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식민지 관련 통념들과 이에 대한 반박 기타 근현대사

1. 식민지가 된 이후로 식민지의 기존 사업은 망한거 아니냐?

일부분 사실. 이러한 관념의 대표적 예시가 다름아닌 영국령 인도제국인데 영국산 면직물의 대량 유입으로 인도의 토착 산업이 요단강을 건넜기 때문. 당시 인도에서 직물공업은 인도 공업의 65~75%를 차지하고 인도의 수출의 60~70%의 비중을 가질 정도로 매우 중요한 산업. 1813년 동인도회사의 독점이 끝난 후 압도적인 효율성을 가진 영국산 면직물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곧 인도 직물의 55~75%가 영국산 직물로 대체됨.

다만 인도의 토착 산업도 19세기 말까지 25~40% 비중은 유지했고 토착 철강산업도 1~5% 규모 정도는 살아남음. 확실히 기존 산업이 엄청난 타격을 받은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하나도 남지 않고 전멸'했다고 보던 기존의 시각에 비하면 탈산업화의 속도는 느렸고 이러한 점이 요즘에는 주목을 받고 있음.

2. 식민지 토착 산업의 붕괴는 다 제국주의 종주국 때문 아니냐?

역시 일부분 사실. 첫번째 관념과 연계가 높은 것인데 기존에는 외부적 요인(지배국인 열강)을 절대적으로 보았음. 물론 지금도 외부적 요인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거대한 요인이지만 식민지 내부 문제가 너무 간과되어 왔다는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함. 예컨대 인도 내부 산업의 붕괴에 대해서도 요즘에는 탄력적인 노동공급으로 인한 기술 경시, 육체 노동에 대한 지나친 의존 등은 영국탓을 할 수 없는 인도 내부의 문제로 지적되는 분위기.

그리고 무조건 제국주의 열강탓만 하기에는 식민지마다 양상이 다름. 영국이 들어온 이후 이집트는 망했지만 아르헨티나는 농업 특화로 1920년대까지 오히려 잘나갔고 오스트레일리아는 산업화라는 결과를 보임. 이러한 사례는 제국 중심부 뿐만 아니라 주변부의 지역적 상황 역시 집중해야 한다는 증거. 박지향의 언급에 따르면, 요즘 학계의 정설은 식민지 사회의 기본구조가 유럽의 제국주의보다 식민지 경제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하고 있음.

※아르헨티나는 영국 식민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할 수 있지만 영국은 아르헨티나에 엄청난 투자를 하여 아르헨티나 철도의 88%를 소유하는 등 영국에 의한 경제적 종속이 심했고 (뭐 누군 이것도 식민지로 규정할지 모르겠지만) 군사점령이 없었던 것이지 아르헨티나에 대한 영국의 간접 통제가 존재함으로 아르헨티나는 영국이 주도하는 경제권에는 포함된 상태. 이집트나 인도의 일부 토후국 역시 영국에 공식 합병되진 않았지만 영국령 식민지로 간주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할 부분.

3. 식민지는 얻은 것이 없지 않나?

얘기하긴 좀 껄끄럽지만 이것은 명백히 거짓. 제국주의 열강이 식민지를 경제적으로 발전시켜주기 위해 식민지로 삼은 것이 아니라는 동기적인 문제와 일단 식민지가 당한 자유와 주권의 박탈, 학대, 핍박을 비롯한 물질적 심리적 고통을 제외하고 순수 경제적인 얘기만 해보자면 결국 결과적으로 식민지는 식민지배로부터 경제적 이익을 얻은 부분이 분명히 존재.

"제국이라는 존재는 시장으로서, 투자자로서, 채권자로서 이롭게 작용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식민지 지배자들은 전형적으로 도로, 철도, 항만시설, 건축, 상하수도 설비 등 사회 간접자원을 확충하였다."
-제국주의, 98페이지.

※ 분명히 밝혀두자면 이게 잘했다는 것이 아니고 결국 이에서 발생한 이익 역시 지배자들을 위한 것이고 주로 그들에게 이익이 돌아갔다는 것은 분명히 지적되는 부분.

박지향의 제국주의 95~99페이지를 집중적으로 참고한 포스팅.
역시 식민지는 폭발적인 소재란 말이지....

그렇다고 식민지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누가 말이나 했습니까? 기타 근현대사

서양이 식민주의로부터 얻은 것이 별로 없다는 말은 제3세계가 별로 잃은 것이 없었다는 말과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 경제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양쪽 경제의 규모의 차이는 중심부와 주변부의 불균등한 효과를 가져오기 말연이었다. 따라서 한쪽에서 보는 그림은 다른 쪽에서 보면 매우 달라 보이는 것이다. 제3세계의 입장에서 보면 1차 산업 생산품이 수출의 90% 이상을 차지했으며 그 수출의 거의 전부가 선진국으로 향했다. 여기서 서양의 산업화를 마치 제3세계에서 생산되는 원료 덕분인 것으로 보는 신화가 탄생했다고 보여진다.

제국주의, 박지향, 서울대학교 출판부, 95페이지.

(제국주의 열강이 설치한) 시설은 주로 지배자들의 안정과 상업적인 목적을 위해 설치되었기 때문에 원주민들에게 돌아간 이익은 부수적인 것이었다.

(...)

(식민지가 얻은 경제적 이익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제국주의는 경제적 현상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유럽 식민주의의 부정적인 결과는 경제적 영역을 넘어서 종교와 언어를 포함한 중심부의 문명을 식민지 주민들에게 부과하려고 시도하고, 인종, 기원, 종교를 근거로 식민지 주민들을 차별하고 중심부 사람들을 선호하는 등으로 나타났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적 독립의 상실과 개인적 자유의 제한이었다. 거의 모든 제국주의가 피지배자들에게 물질적, 심리적 고통을 야기하였던 것이다.

동일 저서 98~99페이지.

옛다, 여기저기 사이트에서 글 의도 파악못하고 관심법+뇌피셜로 제국주의 옹호자로 몰아서 죽창질하려는 인간들 보여서 사상검증해준다. 됐냐?

식민지? 거시적으로 도움되지 않나? 기타 근현대사

산업화에서의 식민지의 중요성을 재평가하는 연구자들은 마지막으로 19세기를 통해 식민제국이 아닌 나라들이 오히려 더욱 빠른 경제성장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즉 영국, 프랑스, 스페인 제국보다 독일, 스웨덴, 미국의 경제성장이 더욱 빨랐던 것이다. 이것은 20세기에도 적용되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네덜란드는 식민제국을 상실한 후 한층 빠른 경제성장을 경험하였다. 여기서도 제국의 채산성이 의문시된다는 것이다.

물론 식민지 소유가 특정 개인, 지역, 부문에 이득이 없었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19세기 전반기 영국 면방직 공업은 식민지, 특히 인도로의 수출에서 큰 도움을 얻었다. 그러나 부문적 성공과 국가 전체를 혼동해서는 안되며, 더군다나 영국 방직면 공업은 1920년대 이후 가장 경기가 부진한 부문이 되었다. 여기서 유출되는 결론은 19세기 말 영국이 새로운 산업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것은 식민지 시장에의 쉬운 접근이 중요한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손쉬운 시장이 기술혁신의 동기를 막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식민지 지배, 제국적 패창 등은 분명 수익성 있는 사업이지만 서유럽의 산업화와 뒤를 이은 남부, 동부 유럽의 경제발전에서 식민지들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롭기는커녕 오히려 거시적 관점에서 볼때 식민주의는 가장 활발하게 제국적 팽창과 방위와 운영에 참가한 식민제국에게 보상해 주지 못하였다고 주장되고 있는 형편이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벨기에 등 선진국의 자본가들은 국내에 투자함으로써 더 많은 이윤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럼으로써 독일, 미국, 일본 등 보다 젊고 기술적으로 진보한 경쟁국들의 경제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식민지 시장은 쉬운 시장이었기 때문에 기술혁신과 변화를 촉진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장애가 되었다는 것이다.

제국주의-신화와 현실, 박지향, 서울대학교 출판부.
제5장 제국주의와 경제:수탈인가 근대화인가, 94페이지.

-ㅅ-
제국주의... 당신은 누굴 위해...

식민지? 그거 순 물건 강제로 팔려고 만든거 아니냐? 기타 근현대사

최근 연구들은 잉여 상품의 시장으로서의 식민지의 유용송 역시 오류라고 주장한다.

(...)

선진국 전체를 볼 때 1800~1938년간 전체 수출의 17%만이 제3세계로 향하였고 그 중에서 단지 반 정도가 식민지로 수출되었다. 따라서 유럽 총수출의 9%만이 식민제국으로 향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 기간 동안 선진국들의 총수출은 국민 총생산의 8~9%를 차지했기 때문에 식민지로의 수출은 단지 0.6~0.9%에 머물렀다는 계산이 나온다. 만약 선진국 전체가 아니라 미국을 제외한 유럽으로만 국한시킨다면 수치는 약간 높아진다.

물론 영국의 경우는 달랐다. 영국에서는 제3세계로의 수출이 전체 수출의 40%를 차지했는데, 아마도 이 사실이 신화가 생긴 원인 가운데 하나일 것으로 짐작된다. 국민 총생산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몫도 영국에서는 다른 나라보다 컸다. 19/20세기 전환기, 직물공업에서는 생산품의 35%가 제3세계에 수출되었는데 특히 면직물의 경우는 67%에 이르렀다. 

그러나 식민지 시장의 기여는 시기적으로 근대적 상업 발달이 진행된지 50~60년 뒤에야 나타나기 시작하였던 것이었다. 1914년 이전에 프랑스에서는 수풀품의 10%만이 식민지로 향하였다. 식민지들은 인구가 너무 희박했고 시장 기능을 하기에는 너무 가난했던 것이다. 게다가 원료에서와 마찬가지로 상품수출에 있어 정치적 통제는 필수 요인이 아니었다. 영국령 인도는 진정 거대한 시장이었지만 영국만을 위한 시장이 아니었다. 독일인들은 독일 식민지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제품을 인도에서 팔았고, 프랑스는 알제리아에서보다 인도에서 더 많은 판매량을 보였다. 유럽의 산업국, 제국들은 주로 서로 간의 무역에 초점을 두었다. 독일 제품의 가장 큰 해외 구매자는 영국이었고 영국에게도 독일은 가장 큰 시장의 하나였으며, 프랑스도 영국과 독일의 중요한 무역 파트너였던 것이다. 

따라서 산업혁명의 시작에 있어서 식민지 시장의 불가결한 역할이라는 가설은 영국에만 적용되는 가설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는데, 여기서도 산업화는 식민지의 중요성보다 앞섰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1700~1750년에 영국 경제가 상당히 발달했을 때 영국 식민지는 총인구 100만 명 정도로 보잘것없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초기에 견인차 역할을 한 면직물 제품 생산의 성장률과 수출의 신장률은 1750~1829년 간에는 그 상관관계가 특별히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수출이 영국 국민총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801년 18%였지만, 1841년에는 11%로 떨어졌고, 1851년에는 다시 14%로 증가하였다. 한편 수출이 공업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801년에는 76%로 매우 높은 비중을 보였지만 1841년에는 32%로 떨어졌다. 만약 수출이 산업화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는 가정이 성립되려면 산업화가 가장 진척된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이후 (1815) 시기에 수출의 비중도 가장 높아져야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

영국은 가장 큰 제국이면서 가장 큰 자본 투자국이었다. 그러나 영국 해외투자의 반 이상이 해외 독립국과 자치령으로 향했으며, 프랑스의 경우에도 1914년 이전에 투자액의 10% 미만이 식민지에 투자되었다. 프랑스는 주로 다른 유럽 국가에 투자했는데 특히 러시아에 대한 투자가 전체의 1/4이상이었다. 독일의 투자는 무시할만했다. 게다가 제국주의 국가들 가운데 일부 -러시아,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일본, 미국- 는 투자국이 아니라 채무국이었다.

제국주의 -신화와 현실, 박지향, 서울대학교 출판부.
제5장 제국주의와 경제:수탈인가 근대화인가. 91~93페이지.

3줄 요약

1. 유럽제국의 총생산 중 식민지 비중은 아오안.

2. 그나마 영국은 비중이 높은 편이지만 결국 영국의 성장은 식민지가 아니라 산업화가 원인.

3. 홉슨과 레닌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연계를 주장했지만 실제로 식민지 투자 따위 아오안.

※그나마 영국의 해외 수출은 영국의 기술 혁신과 특정 사업의 발달을 촉진했다고 평가 가능해서 그나마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음.

식민지? 그거 순 원료 착취하려고 만든 거 아니냐? 기타 근현대사

1920년대까지 선진국들은 자신들이 소비한 것보다 더 많은 동력자원을 생산하였다고 경제사가 베이로크는 밝힌다. 석탄과 석유 모두에서 선진국들은 수출국이었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20세기 전반기까지 경제적으로 가장 발달한 나라인 영국이 동력자원의 최대 수출국 가운데 하나였다. 영국은 후에 제3세계라고 불리게 되는 지역에까지 석탄을 수출했는데, 수출량은 1837년에 100만톤, 1882년에 2000만톤, 그리고 1913년에 7800만톤에 이르렀다. 독일도 석탄 수출국이었다. 한마디로 서유럽에는 석탄이 남아돌았다는 것이다.

(...)

20세기 전반기 금속자원의 무역은 유럽 내에서 이루어졌다. 1914년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선진국들이 사용한 금속자원의 90%가 다른 선진국들로부터 수입되었는데, 선진국들은 철, 구리, 납, 보크사이트, 주석, 망간 등 자신이 소비하는 광물질의 98%를 생산하여 거의 자급자족 수준에 있었다. 19세기에는 아마 99%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모든 증거들은 식민지가 원료 공급지로서 크게 가치가 없었다는 말을 뒷받침해준다는 것이다. 동력과 금속자원의 90% 이상이 선진국끼리의 무역에 의존하였던 것이다. 제3세계에 대한 의존은 1950년대에 이르러서야 뚜렷해지기 시작한다. 따라서 1955년 이전에 유럽이 산업의 원료를 제3세계에 의존했다는 주장은 신화이며 선진국들은 그 지역에서 생산된 원료와 그 지역의 노동력을 가지고 산업화의 높은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상 원료에 접근하는데 있어 정치적 통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 아프리카에 있는 유럽제국의 식민지보다는 남, 북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자치령들이 유럽 산업의 가장 큰 원료 공급지였기 때문이다.

박지향, 제국주의 -신화와 현실, 서울대학교 출판부.
제5장 제국주의와 경제:수탈인가 근대화인가. 90~91페이지.


이렇게 수치로 보니까 좀 충격적이기까지 하네....

기가 막히는군... 트롤열전

https://board.namu.wiki/report/493750

전에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문서 반달한 병신인데 급식충 냄새가 너무 철철나서 ㅉㅉ

스탈린은 반유대주의자인가? 소련사

출판된 그의 저작에서 그가 반유대주의자임을 말해주는 뚜렷한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제1차 세계대전 전에 그가 유대인은 민족이 아니라고 말한 게 근거가 되었을 뿐이며, 그가 특별히 유대인을 배척하려고 민족이라는 것을 엄격하게 정의하려 했다는 증거도 없다. 그는 10월혁명 뒤에 유대인이 문화적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허용하기를 거부하지도 않았고, 사실 그의 민족 문제 인민위원부에서는 유대인의 이익을 도모하는 집단에 돈과 편의를 제공했다.

그러나 1920년대에 그의 지지자들이 트로츠키와 카메네프, 지노비예프와 싸우면서 반유대주의적인 주제를 부각시켰다는 비난도 그를 반유대주의자로 모는 데 한몫했다. 그는 딸이 유대인 영화 제작자인 알렉세이 카플레르와 사귀는 것도 반대했다. 하지만 그의 추종자들이 당내 분규에서 반유대주의 정서를 이용했다고 그를 반유대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 더구나 그가 아버지로서 스베틀라나가 중년의 바람둥이 카플레르와 사귀는 것을 막을 이유는 아주 많았다.

그가 '뿌리 없는 세계시민주의'를 격렬히 반대했다는 이유로 그를 유대인 혐오자라고 할 수도 없다. 스타린은 소련 안에서 외국의 국민과 민족성이 같은 사람들에게는 모두 공격적으로 대했다. 이런 이유로 제2차 세계대전 전에 그리스인과 폴란드인, 한국인이 그의 손에 고통을 받았다. 세계시민주의에 대한 공격은 1947년에 소련과 미국의 관계가 급격히 나빠지면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뚜렷하게 유대인을 겨냥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게 얼마 안되어 변했다. 이스라엘이 국가로 건설된 뒤인 1947년 9월에 2만 명의 유대인이 모스크바에 있는 시나고그에서 골다 메이어를 따뜻하게 맞이했다. 이 일이 스탈린의 분노를 샀고, 이때부터 그가 유대인을 파괴분자로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말년에 그가 한 몇몇 사적인 발언과 공적인 행동에서 유대인을 향한 노골적인 반감이 엿보이기는 했어도 그의 동기는 비이성적인 편견보다는 현실 정책에 있었다.

그런데도 유대인인 베리아와 카가노비치는 지도자의 반유대주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분명히 카가노비치는 때때로 불편해했다. 스탈린의 측근들은 농담을 아주 거칠게 했다. 하루는 스탈린이 물었다.

"우리가 유대인을 비웃을 때 당신은 왜 그렇게 어두운 얼굴을 하지? 미코얀을 봐. 미코얀은 우리가 아르메니아인을 비웃을 때 자기도 함께 비웃잖아."

카가노비치는 이렇게 대답했다.

"스탈린 동지, 민족 정서와 성격에 대해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유대인의 성격에서 눈에 띄는 것은 유대인은 자주 몰매를 맞아 미모사처럼 반응한다는 사실일겁니다. 유대인은 건들면 바로 움츠러듭니다."

스탈린은 마음을 누그러뜨렸고, 카가노비치는 아주 예민한 사람이랄수는 없었지만 이제 농담에 끼어들지 않아도 되었다.

이 일화 자체가 스탈린의 결백을 입증해주지는 않는다. 덧붙여야 할 것은 그가 1950년대 초에 다른 사람들에게 소련의 유대인에 대해 몹시 악의적인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아마 스탈린은 결국 반유대주의로 돌아섰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혹시 정치적 지지를 불러 모으려고 폭력적인 언어를 사용했을수도 있다. 그는 판단을 내리기에는 너무 불가해한 인물이었다. 분명한 것은 스탈린의 생각을 하나의 차원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를 러시아 민족주의자로 보았고, 어떤 이들은 그의 생각을 추동하는 것은 반유대주의라고 보았다. 또 어떤 이들은 그에게 이념이 있었다면 그것은 현실정치가의 이념이었을 거라고 말했고, 이렇게 해석된 스탈린도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스탈린, 로버트 서비스, 교양인.
855~857페이지.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군의 약탈의 규모 소련사

점령지 유럽에서 많은 소련 군 사령관을 비롯한 고위 관리들에게 제국주의는 사리사욕의 문제였다. 그들은 겸양과 소유에 대한 혐오라는 볼세비키 법도를 던져버리고 전쟁 노획물을 긁어모으는 등 16세기 아메리카 대륙의 에스파냐인 정복자처럼 행동했다.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는 러시아에 있는 자신의 집을 희귀한 도자기와 모피, 그림, 벨벳, 금, 비단이 진열된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공군 중장 알렉산드르 골로바노프는 요제프 괴벨스의 시골 저택을 해체하여 러시아로 실어 보냈다. 스메르쉬 장군 이반 세로프는 벨기에 왕의 왕관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매장 보물을 약탈했다. 다른 소련군 원수, 장군, 비밀경찰 수장들은 란제리, 나이프와 포크, 스푼, 가구뿐만 아니라 금, 골동품, 그림들을 비행기에 가득 실어 집으로 보냈다.

혼란스런 첫 몇달 동안 사령관들과 관리들이 대부분인 소련인들이 철도차량에 갖가지 '건축자재'와 '세간'들을 실어 독일에서 보낸 것이 10만 차량이나 되었다. 그 물품들 중에는 피아노 6만대, 라디오 45만 9천대, 카펫 18만 8천장, 거의 100만점에 이르는 '가구', 벽시계와 탁상시계 26만 4천개, 도자기와 다른 식기를 실은 철도차량 588대, 신 330만 켤레, 코트 120만 벌, 모자 100만 개, 710만벌의 코트, 드레스, 셔츠, 속옷이 있었다. 소련인들에게 독일은 물건을 무료로 가져다 쓸 수 있는 거대한 쇼핑몰이었다.

실패한 제국 1권, 블라디슬라프 주보크, 아카넷.
76~77페이지.

크렘린 의사 사건 때의 스탈린의 반응 소련사

'의사-반역자 사건'을 또한 떠올려보십시오. 의사인 티마슈크가, 아마도 누군가의 영향 아래 또는 지시에 따라 스탈린에게 편지를 써서 의사들이 마치 잘못된 치료 방법을 사용하는 것처럼 말했던 것 이외에는 사실 어떤 '사건'도 없었습니다. 스탈린에게 그런 편지가 도착한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스탈린은 곧바로 소련 내에 의사-반역자들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고, 소련 의학계의 뛰어난 전문가 집단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는 어떻게 수사를 하고, 체포된 의사들을 어떻게 심문할 것인지 직접 명령을 내리곤 했습니다. 그는 학술원 회원인 비노그라도프에게 수갑을 채우라고, 그리고 누군가를 때리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여기에는 이전에 국가보안보 장관이었던 이그나트예프 동지가 전당대회 대표로 참석하고 있습니다. 스탈린은 그에게 직접 말했습니다.

"만약 의사들의 자백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너희들 목이 날아갈 것이다."

(대회장 내부 분노의 웅성임)

스탈린은 조사관을 직접 불러서 그를 다르치고 조사 방법을 지시했는데, 그 방법들은 똑같은 것, 즉 때리고 때리고 또 때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의사들이 체포되고 얼마 후에 정치국 위원들인 우리는 의사들의 자백서가 포함한 조사 기록을 받았습니다. 스탈린은 이 조사 기록을 나눠준 후에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이 새끼들아. 너희는 눈이 멀었다. 내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 너희가 적을 구분할 줄도 몰라서 이 나라는 망하게 될 것이다."

흐루쇼프의 20차 당대회 연설 <개인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하여>, 박상철 역, 책세상.
82~83페이지.

2차 양광사변 문서 쓰려는데

정보를 못 구하겠다.... 유일한 소스가 조너선 펜비의 장제스 평전인데 믿었던 장개석비록에 양광사변 내용이 없고 있을 것 같은 신승하의 중화민국과 공산혁명은 집에 있네... 쒸펄....

진제당이 광동군벌에 관한 내용 더 구할 수 없남....

가오원첸의 저우언라이 평전 구입 책 이야기

미국에서 12일만에 날아온 귀한 책입니다. 언젠가 번역해보지요.

1920년대 스탈린과 서기국의 미약했던 권력 소련사

(스탈린의 서기국 시절을 권력 장악의 교두보 확보로 보는 기존 해석과 달리) 실제 스탈린과 서기국의 정책들은 이미 시작 단계부터 삐걱거렸다. 제11차 당대회의 지방 당 서기 교체운동 승인 직후, 서기국은 10월 혁명 이후 당 가입자들이 서기로 있는 지방 당 또는 당 위원회에 공문을 보내, 다음 번 지방 당 협의회에서 그들을 새로운 서기로 교체할 것을 지시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서기국은 이런 지령과 함께 지방의 상황이 특별할 경우에는 인정할 것이라는 단서를 함께 달 수밖에 없었다.

(...)

혁명경력과 출신성분 면에서 "믿을 만한" 서기들의 비중이 크게 확대된 외관상의 눈부신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 야심찬 서기국의 기획은 그 에외, 즉 지방에서 서기국의 지령과는 관게없이 당 서기를 선출한 경우가 절반 이상으로 집계되면서 결과적으로 기대만큼의 효과를 내지 못했다. 이같은 서기국과 스탈린의 '실패'를 반증하듯, 그 후 1920년대에 이어졌던 당 대회와 당 협의회, 그리고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등에는 지방 당원, 특히 서기들의 구성 및 규율문제가 계속해서 언급되었다.

노멘클라투라 체제의 운영 역시 서기장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각기 3500여개와 1500여개의 직책 목록으로 출발했던 제1호와 제2호 노멘클라투라는, 점차적으로 그 숫자가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에도 불구하고, 정반대의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노멘클라투라 체제가 실행된지 불과 15개월만인 1925년 초, 서기국 내 신설 부서 조직배치부는 이에 속한 직책의 숫자를 600여개 줄여 4400개로 낮춰야 한다고 제안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제안에서 조직배치부는 생각보다 거대한 노멘클라투라 관련 업무를 서기국은 감당하기 어려우며, 그 결과 서기국의 현황은 지방으로부터 올라오는 인사 청탁과 제안들을 정교한 검증 없이 사실상 그대로 수용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토로했다. 결국 1925년 당 중앙위원회 조직국이 승인한 제1호 노멘클라투라 명부에는 애초 계획의 사실상의 절반인 1870개의 짗책만이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절반으로 줄어든 숫자의 직책에 당원을 심사하고 채우는 과정도 서기국에게는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서기국의 행정적 부담 때문에, 노멘클라투라 체제의 출범 이후에도, 지방 당원들의 인사 문제는 사실상 지방의 것이 되었다.

(.,.)

심지어 1928년에도 노멘클라투라 명부의 개혁을 위한 또 한번의 논의가 있었다는 점을 미루어 본다면, 소위 '스탈린 혁명'의 전야, 즉 스탈린이 좌파를 몰아낸 후 우파를 종국적으로 패배시키기 직전까지도 노멘클라투라 체제는 그에게 지방 당원 인사권 장악이라는 권력을 선사해주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방의 분쟁을 중앙의 직접적 개입을 통해 호전시키려던 스탈린의 노력도, 그 빈도수를 줄이는 성과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기대만큼의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

(...)

현장에서 당 중앙위원회 출신들이 이루려 했던 "협조 관계" 정립은 사실상 경쟁하는 파벌 간의 화해 또는 타협을 제안하는 수준이 대부분이었다. 대개의 경우 중앙위원회의 조치는 '당 관료들은 다툼을 멈추고 친화적으로 함께 과업을 수행한다."라는 식의 다분히 상징적 선언으로 끝을 맺는 결의문을 작성하는 선에 그쳤다.

(...)

결과적으로 지방의 분쟁은 대개 지역적으로 해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는 자연히 당시 해당 지방당에 권력을 쥐고 있든 이들 위주로 결론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

서기국과 스탈린의 권력장악문제, 노경덕, 사총 90집.
203~209페이지.

오랜만에 포스팅하는 스탈린 연구.
아치 게티 류의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이 있긴 하지만, 실증적인 연구를 살펴보면 이들의 연구가 스탈린과 소련사 연구의 논의 혁신을 가져오긴 한듯.

탄호이저 서곡

https://www.youtube.com/watch?v=OQpBQSOOups

전 김태권 덕에 사학과 갔으니 나무위키에서 김태권을 까면 안된다구욧! 트롤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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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라고

조리돌림당하는 류사오치에 대한 회고 중국 근현대사

중앙경위단의 경위들도 그곳에 있었지만 그저 바라만 볼 뿐 류사오치에게 도움을 주는 이가 없었다. 류사오치와 왕광메이는 에워싼 군중 한가운데에 선 채 서기국에서 온 직원들에게 떠밀리고 발길질을 당했다. 류사오치의 상의는 이미 찢어지고 단추도 두개나 떨어져 나갔다. 그들은 머리채를 잡아 흔들기도 했다. 내가 좀 더 가까이 가서 보니, 누군가 그의 허리를 억지로 숙이게 한 다음 다른 사람이 그의 팔을 등 뒤로 잡아 올렸다. 이른바 '제트기 타기' 자세를 취하도록 한 거싱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류사오치를 엎어뜨리고 땅바닥에 닿도록 얼굴을 눌렀다. 또 누군가는 발길질을 하고 얼굴을 때렸다. 중앙경위단 경위들은 그때까지도 전혀 손을 쓰지 않았다. 나는 도저히 바라볼 수 없었다. 그때 류사오치는 이미 일흔살 가까운 노인네이자 국가 주석이었다.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레빈, 민음사.
739페이지.

원래는 국가주석도 조리돌리는 문혁의 민주성에 감탄했습니다 뭐 이런 제목 달려다가 그냥 뭐랄까 할말이 없어서 덜 자극적인 제목으로 수정.

이후 류사오치는 마오쩌둥에게 농사를 지으며 살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씹혔고 혈압이 260까지 치솟는 상황에서 가구 하나 없는 건물에 방치되어 사망했다. 의사는 그가 죽은 뒤에 2시간이 지나서 도착했고 의사는 무직인 남성이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주석님 낯짝이 그려진 배지를 만드느라 비행기 만들 알루미늄이 떨어졌습니다. 중국 근현대사

주석을 숭배하는데 뒤처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봉건적이라거나 부르주아적이라고 비난받는 물건이 늘어나면서 일반인은 갈수록 마오쩌둥 사진이나 마오쩌둥 배지, 마오쩌둥 포스터, 마오쩌둥 저서같은 정치적으로 안전한 상품만 찾게 되었다.

수요가 제공되는 공급량을 크게 앞질렀다. <마오쩌둥 작품 전집>이 여기에 딱 어울리는 사례였다.

(...)

문화부는 1966년에 이 두 가지 판형을 합쳐서 인쇄 부수를 4000만 부에서 6000만 부로 늘리기로 결정했지만 계획을 실행하기에는 종이가 턱없이 부족했다. 이에 여가 잡지를 포함한 모든 <불필요한 책들>의 생산이 축소되었고 예컨대 레이펑의 일기처럼 정치적으로 중요한 책을 증쇄하는 것만 허락되었다. 하지만 대중의 소요를 감당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했다. 그러자 기계로 생산되는 종이의 공식적인 생산 목표가 급증해서 1967년에만 500톤에 이르렀다. 한편 경제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전국의 비누 생산량은 15%나 축소되었다.

상하이에 축구 경기장 세개를 합친 것과 같은 총 1만 6400제곱미터의 면적에 새로운 공장이 일곱 개나 지어졌다. 사진과 초상화, 포스터, 책의 수요를 따라잡기 위해서였다. 장쑤 성에서는 <마오쩌둥 어록> 인쇄를 위해서 산업용 공장들이 개조되었다. 붉은색 잉크를 생산하는 공장들은 24시간 내내 일했음에도 여전히 재고 부족에 허덕였다.

책에는 표지도 필요했다. 특히 세련되고 선명한 붉은색의 표지가 필요했다. <마오쩌둥 어록> 하나에만 소요되는 비닐의 양이 1968년 기준으로 4000톤에 육박했다. 이미 1966년 8월부터 상무부가 비닐 신발과 비닐 슬리퍼, 플라스틱 장난감 생산을 줄이면서 전국의 공장들은 마오쩌둥 사상에 기여할 준비를 완료했다.

(...)

마오쩌둥 배지가 등장한 시점에는 이윤 동기가 사회 곳곳에 더욱 만연해 있었다. 마오쩌둥 배지는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그마저도 없으면 완전히 획일적일 수 있는 복장에 개성을 주기 위해서 홍위병도 자주 이용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계획 경제는 대중의 요구를 따라잡기 위해 씨름해야 했다. 상하이에서는 75개의 공장이 잔업까지 하면서 한달에 1500만개의 배지를 찍어냈다. 워한은 대략 600만개를 생산했고 난징은 간신히 100만개를 생산했다. 1967년에는 생산량을 세배로 늘리기 위해서 추가로 90톤의 순수한 알루미늄이 투입되었다. 1968년이 되자 전국의 배지 생산량은 한달에 5000만개를 상회했다.

이러한 노력은 충분하지 않았고 암시장이 번창하면서 정부와 경쟁을 벌였다. 정부 산하의 몇몇 조직들은 직원이 사용할 배지를 자체적으로 생산했는데 이윤 동기에 현혹되어 합법의 경계가 불분명한 영역까지 사업을 확대했다. 암시장에 납품하는 데만 전념하는 지하 공장들이 탄생한 것이다. 이런 공장들은 알루미늄으로 된 양동이와 주전자, 냄비, 팬 등을 도둑질하면서 부족한 자원을 놓고 국영 기업과 경쟁했다. 공장에 설치된 고가의 기계에서 알루미늄 보호막까지 벗겨 갈 정도로 배지 열풍으로 인한 수요는 대단했다.

(...)

워낙에 많은 배지가 불법적으로 제작된 탓에 정확한 숫자를 가늠하기는 불가능하지만 혁명이 절정에 달했을 때 전국적으로 약 20억 개에서 50억 개가 생산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른 사업 활동을 포기한 채 유용되는 알루미늄의 양이 너무 많아지자 1969년에 마오쩌둥이 직접 개입하고 나섰다.

"내 비행기들을 돌려달라."

열풍은 빠르게 잦아들었고 1971년 린뱌오가 사망한 뒤로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문화대혁명,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174~178페이지.


씨발, 이것도 상상 못했다.
생각해보면 그 많은 뱃지를 만드는데 드는 자원은 다 어디서 나왔을까.

대약진운동 이후 중국 사회의 풍경:민심의 이반 중국 근현대사

나뮈키의 모 중빠:대약진은 일반적인 기근에 불과하며 그것만 빼면 당시 중국은 기근이 퇴치된 지상락원입니다!


농촌에 만연한 미신은 쉬이 사라질 기미가 아니었다. 허베이 성 싱타이 지구에서는 관리들이 <자본가>와 <독자 노선을 가기로 결심한 농민>과 맞서 싸우도록 가난한 농민들을 부추기는 한편으로 반동분자들과 결탁해서 절을 짓고, 연극을 상연하고, 향을 피우고, 귀신을 불러냈다. 장시 성에서도 독자적으로 농사를 지으려는 농부들을 상대로 계급 투쟁이 일찍부터 진행되었지만 종교의 부활이라는 보다 뿌리 깊은 현상을 막는 데는 실패했다. 취장 지구에서만 100여개의 불교 사원이 재건되었다. 전국에서 우상 숭배가 나타났다. 게다가 공산주의자들이 농민을 해방시키기 이전 상태로, 즉 과거의 봉건주의 시대로 농촌 곳곳이 회귀하는 양상을 보이면서 매우 상서롭지 않은 관습이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수백명의 여성이 매매혼에 의해 팔려갔다. 쉬룽다는 2200위안을 주고 신부를 샀다. 심지어 그가 속한 인민공사의 당 서기는 돈을 주고 열다섯 짜리 소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전국에서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낀 농민들이 그들의 오랜 풍습을 되살렸다. <해가 바뀌어도 재앙은 매년 반복된다. 날이 바뀌어도 늘 어렵다는 말만 나돈다. 도대체 언제 끝날 것인가?> 홍콩과 그다지 멀지 않은 순더에서도 전망은 밝지 못했다. <우리가 정말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올바른 길을 걸어 왔을까?>

심지어 15년에 걸친 모진 박해를 받은 기독교조차 건재한 듯 보였다. 산둥 성 이두 현에서는 부활절을 맞이해 수백 명의 기독교 신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축복했다. 창웨이의 한 교회는 신자가 수천 명에 달했는데 대다수가 대약진 운동을 겪고 개종한 사람들이었다. 산둥 성의 항구 도시 칭다오에서는 크리마스를 전후하여 교회에 발디딜 틈이 없었다. 개종한 상당수가 아이들과 청소년이라는 점에서 젊은 세대가 반혁명적인 독에 특히 취약해보였다. 칭다오의 전체 아이들 중 3분의 1이 종교 활동에 참여할 정도였다. 반동적인 노래도 흔했다. 많은 사람들이 익히 알려진 선전 노래를 개사해서 당을 조롱했다. 학교나 공장, 사무실 등에서 때마다 큰 소리로 불리던 <공산당이 없으면 새로운 중국도 없다>라는 노래는 <공산당이 없으면 말린 고구마도 없다>로 바뀌었다. 잘게 잘라서 햇빛에 말린 고구마는 기근의 상징이었다. <해방구의 하늘은 화창하고 대중은 행복하다>라는 노래는 어쩌면 예상 가능하겠지만 <해방구의 하늘은 어둡고 대중은 불행하다>라는 노래로 바뀌었다. 이와 비슷한 노래들이 100곡이 넘었다.

당 원로들이 버티고 있는 베이징에서는 일부 학생들이 그들의 바로 면전에서 <티토>나 <흐루쇼프>를 당당히 자처하면서 대담한 저항을 표시했다. 몇몇은 노골적으로 공산당을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이징 대학교 생물학과에 재학 중이던 스물일곱살의 대학원생 왕추이원은 줄곧 기근 문제를 제기하고 당을 최악의 독재 정권으로 규정했다. 1962년 봄에 그와 동료들은 홍콩으로 망명을 시도했다. 그는 실패했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이 망명에 성공했다. 그해 5월에는 탈출 행렬이 하루에 5000명에 달했다.

문화대혁명,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77~79페이지.

총체적 난국.

대약진을 겪은 인민들:그러므로 우린 공산당을 멀리하고 공자와 국민당을 가까이 하는 것이 낫습니다. 중국 근현대사

사회주의 교육 운동을 통해 이념적인 부패가 얼마나 심각한지 집중 조명되었다. 1963년 6월에 지도부는 <지금 이 순간 전국에서 이념을 비롯한 교육, 공리, 과학, 예술, 신문, 잡지, 방송, 출판, 복지, 체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엄중하고 중대한 계급 투쟁이 진행 중이며 따라서 이들 모든 분야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경고했다.

시중쉰의 고향인 산시 성 같은 경우, 서향의 영향을 받은 연극이 공연되던 도시와 달리 농촌에서는 봉건 시대의 가극이 다시 유행하고 있었다. 흔히 문명의 발상지로 언급되는기름진 웨이허 강 유역을 따라 산재한 일부 농촌에서는 사립 학교 교사들이 고전적인 공자의 가르침으로 회귀하고 있었다. 한때 성벽 안에만 수백 개의 달하는 불당과 탑, 수도원을 보유했던 고도 시안에서는 반혁명 단체들의 반동적 견해를 담은 출판물이 중앙로를 중심으로 몰려 있는 가판대에서 공공연히 판매되었다. 후펑을 지지하는 의견도 있었고 1949년에 공산주의자들에게 패배해서 타이완으로 도망친 국민당 대표 장제스를 찬양하는 의견도 있었다. 해외에 읽을거리를 주문하는 정부 산하 기관도 있었다. 1950년대에 러시아인 졸업생을 대량 배출한 시안 외국어 학원은 수십 종의 외국 잡지와 신문을 구독했다. 한중 대학교에서는 영어 시간에 맨 처음 배우는 말이 <미국의 오늘이 우리의 내일이다>였다. 1949년 이후로 널리 알려진 이른바 <소련의 오늘이 우리의 내일이다>라는 공식 표어를 빗대어 바꾼 말이었다.

시안이 유별난 경우는 아니었다. 양즈 강 유역의 상업 중심지 우한에서는 1961년 이래로 수백 명의 무허가 행상이 서적을 대여하거나 판매하면서 호황을 누렸다. 이들 서적 중 상당수는 예컨대 <국민당원을 위한 지침서>처럼 반동적인 내용을 담은 것들이었다. 대중 민요를 소개하는 책들도 판매되었는데 재활용품 처리 공장에서 빼돌려진 것만 족히 수십권에 달했다. 약 1만 5000개의 오페라 대본 중 절대 다수는 내용이 <봉건적, 미신적, 유교적, 비합리적, 외설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여행자들은 기차역이나 항구에서 외국 여배우 사진은 물론이고 <정치적으로 옳지 못한 지도자들> 사진을 구할 수 있었다. 농촌에서 봉건적인 문학을 흔히 접할 수 있게 되면서 부패는 더 이상 후베이 성의 한 복잡한 항구 도시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궁안 현에서는 수백 개의 초등학교가 해방 전 학생들에게 유교적 가치관을 가르칠 때 이용하던 삼자경을 다시 꺼내 들었다.

문화대혁명,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76~77페이지.

그리고 갓택동 전 주석님은 유소기 주석님에게 이걸 청소하게 시킨 다음에 유소기를 청소했다더라.

나무위키 후스 문서 완성 중국 근현대사

https://namu.wiki/w/%ED%9B%84%EC%8A%A4
제가 다른 정치사 문서에 들인 공에 비하면 아주 적은 공을 들였습니다. 철학자나 철학같은거 이해도 못하거든요.(...)
하지만 후스가 중화민국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주요인물이며 그에 대한 흥미가 있었기에 일단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열심히 적어봤는데... 결과적으로 매우 대충입니다만 대충 볼만한 수준으론 만들었다고 생각하여 올립니다.

등소평과 유소기는 문혁의 무고한 희생자들인가? 중국 근현대사

디쾨터는 이러한 관점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

....
마오 주석은 자신이 사후에 비난 대상이 된 스탈린과 똑같은 운명이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렇다면 누가 중국의 흐루쇼프가 될까? 1959년 여름에 대약진 운동을 비난하는 편지를 쓴 펑더화이 사령관부터 시작해서 후보는 차고 넘쳤다. 가장 그럴듯한 후보는 당의 2인자이면서 1962년 1월 수천 명의 당 지도부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기근을 인재라고 비판한 류사오치였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마오쩌둥은 숙청 준비에 돌입했다. 1964년 12월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지금의 이런 당을 응징해야 한다.>

하지만 신중했던 마오쩌둥은 자신의 전략을 비밀로 했다. 문화 대혁명과 관련해서는 의도적으로 모호한 수사적 표현과 막연한 말을 사용하며 <계급의 적>, <주자파>, <수정주의자> 등을 비난했다. 1965년 즈음에는 당 지도부 내에 실질적인 <주자파>가 업었던 까닭에 당 지도부 인사들은 누구도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류사오치와 총서기인 덩샤오핑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주석의 분노가 향한 주된 대상이었지만 다가올 일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류샤오치는 1962년부터 1965년 사이에 현대사에서 가장 지독했던 공산당 정화 운동 가운데 하나를 주도하면서 500만 명의 당원을 처벌했다. 그는 주석의 후계자로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안달했다. 덩샤오핑은 소련의 수정주의를 가장 요란스레 비난한 인물이었다. 1964년에 집권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그를 <반 소비에트 난쟁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은 주석의 지지자 중에서도 목소리가 가장 큰 인물들이었고 주석을 도와서 상황 인식이 부족했던 베이징 시장을 포함하여 문화 대혁명의 초기 희생자들을 숙청했다.

문화대혁명,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14~15페이지.


덤으로 류사오치의 아내인 왕광메이도 이런 혐의에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

....
류사오치는 사회주의 교육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1963년 2월에는 도시의 부패 실태를 고발하는 펑전의 보고를 중간에서 가로막고 사회주의 교육 운동이 <우리 당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중대한 계급 투쟁>이라는 사실을 엄중하게 경고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결연한 혁명가이며 주석을 계승할 자격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마오쩌둥 본인보다도 더 극단적인 좌파의 길로 노선을 선회하고 있었다. 1963년 말에 이르러서는 공작대를 이끌도록 자신의 아내를 농촌으로 보냈다. 열렬한 환호 속에서 왕광메이가 베이징을 출발했다. 베이다이허 해변 휴양지와 바로 인접한 푸닝 현에 도착해서 도원이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에 거점을 마련하고 <계급의 적들로부터 힘을 되찾겠다>는 굳은 의지를 다졌다. 

그녀는 당의 적으로 알려진 세력을 겨냥하여 전례 없는 강력한 징벌적 폭력을 선동하면서 계급 투쟁 전면에 나선 사나운 투사로서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용의자들은 폭행을 당하거나 추위 속에서 알몸으로 서 있어야만 했거나 처형 위협을 받았다. 그녀가 제트기 자세라는 새로운 고문 자세를 고안했다는 소문도 등장했다. 피로감을 가중시킬 목적으로 희생자에게 무릎을 구부리고 양팔을 뒤로 쭉 뻗은 채 몇 시간이고 계속 서 있게 하는 방식이었다. 이삼년 뒤면 이 제트기가 홍위병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될 터였다. 이 일련의 조사를 끝으로 그녀가 내린 결론은 관료들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문제가 있으며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문화대혁명,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61~62페이지.


전부터 느끼던 거지만
마오에게 당했다고 얘들이 선역은 아니지.
-ㅅ-

나뮈키 서버가 안 좋은듯 위키 이야기

느리네....

홍위병이 불태우지 않은 예술품들의 결말 중국 근현대사

나치는 불태우지 않고 남긴 것들을 소중하게 보관했지만 홍위병은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노획물을 썩도록 방치했다. 상하이에서는 몰수된 피아노 600대가 유치원에 분배되었지만 다른 많은 물건들은 그다지 잘 관리되지 않았다. 불살라지는 것을 간신히 면한 500만권의 책들이 특히 그랬다. 여러 권이 한 다발로 묶인 채 상당수가 한때는 서점이 번창했던 푸저우로의 생물 시장 다락방에 방치되었다. 1874년 영국인이 지은 상하이 박물관을 기리기 위해 한때 박물관로라고 불렸던 후추로에는 100만권에 달하는 희귀 서적들이 해충의 공격과 악천후 속에서 천장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교외로 나가면 상황은 더 심각했다. 1966년 9월에 새로운 화장터가 문을 연 펑셴에서는 골동품 족자와 그림이 급조된 창고 바닥에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고 대부분이 물에 젖거나 찢어지거나 곰팡이가 핀 상태였다.

청동으로 제작된 골동품 종이나 제기, 동상 등을 재활용하거나 파괴하는 것을 금지해서 이런 노획물을 보존하려는 때늦은 시도가 1966년 말에 이루어졌다. 일단의 베이징 출신 전문가들에게 남은 것이라도 보존하라는 임무가 맡겨졌고 그들은 지난한 싸움에 직면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수많은 골동품 청동 제품들이 이미 주물 공장에서 녹여졌거나 암시장에 팔린 뒤였다. 도자기는 상당수가 산산조각 난 터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공예품 28만 1000점과 책 36만 8000권을 지켜 내는 데 성공했다. 

상하이의 상황이 나빴다고 치면 내륙의 상황은 더욱 나빴다. 우한에서는 창고에 아예 경비가 없었고 1968년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압수품이 이미 도난을 당했거나 해충과 습기로 인해 복원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손된 상태였다.

문화대혁명,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164~165페이지.

-ㅅ-

이 예술품은 이제 제겁니다.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겁니다. 중국 근현대사

전국에서 예술품과 다양한 악기, 리넨 수납장을 비롯하여 부르주아의 소유물을 잔뜩 실은 대형 트럭들이 때로는 교통 혼잡을 야기할 정도로 도시를 누비고 다녔다. 압수품은 각 도시의 중심부로 옮겨져 보관되었다.

(...)

노획물은 꼼꼼하게 목록이 작성되었고 상당수가 기록 보관소에 여전히 실물이 보관되어 있다. 후베이 성의 성도인 우한에서는 2만 가구에 달하는 집들이 습격을 받았는데 노획물 내역을 살펴보면 1달러짜리 은화 31만 9933개, 은행 예금 300만 위안 이상, 현금 56만 130위안, 골동품 679점, 가구 3400점, 밀봉된 상자 8439개, 은제품 9428점, 도자기 9만 1000점 이상, 시계 798개, 라디오 340개, 국민당 깃발 8개, 소총 22정, 금 971.1킬로그램, 은 1717킬로그램 등이 포함되었다. 총가구의 1%가 습격당한 후베이 성 전체를 놓고 따지면 노획된 자산 가치가 2억 위안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었다. 홍위병들이 끌어모은 금만 하더라도 4톤이 넘었다.

노획물 규모로 따지자면 홍위병이 25만 가구 이상을 수색한 상하이가 아마도 가장 많을 것이다. 6억 위안에 상당하는 보석과 화폐를 제외하고도 창고로 옮겨진 수집 가치가 있는 골동품과 예술품만 300만점에 이르렀다.

물론 이런 목록은 전체 노획물의 극히 일부만 보여줄 뿐이었다. 정녠은 홍위병에게 자신의 진귀한 도자기 수집품을 제발 부수지 말고 나라에 기증하라고 애걸해야 했다. 홍위병은 낡은 세상을 박살내라는 명령을 받았고 망치와 도끼, 쇠 지렛대, 펜치, 방망이를 휘두르면서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책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불살라졌다. 샤먼에서 화염 속에 던져진 물품 목록에는 <조상의 위패, 오래된 지폐, 화려한 색상의 중국 전통 의상, 남성용 정장, 옛날 간판, 영화관의 이전 이름으로 발행된 영화표, 대나무로 제작된 마작 패, 트럼프 카드, 외제 담배, 미술품, 골동품, 족자, 경극에 사용되는 현악기, 서양의 바이올린> 등이 포함되었다.

노획품은 너무나 많은 도둑들에게 노출되었다. 그 시작은 홍위병이었다. 그들은 돈과 보석, 손목시계로 사리사욕을 채우고 대의명분을 핑계로 공공연히 라디오나 자전거를 이용했다. <학교 기숙사가 갑자기 호화롭게 변했다. 많은 기숙사 학생들이 노획물로 풍족한 생활을 즐겼다.> 홍위병을 가장하여 순찰을 돌면서 노획물 중 일부를 자기 몫으로 챙기는 좀도둑도 있었다. 노획된 물품들이 일단 중앙 창고에 도착한 다음에는 목록이 작성되기도 전에 상당수가 증발했다. 시안에서는 중앙창고인 성황묘에 압수품을 맡기면 달랑 몇글자 끄적걸니 종이 한장이 압수품을 맡긴 홍위병에게 건네질 뿐이었다.

가장 큰 도둑은 중앙 문화 혁명 소조원들이었다. 헤르만 괴링이 주드폼에서 가장 좋은 물건들만 골라 자신의 개인 소장품으로 삼기 위해 스무 차례나 파리에 들락거렸던 것처럼 캉성은 전국의 주요 창고들을 돌면서 방대한 양의 인상적인 예술품을 수집했다. 개중에는 갑골 문자가 새겨진 선사시대의 뼈도 있었고 옛날 청동 제품과 상아 도장, 값비싼 그림도 있었으며 1만 2000권이 넘는 장서도 있었다. 세련된 학자이자 뛰어난 서예가이면서 고전에 매우 정통한 캉성은 희귀한 비석 탁본과 족자, 골동품 벼루 등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덩퉈가 모은 공예품 중 일부도 종국에는 캉성의 차지가 되었다. 이외에도 문화 대혁명 기간에 하나같이 박해를 받았던 거의 100명에 이르는 다른 학자들의 소장품도 결국에는 캉성의 소유가 되었다. 캉성 혼자서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캉성과 천보다, 린뱌오의 아내 예췬, 그리고 그녀의 수행원 네명은 1970년 5월에 딱 한번의 방문으로 창고 하나를 거의 비워 버리다시피했다. 캉성은 장칭과 희귀한 도장이나 벼루를 나누어 갖기도 했다.

문화대혁명,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162~163페이지.

탈레반도 박살낸 바미얀 석굴 조각을 팔았다고 합니다. 껄껄.

나무위키 4.12 상하이 쿠데타 문서 완성 중국 근현대사

https://namu.wiki/w/4.12%20%EC%83%81%ED%95%98%EC%9D%B4%20%EC%BF%A0%EB%8D%B0%ED%83%80

조너선 펜비의 장제스 평전만을 기초하여 썼던 문서인데 내가 보고 두고두고 이불킥한 문서 중 하나. 보다 못해서 이번 기회에 싹 다 갈아엎었습니다만 배경 부분의 국민당 좌우파의 대결 부분이 부실한 것이 걸리고 난징 국민정부 수립 과정에 대한 참고문헌이 부족하여 이 부분도 영한합작 문서에 쓴 것으로 떼운 것이 걸리네요. 이후에 자료를 더 모아서 보충해야겠습니다.

이 영화는 평식이횽이 높게 평가 영화 이야기

http://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8480200&memberNo=15205863&mainMenu=MOVIE

문화대혁명의 또 다른 선물:뇌수막염 중국 근현대사

홍위병들은 공짜로 여행을 다녔다. 다수의 병원균과 바이러스, 박테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혁명가들에 의해 초래된 것과 같은 으레 혼잡하고 불결한 환경에서 창궐하는 많은 질병 중에서 뇌수막염은 가장 치명적이었다. 뇌와 척수를 감싸고 있는 보호막에 염증이 생기는 이 질병은 기침과 재채기를 통해 전염되었다. 환기가 되지 않는 혼잡한 기차와 기숙사가 뇌수막염의 급속한 확산을 더욱 부채질했다.

1966년 8월 베이징에서 뇌수막염이 처음 발병했다. 불과 두세달 뒤에 베이징은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경계령이 발령되고 중앙 위원회가 적절한 절차에 따라 상황을 전파했지만 어떠한 예방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혁명에 방해가 되는 어떠한 행위도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수도에서 뇌수막염에 감염된 학생들이 철도망을 따라 위치한 대도시에 병을 옮겼고 11월에 들어서 유행병으로 발전했다. 이후 학생들이 걸어서 혁명을 전파하도록 독려하면서 뇌수막염은 도시에서 시골로 확산되었다. 12월 들어서 무료 여행이 폐지되었음에도 많은 홍위병이 계속해서 새로 발견한 자유를 즐기고 있었다. 1966년 12월부터 중앙 문화 혁명 소조가 마침내 모든 홍위병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한 1967년 2월까지 전국의 모든 주요 철도 노선을 따라 뇌수막염이 창궐했다. 그럼에도 이 시기에는 전국이 문화 대혁명에 매달리느라 심지어 마스크같은 기본적인 의료 용품도 공급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그 결과 뇌수막염을 치료하던 수많은 간호사와 의사가 차례로 감염되었다.

대부분의 병원은 뇌수막염을 치료할 약은 고사하고 마스크도 살 수 없는 형편이었다. 가뜩이나 부족한 재원은 문화 대혁명을 추진하는 데 투입되었고 홍위병은 홍위병대로 정부의 일상적인 업무를 마비시켰다. 마오쩌둥이 시민보다 지도부를 더 챙긴다며 보건부를 비난한 1964년부터 이미 보건부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1966년 가을에 이르러서는 내부에 숨은 <주자파>에게 책임을 물으려는 홍위병에게 보건부가 포위되었다. 미국이 의료 지원을 제안했지만 중국은 응하지 않았다. 1967년 2월 들어 항생제가 너무 부족해지자 정부는 마지못해 서유럽과 아시아의 제약 회사에 손을 내밀었고 수백톤의 의약품을 구입했다. 뇌수막염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전국적인 업무를 조직적으로 관리할 목적으로 통제 센터도 설립되었다. 하지만 너무나 보잘것없고 때늦은 조치였다. 상황이 진정되었을 무렵에는 이미 16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터였다.

문화대혁명,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197~199페이지.


....
아 씨바 할말을 잊었슴다.
이건 상상도 못했다.

이 블로그의 주권은 트와이스에게 있고 잡상

모든 권력은 트와이스로부터 나온다


https://www.youtube.com/watch?v=t35H2BVq490

저 짐승은 해로운 짐승이다! 저 꽃은 해로운 꽃이다! 중국 근현대사

8월 23일에 홍위병은 상하이에서 약 서른여섯개에 달하는 꽃가게를 공격했다. 관상용 식물과 꽃은 낭비이며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뒤이은 며칠 동안 홍위병은 도시 곳곳에서 공원 화단과 온실을 휘젓고 다녔다. 공들여 제작된 암석 정원과 금붕어 연못이 파괴되었다. 장례식에서 꽃을 사용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태생적으로 착취적인 화훼농업의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 복잡한 경제 계산이 이루어졌으며 당의 한 충실한 일꾼은 1965년에 상하이에서 판매된 300만 다발의 생화를 재배하려면 프롤레타리아 계급 3000명이 1년 동안 먹을 양곡을 생산할 수 있는 면적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개는 1950년대 초반에 공중 위생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사냥당해서 전국의 도시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씨가 마른 터였다. 홍위병이 순찰을 돌며 타락한 부르주아의 상징인 고양이를 죽이면서 이제는 고양이를 상대로 한 대대적인 학살이 진행되었다. 베이징에서 자신의 교사를 맹비난했던 열다섯 짜리 학생 양레이는 자신이 기르던 애완용 고양이를 몰래 집 밖으로 빼돌리려고 했다. 그녀가 든 가방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한 홍위병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이내 눈치챘다. 그들은 가병을 거머쥐고 붕 휘둘러서 벽돌 담장에 내리쳤다. <소년들이 큰 소리로 웃었다.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고양이가 든 가방을 계속해서 벽에 내리쳤다.> 그녀의 남동생이 울기 시작했고 그들에게 제발 그만하라고 애걸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8월 말이 되자 베이징의 거리에서는 앞쪽 두발이 묶인 채 길가에 죽어 있는 고양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비둘기 경주를 공격한 것은 성과가 별로였다. 비둘기 경주는 19세기에 외국인을 통해 유입된 취미였다. 1929년에 상하이에서 최초의 전서구 클럽이 문을 열었으며 머지 않아 이 지역의 열광적인 애호가들은 방향 감각과 지구력, 속도에서 차별화된 비둘기 품종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상하이가 해방되었을 즈음에는 아홉 개의 서로 다른 비둘기 클럽이 존재했는데 1964년에 정부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 하나의 협회로 모두 통합되었다. 영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회원의 절대 다수는 노동자였고 그들이 기르는 비둘기가 대략 3만 마리였다. 그들과 별개로 독자적인 애호가들이 허가를 받지 않고 기르는 비둘기가 추가로 2만여 마리에 달했다. 비둘기를 키우는 사람들이 비난을 받았는데 수천 명의 노동자를 부양할 수 있는 소중한 곡식을 낭비한다는 이유였다. 홍위병은 먼저 이틀 안에 비둘기를 모두 죽이라는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그런 다음 순찰을 돌면서 상하이 곳곳의 건물 옥상에 산재하는 비둘기장을 파괴했다. 시 당국도 이후 몇달 동안 수백명의 비둘기 사육사를 체포하여 홍위병을 도왔다. 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그 장소를 옮겼을 뿐 비둘기 사육은 계속 명맥을 이어갔다.

문화대혁명,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157~158페이지.

그래 다 죽여라.

결국 역개루는 함락됐군 잡상

그들이 빼앗긴 들에서 무엇을 하는지 지켜볼 것이다.

오늘 상기해보는 주옥같은 명언 트롤열전

#29 183.109.105.217

(......) 뭐라고 해야할지....이미 인터넷 광장에 대놓고 나와있는 사실을 가지고 계속 억지 부리시면서 아니라고 하시니...그러면 그 내용 작성한 사람이나 응오딘지엠 항목작성한 위키러들이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겁니까?


#57 222.99.89.26

아무나 수정하는 위키백과

해당 분야 최고 전문가들이 피어 리뷰 받으면서 연구하는 학계

승자는 위키백과?


#62 222.99.89.26

이러니 인터넷 세상이 뇌피셜 선동 혐오로 물들지....새로운 반 지성주의도 아니고....


나무위키가 논문보다 우월합니다^^

#152 183.109.105.217

응오딘지엠은 명분상 반공 정책을 내세우는데 실제로는 친일세력(프랑스비유)을 척결하지 못한 것이잖아요. 그리고 가톨릭 우대정책을 쓰는데 이게 알고보면 친프랑스적정책이잖아요. 게다가 돈도 펑펑 쓰고, 비밀경찬ㅅ 운영하고 토지개혁도 안하고, 부정부패도 심하고, 국민과 언론을 탄압합니다. 그래서 생긴게 베트공이죠.
-최진기(역사 강사)의 끝내주는 전쟁사1

#153 vanguard

#152 비전공자 최진기 인정안합니다.

#155 183.109.105.217

와...고려대학교 사회학이 전공자가 아니라고요? 도대체 어느기준으로 전공자입니까?

#156 183.109.105.217

사회학 수학할때 반드시 부전공하는게 역사인데

#160 183.109.105.217

그럼 이투스에서는 저사람 바로 잘라야겠군요 . 저사람 강의듣고 수능보는 학생들 뭐지요?


#162 183.109.105.217

미쳤다고 수능틀리라고 틀린거 가르치겠습니까? 그리고 꼭 베트남학 전공한 사람만이 서술해야 정답입니까?

#163 183.109.105.217

답이없군요..

#164 vanguard

#160 난 저 사람 강의 들으라고 추천하고 다닌 바가 없으니 학생들이 저 사람 강의를 듣든말든 제가 책임질 이유 없습니다만.



사회학과가 사학 전공이나 마찬가지입니다^^

#198 183.109.105.217

호치민 나무위키에 이내용 작성한 사람한테 따져보세요 이사람은 설마 찌라시보고 쓰셨겠습니까?

#199 vanguard

#198 누가 썼는지, 뭘 보고 썼는지는 이 토론의 주제와 관계 없고 내 알바도 아닙니다.

#202 183.109.105.217

저런식으로 알바아니라고 하고....참 실망스럽습니다.


어쩌라고, 그럼 그게 내 알바냐?

#220 183.109.105.217

계속 인정한할거면 알아서 써재끼십쇼. 님 논리라면 EBS 지식채널E도 호치민 미화했으니 거기도 베트남숭배 채널이네요 WHO?시리즈도 그랬는데 그럼 그것도 베트남 공산당 숭배 책이네요. 호치민 평전도 마찬가지고요

#221 183.109.105.217

매사에 공격적이고 나름 증거준비했는데도 조잡한 증거운운거리고 뇌피셜이니 뭐니 오글거리는 숭배평이니뭐니 인신공격이나 하는 태도는 정말 이해할수 없습니다. 
만약에 자료가 틀려도 존중이 예의 아닙니까?

#222 183.109.105.217

계속 그 딴식의 공격적인 태도로 몰아가기병법 쓰실거면 그냥 이 문서 님이 처음부터 다 갈아 엎어요. 호치민이 김일성하고 동급이라고 쓰세요. 상관안합니다. 계속 인정 안한다는데 뭘 제시해도 이길 자신이 없군요. 문서를 갈아업든지 날리던지 알아서 하세요. 자기 증거만 소중한 사람 상대 안합니다. 다만 평전 쓴 사람들이나 베트남사람들한테 계속 이럴수 있을지 심히 궁금하네요 

저 갑니다. 알아서하세요.

#224 183.109.105.217

나무위키는 엔하랑 달리 믿었는데...사람들이 나무위키 비판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었군요....이제 상관 ㄴㄴ 차라리 정신건강 챙기겠음 알아서들해요~


결론은 좆무위키꺼라.
문제는 그걸 왜 쟤가 시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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