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공지 군대 잡담

음 안녕하십니까. 블로그 주인장 전위대입니다. 지금껏 제가 연재하고 있던 장제스 일대기, 스페인 민주화 시리즈, 이라크 점령사 시리즈를 모두 연재중단합니다. 이 기간은 최대 2년 이상이 될 수 있으며 운이 좋다면 좀 더 빠르게 돌아올 수 있지만 어떻게 될 지 전혀 모르는 일이니 어떠한 확답도 드릴 수 없군요.


그러면 저는 왜 연재를 중단하는 것일까요? 여기저기서 떡밥은 흘렸지만 그렇습니다. 본인은 군대를 갑니다. 바로 내일 입영입니다. 사실 장제스 일대기는 이렇게까지 오래 끌 줄은 몰랐고(공부를 하면 할 수록 느껴지는 본인의 공부 부족으로 의욕이 사라진 것도 있습니다... 매일 연재하던게 한달 단위로 연재가 됐으니...) 스페인 민주화 시리즈도 군대 가기 전까진 다 끝날 생각이었는데 마지막 두편을 남기고 결국 이렇게 사라지게 되는군요.


뭐 구질구질하게 길게 쓸 것은 없겠고 2년간 몸 성히 다녀오겠다는 말씀 밖에 드릴게 없네요. 최대한 빨리 연재를 재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p.s 1. 장제스 일대기는 원래 국부천대까지만 다루려 했으나 대만 역사서를 몇권 구해서 장제스가 죽는 순간까지로 연장합니다. 그게 언제 재개될진 모르겠지만요 ㅠㅠ


p. s 2. 나무위키가 제가 없는 동안 반달들에게 함락되지 않길 바랄 따름입니다. 우리 역밸 동포 여러분들께옵서 나무위키를 하시는 분도 계시다면 부디 역사 관련 문서들을 지켜주소서.


공군 합격 군대 잡담

5.16절에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러 진주로 사라집니다.
그렇게 되면 2년간 빠빠이군요. ㅠㅠ

집산화의 결과 - 죽거나 구걸하다 중국 근현대사

이것에 관해선 조영남 교수의 서적을 인용.



급속한 집단영농화는 대재앙을 불러왔다. 농민의 생산 의욕이 떨어지고 여기에 관리 부실까지 겹치면서 농업 생산량은 크게 감소했다. 게다가 간부들이 곡물 생산량을 국가에 허위 및 과장보고하고, 국가는 이런 보고에 근거하여 과도하게 곡물을 징발하면서 농촌에선 곡물 부족 현상이 매우 심각했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굶주림으로 인한 죽음이 일상화되었다. 한 연구에 의하면, 1958년부터 1962년까지 5년 동안 3600만명이 굶어죽었다. 이는 1945년 8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져서 사망한 8만명의 450배, 1976년 7월 탕산 대지진이 발생하여 사망한 24만명의 150배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다. 다른 학자는 이보다 많은 4500만명이 죽었다고 주장한다.(이 학자가 바로 프랑크 디쾨터)

(...)

1958년 인민공사가 설립되었을 당시에 1개의 인민공사에는 평균 5443호의 농가와 2만 3706명의 농민이 속했다. 또한 1개의 생산대대에는 약 209호의 농가와 912명의 농민, 1개의 생산대에는 25호의 농가와 109명의 농민이 속했다. 이 같은 삼급 조직 체계에서 생산과 분배는 생산대를 단위로 이루어졌다. 즉 대략 25호의 농가의 100여명의 농민이 하나의 생산대를 구성하여 함께 농사를 짓고 생산물을 분배했던 것이다.

(...)

1958년에 모든 농가가 인민공사로 통합되면서 '다섯가지 불분'과 '여섯가지 같음'이 시행되었다. 다섯가지 불분은 노동의 좋고 나쁨, 노동의 많고 적음, 부자와 가난한 사람, 어른과 아이, 공사를 구분하지 않는 정책이다. 여섯가지 같음은 먹는 것, 입는 것, 쓰는 것, 자는 것, 일하는 것, 돌보는 것을 같게 한다는 정책이다. 한마디로 완전한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하는 그런 정책을 실시했다. 결과는 '다섯가지 풍조'의 만연이었다. 공산주의 풍조, 허위과장 풍조, 강제 명령 풍조, 생산의 눈먼 지휘 풍조, 간부 생활의 특수화 풍조가 그것이다.

이런 정책을 실시한 결과로 펑양현(안후이성)은 심각한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먼저 노동력이 감소했다. 노동 인구가 1958년에 15만 8272명에서 1961년 10만 9025명으로 4만 9247명(31%)이 줄었다. 주로 사망이나 외지 유출 떄문이다. 또한 경작용 가축이 죽고 농기구가 파괴되었다. 1958년 경작용 가축이 3만 7619마리에서 1961년에 1만 3763마리로 63.4% 감소했다. 곡물 생산도 급감했다. 1957년에 13얼 5800만에서 1960년 4900만근으로 96.4%가 줄었다. 같은 기간에 가축 사육도 43.4%가 감소했다.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1권(1976~1982년), 조영남, 민음사
102~104페이지

(...)

생산 면에서의 '허장성세'와 분배 면에서의 '한솥밥', 즉 평균주의는 농민의 적극성을 크게 해쳤다. 당시에 유행했던 말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밤낮으로 죽어라 일해도 큰 계란을 낳는 것만 못하고, 7천점, 8천점 해봤자 늙은 암탉이 둥지에 앉아 있는 것만 못하다." 농민이 집단농장에서 하루 종일 일해보았자 품삯, 정확히 말하면 '하루치 노동의 점수'가 계란 하나 값도 되지 않는 현실을 풍자한 말이다.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1권(1976~1982년), 조영남, 민음사
107~108페이지

(...)

개혁기에 펑양현이 유명해진 이유는 두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허리에 차는 작은 북인 펑양 화고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펑양 화고를 허리에 차고 전국을 떠돌면서 구걸하는 펑양현 출신의 거지다. 이들이 구걸하면서 부르던 유명한 노래가 바로 '펑양 화고'다.

펑양을 말하자면, 펑양은 원래 좋은 지방이었네.
주황제가 나온 이후로 도리어 10년 중 9년이 기근이네.
큰집 사람들은 소를 팔고 양을 팔고
작은집 사람들은 사내아이를 팔고
우리집은 팔 사내아이도 없어
작은 북을 메고 사방을 떠돈다네.

(...)

펑양현 농민들은 1년 수확으로 2개월 정도, 국가의 식량으로 4개월 정도를 생활하고 나머지 반년은 구걸하면서 연명했다. 그래서 매년 겨울부터 봄까지 남녀노소가 무리를 지어 외지로 구걸을 나갔다. 구걸할 때에는 주머니에 신분증과 당원 소개장을 지참했다. 자신들이 뿌리도 없는 거지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완리가 안후이성에 부임한 1977년 겨울에도 이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 안후이성과 인접한 장쑤성, 저장성, 푸젠성, 상하이시는 물론이고, 멀리 떨어진 산둥성 등에서도 펑양현의 '유랑민'을 데려갈 것을 요청하는 전화나 전보가 계속 들어왔다.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1권(1976~1982년), 조영남, 민음사
120~121페이지



그러하다.
한마디로 이것

"어디서 굴러먹던 거렁뱅이가 구걸질이야? 체포하겠다."
"이보시오. 난 어엿한 공산당원이오. 이 당원증을 보시오."
"아니, 공산당원이 왜 남의 고장에서 구걸이나 하는거요?"
"1년 농사 지었더니 2개월만에 다 먹어버렸소."
"나라에 곡식을 빌리지 그랬소?"
"빌렸는데 그것도 4개월만에 동나버렸소. 그래서 여기서 구걸을 하는 거요."

짤을 첨부하고 싶은데 싸지방 사정상 생략.
괴롭습니다. 괴로워.

다음에는 덩샤오핑이 중국 농촌을 개혁하는 연재를 올려 항암제를 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한 며칠 나눠서 할 연재였는데 순식간에 끝나버렸네요.

중국 공산당의 농민 수탈 - 농노제의 완성 중국 근현대사

1953년 공산당은 전매권을 도입했다. 모든 잉여 곡물을 국가가 정한 가격에 팔 것을 농민들에게 강요한 것이었다. 이것이 집산화의 3차 단계였다. 이는 곡물가 안정과 도시의 식량 공급을 안정화를 추구하여 산업화를 촉진하고자 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때까지 남아있던 민간 상인들이 쌀과 밀을 비축하여 곡물가 상승에 기여하고 있단 점에서 공산당은 쌍심지를 돋우었다. 이러한 현상은 농경 사회의 자연적인 현상이었지만 당연히 공산당 입장에선 반동행위였다. 하지만 합작사의 존재가 이들 민간 상인들의 영업에 오히려 도움을 주었다. 집산화에 반발한 농민들이 쌀을 국가에 바치지 않고 상인들에게 판 것이었다. 게다가 영업시간이나 가격에 있어 까다로운 합작사와 달리 상인들은 언제라도 농민들과 거래했고 가격도 그들이 정하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합작사조차도 자신들이 매매 경험이 전혀 없어 일에 서툴다는 것을 인정하고 곡물 수매에 민간 상인들의 손을 빌렸다. 공산당은 24억위안의 적자를 비롯하여 파탄 지경에 이르고 있던 중국 경제의 책임을 모두 이들에게 돌리기로 했다.

소련과의 경제 협상이 지지부진하던 와중인 1953년 여름, 마오쩌둥은 재정 위원회에 더 많은 곡물을 징발하라고 지시했다. 천윈과 보이보가 1951년 곡물 전매권을 제안한 바가 있었는데 지방 간부들의 반대로 포기한 바가 있었으나 마오쩌둥은 마침내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지방 지도자들은 여전히 반대했다. 중앙 농촌 사업부장 덩쯔후이는 척박한 내륙 황무지에서 양곡을 징발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했고 천윈도 입장을 바꿔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했으나 마오쩌둥을 거스르진 못했다. 1953년 11월 전매제도가 시행되었고 모든 농가는 면적당 훨씬 높게 산정된 생산량에 근거한 곡물을 바쳐야 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먹어야 하는 곡물의 양도 정해졌다. 1인당 한달에 13~6킬로그램 정도였는데 이대로 먹으면 딱 기아가 오기 좋았다. 그 외의 곡물은 모두 잉여 생산물로써 국가에 바쳐야 했다. 그러고도 곡물이 남는다면 농민들이 남는 수량만큼 국가에서 살 순 있었는데 당시 개판이 난 중국 경제와 막장이 된 농민 생활을 고려하면 그런 일이 있을리 만무했다.

사실 이런 수확물 통제 정책은 과거 전례가 있었다. 누가 했는가? 바로 일본 제국이었다. 이래서 공산당은 일본 제국을 떠오르게 하는 조달이란 용어 대신에 일괄 수매 일괄 판매 제도라는 완곡한 표현을 사용했다. 이 제도에 농민들이 저항할 것이 너무도 자명하여 공산당 내부에서도 이 제도를 '황색 폭탄'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전매 제도가 시행되지 않을 경우 민간 상인들이 농민들을 '착취'할 것이 자명하였기에 공산당은 '검은 폭탄'보단 '황색 폭탄'을 택하기로 했다. 당연히 중국 전체가 흔들렸다.

중국 곳곳에서 은밀하게, 혹은 공개적으로 반발이 터져나왔다. 광둥성에선 당간부들마저 농민들의 편에 섰고 광둥성의 당간부 중 3분의 1이 곡물 은닉을 도왔다. 곡물 조사관을 막기 위한 공식 회의가 열렸고 방화, 살인, 반란이 벌어졌다. 장시 성에선 농민들이 당간부의 집을 약탈하여 모든 음식을 먹어치운 다음에 푼돈만을 던져주었다. 과거 공산당이 그들을 푼돈만 주고 그들의 식량을 빼앗은 것에 대한 항의 시위였다. 일부 지역에선 당 관리들의 집이 점거당했고 조달 정책에 저항하자는 전단지가 돌았다. 아이들은 마오쩌둥과 공산당을 욕하고 다녀 곡물 조사관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후베이 성의 농민들은 화물선을 공격하여 곡물은 곡물을 생산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자들이 몰려와 곡물 창고를 점령하고 곡물 조사관들이 식량을 빼앗는 것에 저항했으며 어떤 마을에선 농민들이 무장하고 화물선의 접근을 막았다. 쓰촨에선 마오쩌둥과 인민해방군을 몰아내야 한단 소책자와 깃발이 유포되었다. 공산당은 언제나 그렇듯이 폭력으로 대응했다.

군대가 출동했고 공산당은 저항하는 사람들이나 할당된 곡식을 바칠 수도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을 폭행했다. 국가 양식국은 광둥에서 식량을 바치지 못한 사람들을 발가벗겨 추위 속에 던져놓은 사례를 보고받았고 수천명이 저항하다 투옥되었다고 확인했다. 허베이에선 곡물 조사관들이 저항하는 사람들을 매질하며 마을 곳곳을 뒤졌다. 한단에선 공산당이 잉여 곡식을 신고하지 않겠다면 식용유와 소금을 더 이상 공급하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농민들을 매질하고 침을 뱉고 모욕하고 아이와 임신부를 고문하고 조리돌리는 일은 흔했다. 숱한 자살자가 속출했고 공산당도 자살자가 끊임없다고 표현했다.

결국 농민들의 반란이 이어졌다. 뤄루이칭은 공개 폭동만 수십건이 된다고 인정했다. 1955년 광둥 성 중산 현에서 수천명이 동원된 폭동이 벌어져 전매 제도 폐지를 요구했다. 공안국 병력 4개 중대가 폭동을 진압했다. 300명이 투옥되고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쓰촨성 루딩에서 한달 동안 6건의 폭동이 일어났고 쓰촨성 미이에선 10개의 마을에서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 기록이 공개된 것만 해도 이정도다. 공산당은 간쑤 성의 티베트인들의 저항에 그들에게 안정적인 곡물을 제공하도록 후퇴했다. 그곳이 정치적으로 민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민감하지 않은 지역에는 생존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식량까지 모조리 압수했다. 공산당은 식량을 무기화하여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굶주림으로 공격했다.

여기에 공산당이 식량 보관을 민간에서 빼앗아 자신들이 독점했기 때문에 전국 곳곳에서 수탈된 엄청난 양의 식량을 보관하는데 추가적인 비용이 들었다. 기존에 일하던 농부, 행상인, 중개인, 상인, 방앗간 주인들은 모두 밀려났고 그 자리는 공산당원들이 채웠다. 이후 공산당은 한동안 곡물 저장에 엄청난 공을 들였는데 1956년 기준으로 정부가 3년 치의 곡물을 보관하는데 드는 비용은 그 3년치의 곡물을 모조리 판 값과 같았다. 1954년 1월 중국 동부의 모든 성에서 보관된 곡물이 변질되었단 보고가 올라왔다. 상하이에서만 4만톤의 곡물이 썩어서 버려졌다. 하지만 공산당은 더 많은 식량을 수탈하는데만 집중했다. 이런 식으로 공산당은 산둥에서 1953년 200만톤의 식량을, 1954년 300만톤의 식량을 조달했고 허베이는 190만톤에서 208만톤을 수탈했다. 지린 성은 531만톤의 생산량 중 50.7%를 국가에 바쳤다. 결과적으로 국공내전의 시기에서조차 연평균 300킬로그램의 식량을 비축할 수 있었던 농민들은 하루에 0.5킬로그램으로 연명했다. 곡물 뿐만 아니라 식용유를 비롯한 다른 생필품도 없었다. 덩쯔후이는 곡물 전매제도가 다른 수단이 없을 때만 택하는 제도이며 그나마도 고통의 분담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수탈 이후 기아가 만연하기 시작했다. 중앙 위원회는 전매제도가 농민들을 죽이고 있다고 경고했다. 허난과 장시에서 450만이 굶주렸고 후난에서 6명 중 1명에게 먹을 것이 없었다. 산둥에서 300만이 굶주렸다. 구이저우와 쓰촨에선 산악지대에 사는, 전 주민의 25%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팔아버렸다. 전국에 유량민들이 돌아다녀 먹을 것을 구걸했다. 하지만 중앙위원회는 이 모든 것이 자연재해 탓이라고 주장했다. 1955년 류사오치와 저우언라이는 먹을 것이 부족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기꾼이라고 주장했다. 저우언라이는 전매제도가 효과적이라고 고집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1953년 11월 유료 작물에 대한 전매제도를, 1954년 9월 면화에 전매제도를 확대했다. 곧 모든 곡물과 농산 원료품에 전매제도가 실시되었다.

중국 농촌의 집산화 - 농촌의 파멸 중국 근현대사

마오쩌둥의 집산화 프로젝트에 관한 연재글.

1. 중국 농촌의 집산화

2. 공산당의 농민 수탈

3. 집산화의 결과 

순으로 연재될 예입니다. 분량은 들쑥날쑥할 것일듯.


토지개혁이 끝나기도 전이며 국공내전이 끝나기도 전인 1949년 6월 30일, 마오쩌둥은 레닌과 스탈린의 영도 아래에 건설된 위대하고 빛나는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편에 기대어 서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소련이 그러했듯이 농촌을 집산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농업이 사회주의화되지 않고는 사회주의가 완성되거나 견고해질 수 없다. (...) 시간도 오래 걸리고 힘든 일이 될 것이다."

흔히 중빠들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 개혁만 있으면 농촌에 지상락원이 찾아온다고 주장했는데, 그 과정의 유혈사태는 둘째치고 땅을 분배받은 농민들이 생산의 효율성을 위한 농기구와 가축 도입, 관개시설과 종자 도입을 위한 비용을 댈 수 없어 땅을 줘봤자 여전히 가난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전혀 간과한 무지몽매한 소리였다. 실제로 팔라비 왕조의 백색혁명의 결과가 그러했고 장제스가 1920~1930년대에 실시한 농촌개혁도 농민들에게 관개시설 건설, 수리 비용과 종자 도입을 위한 금융, 제도적 지원을 하여 농민들의 수익을 자연적으로 증가시킨다는 방침이었다. 레이 황 교수도 당시 중국 농촌의 문제는 토지개혁만이 해법이 아니었다고 지적했으며 토지개혁이 채고시다를 외치던 학계의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이 가해지고 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구글 드라이브 접속이 안되는 관계로 추후에 보충)

실제로 토지개혁 이후 중국 농촌에선 농민들에게 가축도 종자도 농기구도 비료도 없어서 땅을 받은 농민들이 여전히 굶주리고 있다는 보고들이 속속 올라왔다. 이창에선 이런 보고가 올라왔다.

"올해는 가난한 농부들과 농장 인부들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전망할 수 있는 요인이 정말 하나도 없다. 그들은 생산성을 높일 수도, 인생을 바꿀 수도 없다."

공산당은 이러한 사태에 집산화로 대응하기로 했다. 그렇게 중국 농촌에 대한 두번째 재앙이 찾아왔다.

첫단계는 농기구, 가축, 노동력을 여러 가구가 공유하는 호조조 제도였다. 우리나라의 두레와 마찬가지로 농촌의 상부상조 풍습은 과거에도 존재해왔지만 공산당 간부들의 서슬에 마지못해 하는 협력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농민들은 자신의 가축과 농기구를 다른 농민들이 소중히 다루지 않을 것이라 여겨 불만을 표출했다. 일부 농민들은 참여를 거부했으나 그런 농민들은 "장제스 노선", "낙오자", "비애국자"라는 비난을 들었고 그런 비난을 각오하고도 참여하지 않은 농민들은 자본주의자, 독불장군이라 쓰여진 종이를 등에 붙이고 다니거나 게으름뱅이라고 적힌 판자를 목에 거는 등 사회적 린치를 겪어야 했다. 일부 지역에선 마오쩌둥에게 충성하든지 장제스에게 충성하든지 택일하라는 최후통첩이 내려왔다.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대출이 금지되는 등 재정적으로 압박이 찾아왔다.

호조조 도입 이후로 경제학적으로 '공유지의 비극'이라 불리는 현상이 실제로 찾아왔다. 가축들은 방치되다 죽어갔다. 원래 가축 주인들이 자신의 가축을 제때에 돌려받지 못해 땅을 일구지 못하였고 선박의 반납도 지연되면서 사람들은 공유에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일주 선주들은 배를 빌려주느니 차라리 배를 진흙에 처박길 선택했다. 농기구들도 부주의로 훼손되거나 방치되거나 심지어 개인적 원한 때문에 파괴되었다. 일부 극단주의자들은 가진 것을 죄악으로 여기며 모든 사람들에게 절대적 평등을 표준으로 삼을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 때문에 일부 호조조들은 결혼식비용까지 공동 부담하였다. 사유재산 제도가 붕괴되었고 사람들이 시장에 가는 것도 꾀부리는 행동이라고 비난받았다. 임산부들도 태업을 한다고 비난의 대상이었다.

과거 소련의 농민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유재산을 잃는 것에 분노한 농민들은 재산을 파괴하는 것으로 저항했다. 수많은 가축들이 도살되었고 건강한 말들이 늙은 말과 교환되었다. 고무 타이어가 달린 수레들은 나무바퀴가 달린 수레들로 바뀌었다. 1950년 봄부터 이러한 현상이 확산되었으며 물자 부족이 초래되었다. 설령 물자가 있는 경우에도 사람들은 열정을 보이지 않고 일을 건성으로 하였다. 게다가 당간부들이 부패하여 암암리에 비옥한 땅을 황무지로 속이고, 소위 검은 땅이라 하여 세금이 부과되지 않는 땅을 만들고 소작을 주고 토지를 매매하는 사례들까지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당간부들은 마치 영주들처럼 군림하였다.

문제는 끝이 없었다. 원래도 농촌 수공업과 제조업이 토지개혁의 직격탄을 맞은 상황인데 호조조 집산화 이후 남아있던 수공업자, 농촌 제조업자들이나 대장장이들도 정부의 통제 아래에 들어가면서 제조업의 비효율화가 극대화되었다. 쓰촨성에서 제작된 괭이와 갈퀴는 무게가 두배로 늘었고 갓 만든 농기구들은 하루나 이틀도 버티지 못했다. 저장 성 샤오산의 종이 제조업자들도 몰락했다. 공산당이 종이 제조업에 막대한 세금을 부과하여 이들을 착취하였기 때문에 공산화 1년 후 샤오산의 200개 공장 중 150개가 몰락했다. 남은 숫자도 명맥만 유지했으며 어제의 종이 제조업자들은 이제 산에서 풀뿌리를 캐며 연명했다. 후베이성의 부수입은 1951년 기준으로 공산화 이전의 절반으로 폭락했고 수공업과 제조업이 몰락하여 이들을 강제로 농민으로 만들었다. 중국의 몰락한 수공업은 1980년대에 들어서야 회복되었다.

농민은 더 늘었지만 상기한 이유들 때문에 농업 생산량은 줄어들었다. 토지 개혁 위원회는 후베이의 모든 현이 굶주리고 있다고 보고했다. 간부들은 지역 사정을 조금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지시를 내렸다. 농민들이 각 지역에 맞는 농사를 지으려 하는 것은 반동 행위였고 이런 개짓거리는 1975년은 되어야 시정되었다. 가축들이 굶어죽고 아이들이 굶주리는데도 농민들은 공산당 군중대회에 동원되어야 했다. 국민당 시절이라면 정 굶주릴 때 남에게 식량을 꿀 수 있었겠지만 공산당 정권 하에서는 누군가에게 뭔가 빌려주는 것은 반동적 자본주의 행각이라서 그럴 수도 없었다. 게다가 종교 탄압 연재에서 밝혔듯이 이때 개입할 수 있던 기독교 계열 자선단체도 전멸하여 이들을 도울 수 없었다.

1953년에 접어들자 산둥에서 300만, 허난에서 500만, 안후이에서 700만이 굶주렸다. 산시와 간쑤에서도 각각 150만이 굶주렸고 광둥은 25만이었다. 농민들은 종자곡까지 팔기 시작했고 곧 나무껍질, 나뭇잎, 나무뿌리, 진흙을 먹었으며 자식들을 팔았다. 1952년 시점의 산둥성은 한달에 20킬로그램의 쌀만 먹을 수 있었다. 그나마도 이 쌀은 도정되기 전의 쌀이라서 실질적으로 먹을 수 있는 쌀은 14킬로그램이 되지 않았다. 공산당은 1953년에 접어들자 이 양을 10킬로로 줄였다. 이 와중에도 공산당은 막대한 세금을 부여하여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하였다. 한달에 15킬로그램의 쌀만 먹을 수 있던 만주에선 한줌의 쌀로 아이들을 살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공산당은 이 모든 것이 자본가, 투기꾼, 사재기꾼, 부농의 탓이라고 주장하면서 1953년 호조조를 합작사로 전환했다. 그나마 가진 소유권과 사유재산도 이젠 인정되지 않았고 농민들은 오로지 토지에 대한 명목상의 소유권만을 가졌다. 농민들은 남아있는 가축들마저 도살했다. 국가로부터 쌀을 닥치는대로 빌린 다음에 갚지 않으려는 사례도 속출했다. 그전까지 전통에 따라 공유되던 목초지, 황무지, 갯뻘, 강둑, 삼림지는 집산화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사람들의 전쟁터로 변했다. 아무리 일해도 보상을 받지 못하던 사람들은 토지를 버렸다. 지린성에서만 4~5만 헥타르의 땅이 버려졌다. 사람들은 공동 소유가 될 땅을 경작해야 할 필요성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집산화 속도는 엄청났다. 1953년 시점에서 지린성의 합작사 가입 비율은 6%에 불과했으나 1954년 33%로 급증했다. 1953년 10만개였던 합작사는 1955년 60만개를 돌파했으며 중국 농민의 40%가 합작사에 소속되었다.

공산화 초기 중국의 종교탄압 (3) 도교, 이슬람교편 중국 근현대사

3. 도교

온갖 종교들이 다 탄압받는 와중에 도교라고 예외일리는 없었다. 공산당 입장에서 도교는 괴력난신의 미신일 뿐이며 더욱이 여러 반역 전력이 있는 불순단체였다. 즉각 전국의 도사들이 체포되어 목수나 재봉사가 되는 재교육을 받았고 토속 신상과 조상을 모시는 사당들이 파괴되었다. 공동 제사들이 중단되었고 제례의 간소화가 강요되었다. 각 집안에서 지내는 제사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남아있긴 했으나 도교의 사회적 영향은 크게 약화되었다. 1951년에 도교에 대한 탄압은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극에 달했다. 도교는 수천년을 내려온 종교이고 그 사회적 영향력이나 정부의 탄압으로부터 살아남은 역사가 무궁무진했다. 허베이 성장은 허베이에만 전 인구의 8%인 200만명의 도교 신도가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를 발본색원하기 위해 1951년 초에 3500명의 도교 지도자들이 체포되었고 1951년 6월까지 베이징에서만 10만명의 도교 신도들이 배교를 선언했다. 신선도, 팔괘도, 선천도, 구궁도 등 도교 종파들은 하나같이 철퇴를 맞았다.

중국 남부에선 도교의 영향력이 특히 강했는데 광둥성의 경우, 광둥성 해안의 항구 도시의 50%가 도교를 신봉했고 선전시에만 19개의 도교 비밀단체가 있었다. 이 중에서 황우당의 영향력이 가장 막강해싿. 공산당은 황우당을 밀수, 강도, 간첩으로 몰아 엄청난 숫자의 황우당 신도들이 고문, 처형당했다. 하지만 1953년 시점에서도 공안부장 뤄루이칭은 윈난, 쓰촨, 저장, 안후이의 종교 지도자 수백명의 명단을 추가로 작성할 정도였다.

탄압에 직면한 도교 지도자들과 신도들은 문자 그대로 지하로 파고들어갔다. 지하터널을 파고 지하에서 종교 활동을 계속한 것이다. 중국 북부에선 아예 군사적인 전략망을 방불케하는 거대한 터널망들이 발견되었다. 1955년 산시에서만 100여개의 터널이 적발되었다. 허베이에선 종교지도자들이 터널 속에서 4년을 버텼다. 쓰촨에는 일관도 신도들이 공산당 간부들과 군인들마저 도교 신도로 전향시켜 일부 지역을 일관도가 지배하는 역현상이 포착되기도 했다. 그외에 여러 토속신앙들도 쉽사리 퇴치되진 않았다. 

역시나 1966년이 오기 전까지.

4. 이슬람교

중국 서부의 이슬람교도 공산당의 마수에서 무사하진 못했다. 일부 당간부들은 "선한 이슬람교도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단언했다. 쓰촨과 간쑤, 칭하이, 신장에서 이슬람 교도들에 대한 린치와 폭행이 일어났고 공산당은 이슬람 교도들의 무덤과 파헤쳐서 나온 자재와 비석을 곡식 창고 건설과 제방 보수에 사용했다. 심지어 일부는 돼지 우리를 짓는데 사용되었는데 이슬람교에 대한 가히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농민단체들은 모스크를 점거하여 메카의 방향을 알려주는 미하라브를 파괴하고 이맘들이 설교하는 제단을 대중 집회 무대로 개조했으며 무슬림들이 목욕 의식을 치르는 목욕탕을 여자 화장실로 삼았다. 중국인 민병대들도 공산당원을 등에 업고 무슬림들에 대한 약탈과 폭행을 자행했다.

무슬림들은 이러한 탄압에 매우 격렬히 저항했다. 간쑤, 칭하이, 신장에선 통금령이 시행되었으나 밤마다 총격전이 벌어졌다. 곳곳에서 무장반란이 일어났으며 공산화 이후 불과 수개월만에 수천명이 동원된 대형 반란이 터졌다. 간쑤성의 반란에 대해 공산당은 소수 집단 정책을 단호히 실행하지 못한 결과라 판단, 더욱 가혹한 탄압에 나섰다. 이슬람 학교들은 돼지 우리로 개조되고 학대와 폭력이 '예삿일'이 되었다. 이에 분노한 무슬림들의 반란도 거세졌다. 간쑤성의 핑량에선 2천명의 무슬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1951년 간쑤성 닝딩현에선 8천명의 무슬림이 탄압에 반발하여 봉기하여 현 책임자를 포위했다. 이 싸움에서 1천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간쑤성 린샤에선 감옥에서 동사한 무슬림들의 시체가 들판에 벌어져 무슬림들이 또 분노했다. 이슬람 벨트 지역은 서서히 통제불능에 빠져들었다. 중국 정부는 끊임없이 정부군을 투입하고 반란 지도자들을 처형했으나 사태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1952년 이슬람교에 대해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간부들에게 이슬람 관습을 존중하란 주의가 내려졌고 군인들이 무슬림들 앞에서 돼지란 단어를 말하는 것이 삼가게 되었고 무슬림들의 목욕 의식 장소를 침해하지 말란 지시도 내려졌다. 1953년 5월 베이징에서 중국 이슬람 연합회가 설립되어 정부에 협조적인 이슬람 지도자들을 포섭, 육성하는 작업도 행해졌다. 1953년에 이르러 무슬림들에겐 자치권이 부여되었다. 1955년 10월 신장은 신장웨이우얼 자치구로 정해져서 위구르족의 존재가 인정되었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자치구의 경계를 통해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소수민족의 수적우세를 막았다. 위구르족과 카자흐족, 타지크족, 몽골족이 뒤섞인 여러 지역에서 여러 민족이 뒤섞여 우위를 점하지 못하게 조치되었다. 또한 소수민족에 대해서 사상개조 대신에 중국화 교육이 이어졌다. 쿠란과 아랍어 대신에 중국어가 교육되었다. 1951년 베이징에서 중앙 민족 학원이 설립되어 무슬림을 위한 특수 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이슬람 신학원이 설립되어 종교 지도자들이 개조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종교 지도자들은 당에 충성스러운 인물들로 걸러졌다. 또한 모스크와 이슬람 단체들이 소유한 수입원들이 박탈되어 이들이 국가에 의지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중국화의 절정에는 이슬람 벨트로 트럭을 타고 이주한 수십만명의 중국인 정착인들이 있었다. 1949년까지 무슬림들의 복장이 지배적인 이 지역에선 인민복들이 가득차기 시작했다. 베이징 방송국의 방송만 허락되었고 저서는 공산주의 찬양 서적만 가득했다. 하지만 이슬람교에 대한 본격적 박해는 1966년 홍위병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모택동이 그들을 덮쳤을 때 중국 근현대사

모택동이 국민당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국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가 지주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지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가 종교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종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ㅆㅍ
요즘 글 쓰고 드는 생각이 이거 뿐이다.

(혐오주의)공산화 초기 중국의 종교 탄압 (2) 기독교편 중국 근현대사

1949년 시점 중국에는 300만 명의 천주교 신자와 3천명의 천주교 사제가 있었다. 개신교의 경우에는 100만명의 신자와 4천명의 선교사들이 있었다. 1만 6천개의 성당과 수천개의 교회가 있었다.

이미 공산당은 1920~1930년대에 국민당과 전쟁을 치르면서 기독교에 대한 적의를 보인 바가 있었다. 공산당 점령 지역에선 교회가 파괴되고 선교사와 목사들이 공격을 당했다. 공산당의 탄압은 국공내전 시기에도 이어졌다. 유명한 사례로는 트라피스트 수도회 공격 사건이었다. 1947년 7월 공산당은 베이징 북쪽의 트라피스트 회 수도원을 점령했으며 수도사들을 체포, 구금하였다. 이들 중 6명이 1948년 1월 총살당했다. 학대를 견디지 못한 27명의 수도사들이 추가로 사망했다. 이는 가장 악질적인 사례였는데 이 사례를 포함하여 100명 정도의 천주교와 개신교 선교사들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격적인 탄압은 공포정치와 함께 시작되었다. 개신교의 경우에는, 4천명 정도의 선교사들이 중국에 거주했는데 이들 중 2천명이 신변의 위협 때문에 중국을 떠났다. 하지만 교황청은 천주교 선교사들에게 자리를 지킬 것을 명령했고 천주교 선교사들은 파견지에 남았다. 당시 중국의 기독교 사제와 선교사들은 공산당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했다. 일부는 공산당과의 협력이 가능할 것이라고 보았지만 공산당과 접촉하는 것을 악마와 타협하는 것이라고 극단적으로 거부하는 견해도 있었다. 국공내전에서 유혈사태가 있었으나 공산당은 공산화 초기 1년간은 기독교를 조직적으로 건드리지 않았고 중국에 남기로 한 선교사들의 결정은 일견 현명해보였다. 하지만 탄압의 손길은 나날이 거세어져갔다.

공산화 6개월 후, 장시 성 남부의 존 오세이 주교는 "하루하루 스프링이 당겨지는 느낌이다."라고 논평했다. 이미 중국인 기독교도들에 대한 탄압은 진작에 시작된 상태였고 외국인 사제들에 대한 공격도 시작되고 있었다. 1950년 9월 중국 정부는 전국 기독교 협의회를 설립하고 기독교 선언문을 발표하여 신자들에게 외국과 접촉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이에 따르지 않으면 제국주의의 주구로 몰렸다. 신자들은 교회, 시장, 경찰서에서 심문당했고 배교를 강요받았다. 여기저기서 종교적 네트워크들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또한 중국 정부는 선교사들을 가택연금하고 교회를 점령해 군인들 숙소나 양곡 창고로 사용했으며 선교사들의 재산을 수탈했고 선교사들의 사업으로부터 선교사들을 축출했다. 당시 선교사들은 중국의 의료, 교육 산업에 막대한 관여를 하고 있었고 이들의 노력으로 중국의 근대화에 많은 도움이 있었으나 공산당의 눈에는 모두 제국주의자들의 간교로 보일 뿐이었다. 공산당은 선교사들에게 '파괴적인 수준'의 세금을 부여했고 이 때문에 선교 사업들은 차례로 도산하기 시작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공산당의 외국인 혐오는 극에 달했다. 공산당은 닥치는대로 선교사들을 체포했다. 이때 개신교 선교사들은 파멸적인 타격을 입고 남아있던 2천명의 선교사 중에 100명만이 중국에 잔존했다. 하지만 교황이 파견한 사절 안토니오 리베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버티라고 사제들에게 지시했고 천주교는 완강하게 버텼다. 1950년 시점에서도 2천명의 천주교 사제들이 잔류했다. 공산당은 1950년 9월 안토니오 리바와 야마구치 류이치가 마오쩌둥 살해 음모를 저질렀다고 발표하고 이들을 처형했으며 타르치시오마르티나 주교가 개입했다고 그를 체포하여 종신형에 처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1951년 2월 선전부 수장 후차오무는 소련의 기독교 탄압을 모범적 사례로 지지했다.

리베리는 연금되어 갖은 심문을 당했고 1951년 9월에 추방당했다. 이미 천주교가 제국주의 앞잡이라는 선전이 판을 쳤다. 공산당은 천주교 평신도 단체 <레지오 마리애>를 군사조직으로 몰아 레지오 마리애 회원들에게 반혁명행위를 자복하라고 압박했으나 원하는 결괄르 얻지 못하자 1951년 8월 14일 공안국은 1년 안에 레지오 마리애를 해체하라고 명령했다. 이미 1950년 9월 레지오 마리애 사절 애단 맥그라스가 체포되어 시계, 묵주, 성패를 빼앗기고 수시간 동안 발가벗겨져 모욕을 당했고 곧 영국인들이 세웠던 워드 로드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는 32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재판에 회부되었고 이틀 후 추방당했다.

1918년부터 33년간 선교활동을 해온 60세의 메리놀 회 주교 프랜시스 엑세비어 포드는 1951년 12월 간첩죄와 무기소지죄로 체포되어 조리돌림당했다. 공산당원들은 그의 목에 올가미를 걸었고 그가 질식하여 쓰러지자 군중이 그를 폭행했다. 그는 감옥으로 옮겨졌으나 죽었고 광저우에 묻혔다. 1951년 8월 3일 산둥 성 칭다오에서 27명의 신언회 회원들이 습격당했다. 그들은 2년간 투옥된 후 추방당했다. 선교사들의 성배, 예복, 성유물은 압수당했고 기독교 묘지들은 파괴되었다. 숨겨진 무기와 송신기를 찾는단 구실로 무덤들이 파헤쳐졌고 건덕지가 없으면 묵주를 무기의 일부라고 보고하여 처벌을 가했다. 심문과 고문을 견디지 못하여 정신이상도 발생했다. 란저우에서 체포된 폴 뮐러 신부는 간수들이 살인광선을 쏘고 있다는 망상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1906년부터 46년간 선교해온 87세의 빈첸시오 선교사 아돌프 부흐는 1952년 10월 중국을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곱게 떠나진 못했다. 공산당이 그가 수집한 나비들이 중국을 공격하기 위한 생물학적 병기라고 주장하여 압수한 것이었고 보청기도 빼앗겼다.

또한 공산당은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수백개의 병원을 닫아버렸다. 단순히 닫아버린 것으로 끝나지 않고 선교사들이 환자들을 학대하고 죽이고 아이들을 매매했다는 날조된 혐의를 씌워 마구 처벌했다. 환자에게 가망이 없다는 선고를 하는 것도 살인 혐의로 뒤집어씌웠다. 이런 피해자로 뤄양의 초티 신부가 있었고 초티 신부는 1년 형과 더불어 가택연금을 당했다. 공산당은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250개의 고아원을 닫아버렸고 수녀들을 살인자로 몰았다. 1951년 12월 광저우에서 다섯명의 수녀가 2116명의 아이들을 살해한 혐의로 조리돌림 당했고 2명은 투옥되고 3명은 추방당했다. 일주일 뒤에 2명의 수녀와 한명의 사제가 같은 혐의로 매질을 당했다. 베이징과 텐진과 푸저우에서 여러 사제들과 수녀들이 체포, 투옥, 추방되었다.

1951년 애국교회가 등장하면서 개신교는 더욱 나락에 몰렸다.애국 교회에 합류하지 않는 목사와 신도들은 연금당하거나 수용소로 보내졌다. 가택 수색의 결과로 기도서, 교리문답서, 성화가 파괴되고 성물도 압수당했다. 신학교도 파괴되고 교회들은 문을 닫았다. 중국인 주교 류한천은 윈난 성에서 쫓겨났고 결국 인민재판에 회부되었고 그를 따르던 수녀들과 함께 조리돌림을 당한 후 수용소로 보내졌다. 1927년에 설립된 텐페코스트파의 경우에는 이들이 자급자족 공동체 생활을 영위했음에도 1952년 공격당하여 제국주의자들로 몰려 전멸당했다.

살아남은 교회들은 공산당에 굴복한 교회들 뿐이었다. 여러 교회에는 붉은 깃발과 공산당, 마오쩌둥 찬양 문구들만 가득했다. 십자가 대신에 붉은 별이 걸렸다. 그나마 남은 교회들도 해외에 보여주기 위한 용도가 강했다. 1949년 1만 6천개에 달하던 성당은 1954년 3252개로 격감했다. 300만의 신도도 170만으로 줄었다. 개신교 교회는 아직 6700개가 남아있었으나 신도는 63만명으로 줄어들었다. 1954년 시점에서 천주교 선교사들은 300명이 남아 있었다. 17명이 투옥 상태였고 60명은 조사를 받고 있었으며 34명이 중국을 떠나고 있었다. 나머지 선교사들도 곧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중국의 기독교는 근절되지 않았다. 산둥과 쓰촨에선 여전히 종교 활동이 보고되었고 일부 지역에선 오히려 기독교 신자들이 증가했다. 그러자 공산당은 1955년부터 대대적인 탄압에 돌입했다. 상하이에서 이냐시오 궁핀메이 중교를 비롯하여 수백명의 천주교도들이 투옥되었다. 11월까지 1500명이 제국주의자로 몰려 투옥되었다. 이어 쓰촨, 산둥, 저장, 푸젠, 후베이, 광둥에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이어졌다. 궁핀메이 주교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러한 가혹한 탄압의 결과로 단순히 중국 기독교계의 몰락만이 있진 않았다. 중국인들도 피해의 반열에 들어갔다. 공산당이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병원과 고아원을 공격하면서 많은 중국인들이 방치된 것이었다. 특히 나병 환자들의 피해가 컸다. 신부와 목사들이 쫓겨난 이후 방치된 나병 환자들은 폐허가 된 교회와 요양소를 나와 구걸을 하였다. 우리나라만 해도 불과 몇십년 전까지 나병 환자들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풍문이 떠돌면서 나병 환자들을 백안시했는데 이때 중국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나병 환자들을 폭행하고 살해했다. 1954년 쓰촨성 보건당국은 곳곳에서 나병 환자들이 생매장당했다는 보고를 올렸다. 

공산당의 탄압 때문에 이에 반발하는 폭동과 반란이 빈번하던 구이저우나 윈난의 경우에는 이미 정부가 나병 환자 관리가 불가능해진 상황이었다. 나병 환자의 수는 급증했고 주민들의 불만도 급증했다. 이에 구이저우 공산당은 나병 환자들을 태워죽이는 것으로 대응하기로 결정했다.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나환자들은 꽁꽁 묶인 채로 불태워졌다. 이러한 결정은 윈난에서도 반복되었다. 융런 형 농촌 담당 관리 마쉐서우가 말했다.

"4구역에 위치한 병원의 나환자들이 자주 밖으로 나와 몸을 씻거나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초래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화형시키라고 요구한다."

융런 형 당 서기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텼지만 마쉐서우는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면서 직접 일에 나섰다. 

"대중이 그들을 화형시키길 원한다면 그렇게 하자. 우리는 대중의 뜻에 따라야 하며 대중이 그렇게 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냥 그렇게 하고 대신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

1951년 6월 융런 형에서만 110명의 나환자들이 산채로 태워졌다. 오로지 6명만이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나환자들의 상태도 좋은 것은 아니었다. 중국 공산당은 이들을 돌볼 능력이 전혀 없었다. 광둥 성에만 10만명의 나환자들이 있었지만 공산당은 2000명만 관리할 수 있었다. 중국 공산당이 선교사들로부터 고아원을 빼앗은 이후 고아원의 사망률은 30%를 돌파했다. 그 다음에는 시각 장애인들과 노인들이 희생되었다. 아무도 이에 저항하지 못했다.


3줄 요약
1. 노답
2. 노답
3. 개노답

공산화 초기 중국의 종교탄압 (1) 불교편 중국 근현대사

작년부터 기획중이던 포스팅인데 공산화 이후 중국의 종교들이 어떻게 탄압받았는가를 디쾨터의 저서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알아보려는 것. 중심 출처가 되는 디쾨터의 저서도 그렇고 본인의 시각도 그렇고 객관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출처 접근의 애로로 인하여 단독 출처만을 활용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해주십사 합니다. 근래에 나온 제 포스팅이 다 그렇듯이 추후에 더 많은 연구와 공부를 통해 보충될 예정입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1949년 시점에서 중국에는 본토 지역에 600만의 불자, 신장, 내몽골, 티베트에 700만의 불자가 있었으며 승려의 수는 50만 명, 사원의 수는 23만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산화 이후 불교는 공산당의 철퇴를 맞았다.

주요 종교들 중에 조직화되어 있지 않던 불교는 공산당의 손쉬운 표적이 되었다. 공산당은 사찰 소유의 재산을 압수하였으며 절을 불사르고 불상을 압수하여 녹였으며 대장경을 태우고 승려들을 폭행하거나 죽였다. 특히 상당한 사찰이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만큼, 사찰들은 공산당의 토지개혁에도 걸려들었다. 난징의 경우에는 공산당원들이 승려들을 잡아 상의를 벗기고 손과 다리를 묶어 인민재판을 행하며 죄상을 자백할 것을 강요했다. 항저우의 가장 큰 절인 영은사에서는 다섯명의 승려가 4천명의 군중 앞에서 조리돌림을 당했다. 군중들 앞에서 공산당원들이 외쳤다.

"여러분도 저자가 얼마나 뚱뚱하고 고생 한번 안한 얼굴인지 보일 것이다. 저토록 뚱뚱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동안 사람들의 피와 땀을 빨아먹고 살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착취자이며 나쁜 인간이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저자를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민 정부는 도량이 크다. 따라서 저자를 노동 수용소로 보내 새로운 인간으로 개조할 것이다."

불교 탄압은 윈난과 티베트의 소수민족 박해에도 유용한 도구로 쓰일 수 있었다. 공산당은 윈난의 고도 리장에 거주하는 나시족의 전통적인 춤과 노래를 금지하고 나시족의 불교 사원과 불화들을 불태웠다. 전통이 말살된 자리에는 공산당이 강요한 가요가 나타났다. 공산당은 비판대회를 열고 불법적인 체포와 처형을 자행했다. 사원들은 징발되어 학교, 감옥, 군부대로 개조되었고 승려들도 체포되었다. 체포된 승려들은 비판대회에 끌려나가 총살당하거나 혀를 잘리는 고문등을 겪고 사망했다. 이런 식의 탄압이 공포정치 내내 지속되었다.

1949년부터 1950년대 초반의 공포정치가 완화되면서 공산당은 불교에 대해 새로운 접근법을 내놓았다. 1952년 11월 중국 공산당은 중국 불교 협회를 설립하고 불교를 어용종교화하였다. 공산당은 불교에게 명상과 묵상 대신에 토지개혁과 반동 척결 운동, 6.25전쟁 동참 등을 요구했다. 승려들에게 자아비판이 의무화되었고 1954년부터 불교협회가 앞장서서 전통적인 지전 태우기, 불교 축제, 제사 등을 폐지해나갔다. 그리고 탁발 행위는 비생산적인 이유라고 엄격히 금지되었다. 이 시기의 승려들은 전통적인 수입원이 모두 공산당에 압수당하여 극도의 굶주림에 시달렸다. 가장 유명한 사찰인 바오화산의 승려들도 이미 하루에 묽은 죽 한그릇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불교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수많은 승려들이 환속하여 농부, 군인 등의 새로운 길을 찾거나 명목상 승려로만 남아 결혼을 하고 생산활동에만 종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불자들의 경우에도 일부 연로한 공산당원들에게 계속 불교를 신봉하는 것이 허용되기도 하였으나 절대로 새로운 불자가 생기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공산화 이후 1950년 2월까지 난징의 2천명의 승려 중에 500명이 환속의 길을 택했고 이 숫자는 차차 엄청나게 불어났다. 1958년 시점에서 중국 공산당은 승려의 수가 50만명을 유지한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거짓말이었다. 1955년 3월 18일 비밀회의에서 민족위원회 담당자 왕펑은 승려의 수를 10만명으로 줄여버린 것에 대해 담당자들을 크게 치하했다.

하지만 공산당은 해외의 눈과 중국 내부의 여론을 고려하여 이러한 작업들을 공개적으로 해나가진 않았다. 승려의 수가 50만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거짓 선전이 대표적인 예였다. 사찰들에 대해서 윈난과 티베트의 라마교 사찰들은 파괴와 개조를 면치 못했지만 베이징을 비롯하여 대도시와 국경지대의 100여개의 사찰들은 막대한 비용을 들여 유지보수되었다. 이들 사원은 1951년부터 1958년에 걸쳐 수리되었다. 공산당조차 무시할 수 없었던 일부 역사적 건물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불교를 신봉하는 외국을 고려한 조치였다. 특히 동남아시아가 그 대상이었다. 저우언라이는 미얀마, 스리랑카, 일본, 인도의 불교도를 초청하여 중국의 사원들을 보여주었고 부처의 유골과 치아를 제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의 불교는 단기간에 뿌리뽑히지 않았다. 1953년 허난성에서 기근이 발생하자 뤄양의 백마사는 순례객으로 붐볐다. 3월 25일 하루에만 2만명의 순례자들이 백마사를 찾았고 중국 공산당은 이에 대해 불쾌해했다. 위에서 언급한 1955년 3월 18일 비밀회의에서 왕펑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숭배의 의미로 또는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하거나 향을 피우기 위해서 또는 부처에게 절을 하기 위해서 1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린다."

공산당은 이러한 경향을 잠시는 용인했다. 1966년이 오기 전까지는.

중일전쟁이 터졌을때 어느 화교의 논평 중국 근현대사

ㄹㅇ 재미로 읽으면 되는 뻘글.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에 내려오는 이야기인데, 제 모교는 군밤왕 폐하 시절에 세워진 학교라서 당연히 중일전쟁이 터졌을 때도 있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저희 학교 교사들이 그날 회식을 화교가 하던 동네 중국집에서 한 것인데 이 일화를 얘기해주신 선생님의 표현으론 선생님들이 주인장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일본과 중국이 전쟁이 붙었다. 당신네 나라는 좆된 것이다. 중국도 곧 우리 조선처럼 된다."

그러자 나이가 지긋했던 화교가 코웃음을 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걱정할 거 없다. 그까짓 일본 오랑캐 몇백만명 정도야 조금만 있으면 중국에 녹아버린다."

(...)


몽골족과 만주족도 몰아내본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
하지만 정말로 몰아내기 위해서 중국이 지불해야 했던 피값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으니....

마오쩌둥이 량수밍을 숙청하다 중국 근현대사

흥미가 돋아서 한번 갈겨 보는 글.
큰 의미도 없고 교훈도 없고 재미도 없는 잡글이니 조리돌리기 좋은 글입니다.

"당연하지만 우리는 그곳에 언론의 자유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침묵할 자유도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공산주의 국가에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믿음과 충성심에 관련하여 긍정적인 진술을 하도록 강요받는다."
-후스, 1950년 10월 2일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옛날 중국에 량수밍이란 학자가 살았더랬습니다. 이 학자는 1893년 생으로, 마오쩌둥 주석과는 동년생입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초등학교 교사, 베이징 대학 도서관 보조사서로 초라한 삶을 살 동안 량수밍은 24세로 베이징 대학 철학과 교수가 되는 등 젊은 시절부터 마오쩌둥에 비해 화려한 삶을 살았습니다. 마오쩌둥은 후스의 수업을 청강했던 것처럼 량수밍의 수업을 청강했고 1918년 마오쩌둥과 량수밍의 만남이 있었지만 량수밍은 볼품없는 사서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938년 량수밍은 공산당을 영도하던 마오쩌둥을 만나기 위해 옌안으로 떠났고 그와 두번째 만남(그가 생각하기론 첫번째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오쩌둥은 량수밍과 만났던 사실을 금방 떠올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주 오래 전인 1918년에 우리는 베이징 대학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당신은 잘 나가던 교수였고 나는 초라한 도서관 사서였지요. 어쩌면 기억 못할지 모르지만 당신이 양 교수의 집을 자주 방문할 때 문가에서 당신을 맞아주던 사람이 바로 나였습니다."

당혹한 량수밍은 더듬거리며 대답했습니다.

"맞아요. 그래... 생각이 나는군요... 맞아."

하지만 로스 테릴은 그가 실제로 마오쩌둥을 기억했을 리는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어쨌거나 량수밍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오히려 유교성향의 지식인으로 계급투쟁에 대해 동의하는 사람은 아니었건만 당시 수많은 지식인들을 휘어잡아 자신을 중국의 미래로 생각하게 하던 마오쩌둥에게 큰 인상을 받고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량수밍은 마오쩌둥을 지지하였고 마오쩌둥에게 자신의 저작을 보내주는 등 '지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1949년 공개적으로 마오쩌둥을 지지하고 중화인민공화국에 합류했습니다. 고무된 마오쩌둥은 1950년 량수밍을 정치 협상 회의 위원으로 초빙했습니다. 급기야 그를 중난하이로 불러들여 1950년 9월 이화원 안의 호화로운 저택을 주어 그를 거기에 살게 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화기애애한 사이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공산화 이후, 마오쩌둥은 알려진 것이나 자신이 말한 것과 달리 중국의 산업가와 자본가들에 대한 잔혹한 사냥을 실시하였고 중국의 산업계는 나락에 치닫고 있었습니다. 이때 량수밍이 나섰습니다. 1952년 량수밍은 <상인이라고 모두 정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하는 편지를 보내 그의 정책을 비판했습니다. 마오쩌둥은 공개적으로 량수밍의 견해가 어리석다고 비판하였고 둘의 관계는 냉랭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53년 정치협상회의에서 저우언라이의 부추김을 받은 량수밍이 다시 나섰습니다.그는 공산화 이후 파탄 지경에 이르른 농촌의 상황에 대해 개탄하며 "도시 노동자들이 천국의 아홉 번째 수준으로 살고 있다면 농민들은 지옥의 아홉 번째 수준으로 살고 있다."라고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즉각 반격했습니다. 며칠 뒤 그의 사주를 받은 저우언라이가 량수밍을 반동이라고 비판했고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의 연설에 연신 감탄사를 쏟아냈습니다. 충격을 받은 량수밍은 잠시 할말을 잊었지만 이튿날 회의에서 즉각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해명을 시간을 주지 않으면 주석도 존중하지 않겠다고 오히려 강하게 나왔습니다. 마오쩌둥이 그에게 경고했습니다.

"귀하는 자신이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 같소. 양귀비보다도 더 아름답다고 말이오. 그렇지만 내게는 냄새가 날 뿐이오."

놀란 량수밍은 연단에 서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마오쩌둥은 1천명의 청중과 량수밍을 번갈아 가며 손가락질하며 덧붙였습니다.

"국민당 사람들은 귀하가 마음에 들었던지 나보고는 비적이라면서 귀하는 선생이라고 불렀소."

마오쩌둥은 그가 공산당보다 어떻게 더 농촌에 대해 더 잘아냐고 위원회에게 물은 다음에 빈정댔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반문농부의 경우라 하겠소. 저분이 기업가처럼 우리를 위해 제품을 생산하거나 소득세를 지불할 수 있겠소? 아니요. 그럴 수 없소."

그리고 량수밍에겐 만약 농민을 돕고 싶다면 노동자의 임금을 깎지 말고 자신의 두툼한 급료를 삭감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량수밍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오쩌둥에게 그는 자아비판할 용의가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청중들은 흥분하여 량수밍에게 야유했습니다.

"량수밍은 연단에서 내려가라! 그가 헛소리를 지껄이지 못하게 막아라!"

하지만 량수밍은 끝까지 연단에서 버티며 의견을 고집했습니다. 흥분했던 마오쩌둥은 냉정을 찾고 량수밍에게 10분 간의 발언을 허락했습니다. 량수밍은 끝까지 의견을 피력했으나 이미 분위기가 정해진 상태에서 무의미했을 뿐더러 10분은 터무니없이 적은 시간이었습니다. 으르렁거리는 청중들이 저주를 퍼부었고 좌석에선 고함과 야유가 쏟아졌습니다. 끝내 량수밍은 연단에서 쫓겨났습니다. 전직 국민당원이었던 한 노인이 평정을 찾자고 호소했지만 마오쩌둥은 즉각 그 노인에게 자아비판을 명령했습니다. 마오쩌둥은 량수밍에게 싸늘하게 외쳤습니다.

"장제스는 총을 가진 암살자지만 량수밍은 펜을 든 암살자다."

얼마 후 <량수밍의 반동 사상에 관한 평론>이 발표되었습니다. 량수밍은 위선가요 음모가로 비판받았고 마오쩌둥의 지난 발언에 관한 보충설명이 실렸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방식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총을 이용하는 방식이며 다른 하나는 펜을 이용하는 방식이다. 훨씬 교활하게 위장되고 피를 볼 필요도 없는 방식은 펜을 이용하는 것이다. 바로 당신 같은 살인자들이 사용하는 방식이다."

이 평론에 따르면 장제스보다도 악질인 것은 공산당을 비판하는 지식인이란 소리였습니다. 량수밍은 즉각 이화원에서 추방당했고 그의 모든 경력은 끝장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만... 더 자세한 것은 언젠가....

3줄 요약

1. 량수밍은 마오쩌둥에게 희망을 품고 중국공산당을 지지했다.
2. 하지만 그는 공산당 깠다가 장제스보다 악질이라고 평가받고 숙청당했다.
3. 후스 1승 추가.

p.s

1. 사실 마오쩌둥은 량수밍의 완전한 숙청보다는 량수밍의 직위를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의 연단을 반동적인 사상을 퍼뜨리는 데 사용할 욕심을 잃지 않는 한'이란 조건으로 유지시키면서 그를 산 화살받이로 써먹을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2. 량수밍은 문혁 이후 복권됩니다.

3. 이 글을 제 하찮은 잡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과 민주적 마오쩌둥 운운하던 나무위키 중빠들에게 바칩니다.

참고문헌

해방의 비극, 프랑크 디쾨터
마오쩌둥 평전, 로스 테릴

싸지방 컴퓨터가 모두 새것이 됐어요! 군대 잡담

죽인다...
근데 인터넷은 여전히 좆
-ㅅ-

WTF 정남이가 죽어? 북괴 이야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sec&oid=001&aid=0009033863&isYeonhapFlash=Y&rc=N

아 씨바 할말을 잊었슴다.
검색순위에 오르길래 혹시나 했는데...
대체 왜 이 순간에 난 여기에 있는가?

코르테스의 복수 (21) 계속되는 전투 코르테스 정복기

날이 밝은 후 코르테스는 중대장들을 데리고 사면을 정찰했다. 암벽은 전에 공격한 산에 못지 않게 험해보였으나 대신에 올라가기 더 쉬워보이는 두개의 언덕이 있었다. 그러나 많은 수의 적이 방어하고 있었다. 코르테스는 중대장, 이달고들을 거느리고 방패를 가진 채 언덕에 다가갔다. 이때 코르테스의 말들이 1레구아 떨어진 곳에서 물을 마시고 있어서 코르테스는 걸어서 이동했다. 바위산의 정찰과 공격로의 물색을 위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나머지 병력이 코르테스가 바위산에 다가가는 것을 보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코르테스를 따라 바위산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코르테스가 바위산 밑에 당도했을 때 언덕을 지키던 아즈텍인들은 코르테스가 공격을 하려는 것으로 오해하고 코르테스가 산의 중앙을 돕기 위해 몰려오기 시작했다.

코르테스는 적의 실수를 놓치지 않고 즉각 언덕을 점령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기로 결정했다. 코르테스는 중대장 한명을 은밀히 불러서 두 언덕 중에 더 가파른 쪽을 비밀리에 점령할 것을 지시했다. 페드로 바르바, 프란시스코 페르두고, 훌리안 데 알데레테가 코르테스의 명령에 따라 가파른 언덕을 점거했다. 코르테스도 남은 병력을 데리고 다른 언덕을 올라가 언덕 한쪽을 차지하고 저항하는 적들과 같은 높이까지 올라갔다. 코르테스는 이는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지 않곤 불가능한 일이라 자화자찬했다. 이미 언덕 위에는 중대장들이 군기를 꽂아둔 후였다. 언덕 위의 코르테스 병사들이 화승총과 석궁을 퍼부어대자 적들은 희망을 잃고 항복하겠단 신호를 보내오며 무기를 버렸다. 코르테스는 항복하는 적은 반드시 받아들인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해칠 뜻이 없으며 환영한다는 말을 하였다. 스페인인들이 그들을 환대하자 항복한 적들은 일전에 코르테스가 패배했던 바위산의 동료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며 항복을 촉구했고 이에 바위산의 전사들은 코르테스에게 일전의 일을 사과하며 항복해왔다.

코르테스는 바위산 옆의 마을에서 이틀간 머무른 다음에 부상병들은 테수이코로 보내고 자신은 과스테페케로 떠났다. 코르테스는 자신이 본 정원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상쾌한 정원 한가운데에 위치한 농가에 도달하여 휴식을 취했다. 이 정원이 대단히 아름다웠던지 코르테스는 물론 알데레테와 멜가레호와 같은 중대장들도 탄복을 금치 못하였고 카스티야에서도 이런 정원은 본 바가 없다고 말했다. 세르반테스 데 살라사르의 기록에 따르면 몬테수마 역시 이 정원에서 가족들을 데리고 이곳에서 머물곤 했다고 했다. 다음날 농가를 떠난 코르테스는 야우테페케란 멋진 마을에 도착했다. 그곳엔 다수의 적이 있었으나 코르테스가 도착하자마자 화해의 뜻을 전해왔다. 코르테스는 이를 자신들을 속이려는 뜻이 아닌가 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적들은 마을을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코르테스는 즉각 30명의 기병들을 데리고 그들을 추격하여 힐루테페케란 마을로 몰아넣은 다음에 다수를 죽였다. 코르테스가 힐루테페케의 정찰병들보다도 빨리 도착했기 때문에 힐루테페케 주민들은 전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코르테스는 일부 주민들을 살해하고 다수의 아이와 여자들을 포로로 잡았다. 나머지는 달아났다. 코르테스는 달아난 수장이 항복의 뜻을 전해올 것이라 믿어 힐루테페케에 이틀간 머물렀다. 하지만 수장이 찾아오지 않자 코르테스는 마을에 불을 지르고 떠났다.

코르테스가 힐루테페케를 떠나기 직전에 야우테페케의 일부 주민들이 찾아와 용서를 구하며 황제의 신민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코르테스는 그들이 충분한 벌을 받았다고 판단하고 그들의 전향을 받아주었다. 그날 9시에 코르테스는 코아드나바세드란 요새 마을에 도착했는데 그곳엔 많은 수의 적이 있었다. 이 마을은 난공불락의 언덕과 계곡에 둘러쌓여 접근 가능한 지점이 두 곳밖에 없었는데 그 시점에는 코르테스는 그 길목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요새는 워낙에 철통같아 요새를 지키는 적의 10배의 병력을 데려온다 하더라도 함락시키기는 어려울 듯 싶었다.

중일전쟁 시기 공산당 확장 요인에 관해 잡설. 중국 근현대사

중국 공산혁명 성공의 원인에 관한 탐구는 시기적으로 중일전쟁기의 혁명과정에 주목해 왔다. 그것은 이 시기 중국공산당 세력의 성장이 이후 국민당과의 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전국적 권력을 장악하는 결정적인 기반이 되었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많은 연구들이 이 시기 공산세력의 성장 원인을 두고 상이한 입론들을 제기해 왔다. 1960~70년대를 통해 농민 민족주의 대 사회, 경제적 혁명론의 논쟁, 연안시대 중국 공산당의 대중노선과 (신)민주주의에 대한 낭만적인 평가와 그 음여에 주목하는 부정적 견해 간의 대립, 도덕경제적 설명과 그것을 부정하고 공산당의 유연하고도 노회한 전략을 강조한 연구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연구에서 주목되는 것은 그 대부분이 혁명의 성공을 단일원인(mono-causal)으로 설명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이 갖는 설득력의 한계는 1980년대 이래 지방사자료들의 발굴과 지방혁명사 연구의 축적을 통해 분명해졌다. 하나의 근거지 혹은 하나의 현 혹은 한 촌락의 혁명과정을 탐구한 미시적 연구들은 중국 혁명이 하나의 '만화경(kaleidoscope)과도 같은 '지방적 다양성(local diversity)을 통해 전개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혁명은 당 중앙에 의해 통일적, 집중적으로 지도되었던 것이 아니라 현장의 지방적 조건에 따라 상이한 방식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일전쟁기 중국공산당 권력의 성장과 지역사회 - 강소 북부 농촌의 소도회를 중심으로, 박상수,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39~140페이지.

읽다가 흥미로워서 발췌.

최근 읽은 책들 책 이야기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아서 클라크
캐리, 스티븐 킹
미저리, 스티븐 킹
세계질서, 헨리 키신저
히로히토 평전, 허버트 빅스

며칠 전부터 쓰려다가 자꾸 까먹어서 오늘에야 쓰네요.
휴가 1주일 밀려 괴롭습니다...

호옹이 잡상

오늘 방문자가 무려 700...
보고 깜짝 놀랐네링.

중일전쟁 시 중국군 수송망의 붕괴의 결과 중국 근현대사

계속 공산당 얘기만 써서 슬슬 국민당 얘기도 써야 겠다는 생각이 들기에 올리는 간단한 포스팅. 언제나 그렇듯이 재미로 읽어주십시오.


장제스와 난징 국민정부는 1931년 대공황에서 닥쳐온 위기를 1935년 화폐개혁과 실업부 산화의 공업화 계획으로 극복해내가고 8200킬로미터의 철도망과 1만 2천킬로미터의 도로 건설 및 해운업 촉진을 하면서 눈부신 발전을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흔히 장제스 시절의 농업정책에 대해서 비판점이 많긴 하지만(마오식 토지개혁을 안했단 개소리를 제외하고도) 1936년~1937년에는 국민정부가 주도한 생산력 증강 프로젝트가 성과를 거두면서 큰 성과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아십니다. 국민당의 경제정책의 꽃이 막 만개하려는 순간 일본 제국이 닛뽄도를 휘두르면서 몰려왔단 것을. -ㅅ-

중국은 나름 분투했습니다만 결국 상하이 공방전 패배 이후 정신없이 밀렸고 수도 난징 함락에 이어 우한과 광저우의 함락으로 중국이 가지고 있던 최후의 대도시까지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가면서 90% 이상의 공업력과 관세, 조세 수입 등이 상실되면서 국민당의 재정력과 공업 생산력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라 하겠습니다.(모르거나 알아도 그게 뭔 의미인지 모르는 양반들은 나무위키에 많이 보이긴 했습니다만...) 그러다가 최근에 본인이 국공내전 공부하면서 다시금 주목하게 된 것이 중국의 수송망의 마비였습니다. 이후 국공내전의 패배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 수송망 붕괴는 그 원인이 일본의 침공으로 소급됩니다. 철도망과 수운망을 죄다 일본군이 먹어버렸고 이후엔 얼마 되지 않는 트럭과 비행기, 그리고 사람의 발에 모든 것을 의지해야 했거든요. 레이 황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한커우와 광저우가 함락된 이후, 군대는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모든 철도와 교통 시설을 적에게 빼앗겼다. 남아 있는 것이라곤 대개전장의 전선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방어 부대에겐 큰 가치가 될 수 없었다. 장제스가 1939년 동계공세를 시작했을 때, 중국군 전체에는 트럭이 겨우 1532대 있었다. 버마 로드가 열렸을 때,모든 종류의 자동차는 총수가 15000대였던 듯 하다. 그 대부분은 자원위원회와 다른 민간기구의 소유였다. 그러나 정비와 부품의 결여로 인해 그 숫자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1943년에 이르러선 대략 5천대에서 6천대가 운행 중이었다. 화이트에 따르면 그해 여름 한달 동안 버마 로드가 가장 붐볐을 때조차 하루 평균 123대의 자동차가 운행되었다.(제가 근무서는 곳에선 출근시간 한시간 동안 600대가 지나갑니다. -ㅅ-) 1942년의 한 군사회의에서 장제스는 장군들에게 종래 중형의 기선 한 척이 3천톤을 나를 수 있었는데 이제는 100대의 수송기가 겨우 300톤을 나른다고 말했다. 종래 열차 한편이 500톤을 날랐지만 이제는 200대의 트럭뿐으로 그 정도의 운송능력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 역사
230~231페이지

안그래도 중국의 공업력은 파멸적인 타격을 입어 96%의 전기생산과 94%의 공업생산을 상실하였고 1939년 중국의 철강생산량은 연간 1200톤으로 추락했습니다. 이후 철강생산량이 절정에 다른 1944년에 13000톤으로 증가하긴 했는데 이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이 한시간 동안 생산하는 양보다 적은 것이며 국민당 집권 이전에도 만주를 제외하고도 신식용광로에서 선철 2만톤, 토법생산으로 16만톤을 생산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참담한 것이었습니다. 그나마 미국의 원조는 형편없는 것이라 한달 내내 30톤만 받은 적도 있어서 장제스가 격노했고 그나마 약속한 무기도 영국이 중간에 도적질해서 가기도 하여서 장제스의 분노는 폭발했습니다. 이 때문에 장제스 부부는 스틸웰에게 한달에 5000톤의 공수를 보장할 것을 요구하며 싸웠고 특히 분노한 쑹메이링은 이런 식의 배신이 계속되면 중국이 더 이상 싸울 이유가 없다고 쏘아붙이기도 했습니다. 

가뜩이나 공업생산량이 개판이라 당시 중화민국은 한달에 소총탄과 기관총탄을 모두 합쳐 겨우 1500만발을 생산했는데 전 중국군에게 총알 4발씩을 쥐어줄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나마 기관총탄이 섞여 있단 것을 감안한다면 실제 소총탄은 매달 한 사람에게 4발도 쥐어주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기껏 생산한 물자를 보급해준다 쳐도 그걸 사실상 사람이 죄다 날라야 한단 겁니다. 그럼 결과가 어떻게 될까요?

"내가 제42보병에 소대장으로 배치된 날, 나의 모든 기대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목도한 현실에 충격을 받았다. 모든 대대와 중대의 병력은 정원의 절반에 불과했다. 분명, 제14사단은 한때 장비를 충분하게 갖추고 있었다. 과거의 영광을 증언하는 독일식 헬맷, 방독면, 텐트용 범포 등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벼룩시장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상태였다. 한 조각은 여기에, 다른 조각은 저기에, 이런 식으로 물품들은 한 세트를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된 사연은 이랬다. 몇달 전에 일본군이 북부 베트남을 점령했을 때 제14사단은 그 비상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성을 가로지르는 500마일의 도보 행군을 산악 지대에서 감행했다. 행군이 시작되었을 때, 장교들과 사병들은 모든 물자와 장비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점차 그들은 단지 무기에만 신경을 썼다. 그 다음에, 몇몇 환자들이 길 위에서 죽기 시작하자, 모두의 마음에 생존이 지상과제가 되었다. 병사들은 담요를 찢어 각반을 만들었다. 우기 동안 말라리아에 감염된 지역을 도보로 들고 나고 한 다음에 이르자, 제14사단은 더 이상 철도 위와 내륙의 수로망 안에서 작전하던 때의 그런 부대가 아니었다.

그해의 남은 기간 동안, 군대는 아일라우 산 지역의 노새들을 징발하여 소금, 모기장, 통신장비와 같은 가장 필수적인 물품들을 나르도록 했다. 제14사단 사병들은 추운 밤 동안 덜덜 떨어야 했고, 서너명이 한 장의 담요를 같이 썼다. 그들에겐 칫솔이 없었다. 화장지 대신에 대나무 조각을 사용했다. 얼굴을 닦을 때 한장의 수건을 같이 썼다. 때문에 한 명이 눈병에 걸리면 며칠 안에 소대 전체에 감염되었다. 말라리아에 쓰는 키니네 알약이 없었다. 정강이나 발목의 피부가 짚신으로 마찰하여 벗겨지면 상처 부위가 진흙과 빗물에 노출되어 괴저로 발전하는 일이 흔했다."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 역사
231~233페이지.

아마도 군대 시절에 행군 경험하신 분들은 20킬로그램 군장 메고 포장 도로 위에서 40킬로 행군하는 것도 얼마나 죽을 맛인지 아실 것인데 그걸 산악지대에서, 몇달 동안에 저러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짐작이 가시리라 믿습니다. 위에 언급된 14사단은 장제스의 직계사단으로 중일전쟁 내내 '패배한 적이 없다'라고 할 정도로 명성이 자자한 사단이었습니다만 그런 14사단조차 저런 꼴이니 아예 군벌군들은 어땠는지 뭐라 견적이 안 나옵니다. 물자의 부족으로 인해 장제스는 충칭의 생존에 필수적인 전략 요충지인 이창 탈환작전조차 감행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꼴을 보면 대체 '마오쩌둥이 일본군의 7할 막는동안 막대한 미국 물자 쌓아놓고 태업한 장제스'란 테제는 어디서 나온 것인지가 궁금할 정도입니다. 여튼 이 조잡한 글의 끝을 내보자면 다음과 같겠습니다.

1. 장제스와 국민정부가 노오오력을 해서 건설한 공업력, 수송망은 요단강을 건넜다.
2. 그 결과로 중화민국의 전쟁수행력은 개판이 되었으며 특히 수송망의 붕괴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했다.
3. 그때 마오쩌둥은 뭐하고 있었다? 

무척이나 편향적으로 보이는 3줄 요약이지만 파보니까 이렇습니다.

참고문헌
-욱이님의 중일전쟁
-장제스 일기를 읽다, 푸른 역사, 레이 황
-남경정부 시기 국가주도 하 국민경제 건설, 강명희, 한세대학교.
-중일전쟁과 중국의 대일군사전략(1937-1945), 경인문화사, 기세찬

저 달팽이는 해로운 달팽이다 중국 근현대사

정부는 질병을 뿌리 뽑고 해충을 근절하고자 굳은 결심을 보였지만 전국적으로 수백만명을 동원한 대대적인 캠페인이 그들의 훌륭한 목표에 항상 만족할 만한 성과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국가에 제출할 쥐 꼬리의 할당량을 부과했을 때는 사람들이 쥐를 사육하기 시작했다. 대규모 인원을 투입하고 기치를 올리고 나팔을 울리는 군사 작전을 통해서 전염병에 맞서고자 한 발상 자체가 일반적인 의료 관행과 충돌했다. 주혈흡충증을 근절하기 위한 노력도 이 경우에 해당되었다.

해방 이후로 주혈흡충에 감염된 사람의 숫자는 매년 증가했다. 특히 중국 동부 지역에서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하지만 지도부는 처음에 이 문제를 외면했다. 그들의 관심은 한국 전쟁 중 첩자들이 세균에 감염시킨 것으로 의심되는 말벌과 나비를 잡는 데 집중되었다. 1955년 11월 저장 성을 방문한 마오 주석이 심신이 쇠약해지는 주혈흡충증 증상을 직접 목격한 다음에야 마침내 주혈흡충증에 관심을 보였다. 마오쩌둥은 <역신에 이별을 고하며>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시를 쓰고 1956년 2월에 이르러 대대적인 캠페인을 실시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주혈흡충증은 반드시 근절되어야 한다!>

호숫가로 내몰린 수백만명의 농민들이 진흙 바닥을 기어다니면서 주혈흡충증을 옮기는 달팽이를 잡았다. 하지만 의료계의 주요 인사들은 내내 단순히 달팽이를 잡아들임으로써 해당 질병을 근절하려 하는 것은 가망 없는 시도라고 경고했다. 달팽이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주혈흡충의 숙주에 불과했다. 주혈흡충은 접촉을 통해 인간과 동물에게 감염될 수 있었고 일단 감염된 다음에는 혈관이나 간에서 알을 낳았다. 이 알이 섞인 인간이나 동물의 배설물이 다시 호수에 흘러 들어가 달팽이 몸에 부화하면 한번의 순환이 완성되었다. 조언을 건넨 전문가들은 운이 좋을 경우에 그냥 무시되고 말았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부르주아라는 비난을 받았다.

소대 규모로 편성된 전국의 수많은 농민들 손에 의해 달팽이가 파헤쳐지고 수집되었다. 기존의 수로를 막아서 달팽이를 묻느라 새로운 수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캠페인으로 엄청난 인력이 동원되었지만 캠페인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풀을 베거나 갈대를 모으기 위해 또다시 감염된 호수로 보내졌다. 이는 후베이 성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 화중 지역의 후베이 성에는 양쯔 강을 따라 오리가 헤엄치고 수련과 마름이 발달한 천여 개의 호수가 존재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전체 주민 중 3분의 1이 감연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역신과 이별했음을 알리는 지방 간부들의 열정적인 보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150만 명 이상이 감염된 상태였다. 한촨 현에서는 캠페인 기간 중 대략 700명의 환자가 치료되었지만 캠페인이 끝나자마자 1000명에 달하는 새로운 환자가 등장했다. 기록 보관소의 증거에 따르면 해당 캠페인으로 주혈흡충증 발병률이 거의 줄어들지 않기로는 다른 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구호와 할당량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캠페인으로 운영되는 국가였다. 질병을 통제하기 위해 예컨대 분뇨 처리 방식을 개선하는 등의 다각적인 측면에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집산화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합작사에 소속된 사람들은 어차피 그들 소유도 아닌 가축을 신경 쓰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같은 맥락에서 가축 배설물을 처리할 적당한 방법을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 당 간부의 명령에 따라 살게 되면서 끓인 물을 마시거나 따뜻한 음식을 먹는 등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위생 규칙도 도전을 맞이했다.

해방의 비극,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413~415페이지.

참새잡이는 예전부터 예고된 일....
집산화 과정과 집산화의 부작용에 대해선 내일 근무가 없으니 쓰도록 하겠습니다.

공부하다가 느끼는 점 잡상

어느 책에서 기발한 발언을 찾아서 이거 가지고 포스팅 써야겠다! 라고 생각해서 그 책 다시 펼쳐들면 책이 방대한 경우가 많아서 어디였는지 찾기가 힘들다.(...) 지금 헨리 키신저의 세계질서와 키신저가 사다트와의 개인적인 흥미로운 일화를 실어놓은 것가지고 포스팅 쓰려고 세계질서 뒤지고 있는데 못 찾겠고 조영남 교수의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에서도 중국의 의료 상황 다뤄놓은거 찾아서 글 쓰려고 찾으니 안보인다. -ㅅ-

안휘성 당서기 완리가 본 중국의 현실 중국 근현대사

완리 일행이 한 농가를 방문했을 때, 그 집에는 노인 1명과 2명의 과년한 딸이 있었다. 그들은 신임 당서기가 방문했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완리는 노인이 보고 듣는 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동행한 간부가 완리를 다시 소개하자 노인은 어쩔 수 없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인은 바지를 입고 있지 않았다. 추운 날씨에 천으로 몸을 감싸고 앉아 있어서 일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완리는 옆에 있는 두 딸에게도 말을 걸었다. 두 딸도 수줍은 표정으로 바라볼 뿐 일어나질 않았다. 노인이 끼어들어 말했다.

"부르지 마십시오. 그 애들도 바지가 없어서 추위를 견디지 못해 솥 근처에 앉아 몸을 따뜻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완리 일행은 노인의 집을 나와 젊은 부부가 두 아이를 키운다는 농가를 방문했다. 젊은 부부는 완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완리가 "아이들은 놀러 갔느냐?"라고 묻자 부부는 대답이 없었다. 완리가 궁금해서 계속 묻자 여자는 마지못해 큰 솥의 뚜껑을 열어 보였다. 거기에는 발가벗은 2명의 여자 아이들이 수줍게 웃으며 앉아 있었다. 밥을 짓고 난 솥에 온기가 남아 있어 옷이 없는 두 아이를 그곳에 앉혀 추위를 막고 있었던 것이다.

완리는 두 집을 방문한 후에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채 탄식하면서 말했다.

"옛날 해방구의 인민들은 혁명을 위해 많이 희생했고 공헌을 했다! 그들이 없었으면 우리 국가는 어디서 왔겠는가! 우리의 오늘이 있었겠는가! 그런데 해방하고도 이렇게 많은 해가 지났는데도 농민들의 집안에는 벽밖에 없고, 씻은 듯이 가난하며, 옷은 몸도 가리지 못하고, 먹어도 허기를 채우지 못하니, 우리들은 어찌 얼굴이 있어 촌의 어르신들을 볼 것인가! 부끄럽기 그지없다!"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1권(1976~1982) 개혁과 개방, 조영남, 민음사
109~110페이지

해당 일화는 1977년 11월의 일.

우한 노동자들의 생활상 비교(국민당이 낫냐? 공산당이 낫냐?) 중국 근현대사

1937년 시점 우한 노동자들의 생활상
곡물 소비량: 157/170/172/159(단위는 킬로그램. 왼쪽부터 전이 방적공장, 한커우 전지공장, 우한 모터공장, 우창 조선소 노동자들)
돼지고기 소비량: 8.8/12.5/6.7/8(단위는 킬로그램, 순서는 위와 같음.)
식용유 소비량: 7/8.5/5.9/7(단위는 킬로그램, 순서는 위와 같음.)
옷감 소비량: 10.6/8/7.2/7(단위는 미터, 순서는 위와 같음.)
주택 크기: 6.5/4/4.6/5(단위는 제곱미터, 순서는 위와 같음.)

1957년 시점
곡물: 147/135/127/146
돼지고기: 5.2/5/5/5
식용유 5/4.3/3.9/4
옷감: 6/3.9/4.7/7
주택: 3.9/2.8/4.1/4

출처는 후베이성 1958년 3월 28일 조사 결과.
그리고 이와중에 집세는 1948년 271위안이던게 1957년 990위안으로 폭등했고 영양실조가 만연한 건 덤. 노동자들 건강도 생까버린 것도 덤.

그러니까 인민 삶의 질을 바탕으로 모주석이 우월하니 하다고 떠드는 건 뭐다?

덩샤오핑 집권 이전의 개혁 노력 중국 근현대사

역시나 간단한 포스팅. 요즘 쓰고 싶은 건 많은데 시간이 없어서 슬픕니다.

1. 정돈 운동

대약진운동-문혁을 거쳐서 중국이 개판 오분전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자 천하의 마오 주석도 더 이상은 안되겠다는 것을 감지, 저우언라이의 방광암 진단과 덩샤오핑의 선처 호소를 계기로 1973년 2월 덩샤오핑 복귀를 허락하고 1974년 8월 소위 '8월 지시'란 것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은 이미 8년이 되었다. 현재는 안정이 필요하다. 전 당과 전 군은 단결해야 한다."

11년만에 전국인대 회의가 열려 1975년 1월 13일 4기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열렸습니다. 리셴넨이 재정과 무역, 화궈펑이 정법과 과학, 장춘차오가 문화, 천잉구이가 농업 등을 맡았고 덩샤오핑은 대외 업무와 회의 주관 등을 맡으면서 실세가 되었습니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을 등에 업고 2000년까지 중국에 4가지 근대화를 이룩하겠다고 천명하면서 '정돈'을 실시했습니다. 우선 철도의 정상화가 시범적으로 이뤄졌는데 신임 국무원 철도부장 완리는 강소성 서주의 철도 운영을 정상화하면서 시범 사업을 성공으로 이끌었고 이 성공을 점-선-면으로 확장한다는 전략을 바탕으로 1975년 상반기까지 중국의 철도사업을 개선시켰습니다.

이후 공업, 군, 과학, 교육, 문화에 대한 정돈이 추진되었습니다. 예젠잉이 중앙군사위원회를 정돈했고 판공회의 폐지, 상무위원회 부활, 군부, 교육, 과학기술 쪽의 인사 혁신이 이뤄졌습니다. 다음의 결과로 공업생산량이 15%나 급증하는 등 효험이 보였습니다만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이 감히 자신의 문혁 사업 대상인 교육, 문화, 과학기술 등을 건드리자 덩샤오핑이 문혁을 부정했다고 비판하면서 그를 다시 숙청해버렸습니다. -ㅅ- 정돈 사업은 이렇게 끝나버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덩샤오핑이 내세운 공업 20조, 10년 계획요강 등의 사업 등은 죄다 엎어졌고 덩샤오핑은 모든 공직에서 쫓겨났습니다.

2. 책임전 운동

이건 중국 안휘성에서 있었던 개혁. 당시 중국은 무차별적인 토지개혁-합작화-대약진운동을 거치면서 중국 농촌은 초토화상태였습니다. 토지개혁은 저번에 간단하게나마 쓴 것이 있고 합작화는 추후에 포스팅을 쓰겠습니다. 이런 개판을 보다못한 안휘성 서기 쩡시성이 생산량에 따라 농가의 수입을 결정하는 영농제도를 도입했는데 이것은 농토관리책임제 및 장려란 이름으로 불렸고 줄여서 책임전이라 했습니다. 쩡시성은 이것이 생산수단을 여전히 집단이 소유하니 사회주의적인 제도라고 주장하여 마오쩌둥의 '마지못한' 동의를 얻어습니다. 쩡시성은 "하늘과 통했으니 해도 된다"라면서 전 성에 책임전을 적용했고 농민들은 이를 "구명전"이라 부르면서 환영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책임전을 실시한 안휘성의 36개 현은 38.9%의 생산량 증가를 기록했고 책임전의 획기적인 성공에 놀란 중국 각지에서 이를 받아들여 1962년 중국의 30%에 달하는 지역에 책임전이 도입되었습니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가만 놔둘리가 있습니까. -ㅅ-

마오쩌둥은 책임전이 사회주의 집단 영농을 파괴하고, 토지 개별경작이란 봉건시대 소농경영으로 회귀하고, 농민의 이기심을 고취하여 집단주의를 약화하였다고 비판했고 1962년 1월 공산당 중앙은 책임전이 방향성의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하여 이를 취소하고 안휘성 지도부를 숙청했습니다. -ㅅ- 8월 중앙공작회의와 공산당 8기 10중전회에서 마오쩌둥은 책임전이 개인주의 풍조라면서 게급투쟁을 전개하여 이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천윈도 책임전 지지를 빌미로 이때 잠시 숙청됩니다. 그는 1978년에야 복권될 수 있었습니다.

3줄 요약.

1. 중국의 당시 상황은 개폭망
2. 하지만 덩샤오핑이나 쩡시성 등이 개혁을 시도
3. 그러나 마오쩌둥에게 그런건 없다?

출처:조영남 교수의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1권.

바쁘고 추웠다. 잡상

제곧내.
군사기밀이라 자세한 사항은 비밀.
감기도 걸려 아팠는데 전에도 느꼈지만 항의전대가 꽤 일을 잘합니다 그려.

중국의 공산화는 중국의 기아를 퇴치했는가? 중국 근현대사

매우 간단히 갈기는 포스팅. 나무위키 중빠들도 그렇고 공산당과 마오쩌둥이 중국의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해주었다고 온갖 종류의 찬양을 늘어놓았는데 어디 한번 볼까요?

"...노동자의 임금은 지난 20년동안 오르지 않아 전체 노동자의 70%가 최저 생계 수준을 겨우 유지하면서 근근히 생활했다. 농민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1978년 농민 1인당 연평균 식량은 320근(160킬로그램)으로 1960년의 215근(108킬로그램)보다는 늘었지만 1956년의 310근(155킬로그램) 수준을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1978년에 8억의 농민 중에 2억 5000만명이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절대 빈곤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

1977년 6월 안후이 성 공산당 제1서기로 부임한 완리는 석달동안 지역 농촌의 실태를 조사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약 4000만명의 농민 중에서 3500만명(87.5%)이 의식주를 해결할 수 없는 빈곤 상태에 있었다. 이 조사에서 농민들에게 최대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첫째도 배부르게 먹는 것이고, 둘째도 배부르게 먹는 것이고, 셋째도 배부르게 먹는 것이다." 완리는 이런 비참한 현실을 한탄했다. "우리는 이런 낮은 요구도 아직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사회주의를 실행한 지 곧 30년이 되는데 어떻게 이렇게 빈궁할 수가 있는가."

1978년 11~12월에 개최된 중앙공작회의에서도 회의 참석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심각한 농촌 현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하고 개선책을 촉구했다. 이 회의에 참석한 천윈도 <현재 경제 문제의 다섯 가지 의견>이라는 제목의 발언에서 농촌 문제를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경제 문제 중에서 중공업이나 기초 건설이 아니라 농민 문제가 최우선의 해결 과제라고 주장했다. 즉 농민의 먹거리 문제를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건국한 지 곧 30년이 되는데 현재도 밥을 구걸하러 다니는 농민들이 있으니 어떻게 된 것인가? 조금 느슨하게 해서 농민들이 숨도 쉬지 못하는 일은 없도록 하자. 오래도록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마도 농민은 곧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지부 당서기는 농민들을 데리고 도시로 가서 구걸을 할 것이다."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1권 1976~1982) 개혁과 개방, 조영남, 민음사.
58~59페이지.

대단히 나아진 것 같군요.
암요.

코르테스의 복수 (20) 뜻밖의 패배 코르테스 정복기

1521년 4월 5일 금요일, 코르테스는 30명의 중무장 기병과 300명의 보병을 통솔하여 테수이코를 출발하였고 산도발에게 20명의 기병과 300명의 보병을 주어 테수이코를 지키게 했다. 테수이코의 인디오 동맹군 2만명이 코르테스를 따랐고 코르테스는 칼코의 틀라마날코 지역에서 주민들의 환대를 받으며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 아홉시, 코르테스는 칼코에 도착하여 수장들에게 자신이 호수 주변의 길을 따라 가겠다고 했는데 이는 3차 칼코 지원을 끝내고 나면 브리간틴 선이 완성되어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저녁에 틀라마날코를 떠난 코르테스는 칠마와칸-찰코에 이르러 4만명의 동맹군과 합류했고 아즈텍인들이 들판에 진을 쳤단 정보를 입수하여 다음날 동이 트기 15분 전에 모두 일어나 준비할 것을 지시했다.

다음날, 코르테스는 미사를 올린 후 칠마와칸-찰코를 떠났다. 코르테스가 직접 20명의 기병과 함께 선두에 섰으며 10명의 기병이 뒤따랐다. 가파른 산 몇개를 넘은 후 2시 경이 되었는데 코르테스는 또 다른 가파른 산 앞에 이르렀다. 산꼭대기에는 많은 여자와 아이들이 있었고 바위산의 사면에는 많은 수의 적군이 있었다. 그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연기로 신호를 보냈으며 손이나 투석기로 돌을 던지고 화살과 투창을 날려댔다. 이 때문에 코르테스의 군세는 산을 오르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아즈텍인들이 더 이상 들판에서 코르테스와 상대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코르테스는 이번 원정의 목표가 저 바위산의 아즈텍인들을 섬멸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들을 '혼내주지 않고' 지나가는 것은 전사로서 할 일이 아니며 저들을 공격하지 않으면 동맹군이 코르테스가 겁을 먹었다고 오해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바위산을 계속 공격하기로 하였다.

코르테스는 바위산을 살폈는데 그 둘레가 1레구아나 되었으며 요새가 매우 단단하여 정면공세는 '미친 짓'으로 여겨졌다. 그렇다고 그들을 굶겨죽이는 전술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코르테스는 고민 끝에 세 지점에서 동시에 공세를 가하고 크리스토발 코랄 중대장에게 자신이 늘 데리고 다니던 정예보병 60명을 주어 가장 가파른 사면을 공격하게 했고 후안 로드리게스 데 비야푸에르테 중대장과 프란시스코 베르두고에게 몇명의 화승총과 석궁병을 주어 두번째 사면을 공격하게 했다. 그리고 페드로 디르시오 중대장과 안드레스 데 몽하라스에게 나머지 화승총병과 석궁병을 주어 세번째 사면을 공격하게 했다. 코르테스는 중대장들에게 자신이 총성을 울리면 그것을 신호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공격하여 요새를 점령할 것을 지시했다.

코르테스가 화승총을 쏘자 코르테스의 부하들이 공격을 개시했다. 두 군데의 사면은 손쉽게 점거했으나 병사들이 지탱할 지지물조차 없을 정도로 바위산이 가파르고 험했으므로 더 이상 진격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들판을 뒤덮을 정도로 엄청난 숫자의 아즈텍 지원군이 나타나는 것이 보이자 코르테스는 공격을 중지하고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기병들이 모두 하산하자 코르테스는 기병들을 지휘하여 적 지원군을 격퇴했고 90분동안 엄청난 숫자의 적을 창과 칼로 죽였다. 두갈래로 나뉘어 공격을 하던 기병들이 다시 한곳에 모였을때 코르테스는 이곳에서 1.5레구아 떨어진 곳에 다른 바위산이 있는데 역시 많은 적이 있으나 훨씬 덜 가파른데다가 근처에 물이 있어서 손쉽게 탈취할 수 있을 것이란 보고를 받았다. 코르테스는 첫번째 바위산을 점령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매우 비통해했으나 일단 다른 바위산을 공격하기로 하고 그곳에서 밤을 지냈다.

하지만 보고와 달리 다른 바위산에도 물이 없었으며 병사들은 물론 말도 물을 마실 수 없어서 코르테스의 군대는 큰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아즈텍인들이 북과 나팔을 계속 울려 코르테스의 병사들이 자지 못하게 하였고 이 때문에 코르테스의 병사들의 피로가 크게 누적되었다. 게다가 첫번째 바위산 공격에서 8명의 병사들이 전사했으며 병사들은 '멍청한 짓'을 명령한 코르테스가 제정신이 아니었다면서 엄청난 불만을 터트렸다. 베르날 디아스는 코르테스가 드물게도 전략적 실수를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코르테스의 복수 (19) 2차 칼코 원정과 평화 제안 코르테스 정복기

한편 아즈텍 제국은 칼코에서 대패하자 이를 설욕하기 위해 여러 장수들이 이끄는 대군을 칼코로 다시 파병하기로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칼코 주민들이 다시 원군을 요청하자 코르테스는 산도발을 다시 파견하여 맞서게 했다. 산도발이 다수의 기병과 보병을 거느리고 칼코에 도착했을때 그곳에선 이미 아즈텍인들과 칼코 사람들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 전투에서 칼코인들은 코르테스가 표현하길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하게' 승리하였고 칼코인들은 2명의 추장과 1명의 장군이 포함된 40여명의 포로를 잡아 코르테스에게 바쳤는데 산도발은 그 중에 일부만 코르테스에게 보내고 나머지는 칼코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즉 인질로 확보하여 칼코에 남겨두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아즈텍과 접경한 마을에 잠시 머무르다가 더 이상 필요없다고 여겨지자 테수이코로 돌아왔다. 이때 코르테스는 칼코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공평하게 배분하지 않아 부하들의 불만을 품고 항의하고 전투를 거부하기도 하였다는 사실을 보고서에는 누락하였다.

산도발의 2차 칼코 원정이 벌어지는 동안 코르테스는 아즈텍인들과 수차례 싸워 그들을 섬멸했고 산도발의 원정이 성공하여 베라크루스와 테수이코를 잇는 도로의 안전이 다시금 확보되자 다시 베라크루스의 보고를 받을 수 있었다. 베라크루스에서 전령 한 사람에게 석궁, 화승총, 화약을 들려 코르테스에게 보내 그를 기쁘게 하였고 이틀 후엔 많은 병사들을 실은 세척의 배가 나타났으니 그들을 곧바로 코르테스에게 보내겠다고 하였다. 이 지원병력은 다름아닌, 코르테스가 일찍이 지원병을 모으라고 산토도밍고에 보냈던 알바레스 치코가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결과였다. 알바레스 치코는 산토도밍고에서 로드리고 바스티다스를 설득하여 나비오 선 한척, 카라벨 선 두척, 여러 무기, 말, 돼지, 군수품을 장만할 수 있었다. 알바레스 치코가 보내온 지원병력의 규모에 대해 세르반테스는 배 4척이었으며 2척은 로드리고 바스티다스, 1척은 루카스 데 아이욘, 1척은 훌리안 데 알데레테가 내놓았다고 조금 다른 기술을 하였다. 지원병력의 규모는 여러 기록이 있는데 와그너 교수는 그 병력이 350명이며 말 46필이 있었다고 추정하였다. 병력도 병력이지만 코르테스가 보유한 말을 2배로 늘려준 말의 존재가 매우 이득이었다 하겠다. 이때 지원병을 태운 배에는 국왕의 재정관 훌리안 데 알데레테,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 페드로 멜가레호 데 우레아, 이달고 헤로니모 루시 데 라 모타, 안토니오 데 카르바할, 프란시스코 데 우레아 등도 타고 있었다.

한편 코르테스는 최대한 말로 아즈텍을 굴복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적어도 그는 그렇게 주장했다.) 코르테스는 사로잡은 포로가 있으면 족족 평화를 원한다는 자신의 메시지를 들려 풀어주곤 했는데 1521년 3월 27일 성 부활 주간의 수요일에 칼코에서 잡아서 보내온 테노치티틀란의 수장들에게도 코르테스는 전쟁을 그만두고 다시 스페인에 충성을 바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러한 얘기를 하는 것이 그가 아즈텍인들을 죽이고 싶지 않으며 옛날처럼 친구가 되고 싶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수장들은 그런 메시지를 들고 돌아가면 필히 죽을 것이라고 하여 꺼려 했으나 2명의 수장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서 편지 한통을 써줄 것을 청했다. 코르테스는 편지를 써봤자 아즈텍인들이 그것을 읽을 수 없을 것임을 알았으나 그렇게 함으로 그들의 주장에 권위가 생긴다는 관례를 알았으므로 순순히 편지를 써주었다. 그리고 통역을 통해 편지 내용을 알려주곤 그들을 돌려보내었는데 다섯명의 기병으로 호위하게 하였다.

성 부활 주일 토요일, 코르테스는 칼코의 원주민들과 그들의 친구들, 동맹군이 보낸 사람들에게서 아즈텍이 공격하러 온다는 소식과, 그들의 공격 루트가 그려진 지도를 받았다. 전령들은 원군을 간청했고 코르테스는 4~5일 내로 지원군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부활절 3일 후 다시 동맹군이 지원을 요청하자 코르테스는 25명의 기병과 300명의 보병으로 금요일에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준비하는 중에 타사판, 마시칼싱고, 나우탄과 여러 인근 도시가 코르테스에게 전령을 보내 자신들은 스페인인을 죽인 적도, 스페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적도 없다면서 다시 신하로 받아줄 것을 간청하였고 코르테스는 이를 받아들이고 무명옷을 선물로 내려주었다.

중국 현대사 연구 집필 계획 중국 근현대사

장기적으로 진행될 포스팅 계획. 이번엔 좀 영양가있는 포스팅을 써보기 위해 새롭게 자료도 수집하고 시간과 노력을 들여 저 나름의 관점을 창출하려고 합니다만.

우선

1. 얄타 회담은 장제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가.
카이로 회담-테헤란 회담을 거치는 과정에서 장제스의 노력과 성과, 그리고 그 노력과 성과가 어떻게 물거품으로 사라졌는지를 조명한 다음에 얄타 회담이란 무엇이었는가를 공부하여 이를 밝히고 다시 장제스에게는 어떤 득실이 있었으며 그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다룰 예정입니다.

주로 참고할 소스는 서문당 중국 현대사 3권, 리처드 번스타인의 1945 중국, 미국의 치명적 선택, 제가 카이로 회담 쓰면서 참고한 논문들,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 평전, 와인버그 2차세계대전사, 존 키건의 2차세계대전사, 윈스턴 처칠 회고록이 되겠습니다. 그외에 추천할 참고문헌이 있다면 추천을 바라는 바입니다.

2. 스탈린의 대국민정부 태도는?
1번보다는 집필 우선순위가 떨어질 예정. 무엇보다 자료와 저의 지식, 이해도가 피상적이고 희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공부와 더 많은 자료 수집 후에 천천히 진행되겠습니다. 일단 참고할 것은 위의 저서들과 더불어 민두기 교수의 국민혁명의 구조적 분석 연구, 보로딘 문서 쓰면서 참고한 자료들, 조너선 펜비의 장제스 평전, 제이 테일러의 장제스 평전(근데 이건 번역부터 -ㅅ-), 뢰트바이트의 중국의 소비에트 운동사, 서지영의 중국혁명사, 중국 공산당이 공식적으로 편찬한 중국공산당사를 바탕으로 쓰여질 예정입니다. 근데 1은 어느 정도 근시일에 나올 것으로 예상됩니다만 2는 아주 요원할 듯 -ㅅ-

3. 공산화 이전 중국의 농촌 상황.
그냥 개판이었다는 건 아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판이었는가를 조명하고 왜 개판이었는가, 무엇이 대책이었는가, 당시 장제스와 국민정부는 이 상황을 대처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였는가를 연구해볼 생각입니다. 참고할 서적은 위에도 언급한 두개의 장제스 평전, 디쾨터의 해방의 비극, 이건일의 모택동 vs 장개석, 레이 황의 장제스 일기를 읽다, 남경정부 시기 국가주도하 국민경제 건설(강명희), 1930년대 농촌위기와 남경국민정부의 농업정책, 1920~30년대 난징 국민정부의 농촌정책:장쑤 성을 중심으로(박정현), 염석산 정권 전기의 권력집중과 정치개혁(강명희), 염석산 정권 시기 금융통화의 개혁과 통제(강명희), 1930년대 산서성 토지촌공유제의 배경과 성격(김지환), 저번에 욱이님께 받았던 논문들, 그외에 제 구글 드라이브와 컴퓨터 논문 폴더에 박힌 당시 중국 농업이나 국민정부 경제정책 관련 논문들을 참조할 예정입니다. 사실 제일 먼저 와닿은 프로젝트는 이거.

일단 생각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그외에 몇개 더 있긴 한데 구체적으로 계획이 된 건 이 세가지 정도이겠습니다. 최대한 질 높은 글로 다시 찾아올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참 군대에 있다보니 자료 접근에 너무도 애로사항이 꽃피어 눈물만 납니다. 당장 위에 언급한 상당수 논문과 저서들이 집에 있어서 놀릴 뿐입니다. ㅠㅅㅠ

한동안 포스팅 쉴까 생각 중 잡상

그냥 지친 것도 있고 한동안 문학 활동이나 하면서 머리 좀 식히고 가지고 있는 책 다시 읽으면서 공부나 할까 싶기도 하고요.

물론 이래놓고 얼마 안가서 슬그머니 또 뻘글 갈기겠지만 -ㅅ- 결국 그 한동안은 기껏해야 며칠이려나...

요즘 평가가 오락가락하던 지인에 대한 평가 확정 잡상

그 양반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해야 할지 한 몇달 겪어보면서 고민했는데 나빠졌다-좋아졌다 반복하다가 최근에 확정.
그냥 답이 없는 개병신.
ㅉㅉ

p.s

1. 여러분들이 아는 사람 아니에요.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

2.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 

3. 블로그는 사적인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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