 연방 홀짝였다. 그나저나 보름 사이에 잘도 돌아다녔다. 그 집념에는 나도 감탄했다. 나한테도 구니오처럼 '답례 인사'를 해주고 싶은 놈들이 언뜻 대여섯명 떠오르지만, 우연히 마주쳤다면 모를까 내가 일부러 찾아가고 싶지는 않다. 원한이 옅어졌다기보다는 그런 놈들의 낯짝을 두번다시 보고싶지 않아서다.

산산조각 난 신, 와타나베 기요시, 글항아리.
212~215페이지.


여담

1. DP 개의 날보다는 좀 후련하게 끝나네... 이게 뭔지 모르시는 분들은 나무위키란 좋은 물건이 있으니 거기로 읍읍...

2. 저자 와타나베 기요시도 전역하면서 그 지긋지긋한 정신주입봉을 볼 일이 없는 걸 후련하던...

3. 좆좆위키에 따르면 전후 일본에는 하도 선임에게 뺨을 맞아서 청력이 손상된 청년이 그렇게 많았다더라....

태평양 전쟁 후 일본에서 유행한 형사취수제 2차 대전

낮에 같이 도시락을 먹다가 들었는데, 야스조는 (전쟁 중 전사한) 형인 닷페이의 장례를 마을장으로 치르고 나서 형수 사치코와 형식 뿐인 결혼식을 올릴 거라고 한다.

"이제와서 애까지 딸린 형수를 내보낼 수도 없는 일이고, 형수도 나만 괜찮다면 상관 없다고 해서. 부모님이나 친척들도 제발 그렇게 해서 형수를 집에 있게 해달라고 하니까 나도 결국엔 그래야겠다 싶더라고. 형이 전사해서 유골함까지 돌아왔으니 별수 없지. 나라고 마음에 둔 여자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나 한 사람만 참으면 온 집안이 평안하니까."

야스조는 이렇게 말하고는 얼굴에 박아놓은 것처럼 움푹한 눈을 한참동안 깜빡거렸다. 나는 형수와 결혼할 마음이 좀처럼 없는 야스조한테 새삼 축하한다고 하기도 뭣해서 그냥 잠자코 있었다. 나이는 사치코 쪽이 세살 위라는데, 이렇게 동생이 형수와 맺어지는 일이 요즘은 곳곳에서 일어나는 모양이다. 이웃 마을에서는 동생이 열살이나 위인 형수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마을에서는 '역연혼'이니 '인연 고치기'니 하는데 대부분 대를 이을 아들이 전사한 집인 것 같다.

"쭉 형수, 형수 부르던 사람이 갑자기 내 마누라가 된다고 생각하니까 왠지 대하기도 불편하고, 기분이 좀 이상해."

야스조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사치코 역시 똑같은 심정일 것이다. 어쨌거나 역연혼도 분명 전쟁이 불러온 한가지 '불행'이다.


산산조각 난 신, 와타나베 기요시, 글항아리.
147~148페이지.

와타나베 기요시는 전함 무사시의 수병이었고 마리아나 해전, 레이테 해전 등에 참전했다. 패전 후 소집해제되어 여전히 일본의 군주로 군림하는 히로히토를 보고 분노하여 천황을 비판하는 여러 서적을 저술했다. 산산조각 난 신은 패전 직후를 다룬 그의 수기이다.

히틀러는 파울루스와 스탈린의 장남을 바꾸려고 했는가? 2차 대전

1941년 7월, 비텝스크에서 포로로 잡힌 야코프 주가시빌리 포병대위.


굉장히 유명한 일화.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소련군 포로로 잡히자 히틀러가 1941년에 포로로 잡혔던 스탈린의 장남 야코프 주가시빌리 대위와 파울루스를 바꾸자고 했다는 것이다. 이에 스탈린은 일개 대위와 원수를 바꾸는 미친놈은 없다고 깠다는 것인데... (좆좆위키에서는 덤으로 파울루스를 자기 손으로 총살하기 위해서 히틀러가 이런 제안을 했다고?)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 평전와 같이 유명한 관련 서적에서 한번쯤은 사실로 언급되는 일화다. 이 일화의 출처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으나(서비스는 특별히 주석을 달지 않았고 비버는 교환 제의를 언급하지 않고 그저 스탈린이 아들을 외면했다 정도로 쓰고 있다.)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1차 사료는 한가지 있다.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의 회고록이다.


1943년에서 44년에 걸친 겨울에, 스탈린그라드의 싸움 뒤였는데 당시 좀처럼 없었던 아버지와 만난 기회에 갑자기 아버지가 말한 일이 있다.
"독일군은 야샤와 자기네의 누군가를 교환하자고 제안해왔는데 말야... 내가 놈들과 거래 따위를 할 수야 있나! 아니, 전쟁이라면 끝까지 전쟁으로 버티는거야." 
아버지는 흥분해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조급한 어조에서 짐작되었다. 그리고 그뿐으로 그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나의 손에 루즈벨트와의 왕복 서한의 일절인듯한 무슨 영문으로 된 문서를 쥐어주면서 말했다.
"어떠냐, 번역해보지 않겠니? 영어 공부를 상당히 한 모양인데. 번역할 수 있겠니?"
내가 번역해서 들려주니까 아버지는 놀란 듯한, 만족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이것으로 그때는 시간이 없어서 '알현'은 끝났다. 
나의 아버지 스탈린,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일신서적출판사, 199페이지.


이것이 원전인지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 평전에서도 '독일측의 누군가'와 야코프를 교환하자는 제안이 왔지만 스탈린이 씹었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지 파울루스를 콕 집어서 교환하자고 했다는 얘기는 없다. 영문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히틀러의 조카 레오 라우발과 교환하자고 했다는 얘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올레크 흘레브뉴크 교수는 이 일화에 대해 근거 없음이라고 일축한다.


바실리와 달리 특별 보호를 받지 못했던 야코프가 개전 초기에 독일군 포로로 잡혔다. (...) 스탈린이 야코프와 어떤 독일 장군(가장 많이 거론되는 이름은 파울루스이다.)의 포로 교환을 제의 받았지만 거절했다고 주장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문서 증거는 없으며, 히틀러의 지도부가 어떤 동기에서 이런 교환을 추진했을지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 이야기엔 신빙성이 없다. 
스탈린 평전, 올레크 흘레브뉴크, 삼인, 438~439페이지.

서비스의 스탈린 평전에서 히틀러가 교환에 개입했다는 언급이 있기 때문에 이언 커쇼의 히틀러 평전을 뒤적여봤지만 야코프 주가비실리, 야코프 스탈린이라는 주석이 없어서 바르바로사 작전과 스탈린그라드 전투 부분만 뒤져봤는데 관련 내용을 찾는데 실패했다. 나중에 글랜츠의 독소전쟁사와 오버리의 히틀러와 스탈린의 전쟁 등도 더 뒤져봐야할 듯.

1943년 1월,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한 프리드리히 파울루수 육군원수.

3줄 요약.

1. 히틀러가 스탈린의 아들 야코프와 독일 포로를 바꾸자 했다 카더라.

2. 근데 증거가 없다.

3. 더 찾아봐야겠다.

바실리 스탈린의 최후 (2) 발악하는 바실리 소련사

군대 있을 때 쓰기 시작한 글인데 전역하고도 한참 있다가 겨우 2편을 쓰네요. 기다리신 분들께는 죄송합니다.


1954년부터 55년에 걸친 겨울에 그는 발병해서 감옥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병원으로 옮겼다가 다시 브라비하 시나토리움으로 보내지고 그 후에는 귀가가 허락될 예정으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흐루쇼프가 1954년 12월에 나를 불러서 얘기해준 것이다. 그는 어떻게든 바실리를 정상적인 생활로 되돌릴 해결책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예측하지 않은 결과로 끝났다. 감옥 병원의 그에게 옛날의 운동선수, 축구선수, 트레이너 등이 나타나게 되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루지야 인들도 찾아와서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는 다시 궤도를 벗어났다. 약속을 잊고 그는 또다시 거칠어져서 협박을 하거나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가기는커녕 도로 블라디미르 형무소로 돌아가게 되었다. 군사법정의 판결은 그대로 유효하게 되었다.

나는 진심으로 그의 힘이 되어주려고 했던 세번째 아내 카피토리나 바실리예바와 함께 블라디미르로 찾아갔다.

(...)

바실리는 나와 카피토리나에게 어디 어디에 가고 누구에게 전화를 하고 가능한한 여러 곳에 얘기를 해서 어떻게 하든지 그를 이곳에서 석방시키라고 요구했다. 그는 완전히 절망해 있었고 그것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는 누구에게 부탁하면 좋은지, 누구에게 편지를 쓰면 좋은지를 생각하면서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는 정부의 요인 모두에게 편지를 써서 옛날의 교분을 상기시키면서 약속을 하고 자기 잘못을 깨달았다, 앞으로는 딴 사람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용기있고 심지가 굳은 여성이었던 카피토리나는 어디에도 편지를 보내지 않는 편이 좋다, 조금만 더 견디면 되니까 참아 달라,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해달라, 하고 타일렀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대들었다.

"나는 너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있는데 너는 나한테 잠자코 있으라는 건가!"

이어서 그는 나에게 부탁할 수 있을 듯한 사람의 이름을 늘어놓았다.

"누구에게든지 오빠가 직접 편지할 수 있지 않아요!"

하고 나는 말했다.

"오빠 자신의 얘기가 내가 지껄이는 것보다 훨씬 더 무게가 있어요."

그런 다음 그는 다시 몇통의 편지를 나에게 주면서 탄원을 하러 뛰어다녀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중국인과 연락을 취하려고까지 했다.

"중국인이라면 나를 도와주겠지!"

그가 이렇게 말한 데에는 전혀 근거가 없지도 않았다. 나와 카피토리나는 물론 어디에도 가지 않았고 편지를 쓰지도 않았다. 나는 흐루쇼프 자신이 그를 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 스탈린,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일신서적출판사.
259~261페이지.

1. 와실리 → 바실리, 흐루시초프 → 흐루쇼프 등으로 일부 단어 수정했습니다.

2, 앞으로 2,3편 안에 끝날 것 같습니다.

님은 바로 역밸 콘서트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부운! 블로그 운영


굉장히 심각한 복통 잡상

증상은 딱 배탈인데 뭘 잘못 먹은건지 감이 안잡힌다.

별주부전 토끼보다 간을 잘 숨겼던 오리아나 팔라치의 인물평 기타 근현대사

레흐 바웬사:생긴게 스탈린을 닮았다. 오만하고 무지하고 공격적인 파시스트. 촌스럽고 건방지며 자기가 폴란드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믿는 뻔뻔한 놈. 오로지 폴란드 카톨릭 교회가 허세를 부리기 위해 띄워준 허깨비에 불과하다.

미에지슬라우 라코우스키:똑똑한 듯 하다. 계몽된 공산주의자이며 민주적 공산주의자지만 공산주의자니까 믿을 수가 없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조차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데도 자신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지 못한다.

이디 아민:잔인한 범죄자. 국민을 학살하는 폭군. 돼지새끼.

무아마르 카다피:필요할 때만 혁명투사를 자처하는 제국주의자. 내정간섭이라고 우간다에는 간섭 못한다더니 차드에는 필요하니까 간섭하는 꼬라지가 언행불일치 쩐다. 자기가 신인줄 착각하는 미친놈. 40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히틀러랑 베프 먹을 놈. 국민들이 지를 사랑한다면서 경계근무는 왜 맨날 삼엄한지 모르겠네?

윌리엄 콜비:이탈리아가 자기 식민지인줄 착각하는 제국주의자. 종교재판소 사제나 소련 공산당 공무원같은 인간. 부패한 인간보다 더 구역질나는 부패하게 만드는 인간. 자기가 이탈리아 기독교민주당과 사회민주당 고문변호사라도 되는 줄 아나. 남의 나라 내정간섭하는데나 유능하다.

보응우옌잡:쾌활하고 거만한 프랑스 속물. 근데 분석력은 좋더라.

헨리 키신저:엄마 곁에서 안 떨어지려는 아이처럼 닉슨 곁에서 안떨어지려는 마마보이. 그런데 자기가 헨리 폰다인걸로 착각하는 뻔뻔스럽고 거만한 카우보이다. 자기가 말타고 각국에 달려나가기만 하면 사태가 해결된다고 착각한다. 똑똑한 건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얘를 믿고 따르는 놈들은 병신이다. 과거 속에만 살고 있으니 항상 용두사미로 끝나는게 딱 멍청한 놈들 앞에서 연기만 피워대는 꼴이다.

골다 메이어:스스로에 대해 너무 잘 알아서 자기만족에 빠질 수가 없음. 아름다운 어른이며 속속들이 품위가 배어 있는 귀부인. 근데 권력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닌듯.

하일레 셀라시에:지입으로 용기와 품위를 가진 사람만 좋아한다는데 얘를 몰아내려고 쿠데타를 시도했던 장교들이야말로 용기와 품위가 있었다.

팔라비 2세:지가 신통력있다고 설치는데 얘 옆에 있으면 무함마드랑 악수할 수 있을 것 같군. 언제나 표정이 왜 항상 죽상이냐?

아야톨라 호메이니:단순한 광신자가 아니라 머리가 굉장히 좋고 예의바르다.(그건 그렇고 이란의 무솔리니, 로베스피에르임)

...........하다가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여기까지....
그리고 이 평가들 대다수는 본인의 면전에서 쏟아낸 독설이라고 합니다....

여담에 추가하는 일화들

1. 하일레 셀라시에와 인터뷰할때는 6번이나 인터뷰 주제 바꾸라는 명령을 들었지만 생까다가 결국 쫓겨남. 그리고 셀라시에를 까는 인터뷰 기사를 올려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의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을 때 에티오피아의 이탈리아 교민들이 황제가 살아있는 동안엔 에티포이아에 다신 오지 말아달라고 부탁함. 하지만 팔라치는 무솔리니 통치를 너무 오래받은 모양이라고 까버림.(...)

2..아리엘 샤론과의 인터뷰에서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학살한 것을 추궁하였을때 샤론이 부정하자 준비해간 시체 사진들을 샤론 책상 위에 뿌려버림.

3. 부토와 인터뷰할떄 부토가 인디라 간디를 아버지 명성 못따라가는 여학생 수준의 병신이라고 까자 그걸 고대로 기사화해서 인도-파키스탄 외교관계 종칠뻔함. 부토가 팔라치의 조작이라고 주장하면서 비선라인으로 제발 기사를 철회해달라고 사정하자 지옥에나 가라고 비웃어줌. 이 사태는 인디라 간디가 못들은걸로 하겠다고 하면서 정리됐다나...

이상의 모든 일화나 평은 산토 아리코의 오리아나 팔라치 평전 출처.

스탈린은 애치슨 라인 때문에 김일성의 남침을 지원한 것인가? 소련사

대만과 한반도를 미국의 안전보장선에서 제외한다는 애치슨 라인이 발표되자, 소련은 미국이 한반도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오판하여 김일성의 침략전쟁을 승인해주었다는 것은 전가의 보도처럼 인용되는 일이다. 하지만 근래의 연구들은 스탈린이 애치슨 라인에 대해 낙관적으로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에 관련해 데이비드 쑤이 박사의 연구를 인용한다.


김일성의 남침 제안에 대한 스탈린의 입장을 바꾸게 한 것은 바로 국제적 상황의 변화였다. 그러면 스탈린이 말하는 '국제적 상황의 변화'는 과연 어떤 것일까? 웨더스비는 "미국의 개입 가능성에 대한 계산이 소련의 의사 결정에 핵심적 요인이었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김일성의 남침 제안에 대한 스탈린의 승인 시기 -1950년 1월 말-는 같은해 1월 12일 애치슨이 발표한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시킨다는 새로운 국방정책에 대한 반응임에 틀림없다.

웨더스비의 주장은 과연 정확할까? 소련의 자료는 애치슨의 발언에 관련된 김일성, 모택동과 스탈린의 반응은 말할 것도 없이, 아무런 기술이 전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애치슨의 발언에 대한 스탈린의 진의를 유추할 수밖에 없다.

(...)

화이팅이 지적한 바, 1946년 이란 사태와 1948~1949년 베를린 사태에서 군사력 사용을 불사하는 워싱턴의 자세가 모스크바로 하여금 군사적 시도를 단념켰었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스탈린이 애치슨의 발언을 진심이라 받아들였다고 믿기는 어렵다. 이에 대한 저자의 견해로도 스탈린이 애치슨 발언만으로 김일성의 계획에 대한 승인을 결정한다는 견해에는 반대한다. 스탈린은 노련한 전략가로서 미국이 아마도 군사적 개입을 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미국이 대규모 군사력을 한반도에 파병시키기 전에 북한군이 한반도 남부를 석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리고 이것이 실패할 경우에는 이로 인한 미국과 소련 사이의 군사적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는 모택동이 이 사태에 개입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모택동이 이 구상에 동의하도록 이미 성공적으로 설득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6.25전쟁 참전, 데이비드 쑤이 박사학위 논문, 한국전략문제연구소.

여담

1. 그러니까, 애치슨 라인 때문에 스탈린이 남침을 지지하게 되었다는 웨더스비 등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유추'이지 문서적인 직접 증거가 없다.

2. 곤차로프 교수 등의 연구에 따르면, 애치슨 라인이 발표된 지 한참 후인 1950년 4월 시점에서도 스탈린은 "미국은 결코 남한에서 쫓겨나려 하지 않을 것이며, 이로 인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강대국의 위신을 잃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곤차로프 교수는 오히려 스탈린은 애치슨 선언에 대해서 스탈린이 가진 낙관은 중국과 서방 국가들의 거리를 넒혀버릴 수 있는 데에 있었다고 지적한다.

3. 여러번 언급했던 사실이지만 스탈린은 만약 김일성의 코피가 터져도 자신은 도울 생각이 없으니 마오쩌둥에게 가라고 김일성에게 분명히 못박았다. 스탈린은 대국의 자존심을 내세워 미국과 맞서고 싶었지만 막강한 미국과 군사적으로 직접 대결하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모든 순간에서 결정적으로 회피하였다.

단숨에 2천마리의 닭을 잡수시는 마오 주석??? ㄴ공산중국

1961년의 일이다. 마오쩌둥은 류사오치, 저우언라이를 대동하고 호남성 장사를 방문하였다. 호남성 당 지방위원회 제1서기 장핑화와 호남성 보안국장이 마오쩌둥을 영접했고 그들이 장사에 체류하는 동안 경호를 책임졌다. 세 지도자가 장사를 떠날 때가 되자 장핑화는 중앙경위단 주임 왕둥싱에게 지도자들이 장사에 머무는 동안 소요된 비용을 청구하였다. 그런데 믿기지 않는 대목에 왕둥싱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오쩌둥 일행이 장사에 머무는 동안 무려 2천마리의 닭을 먹어치웠으니 이를 변제해달라는 것이 호남성 당국의 요청이었다.

경위단이나 마오쩌둥의 최측근인 제1조의 관계자들은 모두 장핑화의 청구서가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세 사람의 지도자와 그 수행원 몇명이 단 며칠만에 2천마리의 닭을 먹어치울 수 있을리도 없거니와 대약진 운동으로 파탄난 호남성에서 2천마리나 되는 닭을 생각없이 제공했을 가능성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중앙에서는 호남성 당국의 청구서가 20마리를 2천마리로 잘못 기재한 것으로 판단하고 정정을 확인해달라고 호남성 당국에 요청했다. 장핑화 서기 역시 2천마리나 되는 닭이 소모되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 중앙의 요구에 수긍하고 재조사를 지시했다.

허나 호남성 보안국의 조사 결과 청구서는 맞는 것으로 드러났다. 호남성 보안국에서 마오쩌둥을 보호하기 1만 5천명의 군인을 소집하여 장사에 배치시켰던 것이다.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던 군인들을 위해 보안국에서는 닭고기를 지급했고 사기 진작을 위해 최소 2천마리는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리즈수이는 호남성의 지도자들이 마오쩌둥이 그들의 봉사에 대해 최소한 닭 2천마리 정도의 성의는 보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라 회고한다. 왕둥싱은 격노하였으나 군말없이 닭 2천마리값을 호남성 당국에 지불할 것을 승인하였다.

근데 마오의 위세까지 빌려가면서 1인 1닭도 못하던게 당시 중국의 상황이라는 걸 알수있다.(...) 1만 5천명에게 닭 2천마리라니. 반닭만 하려 해도 7500마리는 필요할건데 대체 한 사람당 얼마나 먹은걸까. 구이나 튀김은 언감생심이고 아마 국이나 죽을 끓여먹지 않았을까 싶다.

-참고, 리즈수이의 모택동의 사생활 2권, 고려원.

마오쩌둥:우린 타이완을 정복해서는 안된다 ㄴ공산중국

마오쩌둥의 주치의 리즈수이에 따르면, 흐루쇼프와의 회담 이후 마오쩌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베이다이허로 돌아가는 길에 마오는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하고 불만을 터트렸다.

"흐루시초프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몰라.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원한다고? 좋아, 우리 대포로 환영해주지. 우리 포탄은 탄약고에 너무 오랫동안 처박혀 있어서 이제는 거의 고철이 돼가고 있어. 이번에 그걸 써서 한번 축하해줄까? 미국도 끼여들라고 해. 그렇게 되면 아마 미국이 푸젠성에 원자탄을 터뜨릴 수도 있을 거야. 1천만, 아니 2천만명이 죽을지도 모르지. 장제스는 아마 미국이 우리에게 원자탄을 떨어뜨렸으면 하고 바랄걸? 그래, 사용하라고 해. 그때 흐루시초프가 무슨 말을 하나 한번 들어보고 싶어. 그런데 몇몇 동지들은 지금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 바다를 건너가 타이완을 정복해 버리자는 거야. 하지만 난 찬동하지 못해. 타이완은 그대로 두는 게 나아. 그래서 계속 우리에게 압력을 가하도록 해야 해. 그것은 우리가 내부 통합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거든! 그런 압력이 없어지면 내부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지."

모택동의 사생활 2권, 리즈수이, 고려원.
95페이지.

1. 리즈수이에 따르면, 진먼 포격전은 흐루쇼프와 아이젠하워가 허둥거리는 것을 보고 싶었던 마오쩌둥의 매우 계획적인 도발이었다고 한다. 이는 미국과 소련이 중국을 장기말로 여길 수 없게 하고자 하는 과시이며 흐루쇼프의 서방 유화정책에 대한 모욕이었다.

2. 하지만 마오쩌둥은 타이완의 정복은 물론, 진먼과 마쭈를 점령하는 것에 대해서도 강력히 반대하며 만약 진먼과 마쭈가 중공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면 타이완과의 연결고리가 단절될 것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3. 여튼 이게 적대적 공생인가 그런건가?

청나라 마지막 황후 완룽의 비참한 최후에 대해 ARABOJA ㄴ공산중국

청나라와 만주국의 마지막 황후 완룽(1906~1946)의 모습


사가 히로는 회고록에서 만주국이 붕괴될 즈음에 그녀가 부의와 부걸을 따라 통화로 도주한 사실과 그 뒤 고통스러운 떠돌이 생활에 대해 회고했다. 사가 히로는 회고록에서 그들은 대율자구에서 임강현성으로 이동할 때 공산당 군대-동북민주연합군을 만났으며 바로 감시를 받기 시작했다고 썼다. 그 뒤로 아이신줴뤄 식구들은 여러 차례 나뉘어 통화로 압송돼 트럭 등에 태워져 눈과 얼음으로 덮인 산길을 달렸는데 차량이 뒤집혀 인명사고가 날 수 있을 정도로 위험했다. 통화에서 부의의 황후 완용과 사가 히로 등은 시 공안국 2층의 한 방안에 격리되고 부의의 귀인 이옥금과 수행인원들은 동북민주연합군 사령부 내에 연금되었다. 물론 그녀들은 모두 엄밀한 신변검사를 받았다.

1946년 2월 3일 악몽같은 통화사건이 일어났다. 총탄과 대포의 굉음 속에서 부의의 늙은 유모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사망하고, 이옥금도 부상을 당했으며, 완용은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사가 히로도 너무 놀라 얼이 나갔다. 그후 그녀들은 영하 30도의 엄동설한에 볼품없이 파괴된 건물 내에서 또 일주일을 지낸 뒤에야 주민의 집으로 옮길 수 있었다. 한번은 그들을 지키던 병사가 밤중에 뛰어들어 권총으로 사가 히로의 머리를 겨누고 "움직이지 마랏, 움직이기만 했다간 쏴 죽일테다!"라고 고함을 질렀다. 또 일본인이 동북민주연합군 사령부를 습격한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이 숫브된 뒤 완용 등 아이신줴뤄 가족들은 부대와 함께 움직였다. 그들은 통풍구가 딸린 화물차를 타고 1946년 4월에 장춘으로 돌아가 부대 초대소로 쓰고 있던 전 후덕복 호텔에 며칠을 묵 뒤 철수했다., 그들은 세게 흔들리는 밀폐식 유개화차에 태워져 길림시로 수송되었다. 공안국 구류소의 얼음장 같은 바닥 위에서 연일 이어지는 심문에 지칠대로 지친 사가 히로는 심지어 "그냥 이대로 호생의 목숨을 끊어버린 뒤 스스로도 자살할" 생각까지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살아서 상황이 더 처참한 완용을 돌봐야 했다. 그 황후가 아편 공급을 끊어버리는 바람에 매일 미친 듯이 "살려줘! 살려줘!"라고 외치는가 하면 신음하며 눈을 희번덕거리며 바닥에서 마구 뒹굴었다. 간수와 팔로군의 간부들이 앞 다투어 구류소로 달려 들어와 미친 황후를 구경했다. 마치 동물원의 동물을 구경하듯이 쉴 사이 없이 들락거렸다. 

국민당 군대가 길림을 폭격하고 공격해오자 이미 걸을 수도 없게 된 완용을 긴 막대기 위에 고정시킨 의자에 묶어 여섯 명의 일본 포로가 메고 기차에 올랐다. 연길에 이르러 기차에 내린 다음에는 또 마차에 태워져 길거리에서 조리돌림을 당했다. 한면에 "앞잡이 만주국 황족 일행"이라고 쓰여진 큰 흰기를 수레에 꽂은 채. 그리고 나서 연길법원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때 완용은 이미 다 죽어가고 있었다. 아편을 얻지 못하는 데다 전혀 먹지 못했으며 게다가 돌봐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6월 20일 외롭고 쓸쓸하게 비극적인 생을 마감했다.

모택동과 주은래 그리고 부의, 왕칭샹, 경지출판사.
18~20페이지.

1. 1960년 사가 히로와 직접 대면한 저우언라이는 중공중앙은 만주국 황족들을 보호하라고 지시를 내렸으나 일선의 무식한 졸병들이 일본 침략자와 만주국 황족들을 구분하지 못해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해명했다.

2. 사가 히로의 회고록 <떠돌이 왕비>를 읽은 저우언라이는 이를 칭찬하였지만 중국인민을 자극하는 내용이 있다는 이유로 중국에서의 출판을 금지하고 문제되는 내용을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3. 이후 사가 히로는 푸제와 재회하였으며 베이징에서 같이 살게 되었고 이 이야기를 추가하고 저우언라이의 요구를 수용한 개정판을 내놓았는데 이는 중국에서 출판되었다.

마오쩌둥:푸이를 제거해야 한다! ㄴ민국시대

호남성의 젊은 지식인이었던 모택동은 1917년 정사복벽을 겪은 후 자신이 발간하던 상강평론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하게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마지막 황제 카를이 스위스에 피신해 있을 대 모 신문사 기자가 뵙기를 청했다. 기자가 황제를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를 만나자 그 신하가 말했다. 

'황제가 옥좌에서 물러난 것은 본인이 원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제왕의 제도를 회복하길 원합니다. 다만 지금은 잠시 은거하며 정치에 참여하지 않을 뿐입니다.'

무릇 황제가 되었던 사람 중에는 계속 황제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없고, 벼슬을 해본 사람 중에는 계속 버슬을 원하지 않는 이가 없다. 심리적으로 관념의 습관성이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서양인들은 일을 행함에 있어서 철저한 것을 좋아한다. 역사적으로 국왕을 처형한 사실이 아주 많다. 영국에서는 찰스 1세를 처형했고, 프랑스에서는 루이 16세를 처형했으며, 러시아에서는 니콜라이 2세를 처형했다. 이들 국민들은 모두 그리하지 않으면 화근을 제거할 수 없다고 여겼다.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되어 있을 때 오늘날 빌헬름 2세도 그가 나폴레옹의 후신이 되어 협약국의 재판을 받게 하고자 했다. 그리 된다면 그에게도 큰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 스위스에 피신해 있는 카를과 북경에 숨어 지내는 부의는 국민이 경계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화근이 될 것이다.

-1919년 7월 21일자 상강평론 제2기.

모택동과 주은래 그리고 부의, 왕칭샹, 경지출판사. 14페이지.

여담

1. 이후 카를 1세는 모택동의 예견대로 헝가리에서 2차례 복벽을 시도했다가 미클로시에게 잡혀서 추방된다.

2. 위에서 보았듯이 모택동은 초기에 복벽세력에 대한 제거를 반봉건 투쟁에 대한 중요 과제로 설정, 이후 덕왕이나 이수신 등 일본에 협력하는 세력들을 푸이에 견주며 비판하곤 하였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의 공식 입장에 따르면 중일전쟁 종전 이후 중국 공산당은 만주국 황실을 보호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3. 이후 공산당은 봉건체제의 우두머리를 '개조'한다는 방향으로 선회하여 잘 알려졌듯이 1959년 푸이는 특별사면되어 그럭저럭 먹고 살게 된다.

어느 조선 지식인이 지적한 일제강점기 조선의 마약 중독문제 기타 근현대사

지금 조선에는 모르핀 중독자가 매우 많다. 의사가 확언하는 바에 따르면 경기도 이남 지역만도 그 수가 1만을 넘을 것이라고 한다. 모르핀은 아편에서 정제한 것으로 그것을 주사하는 것이다. 그 작용은 아편연 흡식과 전혀 차이가 없다. 요컨대 오늘날 조선에 모르핀 중독자가 1만명 이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편연 상습흡식자가 1만명 이상이라는 것이다.

중국이 아편연 때문에 가장 고통받고 있는 나라라는 것은 누군가 알고 있는 바이다. 중국은 그로 인해 아편전쟁을 치렀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편연의 병고로부터 중국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따. 아편연은 중국민족의 발전에 거대한 장애가 되는 것이다. 지금은 병독이 검은 손을 뻗쳐 조선을 옥죄고 있다.

(...)

따라서 지금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법률상의 교정이다. 조선형사령에 따라 조선에서도 일본의 형법이 시행되고 있다. 그런데 형법 가운데 아편연에 관한 형벌을 보면 실로 삼엄함이 극에 달하고 있다. 즉 아편연을 수입, 제조 또는 판매하거나, 만약 판매 목적으로 그것을 소지한 자는 6개월 이상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며, 아편연을 흡식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그밖에 상세한 규정을 두어, 미수죄도 처벌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다이쇼 3년(1914년) 9월 21일 조선총독부 훈령 제51호에는, 불평하는 자가 있을 때는 형법의 조항에 비추어 가차없이 검거하여 단죄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모르핀 주사의 경우 전적으로 아편연의 흡식과 동등한 폐해를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특별한 입법수단을 강구하지 않았다. 즉 다이쇼 3년 10월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훈령 갑 제49호에는

"지난달 21일 조선총독부 훈령 제51호에 따라 지금부터 아편흡식은 반드시 금지조치를 집행해야 하고 되도록이면 한층 면밀한 주의를 기울여 아편연 흡식의 폐풍을 근절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모르핀, 코카인 주사는 아편연 흡식의 대용으로 사람의 신체에 미치는 해독이 아편연 흡식과 감히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그러므로 종래 비밀리에 주사를 맞는 자가 적지 않았으므로 아편연 흡식을 금지한 결과 자연히 모르핀이나 코카인 주사로 옮겨갈 열며가 없지 않다."

라고 함으로써 모르핀 주사의 폐해와 머지않아 그것이 조선사회로 내습할 것을 명료하게 간파하였다.

그런데 그 단속법으로는 겨우 약품 및 약품영역 잔속령 제7조의 시행에 힘쓰도록 하였다. 그에 따르면 불법으로 모르핀을 판매공급한 자에게는 3개월 이하의 금고 또는 500엔 이하의 벌금이라는 제재가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모르핀을 주사한 자에 대해서는 어떤고 하니, 조선의 법령에는 그것을 처벌하는 규저잉 존재하지 않는다. 강하게 요구할 경우, 경찰범 처벌규칙 제11조 제32호의 운용이라도 기대할까? 즉 경찰관에서 특별히 지시, 또는 명령한 사항을 위반한 자는 구류 또는 벌금형에 처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통해 동일한 사회악에 대해서도 법률상의 제제에 차이가 너무 크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아편연을 허가없이 판매공급한 자는 6개월 이상 7년 이하의 징역, 모르핀을 멋대로 판매공급한 자는 3개월 이하의 금고, 또는 500엔 이하의 벌금, 아편연을 흡식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모르핀을 주사한 자는 무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모르핀 중독자는 현재 1만명 이상이나 된다고 한다. 또한 모르핀 주산느 아편연 흡식에 비해 매우 간편하다.

"로마법을 통해 로마법 위로", "현대를 통해 현대의 위에"라는 말로 조선의 당국자에 강요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지금, 절박한 이 모르핀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입법수단을 요구하는 것은 누구도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조선의 당국자는 설마 그 단속을 관대하게 하여 선정을 과시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조선의 모르핀 문제>, 김준연, 중앙법률신보 1권 9호, 1921년 6월자.

아편제국 일본, 구라하시 마사나오, 지식산업사.
166~167페이지에서 재인용.

여담

1. 김준연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엘리트로 독일에 유학했다가 귀국 후 신문기자를 하다가 공산당원이 되었다. 1934년 동아일보 주필이 되었으며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에서 사직했다. 위의 글은 도쿄제국대학 정치학연구실 조교 근무 시절 일본어로 쓴 글이다.

2. 일본 내무성 위생국은 공식적으로 조선의 마약중독자는 1922년 시점에서 1570명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명백한 조작으로 추정된다. 당장 1927년 도쿄에 거주하던 4만명의 조선인 중에서 마약중독자가 3000명으로 집계되었으며 모르핀 중독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도에서 모르핀 주사바늘 수천개가 판매되고 있었다.

3. 1928년 기쿠치 유지는 당국의 조작 통계를 비판하며 최소 7만명, 최대 10만명의 중독자가 있다고 추산하였다. 책의 저자 구라하시 마사나오는 70만명까지도 가능할 것으로 추산한다.


꽤 잊혀졌지만 사실 일정~1공 시기 사이 마약중독자는 심각한 사회문제였지비...

국민혁명 초기 국민당의 반기독교 논리 ㄴ민국시대

공부하던 중 발견한 흥미로운 부분. 국민당 좌익 이론가 감내광은 기독교 타도를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논리를 전개합니다.


1926년 말에 국민혁명군 총정치부는 <반기선전대강>을 작성하여 반기운동(반기독교 운동)을 통해 민중을 봉기하여 국민혁명의 완성을 촉성(促成)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여기에서 기독교는 유산계급의 무악부작(無惡不作)의 위선공구(僞善工具)이며 제국주의 침략의 선봉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반기운동의 국공합작체제 하의 국민당의 민중운동 책략의 일부가 됐음은 농민부장 감내광이 1927년 월의 시점에서 "현재의 반기독교, 반문화침략운동은 전처럼 몇몇 학생이 하는 것이 아니고 (당을 통한) 조직적이고 대규모의 것이니 일체의 행동은 모두 본당이 결정한 전체적 책략에 따라야 한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감내광의 이 말은 반기운동의 적극적인 추진의 뜻이라기보다는 황소교회사건 이후의 국민당의 반기운동책략 전변(轉變)의 경우와 같은 통제의 의미를 포함할 수도 있겠으나, 국민당이 반기독교운동을 주된 운동목표의 하나로 보고 있다는 점은 나타나 있다. 실제로 1927년 3월의 광주에서의 반문화침략동맹회 확대회의에서 만든 광동각계옹호정부수회교육권운동주비위원회(廣東各界擁護政府收回敎育權運動籌備委員會)는 국민당 성시당 청년부와 국민혁명군 총정치부를 포함한 28개 단체로 구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밖에 국민당의 청년부가 교회공격에 앞장선 예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적지 않게 발견된다.

국민당 요인들의 반기독교적 주장은 호한민, 왕정위, 대계도, 료중개 등이 기독교를 비판하는 입장이었고, 농민부장 감내광은 기독교 교회가 농민을 '안분취범(安分就範)케 하여 무엇이든지 잘못을 자기 탓으로 돌리도록 하여 농민들의 혁명성을 상실케 하므로, 농민운동을 진작하기 위해서는 교회세력의 타도가 필요하다고 하고 있다.

중국초기혁명운동의 연구, 민두기, 서울대학교출판부.
국민혁명운동과 반기독교운동.
326~327페이지.

여담

1. 그런데 손문과 송경령은 기독교 신자.... 이 때문에 국민혁명기에 송경령은 다른 국민혁명 지도자들과 기독교 문제로 좀 싸우기도 했다더라...

2. 장개석의 경우 기독교를 까면서도 휘하 군대에게 절대로 교회를 공격하지 못하게 지시하며 본인은 기독교 그 자체의 금지에 목표를 두고 있지 않다고 입장 표명. 국민당 좌파도 우한으로 천도한 후 교회 보호 조치를 내림.

3. 그리고 장개석은 1930년 중원대전 때 승리한 걸 계기로 감리교로 개종. 이후 대만은 장경국, 이등휘, 마영구 등 기독교 총통을 많이 배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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