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트로츠키 관계 재고(1922~1923) 소련사

간단하게 풀어 보는 잡썰. 한번 새로운 형태의 포스팅을 실험해보는 계기도 되겠습니다.

1. 스탈린과 트로츠키는 내전을 거치면서 사이가 나빠졌다?
→관계 악화가 사실이긴 한데 둘의 관계가 이 시기에 결정적으로 악화되었다고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둘의 관계 악화 수준은 당시 볼셰비키 지도부 전반에 만연한 불화에 비교해서 평범한 수준. 이 때문에 분파주의 금지를 외친 것은 다름아닌 제10차 당대회에서의 레닌.

2. 스탈린이 총서기가 되면서 이를 시기한 트로츠키와 사이가 나빠졌다?
→역시 둘의 사이가 나빠진 것이 사실. 트로츠키는 서기국으로의 권력 집중에 대해서 대놓고 불쾌감을 드러냄. 하지만 종래의 인식과 달리 스탈린의 서기국엔 그렇게 권력이 집중되지도 않았으며 스탈린의 권력 남용 정황이나 성공적인 계파 장악 정황도 보이지 않음. 게다가 이 시기에는 오히려 트로츠키보단 지노비예프가 스탈린을 더욱 난타.

3. 스탈린과 트로츠키는 경제정책과 이에 대한 이념을 두고 틀어졌나?
→오히려 이 전제에 반대되는 사례가 더 많이 보임. 1923년 1월 인민위원평의회 부의장에 트로츠키를 추천한게 다름아닌 스탈린. 거기에 스탈린은 인민위원평의회 부의장 자리에 국가경제최고회의 특별 책임까지 부여. 그리고 트로츠키의 최측근인 퍄타코프를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으로 추천한 것 역시 스탈린. 1923년 2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도 스탈린은 '국영공업 문제에 관한 트로츠키의 테제'를 다가오는 12차 당대회 핵심 논의대상으로 삼는 것을 승인했으며 정치 보고조차 트로츠키에 맡기려고 함.

트로츠키가 신경제정책의 폐기를 주장하며 영구혁명론의 급진적 실천을 주장했다는 기존의 관념 역시 의심스러운 정황이 많음. 신경제정책에 대해서 더욱 급진적 시각들 드러낸 것은 스탈린 파벌의 카메네프였고 트로츠키의 주장은 농공동맹과 국제혁명 측면에서 그다지 급진적이지도 않았고 12차 당대회에서 스탈린 진영과 첨예한 대립은 고사하고 오히려 둘의 의견이 비슷했음.

참고문헌
스탈린-트로츠키 권력투쟁 재고:좌우파의 경제 이념과 관련하여, 1923~1927, 노경덕, 사총 89(2016.9.30).
243~250페이지.


다음편은 본격적인 스탈린-트로츠키 관계의 파행과 트로츠키의 축출에 대해 알아보지요.

스탈린이 독재 권력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소련사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스탈린이 1920년대 동안 독재자로 부상할 수 있었던 까닭은 "모사의 달인"으로서 그의 노회한 '행정적, 조직적 수완" 때문이었다. 즉 레닌의 추천으로 1922년 총서기가 된 스탈린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추종자들을 당의 요직에 배치하는데 성공하였다. 총서기로서 당내 주요 직책의 인사권을 장악한 스탈린은 자신을 지지하는 충성스런 당원들을 직접 주요 직책에 임명함으로써 연방 공화국 및 하급 단게에서 일하는 당 서기들을 통제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상급 당 기관과 당 대회들에 보낼 대의원을 선출하는 데 강력한 발언권을 갖고 있었다. 바로 이들 당 대회에 파견될 대의원의 선출을 통제하는 일은 스탈린의 성공에 결정적이었다. 즉 이들은 당의 주요 기관으로서 국가의 핵심 정책을 결정하는 당 중앙위원회를 뽑는 권한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인 역사학자 해리스는 총서기직이 스탈린의 부상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하였으나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방식으로는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스탈린이 총책임자로 있는 당 서기국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당 간부들의 배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으며, 스탈린이 서기국을 이용하여 직접 추종자들을 만들어내려고 했다는 증거도 거의 없다. 대신 스탈린은 트로츠키 같은 경쟁자들에게 해를 가하기 위해 당내 민주주의(분파주의)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여 경쟁자들이 자신들의 사상을 당원들 사이에 유포하는 것을 막았다. 이 과정에서 지역의 당 관료들은 스탈린의 "분파주의에 대한 투쟁"을 자신들 사이의 권력 투쟁에 적용하였다. 즉 1920년대 동안 분파 투쟁은 당 정치국 지도부 사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소비에트 국가를 창출하고 확대하는 과정에서 투쟁은 모든 수준에서 발생하였다. 지역의 당 관료들은 하급 부하들로부터 끊임없는 도전에 직면하였고, 서기국의 개입은 이런 경쟁을 완화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화시키기 일쑤였다. 이때 총서기로서 스탈린이 취한 분파주의 금지 조치는 바로 지역의 관료들이 자신들의 경쟁자를 억압하는 데 적절한 무기 구실을 하였다. 당연히 스탈린은 그들의 환영을 받았고 당 관료들은 생존을 위해 스탈린을 지지함으로써 그의 집권에 궁극적으로 기여하였던 것이다.

그루지야의 혁명가에서 소련의 독재자로:스탈린 신화와 현실, 김남섭, 인문논총 57집(2007)
228~229페이지.

3줄 요약

1. 전통적으로 스탈린은 총서기로의 권한을 남용하여 권력 획득한 것으로 인식.

2. 하지만 사료를 재고해보면 스탈린은 남용할 권력도 없었음.

3. 오히려 스탈린에 대한 당관료들과 지방 당서기들의 지지는 자신들의 이익과 암투를 위한 자발적인 것이란게 해리스의 설명.

전에 포스팅한 다니엘스 테제에 대한 비판과 매우 흡사한 포스팅. 이 해리스가 저술한 거대한 우랄 산맥(원서)을 사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싸지방에선 결재가 안되서 휴가를 도모하고 있군요.

이번 휴가 때 챙길 책들 잡상

1. 이언 커쇼의 히틀러

2. 존 루이스 개디스의 냉전의 역사

3.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

일단 이 정도..........
근데 트로츠키 평전이야 집에 있지만 히틀러 평전이랑 냉전의 역사는 세종에 있어서 오랜만에 한번 올라가봐야 하나?

스탈린 체제는 전체주의 체제가 맞았다? 소련사

※스탈린 사회를 설명하는 전체주의론은 한 60년대까지의 정설이고 그 이후로는 이에 반박하는 수정주의 노선이 주설. 그나마도 80년대부터 수정주의의 흐름조차 또 한번 바뀜.


요컨대, 스탈린의 거듭된 실정은 그의 독단을 가능케 했던 독재 정치와 그의 세계관 및 성격이 결합된 결과였다는 것이 흘레브뉵의 논지이다. 이런 실정을 양산한 스탈린 체제는, 그에 의하면, 전체주의 사회라는 개념으로 규정될 수 있다. 테러의 국가도구화, 전통적 사회관계의 파괴, 사회의 원자화, 그리고 이데올로기 조종 모두가 소련 체제에 존재했다고 인정한다는 점에서 흘레브뉵의 개념은 과거 1950년대 서방 사회과학자들과 페레스트로이카 시대 소련 지식인들의 전체주의론을 부활시킨 것이다. 그간 이미 많은 이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던, 이 낡은 틀을 그가 다시 꺼내든 이유를 추정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것은 전체주의론의 이론적 적실성을 학문적으로 주장하고자 함이 아니라, 스탈린 체제에 대한 수사적인 공격을 위함일 것이다.

(...)

농민들의 지위는, 흘레브뉵의 표현에 따르면, "농노" 또는 국가에 완전히 예속된 상태로 떨어졌으며, 기근이 덮치 소련의 농촌에는 영아살해나 식인행위와 같은 끔찍한 상황이 펼쳐졌다. 이런 모습들을 두고도 스탈린은 소련 사회와는 물론 정치권 내부와도 소통하지 않았다. 농촌의 실상은 그의 정책 변화에 별반 영향을 끼치지 못했으며, 고통을 호소하는 수많은 농민들의 편지들은 대부분 스탈린의 책상에까지 이르지도 못했다.

다음으로, 1930년대 말 대숙청이 야기한 피해 역시 흘레브뉵이 자세히 다루는 부분이다. 그에 의하면, 이 대숙청이 본질적으로 당원이나 관료 등의 엘리트들을 겨냥한 것이었다는 몇몇 서방의 학자들의 주장은 그 기간의 초반에는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못지 않게 중요했던 숙청의 후반기는 보다 넓은 계층과 민족 일반을 표적으로 하는 전반적인 테러였다. 그 결과, 전 인구의 3%에 해당되는 거대한 수가 소위 강제 노동 수용소에 끌려가게 되었다. 강제 노동 수용소, 즉 굴락은 스탈린 시대 소련 삶의 "가장 중대한" 부분이었다고 그는 선언한다.

러시아 역사가의 스탈린 신화 깨기 기획, 노경덕, 인문노총 제73권 제2호(2016.5.31)
551~553페이지.,

흘레브뉵 이 사람이 참 스탈린을 혹독히 비판하는 듯... 여튼 디쾨터도 그렇고 내부문건 중심으로 연구한 결과는 어찌 레퍼토리가 좀 비슷하게 흘러가는 경향이 있는 듯도 합니다.


북한 공업과 일제의 연관에 관한 잡설 북괴 이야기

뭐 흔히 나오는 말로 한반도 북부에 일제가 남겨놓은 공업은 6.25로 다 박살나서 결국 남이나 북이나 맨땅에서 시작한 거 아니냐 라는 말이 있는데, 일단 본인이 배운 북괴 공업론을 중심으로 썰을 펴보자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

북괴 공업 중 특정 분야는 실제로 개박살이 나거나 소련군이 약탈을 해가서 나중에 중소 지원 받아 새로 건설하기도 했는데 군수공업과 화학공업의 경우에는 일본이 남겨놓은 기반을 바탕으로 재건설. 군수공업이 일본 기업에서 일하던 기술자+공장 설비 가지고 소련 무기 체계 도입한 거고 북괴 화학공업은 일제가 30년대 육성한 여러 공장들을 기반으로 발전한 것. 북의 화학공업 자체가 너무 일본 내수용으로 설계되서 규모와 수준은 높았는데 불균형이 심각해서 북한 내부 사정에 맞게 개조하는 것이 60년대까지의 북한 화학공업 정책. 그리고 제철 공업은 일본이 지어놨다가 소련군 약탈+전쟁 크리로 개박살난거 전쟁 후에 복구한 것이 북괴 제철공업의 시작.

뭐 그러하노라.

이거 밸리에 보낼 가치가 있을까 'ㅅ'

스탈린의 성격이 스탈린의 통치에 끼친 영향은? 소련사

얼마 전에 올린 흘레브뉵 연구 소개.



흘레브뉵의 스탈린 성격 이해는 과거 반공주의 감성으로 무장했던 서방 학자들의 정신 병리학적 해석과는 전혀 다르다. 그는 우선 스탈린의 유년 시절 그의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구타와 학대를 성격 형성에 중요한 경험으로 보았던 터커 등의 연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스탈린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체벌이나 구타는 당대 러시아 제국의 일반적 분위기에 비추어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스탈린은 독자로서 어머니의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으며 나름 편안한 유년시절을 보냈다.(필자주:각주에 따르면, 이는 최근의 연구 경향과 일치한다.)

스탈린의 독재 권력에 대한 추구는 정신 병리학적 성격의 소산이 아니라 차가운 '합리성', 즉 계산의 결과였다는 것이 흘레브뉵의 생각이다. 그는 훗날의 독재자가 신학교를 나와 전업 혁명가가 되었던 밑바탕에는 그것이 권력을 쥐는 현실적으로 가장 가능성 있는 길이라는 스탈린의 계산적 판단이 있었다고 본다. 1920년대 말의 농업집산화 시도나 무리한 공업화 목표치 설정도 비이성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 그의 독재 권려 달성을 위한 '합리적' 정치 수단으로 의도된 것이었다. 특히, 그가 이미 제거했던 좌파의 경제 정책을 스탈린이 1920년대 말 차용했던 것은 우파 정치인들과의 집단 지도체제를 파괴하기 위한 계산된 책략이었다. 1930년대 말 대숙청의 회오리 역시, 스탈린 편집증의 역할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독재 체제 유지와 강화의 수단으로 그가 계획적으로 일으킨 면이 더 크다는 것이다.

이런 차가운 '합리성'은 그의 냉혹한 성격과 공존했다. 흘레브뉵은 스탈린의 냉혹함을 드러내기 위해 구체적 예화들을 제시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련 독재자에 대한 감정어린 논평, 또는 도덕적인 공격을 서슴지 않는다. 흘레브뉵에 의하면, 스탈린은 일반민들의 고통스런 현실이나 심지어 목숨까지도 크게 개의치 않는 냉혹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1920년대 말 농업정책의 실패로 농촌의 대혼란과 참상이 빚어지는 현실 속에서도 그는 무자비하게 농업집산화를 밀어붙였다. 1941년 9월 키예프가 나치 군에 포위된 절망적 상황에서도, 스탈린은 그 수많은 목숨이 걸려있던 후퇴 작전을 단호히 거부하여 거대한 수의 인명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전후에 다시 닥쳤던 기근 시기에도, 스탈린은 그 비극을 겪는 농민들의 실상보다는 곡물 등 국가 재산 관리의 엄중성에 더 신경을 썼다. 

또한 스탈린은 처형이라는 수단에 거리낌이 없는 냉혈한이었다. 내전 시기 그의 책임 아래 있던 짜리친 부대에서의 구 제국 장교들 집단 처형이나, 1930년대 초의 가혹했던 부농 척결 운동, 그리고 1930년대 말 대숙청 시기의 수많은 총살은 모두 그가 직접 내린 결정에 의해 집행되었다. 흘레브뉵에 의하면, 스탈린은 "손을 더럽히는 것"을 두려워하는 공산주의자는 필요 없다는 언급을 할 정도의 이물이었다.

이런 스탈린의 냉혹함에 첨병 역할을 했던 것이 일종의 테러 기구였던 비밀경찰이었다. 흘레브뉵은 1920년대 경쟁자들과의 권력 투쟁 시기부터 이미 스탈린은 비밀경찰과 가까웠고, 이 관계는 그의 최후까지 이어졌다고 말한다. 물론 스탈린의 냉혹함은 자신의 첨병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비밀경찰은 스탈린이 가장 자주 건드렸던 숙청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정치적 숙청을 넘어, 스탈린은 이 테러 기구를 사실상의 '개인적' 살해에까지 이용했다고 흘레브뉵은 주장한다.

러시아 역사가의 스탈린 신화 깨기, 노경덕, 인문노총 제73권 제2호(2016.5.31)
549~551페이지.

중일전쟁 시기 중화민국의 경제정책과 그 반발 중국 근현대사

중국인민해방군사 관련 포스팅입니다.


중국은 광주, 무한의 함락으로 전국 토지의 1/3, 공업생산력의 92%, 농업생산력의 40%를 상실함으로써 주요 재원을 대부분 상실하였다. 이로 인하여 국가재정이 어려워지자 공채를 발행하는 등 재정적자를 해소하고자 했다. 그리고 서남경제건설위원회를 조직하여 함락지구의 공장을 이전시키고 공광조정처를 만들어 민간공장에 대한 자금대부 및 통제를 실시하였다. 자원위원회를 통해서 전력, 중공업, 자원개발을 행하였고, 기타 장기대부를 시행하여 경제건설을 촉진하고 공업합작사를 적극 추진하였다. 1939년에는 중앙은행에 의한 통일적 국고망을 형성하고 국영기업을 설립하였으며 공업합작사도 확대하였다. 농업에서도 적극적인 개간, 수리사업을 행하는 등 항일지구전에 대처하였다. 이로써 중경정부의 항전체제는 경제적인 면에서 어느 정도 잡혀 갔다.

그러나 1940년 6월 중경정부의 경제요로인 전월공로가 일본군에 의해 폐쇄되고 또한 절강, 복건 연안에 대한 봉쇄가 강화되어 중경 정부는 크게 타격을 받았다. 이에 1941년 3월 국민당 제5기 8중전회는 이러한 경제위기에 딸느 재원보충을 위해 세제상 실물징수와 호적조사를 실시하여 중앙권력의 지방침투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통제의 강화는 지방군벌, 특히 운남의 용운 군벌과 갈등을 빚었다. 또한 국민당의 지배구조는 지방군벌과의 연합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국민당의 독재 강화와 경제개혁으로 인하여 군벌들과 이해관계로 대립하게 되었고, 독재에 대한 지식인, 언론 등 중간파의 저항 등으로 중앙권력이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인민해방군사, 외국군사사 연구 7, 국방군사연구소.
제6장 중일전쟁 제2절 중기 중일전쟁(1939~1943) 1.항전체제의 위기.

112~113페이지.

3줄 감상

1. 레이 황 교수의 언급에 의하면, 중경 정부는 초기에 남경 시절에 비해서 철강 생산량이 1% 수준으로 폭락했다고 한다. 자원위원회의 피나는 노력으로 전쟁 말기에 10배로 증가되었지만 현재 중국에서 하루 안에 다 만들고도 남는 양이라나 -ㅅ-

2. 이상하게 중공 설립 과정을 옹호하는 논문들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경제력을 비교하면서 중일전쟁으로 개판난 30년대 후반이나 40년대 수치들을 가져와 비교하는 경향이 많나 모르겠다.

3. 여튼 공급이 끊겼는데 수요가 폭증했으면 인플레이션이 늘어날 수 밖에 없는데 총에 맞은 사람이 잘 못 움직이는 걸 보고 게으르다고 까는 것도 아니고....

브레진스키 사망 늬우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27/2017052700847.html

시대는 저문다.

중일전쟁 중 공산당의 확장에 대한 국방부의 평가 중국 근현대사

공산주의자들은 중기 중일전쟁 동안 국민당과의 분쟁을 '마찰'이라고 온유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1939년에 이르러서 많은 관측자들에게 나타났던 것들은 -아마도 잘못으로- 예상하지도 못했던 국공 화해가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중국 공산당 중앙은 1939년 7월 7일 항전 2주년을 기념하여 시국선언에서 국민당의 반공행동을 저지할 것을 전국에 호소하였다. 이어 1939년 9월 16일 모택동은 연안에서 '남이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남을 건드리지 않고 남이 나를 건드리면 나도 반드시 건드린다. (...) 이것이 우리의 일관된 태도이다."라고 말했다. 이같은 주장은 국공간의 갈등이 내재한 데에서 비롯된 그의 국민당 정부군에 공격의 신호라 할 수 있다.

그후 국공간의 긴장과 충돌(마찰)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였다. 군사적 충돌은 여름에 시작하였으며, 가을과 겨울에는 빈도와 강도가 증가하면서 계속되었고, 그 대부분은 북부 중국기지 내와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1939년 12월부터 1940년 3월까지 공산당의 근거지 확대와 이를 저지하는 국공간의 충돌은 섬감령 지구, 진서북과 진동남 등 여러 지구에서 계속 긴장의 고조를 이루었다. 공산당은 이를 
'제1차 반공산주의 고조기' 혹은 '반마찰투쟁기'라고 불렀다. 물론 한편은 다른 편을 침략자라 불렀고, 그리고 부당한 공격에 대한 자위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전략적으로 이 북부 중국의 '고조'는 국민당에 인가된 지역을 침범한 공산당의 허가되지 않은 확장을 저지하고 그리고 공산주의자 혹은 일본인에게 이미 상실한 지역에서 영향력을 다시 찾기 위한 국민당의 노력이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사, 외국군사사연구 7, 국방군사연구소.
제1편 중국인민해방군의 성장과정 제6장 중일전쟁 제2절 중기 중일전쟁(1939~1943) 3. 국공간의 마찰.
117~118페이지.

드라이브 뒤지던 중 우연히 이게 나와서 한번 포스팅 써봅니다.

흘레브뉵:스탈린을 제외한 소련 정치인들은 노예에 불과했다 소련사

현존 최고의 스탈린 시대 역사 전문가 중 하나이며 서방 학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러시아 역사가 올레그 흘레브뉵이 스탈린 전기를 펴냈다. 러시아의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그는 본서에 스탈린 신화 깨끼라는 분명한 현실 정치적 목표를 담았다. 홀레브뉵의 전기는 지금까지 그를 비롯한 수많은 스탈린 전문가들이 쌓아왔던 연구 성과들의 차분한 학문적 종합이라기보다는 현재 러시아의 정치 및 사회 분위기에 대한 시의적 대응으로 기획된 것이다. 그는 무릇 많은 역사가들의 종국적인 꿈인 전기 저술 작업을 한가롭게 훗날로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한 듯 하다.

(...)

흘레브뉵에 의하면, 스탈린은 도전받을 수 없는 유일무이한 권력 소유자였다. 이런 그의 지위는 좌파와 우파 경쟁자들을 물리친 1920년대 말 이후 공고화되었다. 일부 정치국 지도자들의 손에 남아있던 약간의 자율성조차 1936년 키로프 암살 사건 이후 불어닥친 대숙청으로 완전히 사라지면서, 스탈린의 개인 권력은 그 정점을 찍었다. 전쟁 기간 동안 일부 국내 현안의 처리가 여타 지도자들에게 맡겨지는 권력 이완 현상을 보이기도 했지만, 전후에 독재자는 곧 그의 독점적 권력을 되찾아왔다.

이와 같은 묘사를 통해, 흘레브뉵은 일부 서방 학자들이 제기했던 소위 "약한 독재자"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사실, 구소련 문서고가 개방된 이후에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소련 고위 정치에서 스탈린의 권력은 절대적인 것이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스탈린과 그 주변의 핵심 정치인들 관계에 대한 평가는 현재까지도 여전히 논란 중이다. 게티를 비롯한 몇몇 서방의 진보적 학자들은 몰로토프나 즈다노프 등을 나름의 자율적 권력을 가진 힘 있는 정치인으로 묘사했던 것에 비해, 흘레브뉵은 이들이 스탈린의 하수인, 또는 심지어 노예에 불과했다고 주장한다. 스탈린은 공개적 모욕, 좌천, 그리고 주기적인 숙청과 위협 등의 방법을 통해 이들을 통제했으며, 그 결과 이 '노예'들에게 '주인'은 그저 공포의 대상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2차 대전 중후반만을 예외로 한다면, 스탈린이 주재한 회의에서는 진정한 토론이나 그의 의견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있을 수 없었다. 중요 사안은 스탈린이 혼자 결정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며, 이 독단은 수많은 실정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 흘레브뉵의 주장이다.

러시아 역사가의 스탈린 신화 깨기 기획, 노경덕, 인문노총 제73권 제2호, 2016년 5월 31일.
546~549페이지.

요즘들어 게티를 비롯한 수정주의 주장을 중심적으로 받아들이곤 했는데 이런 주장도 있군요. 문젠 흘레브뉵의 책은 커녕 기존의 수정주의 책이라도 우리나라에 들어왔냐는게... ㅠㅠ 그냥 영어 공부나 열심히 해야죠.

일단 노경덕 교수의 언급에 의하면 흘레브뉵의 연구에도 비판점이 많기는 하답니다.

독소전쟁 소련 선제공격설은 왜 인기를 끌었나? 2차 대전

수보로프의 'Icebreaker' 테제는 독일과 러시아의 현실 정세와 맞물려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독일에서는 히틀러의 전쟁 수행 노력을 정당화하는 이른바 '예방 전쟁 테제'가 1980년대 말 역사가 논쟁의 일부와 상호 연관을 맺으면서 다시 부상하였다. 러시아에서도 맟나가지로 이렇나 테제가 과거 소비에트의 경험을 부정하는 측면에서 많은 호응을 받았다. 그 반면에 미국의 학계에서는 일부 '냉전 전사'들이 이 테제를 지지하고 있다.

(...)

슈트라우스는 놀테의 주장에 의거하여 스탈린이 전 유럽 전쟁, 즉 유럽의 국가와 체제를 붕괴시킬 수 있는 소모전을 열망하고 있었고, '자본주의적'인 유럽의 파괴를 위해 전쟁에 개입할 계획이었으며, 그런 뒤 군사력을 이용한 전 유럽의 소비에트화를 지시할 생각이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의 책임은 히틀러가 아니라 스탈린에게 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쟁 책임론은 전후 등장한 냉전 체제의 기원과 맞물리면서 미국의 일부 냉전사가들의 지지를 받았다. 라아크는 스탈린이 적어도 제2차 세계대전을 촉발하는 데 있어서 히틀러만큼이나 죄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라아크에 따르면 "스탈린은 유럽의 혁명적 정복을 목표로 한 '트로츠키주의자'였다. 스탈린은 1939년에 전후 유럽을 붉은 색으로 칠할 생각이었다. 그는 마음먹은 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이었다."

(...)

이러한 논쟁은 학문의 제한된 경계를 뛰어넘어 대중의 상상력을 장악하고 있다. 특히 러시아, 독일, 이스라엘에서 그렇다. 러시아에서 수보로프의 저작이 베스트셀러의 지위를 유지하고 대중일간 신문에 소개된 것은 공산주의 과거에 대한 부정적 묘사 때문에 많은 독자들의 입맛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독일에서는 독일의 전쟁 수행 노력을 정당화하려는 세력이 오랫동안 존재해왔었다. 우에베르세르는 독일에서 예방전쟁 테제의 '부활'은 독일의 과거 이미지를 개조하려는 보수적인 정치세력의 시도에서 점차 우익 민족주의자에게로 확산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예방전쟁테제는 수보로프의 발견물의 결과로서 "훨씬 더 그럴듯하게 되었던" 것이다.

'Icebreaker' Thesis:1941년 소련의 대독 선제공격 계획설, 황동하, 독일연구 (5), 한국독일사학회, 2003년 6월.
120~123페이지.

3줄 요약.

1. 냉전사가:그러니까 소련을 상대로 한 미국의 냉전은 정당한 것이었다니까?

2. 러시아대중:치떨리는 소련 시절... 역시 이렇게나 나빴구나...

3. 독일우익:그러니까 사실 소련 침공한 독일이 나쁜게 아니라구?

좀 수준 높은 포스팅을 쓰고 싶은데 잡상

열악한 상황 때문에 기껏해야 논문 발췌 정도가 고작이다. 내가 직접 쓰는 것들은 대개 수준 낮은 가십거리 수준에 지나지 않고 그나마 볼만하더라도 1,2가지 사료에 전적으로 의존한 것에 불과하다. 괴롭구나... 전역이 답이다.

영불소 3국 협상은 왜 실패했는가? -영불의 태도를 중심으로- 2차 대전

1939년 8월 초순 베리아의 작업반은 영불 대표단들의 인적 사항에 대한 방대한 조사 자료를 준비하였다. 대상자는 드락스, 바네트, 헤이우드, 두멩, 발린, 부라움 등이었다. 드락스는 최근에 영국왕의 해군부관으로 임명되었고 러시아 황제의 성 스타니스라브(스타니슬라프의 오기인듯 -ㅅ- 전체적으로 옛날에 나온 책이라 오역, 오기가 많음.) 훈장을 받은 사실, 두멩은 육군 기계화 전문가였고 11월에 프랑스 최고 국방심의회의 회원이 될 예정이며 정치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는 사실 등이 밝혀졌다. 스탈린은 이러한 정보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소수의 장군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대표들이 초급장교인 것을 재빨리 파악하였다. 그는 몰로토프와 베리아에게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그들은 진지하지 않다. 이런 인원들은 도저히 적합한 권한을 보유하고 있을 리가 없다. 영국과 프랑스는 또 다시 도박을 하고 있지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들의 유럽 책략에 대한 수행 능력이다."

몰로토프는 스탈린의 눈을 직시하며 말하였다.

"그래도 회담을 추진해야 합니다."

스탈린은 건성으로 대답하였다.

"꼭 그래야만 한다면 해야지."

(...)

소련 대표단장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이 8월 4일에 승인한 명령서를 지참하고 있었다. 이 명령서의 제목은 <영국 및 프랑스와의 회담 당시 고려할 사항>이었는데, 독일을 최대의 적으로 지명하였고, '우리 군이 투입되어야 하는 5가지의 상황'을 상술하고 있었다. 국방담당, 그리고 외무담당 인민위원회는 '사태 진전에 따라' 소련, 영국, 프랑스가 투입할 수 있는 탱크, 화포, 항공기, 그리고 사단의 숫자를 정밀하게 계산하였으며 주요 전진 방향, 군사행동의 순서 등을 구상하였다. 소련은 120개 보병 사단을 투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주요 적대국이 우리를 공격할 경우 우리는 프랑스 및 영국이 86개의 보병 연대를 투입할 것과 이후 16일까지 동 연대들이 확실하게 전진하여 폴란드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 그리고 우리 군과 철도 차량이 빌나 통로와 갈리시아 지역을 아무 제한 없이 통과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여야 한다. 주요 적대국의 대 소련 공격 시나리오는 독일이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그리고 루마니아 영토를 사용할 것을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서방 대표단들이 모스크바에 온 이유는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협정을 맺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로 자국의 일반적인 견해를 전달하고 자국 정부에 '소련 정부의 주요 계획'을 전달하는데 있음이 회담 초반부터 분명해졌다. 그렇지만 스탈린은 다시 한번 5년 또는 10년의 명확한 기간을 규정하는 상호방위협정을 제시할 필요성을 느꼈다. 

(...)

스탈린은 답변을 추구하는 전문을 보냈으나 서방 대표들은 이토록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권한이 없었다.

(...)

스탈린은 참을성을 잃었다. 그는 원치적으로 작고 확실한 발걸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데까지 도착하였지만 지금 그는 시간에 쫓기는 체스 선수처럼 행동하였따. 8월 20일 아침 스탈린은 보로실로프가 프랑스 대표와 함께 소련측 제안에 대한 조기답변을 요청받은 영국 대표 드락스 제독의 아래와 같은 메모를 보여주자 3국 회담을 종결시켰다.

보로실로프 원수 귀하
프랑스와 영국 대표단들은 각국의 정부로부터 귀하께서 저희 정부에 전달을 부탁한 정치적 질문에 대해 여태까지 회신을 못 받은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제가 차기 회담을 주최한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8월 23일 오전 10시까지 혹은 그 이전에 회신을 받았으면 합니다.,
경의를 표하며.

영국 대표단 단장 드락스 제독.

"이제 장난 그만치자!"

스탈린은 신경질을 내며 말하였다.

스탈린, 드미트리 볼코고노프, 세경사, 한국전략문제연구소 역.
28~31페이지.

부흥과 역개루 업로드 용으로 재작성.

1939년 막심 리트비노프의 해임이 가져온 파장 2차 대전

유대인인 외무장관 막심 리트비노프를 해임한 것이 독일과 적극적 데탕트를 추구하던 스탈린이 독일을 배려하기 위해 취한 행동이었음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저도 얼마전까지 그런가 하고 생각했는데 이에 대한 정면 비판을 소개합니다.


(독일과 소련이 서로 관계 개선의 의지에 대한 반응을 보이지 않던 와중에) 독일이 소련과의 데탕트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게 된 계기는 5월 3일에 발생한 리트비노프의 해임이었다. 스탈린이 서명한 지시가 5월 3일 오후 11시에 소련의 재외공간에 내려갔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련 인민위원 회의에 대한 리트비노프 동지의 불충한 태도를 둘러싼 인민위원 회의 의장인 몰로토프 동지와 외무 인민위원인 리트비노프 동지 사이의 심각한 갈등 때문에 리트비노프 동지가 인민위원의 직책에서 물러날 것을 요청했다. 소련공산당(사족이지만 이 시기는 전연방공산당이 정식 명칭)중앙위원회는 리트비노프 동지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를 인민위원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인민위원 회의 의장인 몰로토프 동지가 외무 인민위원을 겸직하도록 임명되었다'

10년 후 몰로토프는 인민위원 회의에서 채택된 결정의 배경을 설명했다.

"1939년 5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은 외무 인민위원부가 반대세력과 여러 종류의 의심스러운 준당원들의 피난처가 되는 시대를 끝내고 외무 인민위원부를 중앙위원회에 긴밀히 연결시켜 중앙위원회의 직접적인 수단으로 만들 필요 때문에 취해졌다."

이러한 이유 이외에도 리트비노프 해임의 또 다른 이유는 영국과 프랑스가 취한 입장 때문에 중앙위원회가 영국, 프랑스와의 협력을 지향하는 정책의 결과에 실망했다는 사실에 있었다.(이 때문에 영불은 리트비노프 해임의 파장을 소련에 공식적으로 질의함.)

그러나 독소관계의 진전이라는 측면에서 볼때 중요한 사실은 히틀러가 리트비노프의 해임을 소련 외교정책의 변화로 '잘못' 해석했다는 점이다. 이 점은 히틀러가 1939년 8월 22일 군사지휘관에게 행한 연설에서 "리트비노프의 해임이 결정적"이라고 말한 사실에서 확인된다. 리트비노프 해임 직후 소환된 힐게르는 5월 11일 리트비노프 해임 이유와 소련의 정책변화 가능성 및 소련의 국내 정세에 대해 히틀러에게 보고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슈누레와 아스타포흐의 5월 5일 접촉은 독소관계에 있어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1939년 독일과 소련의 외교 관계 재검토, 홍성곤, 역사와경계 84, 부산경남사학회, 2012년 9월.
215~217페이지.



독소 불가침 조약에 대한 수정주의와 연구의 난점 2차 대전

1980년대 후반부터 로버츠를 필두로 강력한 '수정주의' 해석이 제기되었다. "집단안보 노선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스탈린이 커다란 실책을 저질렀지만 노선 그 자체는 논쟁의 여지 없이 진실하다."는 것이다. 1989년 개혁과 개방의 분위기에서 공개된 소련 측 사료 연구에 기초하여 대두된 수정주의적 해석에 따르면, 소련은 처음부터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소련은 독일의 체코 침공 후 영국과 프랑스에 독일에 대항하는 삼국동맹을 적극적으로 제안했다. 그러나 삼국협상이 체결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게 되자 소련은 1939년 8월 초에 '불가피하게'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소련은 수동적인 태도를 보인 반면 독일은 양국의 관계 개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는 것이다.

1939년 독일과 소련의 외교 관계의 실상에 대한 이상과 같은 세가지 해석(기본적으로 두가지 해석 - 필자주:포스팅을 소개한 전통주의 해석+어쨌거나 소련이 39년봄에는 독일과 친해지려 한거 아님?이라는 주장)의 대립은 1990년 초 소련 측 사료가 발간되면서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왜냐하면 서구의 정통적 해석의 토대가 되고 소련의 데탕트 제안으로 해석된 독일 측 사료의 내용이 소련 측 사료에는 다르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독일이 소련과의 데탕트를 위해 결정적인 제안을 한 7월 24일 이후 주독 소련 대리대사 아스타호프가 본국에 보고한 내용과 독일 측 사료의 내용은 거의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4월 17일 접촉, 5월 5일 독일외무성 경제정책국 동유럽담당 책임자 슈누레와 아스타호프 접촉, 5월 17일(소련 측 사료에는 5월 15일로 기록) 아스타호프와 슈누레의 접촉의 내용에 대해서는 양측의 기록이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문제는 논쟁의 핵심이 되고 있는 세 차례 접촉의 내용에 대한 소련 측 사료의 기술이 사실이라면, 즉 소련이 아니라 독일이 먼저 데탕트를 제안한 것이라면 서구의 정통적 해석은 유지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플라이쉬하우어는 소련과의 데탕트를 바라는 독일 외교관들이 자신들의 관점을 소련 외교관들의 입을 빌어 독일 측 사료에 남겼다는 가설을 제시한 바 있다. 물론 소련과 접촉한 독일 외교관들 중 일부가 독일-소련 불가침조약 체결을 진심으로 바랐던 것은 사실이지만, 세 차례 접촉에 대한 바이츠제커의 발언을 고려하면 독일 측 사료가 일방적으로 윤색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면 1939년 독일과 소련의 외교 관계의 실상을 해명하는 데 관건이 되는 세 차례 접촉에 대한 양측의 기록이 다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필자가 보기에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세 차례 접촉에서 메레칼로프와 아스타호프가 독일 측에 말한 내용과 본국에 보고한 내용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점에 있다. 이 글은 그러한 문제 의식에 입각하여 이용된 자료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독소관계 개선의 의지가 기본적으로 독일 측에서 나왔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냉전기 서구의 정통적 해석의 관점이 잘못되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1939년 독일과 소련의 외교 관계 재검토, 홍성곤, 역사와경계 84, 부산경남사학회, 2012년 9월.
206~208페이지.

독소 불가침 조약에 대한 전통적 해석과 비판 2차 대전

냉전 종식 후 소련 측 사료가 발간될 때까지 1939년 독일과 소련의 외교 관계의 실상은 전쟁 중에 노획한 독일 외무성 사료 특히 미국무부가 1948년에 편집, 발간한 <나치-소련 관계 1939~1941>에 실린 사료를 토대로 해석되어 왔다. 독일의 패배와 냉전의 대두로 전시에 형성된 연합국의 대동맹체제가 와해되어 가자 서구 진영은 소련의 이미지를 전시의 우호적인 동맹국에서 신뢰할 수 없는 적국으로 묘사하기 위해 나치 독일과 소련을 동일시하는 이론을 발면했다. 서구 진영의 이념적 무기로 등장한 '전체주의 이론'은 나치 독일과 소련의 협력을 냉전기 서방 측 선전활동의 중요한 부문으로 삼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나치-소련 관계 1939~1941>의 발간은 냉전의 본격적인 시작을 예고한 사건이었다. 특히 중요한 점은 이 책의 편집자들이 독일 주재 소련 대사 메레칼로프와 독일 외무차관 바이츠제커의 사이의 4월 17일 접촉을 책의 첫번째 사료로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료 선택을 통해 책의 편집자들은 독소 불가침조약은 스탈린이 선택한 마지못한 부차적 선택이 아니라 소련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거래였다는 해석의 토대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냉전 초에 형성된 이러한 분석틀을 토대로 한 서구의 '정통적' 해석은 1930년대 소련의 집단안전보장 정책의 목적이 나치 독일에 대항하는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과의 동맹이 아니라 독일과의 데탕트를 위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오히려 코민테른 지도자 라데크, 주독 소련 무역대표부 대표 칸델라키, 주독 소련 대사관 참사관 베소노프와 독일과의 비밀접촉에 소련 외교정책의 실체가 있다. 따라서 독소 불가침 조약은 소련의 집단안전보장 정책의 실제적 목적의 달성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특히 1939년 소련 외교정책의 우선순위가 영국, 프랑스와의 삼국협상이 아니라 독일과의 협정이었기 때문에 삼국협상은 독일과의 협정이 실패할 경우에 대비한 재보험이거나 독일로부터 최대한의 양보를 끌어내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라아크는 1930년대 소련 외교정책의 목적은 세계혁명의 추진이었으며 독일-소련 불가침조약은 세계혁명의 도화선이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이러한 목적을 위해 스탈린은 1938년에 서구에서의 전쟁을 바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의 문제점은, 소련이 스탈린의 진짜 목적인 독일과의 데탕트를 위해 독일과 비공식적으로 세 차례의 비밀접촉을 시도하는데 그친 반면 실제로 추구하지 않은 집단안전보장 정책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무시한다는 점이다. 라데크, 칸멜라키, 베소노프의 비밀접촉도 독일과의 동맹을 지향하는 소련의 진지한 시도는 아니었다. 세번째 문제점은 1939년 봄과 여름에 진행된 삼국협상 실패의 책임을 소련에 전가함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책임 문제를 희석시킨다는 사실이다.

1939년 독일과 소련의 외교관계 재검토, 홍성곤, 역사와경계 84, 부산경남사학회, 2012년 9월.
204~206페이지.

유소기:자본가가 착취를 많이 할수록 좋다 중국 근현대사

중공이 1949년 초 "핑진전투(평진전역, 북평-천진)"에서 승리하고 베이징 등 대도시를 접수하기 시작하면서, 새로 접수한 도시에서 경제적 혼란을 막고 상공업을 정상화시키는 것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리우샤오치(류샤오치, 유소기)는 마오쩌둥의 지시를 받아 1949년 4월 10일부터 톈진을 시찰하고 텐진의 상공인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일련의 모임을 가졌다. 그는 공업생산이 낙후된 중국에서 사적 자본주의가 존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확대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현재 중국의 노동자는 착취자가 있는 것이 착취자가 없는 경우보다 좋으며, 착취자가 없을 경우 그들은 더욱 고통스러워진다. 착취를 당하는 것도 고통스럽기는 하나 상대적으로 더 좋은 것이고, 실업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생계도 유지할 수 있다. (...) (자본가가) 공장을 더 많이 건설할수록 사회에 이익이 되며 공로도 더욱 커진다."고 답변했다.

이는 이후에 리우샤오치의 '착취하는 것이 공을 세우는 것이다.'라는 발언으로 알려졌다. 이 발언에 대해 1953년 리우샤오치는 자기비판을 한 바 있다.

(...)

<리우샤오치전>은 리우샤오치가 5월 9일 베이징으로 돌아와 마오쩌둥에게 위의 발언을 보고했으며, 마오쩌둥은 이 보고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보이보도 마오쩌둥이 리우샤오치의 발언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한다. 다만 "착취를 많이 할수록 좋다"라는 표현에 대해 그렇게 표현할 필요는 없었다는 언급을 했다고 회고했다.

마오쩌둥 시기 급진주의의 기원 -신민주주의론의 폐기와 그 함의-, 이남주, 동향과 전망, 한국사회과학연구회, 2010년 2월.
228~229페이지.


중공도 이런 시절이 있었지 -ㅅ-
일단 디쾨터의 연구에만 의존하는 경향을 벗어나기 위해 좀 더 다양한 문헌을 섭렵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파시즘 연구에 대한 난점 전체주의 연구

프랑스 파시즘 논쟁이 교착 상태에 빠진 배경에는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 이탈리아나 독일과는 달리 프랑스의 경우 파시즘으로 의심받는 세력들이 후발주자란는 사실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 1930년대 프랑스에서 출현하거나 활동한 극단적 세력들은 제3공화정의 의회민주주의에 환멸을 느꼈을 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격렬한 혐오감을 보였다. 이들 세력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의회민주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맞서 권위주의적 민족주의를 기치로 내걸었다. 한편 이 시기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파시즘이 운동으로서, 그리고 체제로서 대내외적으로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적 환경 속에서 프랑스의 극단적 민족주의 세력들은, 한 역사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말하자면 1930년대 프랑스의 극단적 민족주의 세력들은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동시에 거부하고 강력한 민족국가 체제를 수립하려는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시즘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프랑스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세력으로서 이들과 차별성 또는 독창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떄 프랑스의 극단적 민족주의 세력의 성격 규정을 위해 이탈리아나 독일의 사례와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문제를 한층 혼란스럽게 할 여지가 많다.

둘째, 학자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합의된 파시즘 정의가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프랑스 파시즘 논쟁을 한층 혼란스럽게 만든다. 1920년대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된 일반적 개념으로서 파시즘 정의를 수립하려는 노력은 1950년대와 60년대의 전체주의 모델, 개발 독재 모델을 거치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지만 그러나 여전히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전간기 유럽에서 탄생한 다양한 극단적 세력들을 비교분석하여 일반적인 파시즘 개념을 수립하려는 시도를 가로막는 여러 장애 요인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세력들이 대부분 자국의 역사적 경험과 상황, 민족의 독창성과 우월성을 강조하는 극단적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서 제시되는 파시즘 정의는 무엇보다도 이탈리아와 독일의 경우를 모델로 삼아 수립된 것이라는 점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그러나 최근 파시즘 연구 경향에 의하면 이 두 고전적 파시즘 사이에는 공통점만큼이나 차이점 역시 존재한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따라서 예컨대 파시즘은 반근대적인가 아니면 근대화를 촉진시키는가, 파시즘은 인종주의, 제국주의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또한 파시즘은 우파적 현상인가 좌파적 현상인가, 파시즘은 혁명적인가 보수적인가 등의 의문들은 파시즘의 본질과 관련해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프랑스 파시즘 논쟁에서 핵심을 차지한 쟁점 역시 혁명성과 보수성을 중심으로 한 파시즘 정의 문제였던 것이다.

셋째, 파시즘이란 말이 지니는 극도의 부정적인 인상 때문에 논쟁 과정에서 감정적 반발이 냉정한 분석을 가로막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스테른헬이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를 최초로 그리고 가장 전형적인 형태로 출현한 곳이 프랑스임을 밝히는 저서르러 출간하자 이에 대한 프랑스 학계의 반응과 그의 저서에서 파시스트로 지목된 인물들의 대응은 전반적인 거부와 법정 투쟁이었다. 프랑스의 한 평자는 1930년대 프랑스의 정치문화가 파시즘과 같은 극단적 현상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는 표현으로 스테른헬의 주장에 거부감을 나타냈으며 법정에서 스테른헬의 저서를 가장 비역사적인 책이라고 비난하였던 아롱이 증인 진술을 마친 직후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보다는 덜하지만 마찬가지로 1930년대 프랑스 파시즘 관련 저서를 낸 미국의 역사가 수시 또한 파시스트로 거론된 인물의 가족으로부터 공개 질의서를 받아야 했다. 이러한 정황은 미테랑이 파시즘으로 의심받는 한 조직에 가담한 전력 때문에 벌어진 논란으로 한층 가중되었다. 요컨대 프랑스 파시즘 논쟁이 남긴 교훈 가운데 하나는 역사가의 연구가 학계의 차분한 평가보다는 법의 심판이나 감정적 반발의 대상이 된다는 상황일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파시즘, 특히 프랑스 파시즘에 대한 차가운 분석의 시기는 아직도 다가오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1930년대 프랑스의 파시즘과 보수주의 -불의 십자가 논쟁과 그 문제점-, 김용우.
100~102페이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많은듯.


다리 부상 잡상

펜스 넘다가 착지 실수로... 중력권세에 당하고 말았소....
내일 항의전대나 가봐야지.

파시즘은 좌파인가? 우파인가?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체주의 연구

스테른헬은 "프랑스에서 진정한 파시즘은 항상 우파가 아니라 좌파에서 탄생했고", 따라서 우파의 특징을 강하게 보여주는 CF(프랑수아 드 라로크가 이끌던 불의 십자군, 혹은 불의 십자가)는 파시즘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파시즘을 "우파도 좌파도 아닌" 현상으로 보면서도 파시즘 자체를 기본적으로 좌파에서 발원한 현상으로 보는 암묵적 전제를 깔고 있다. 레몽 역시 파시즘을 일종의 좌파 현상을 보면서 라로크를 파시즘의 육화로 본 1930년대 좌파들은 "기념비적인" 오류를 범했다고 주장한다.

(...)

스테른헬이나 레몽과 달리 CF를 파시즘으로 규정하는 수시는 CF를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증오심을 표출한 "권위주의적 보수주의의 새로운 변종"으로 본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패스모어도 CF를 파시즘으로 볼 수 있다면서 파시즘을 "포퓰리즘적인 극단적 우파 운동"의 하위 범주로 조심스럽게 설정하기도 한다. 이들의 견해에서 파시즘은 좌파 현상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우파 현상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

방대한 파시즘 비교 연구를 수행한 팩스턴에 따르면,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파시스트들은 보수주의자들에게 구미가 당기는 선택 대안, 즉 권력을 좌파에게 나눠주지 않고 기성 제도를 유지하고 대중의 지지를 누리며 통치할 수 있는 "새로운 레시피"를 제공했다고 한다. 이 말의 다른 뜻은 곧 당시 파시스트들의 입장에서 권력의 자물통을 딸 수 있는 열쇠를 바로 보수주의 세력이 쥐고 있었다는 것이다. 코스타 핀투도 팩스턴의 그런 시각에 전폭적으로 공감하면서 파시즘의 권력 장악을 가능하게 한 것이 다름 아닌 보수주의자들의 결정이었다고 재차 확인한다. 다시 말해, 좌파의 위협에 맞서 파시스트와 권력을 공유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보수적 의사결정권자들이 파시즘의 성공을 위한 핵심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파시즘을 단순히 우파 현상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파시즘은 기성 제도와 타협했지만 전통적 우파와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가령 CF는 대규모 '준군사적' 대중 조직을 거느리며 의회 제도를 혐오하고 공화국을 전복할 D데이를 준비했다는 점에서 전통적 우파 단체들과는 구별되었다.

물론 1936년 인민 전선 전부가 CF를 불법화하고 강제해산했을 때 CF는 재빨리 선거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며 '프랑스 사회당'으로 변신했고, 이를 근거로 레몽은 CF/PSF의 준법성과 타협성이 파시즘이 아니라는 근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의 약점은 준법성과 타협성이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시즘에서도 확인된다는 데 있다. 양국의 파시스트 정당들도 선거 정당으로 변신하여 의회의 시민권을 획득하고 이를 권력 장악의 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시즘에게는 허용되는 타협이 프랑스의 경우에만 허용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파시즘의 알리바이? -1930년대 영국과 프랑스의 파시즘을 둘러싼 쟁점과 시각-, 장문석.
221~223페이지.

3줄 요약.

1. 파시즘은 명백한 좌파현상이라고 볼 수 없음.

2. 그렇다고 기존 보수주의 우파와도 구별.

3. 팩스턴과 핀투 등은 파시즘 집권의 열쇠는 보수주의 의사결정권자들과의 타협에 있다고 보며 이를 위한 준법성과 타협성의 획득이 프랑스에서만 예외라고 볼 순 없음.

대숙청에 대한 구조주의적 분석과 이에 대한 비판 소련사

1980년대 후반에 베엘리스나 람페르트는 스딸린 시대의 산업 경영가, 기술 엘리뜨와 인텔리겐챠 집단을 연구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제1차 산업화 5개년 수행 이후 점차 중앙과 공화국 및 지방 당기구 사이에 비전문가 출신의 간부와 전문가 출신의 간부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면서 모스끄바 중앙당에 불만을 느끼는 새로운 집단이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이 연구는 그 후 수정학파 연구자들에게 구조주의적 접근의 근거를 제공하였다.

구조주의적 해석에 의하면 중앙의 과도한 생산목표 달성에 관하여 지방당이 강한 불만과 수동적 저항을 보이자 중앙은 지방을 통제하는데 위기감과 어려움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고로 스딸린은 '반 뜨로쯔끼 파' 혹은 '인민의 적'이라는 이름으로, 지방 당기구의 지도부를 대량 숙청할 필요성을 느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조주의적 해석은 대량 숙청의 정치적 효과에 대해서 깊이 있게 다루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예를 들면 대숙청의 최종적 결과로 스딸린이 독재권을 장악하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딸린은 대량 숙청을 통하여 정적을 제거하였고 집아 당고위지도부를 희생시킴으로서 복종적인 새 간부층을 창출하였으며 적어도 단기적으로 강제적 집단농장화와 산업화로 인한 사회적 불만을 잠재우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대량 숙청과 공포는 그에게 더 이상 필요가 없는 간부를 제거하는데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숙청 이후 빈 자리는 스딸린주의의 새 추종자들이 메꾸어 갔다. 이들은 그(스탈린)의 정책을 맹종적으로 수행하면서 새로운 관료적 노멘클라투라 층으로 부상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수정주의적 역사가인 S. 피츠패트릭도 역시 출세주의적 새 간부들은 스딸린주의 노선에 더욱 복종적이고 충성하는 집단이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1930년대 스딸린 대숙청에 대한 비판적 고찰 -대숙청의 배경과 규모를 중심으로-, 이정희, 역사학보 180, 역사학회, 2003년 12월.
271~272페이지.

세대 단절이 대숙청에 준 영향 소련사

대숙청의 참가자에 대하여 세대간의 단절도 또 다른 중요한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볼셰비끼 지도부 내에서 좌우 반대파의 내분과 경쟁이 발생하였을 때, 스딸린은 세대 간의 단절을 이용하였다. 신세대 당원들은 혁명의 전통이나 이론에 대해 무지하면서 그 대신 1920~30년대 물질적인 빈곤과 외국세력에 대해 더 큰 공포감을 느끼는 세대였다. 이들에게 최상층부 볼셰비끼 우파 지도자들이 시용적 노선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이념투쟁만 벌이는 무의미한 존재처럼 보였다. 확실히 1934년 정치국원들은 1923년과는 달리 문학적, 지적, 이론적 논객들이 아니며 볼세비끼와 사민당의 전통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의 출신이 다수였다. 이들은 대부분 산업 현장의 기술노동자나 실용적 행정가 출신들이었다. 신세대 사이에서는 스딸린을 유일하 대안으로 보는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인물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1930년대 스딸린 대숙청에 관한 비판적 고찰 -대숙청의 배경과 규모를 중심으로-, 이정희, 역사학보 180, 역사학회, 2003년 12월.
270페이지.

어쩌다보니 무척이나 간결해진 글.

앞으로 진행할 소형 프로젝트들 중국 근현대사

1. 중산함 사건을 파헤친다.

2. 상하이 쿠데타를 해부한다.

뭐 장제스의 두번의 무력정변을 한번 파고자 합니다.

마오쩌둥:누가 인민인지는 내가 결정한다! 중국 근현대사

"적아와 인민 내부의 모순을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해서 우선 무엇이 인민이고 무엇이 적인지에 대해 분명히 해야 한다. 인민의 개념은 각 국가와 각 국가의 역사 시기에 따라 내용을 달리한다. 중국의 경우, 항일전쟁 시기에 항일을 한 모든 계급과 계층 그리고 사회집단은 모두 인민의 범위에 속하고, 일본 제국주의, 한간, 친일파는 모두 인민의 적이다.

해방전쟁 시기에는 미제국주의와 그들의 앞잡이 즉 관료자산계급, 지주계급 및 이러한 계급을 대표하는 국민당 반동파는 모두 인민의 적이고, 이러한 적들을 반대하는 계급, 계층 및 사회집단은 모두 인민의 범주에 속한다.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현 단계에서는 사회주의 건설사업에 찬성, 옹호, 참가하는 모든 계급, 계층, 사회집단은 모두 인민의 범주에 속하고, 사회주의 혁명에 반항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적대시하고 파괴하고자 하는 사회세력과 사회집단은 모두 인민의 적이다."

마오쩌둥, 인민내부의 모순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 1957년.

마오쩌둥의 민주관, 박종우, 중국학연구 62, 중국학연구회, 2012년 12월에서 재발췌.

이는 공민과 비공민의 차이를 두지 않은 중화인민공화국 헌법도 씹어먹은 거라 하더라.... -ㅅ-
마오쩌둥의 행보를 생각하면 소름까지 돋는다.

영불소 동맹의 결렬에 대한 잡설 2차 대전

하도 대숙청 얘기만 하다가 질려서 간만에 찾은 다른 주제.

"1939년 8월 초순 베리아의 작업반은 영불 대표단들의 인적 사항에 대한 방대한 조사 자료를 준비하였다. 대상자는 드락스, 바네트, 헤이우드, 두멩, 발린, 부라움 등이었다. 드락스는 최근에 영국왕의 해군부관으로 임명되었고 러시아 황제의 성 스타니스라브(스타니슬라프의 오기인듯 -ㅅ- 전체적으로 옛날에 나온 책이라 오역, 오기가 많음.) 훈장을 받은 사실, 두멩은 육군 기계화 전문가였고 11월에 프랑스 최고 국방심의회의 회원이 될 예정이며 정치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는 사실 등이 밝혀졌다. 스탈린은 이러한 정보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소수의 장군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대표들이 초급장교인 것을 재빨리 파악하였다. 그는 몰로토프와 베리아에게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그들은 진지하지 않다. 이런 인원들은 도저히 적합한 권한을 보유하고 있을 리가 없다. 영국과 프랑스는 또 다시 도박을 하고 있지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들의 유럽 책략에 대한 수행 능력이다.'"

스탈린, 드미트리 볼코고노프 28~29페이지.

스탈린의 실망을 알아차린 몰로토프가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그래도 회담을 추진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스탈린은 "꼭 그래야만 한다면 해야지."라고 건성으로 대답합니다. 

잘 알려진 바지만, 영불 대표단은 격이 터무니없이 낮았습니다. 소련 대표단에 클리멘트 보로실로프가 앉아 있는 판에 말이죠. 그리고 이 격낮은 대표단이 스탈린이 원했던 '구체적이고 실용적 협정' 체결에 대해서 그들이 원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은 곧 밝혀지게 됩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자국의 일반적인 견해를 전달하고 자국 정부에 소련 정부의 주요 계획을 전달'하는 것에 불과했지요.

결국 스탈린이 제시한 여러가지 질문에 대해 대표단은 대답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볼코고노프는 그 의도를 영불이 소련을 독일에 대한 샌드백으로 내세우기 위함이었다고 저술하고 있습니다만, 볼코고노프의 사관 자체가 좀 걸러 들어야 하는 것인데다가 그의 연구 자체가 20년 전의 낡은 것이므로 이에 대해서는 자세한 언급을 피하겠습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영불의 태도에 스탈린이 빡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분노가 폭발한 것은 8월 20일에 드락스 제독이 보로실로프에게 보낸 전문을 받고 나서였습니다. 드락스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보로실로프 원수 귀하
프랑스와 영국 대표단들은 각국의 정부로부터 귀하께서 저희 정부에 전달을 부탁한 정치적 질문에 대해 여태까지 회신을 못 받은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제가 차기 회담을 주최한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8월 23일 오전 10시까지 혹은 그 이전에 회신을 받았으면 합니다.,
경의를 표하며.

영국 대표단 단장 드락스 제독.

스탈린의 반응은 간단했습니다. 그는 빡쳐서 외쳤습니다.

"이제 장난 그만 치자!"

..................
왜 쓰는지 갑자기 이유를 모르겠는 글........
포기.........

민중은 대숙청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소련사

대숙청의 참가자에 대한 문제에 이어 또 다른 중요한 물음은 민중의 태도에 관한 점이다. 1930년대 스딸린의 대숙청(이) 전개되고 있을 동안 민중은 이것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인민의 적들'의 음모와 샤보타쥬에 관한 당지도부의 공식발표를 그대로 믿고 수용했을까? 또 아니면 지방 당지도부의 숙청과 체포를 환호하는 태도를 취했을까? 이에 관해서는, 공장노동자들이나 농민들의 직접적인 기술과 일기장이 매우 유용하지만 그들이 남겨놓은 것은 거의 없다. 

지도부의 대량 숙청이 진행되는 동안 불만과 저항에 차 있던 노동자나 농민들은 자신들의 고통의 원인이 되는 인물들의 재판을 크게 환영하기도 하고 상사를 고발하거나 제보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민중이 당지도부의 숙청을 환호하는 자세로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들이 아래서부터 참여하였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차라리 러시아 인민이 가지고 있는 '탐관오리와 민중 사이의 적대감', '우리와 그들'이라는 전통적 이분법에 의거한 의식문화의 한 단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많은 유형수들은 인민뿐만 아니라 심지어 당원이나 지식인들조차도 자신들의 체포와 고통이 스딸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수하에 있는 부패관료와 중간 집단 탓이라고 생각하였다. 노보시빌르스크에서 탈꿀라끄 운동의 희생자로 유형을 간 한 여성농민의 회고를 들어보자.

'1930년대 당시 그토록 무수한 사람들이 숙청을 당했으니 아무도 스딸린을 욕하는 이가 없었다. 단지 지방의 당지도부층 인물들이 비난을 받았다. 오직 그들 때문에 우리가 고난을 받았고 그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지 모른다. 아마 내가 틀릴지 모른다. 1938년에 다시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잡혔는데... 그들이 우리에게 눈물을 흘리게 했고 그들이 잡힐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숙청은 주로 일반인보다는 고위층을 목표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농민이나 노동자에게는 집단농장화나 산업화만큼 큰 고통은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빵과 임금문제 그리고 방 한칸 구하는데 더욱 필사적이었기 때문에 대숙청에 대해서는 방관자적 입장을 취하였다. 실제로 대숙청 초기에는 중앙은 민중의 불만을 중간층 지도부에게 돌리기 위해서 하위집단을 동원하는 방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민중으로부터 매우 열광적인 반응을 얻기도 하였다. 민중은 처음에는 끼로프의 암살 사건과, 공개재판을 그대로 믿었고 '인민의 적' 존재를 믿었으며 숙청과 테러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점차 테러의 대상이 확산되면서 부하린조차 체포되었을 때 많은 이들은 보도의 진실을 전부 다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매우 냉담하거나 무관심하기조차 했으며 테러와 대숙청을 그렇게 지지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았다.

'내무인민위원부가 공산당원을 체포했다는 소문을 들으면 마치 주인들의 집안 싸움을 쳐다보는 하인들의 눈빛처럼 공개재판에 대한 소문을 받아들였다'

소비에뜨 사회의 선전과 교육을 연구한 P.케네즈에 의하면 일반 민중은 1930년대에 어떠한 대안을 생각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고 철저히 언론에 의해 배제되고 통제되어있었다. 민중은 스딸린적 세계관을 신봉하기보다는 차라리 체념하며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1930년대 스딸린 대숙청에 관한 비판적 고찰 -대숙청의 배경과 규모를 중심으로-, 이정희, 역사학보(180), 역사학회, 2003년 12월.
272~274페이지.

논쟁:대숙청은 어째서 가능했는가? 소련사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때가 왔다. 어떻게 이처럼 광적인 정치 폭력과 테러가 가능할 수 있었는가? 누가 이 대량의 정치적 살상에 참여하였는가? 오직 스딸린 개인이나 모스끄바 상층부에서부터 강제적 권력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인가 아니면 아래서부터의 참여가 존재하였는가? 대숙청이 진행되는 동안 지방 당원이나, 비밀경찰 요원들, 강제노동수용소의 감시대와 군대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또 스딸린의 대숙청이 진행되는 동안 일반 노동자 혹은 농민들은 이를 어떻게 보았을까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대탄압의 원인규명이나 규모 분석만큼 어려운 물음이다.

1930년대 1940년대를 보는 러시아 당관료나 학자들은 대숙청 사건을 표면상으로는 '불가피한 것', '결과적으로 이득을 가져다준 것'으로 생각하려고 애썼다. 그렇기 때문에 흐루시쵸프가 스딸린을 탄핵한 이후에도 상당수 숙청 당한 볼셰비끼 고위지도부는 복권되지 않았다. 고르바쵸프의 글라스노스찌 직후에도 러시아 내 학자들은 모든 책임을 스딸린과 그의 측근 인물에게 전가하였다. 러시아 내 반체제론자 역사가인 R.메드베제프 역시 스딸린의 광적인 권력욕을 근본적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1937~39년 사이 스딸린은 직접 4만 4천명의 숙청명단에 고위 지도부의 이름을 작성하여 비밀경찰로 보냈다는 것이다.

한편 서방에서는 현실사회주의 몰락 이후 다시 보수적인 시각이 강화되면서 전체주의적 해석이 되살아났다. 이들 중 콩퀘스트, 만델쉬땀, 홀레브니끄는 스딸린 대숙청에서 1930년대 새 세대 공산주의자들의 맹종적 정치문화를 가장 큰 요인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이에 대해 뜨로쯔끼파에 속하는 유럽 좌파 이론가들은 스딸린에게 근본적 책임을 돌리면서도 그 원인에 관해서는 스딸린주의는 결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러시아의 후진성과 국제혁명의 좌절 탓으로 해석하였다. 스딸린과 그 측근 당관료들은 국제 사회주의 혁명을 포기하고 민족국가의 이익을 우선하는 정치풍토를 만들었으며 여기에 빈곤에 지친 후진적 프롤레타리아층과 지위상승요구에 가득 찬 관료집단이 가세하여 대숙청을 묵인하였다는 것이다.

스딸린 대숙청에는 스딸린 개인적 성격이나 주관적 요인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거대한 사건이 한사람의 성격만으로 설명하기 힘든 집단적 요인이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1937~38년의 대숙청 의결서에는 분명 모스끄바 중앙정치국과 사법위원회가 서명하였고, 내무인민위원부가 색출한 탄압 대상자를 승인하였으며, 재판과 선고형량 또한 정치국에서 조절하였다. 그러나 정치국 내의 사법위원회의 결의문에는 보다 상세한 회의록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 이 점에서 사건이 베일이 쌓여 있다. 따라서 스딸린 개인문서가 발굴되기 전에는 우리는 아직 많은 부분에서 근본적 진상을 알 수 없다. 예조프가 스딸린에게 색출대상자를 작성해서 보냈는지 스딸린이 작성해서 보냈는지, 정치국이 주도적으로 개입했는가 아니면 사후 승인의 방법으로 결정했는가 하는 점이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1930년대 스딸린 대숙청에 관한 비판적 고찰 -대숙청의 배경과 규모를 중심으로-, 이정희, 역사학보 180, 역사학회, 2003년 12월.
268~270페이지.

대숙청 사망자 수에 대한 주요 학자들의 의견 차이 소련사

1 강제노동수용소 인구) 강제노동수용소 인구에 대해 데이비스는 1933년에 33만 4천명, 1939년에 179만명으로 보고 있으며, 게티는 1930~39년간 70만명을 넘지 않았다고 보며, 콩퀘스트는 900만명이라고 주장한다. 로제필드는 1981년에 1000만명으로 주장하였으나 인구조사 통게자료의 개방 이후 560만명으로 수정하였다. 오브센코는 1600만명으로 주장하며 티마셰프는 1937년 한해에만 230만명으로 주장한다. 휘트크로프트는 450만명으로 보고 있다.

2 정치범 감옥 인구) 반혁명 정치범으로 감독 중 사망한 자는 게티는 7만명으로 지적하고 있다.(필자주:총 정치범 인구는 39년에 정점을 찍어 47만명 정도로 보인다.)

(...)

7 강제노동수용소 사망인구) 강제노동수용소 사망인구에 대하여 로제필드는 280만명, 게티는 20만명으로 주장한다. 콩퀘스트는 160만 내지 260만명으로 주장하며 오브센코는 450만명으로 주장한다.

8 NKVD 반혁명죄 처형) 비밀경찰의 재판에 의해 처형된 자의 수에 대하여 게티는 70만명이, 콩퀘스트는 1937~38년만 100만명, 1935~41년간 700만명이, 오브센코는 1935~37년간 700만명이 처형했다고 주장함. 이점에 관해서는 글라스노스찌 이후 러시아 내 지상에서 발표된 바 있다.

(...)

10 기근사망) 1932~33년 동안 기근으로 사망한 수에 관하여 게티는 70만명으로 주장하였다. 휘트크로프트는 400만~500만으로 주장하고 노브는 800만명으로 주장한다. 콩퀘스트는 강제 집단화와 기근을 합쳐서 1100만명, 그후 다시 기근만 700만명으로 주장, 우크라이나에서만 500만명이 희생되었다고 보고, 여기에 꿀라끄 절멸 운동 이후 희생된 500만명을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1 처형된 수) 1930~1936년 사이 처형자 수에 관하여 내무인민위원부 자료는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에 반해 허프는 2만명이었다고 폭타적 선언을 하였다. 볼코노프는 175만명, 오브센코는 700만명으로 주장한다.

12 수감 중 사망) 강제노동수용소, 유형, 감옥 숙마 중 총 사망자 수에 관해서 게티는 7만명, 콩퀘스트는 노동수용소, 유형 중 총 사망자가 시기별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본다. 1930~35년에 900만명, 1936~38년에는 추가 300만명이 희생되었다고 본다.

13~15 기근, 처형, 수감 중 사망 종합) 로제필드는 인구조사통계의 분석을 통해서 수감 도중 사망자 수가 1930~36년 사이에 450만명이 희생되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1937~39년 사이에는 총초과사망자 수에서 1930~36년간의 초과사망자 수를 산술적으로 뺸 다음의 숫자로 추측하는 것만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16 총 초과사망) 로제필드와 데이비스는 총 초과사망인구는 974만명에 이르며 1930~36년간 863만명, 1936~38년간은 총 107만명이 초과 사망했다고 본다. 휘트크로프트는 기근으로 인한 사망인구가 450만 내지 550만명이고, 그들 중 우크라이나에서만 275만명이 희생되었으며, 강제노동수용소 수감 도중 사망자는 450만명으로 총 사망자 수는 870~980만명으로 본다. 그러나 로미메르는 550만명으로 주장한다. 코헨은 1933~35년간 500만명, 1929~39년간 2000만명이라고 주장하고, 오브센코는 1640만명으로, 데이비스는 550만명으로 본다. 한편 휘트크로프트는 초과사망자 수가 1932~33년간만 적어도 300만명에서 400만명에 이른다고 보고 1930~39년 사이에는 990만명에 가깝다고 종전의 입장을 수정하였다.

17) 1930년대말 강제노동수용소 인구, 노동식민지대 인구, 감옥인구 등 총 탄압받고 있는 인구에 대한 수에 대하여 게티는 70만명, 로제필드는 560만명, 세레르는 270만 내지 530만명, 오브센코는 1600만명으로 각각 주장하고 있다.

1930년대 스딸린 대숙청에 관한 비판적 고찰 -대숙청의 배경과 규모를 중심으로-, 이정희, 역사학보(180), 역사학회, 2003년 12월.
263~266페이지.

논쟁:대숙청으로 얼마나 많이 죽었는가? 소련사

그렇다면 1930년대 스딸린 대테러에서 희생된 자들의 총체적 규모는 어느 정도였는가? 1930년대 전체에 걸친 테러의 총체적 희생자의 숫적 규모에 관한 추산은 지난 20년동안 최소 수치와 최대 수치 사이에 거의 수백만명의 차이를 보이면서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스딸린 대테러의 규모 파악에는 비밀경찰의 재판과 선고의 수, 감옥 수감자의 수,유형수, 강제노동수용소의 수감자 수, 처형된 수, 그들 중 정치범의 수, 수용소 사망자 수, 특수식민지대의 거주자 수, 1931~1939년 인구의 출산율과 사망률, 총 초과사망주 수 등이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데 1991년에 놀랍게도 1937년, 1939년 인구조사통계와 출산율, 사망률에 관한 자료가 공개됨에 따라서 이를 토대로 초과사망자수를 어느 정도 과학적으로 추산할 수 있게 되었다.

글라노스찌 이전까지 대체로 강제노동수용소의 인구에 관해서 N.티마셰프는 1937년까지 약 230만명이, 쟈스니는 1940~41년까지 350만명이, 휘트크로프트는 최고 450만명, 콩퀘스트는 900만명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콩퀘스트는 1930~35년에 집단농장화와 대기근으로 적어도 1100만명이 사망했으며, 1937~38년 대숙청 시기에는 추가로 300만명이 희생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오브센코는 비밀경찰 내부통계에 따른 1935~39년의 체포자의 숫자는 약 1840만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최근 러시아 학자인 젬꼬프는 최근 비밀경찰 문서를 분석하여 1934~37년 사이 강제노동수용소의 죄수가 150만명에 가깝다고 보고 과거 정통파 학자들의 주장에 정면도전하였다. 이 숫자는 콩퀘스트가 추산한 900만명이나 로제필드가 추산한 1000만명보다 훨씬 적은 숫자로서 엄청난 갭을 보이고 있다.

(...)

라께르는 내무인민위원부의 자료를 매우 의심하고 있는데 실제 체포된 바 있는 대부분 고위 관리들의 진술에 의하면 비밀경찰의 대량살해는 이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사실 게티, 젬꼬프, 리터스포른, 휘트크로프트 주장과 달리 내무인민위원부의 문서는 내부적으로 매우 불일치하는 주장이 허다하다. 그뿐 아니라 게티의 추산은 1930년대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내무인민위원부에 보고한 사망자 수에 의거하고 있고 로제필드는 비밀경찰 관할 하의 인구의 사망률에 의거하여 사망자수를 계산하고 있는데 이 두가지의 수가 2배의 차이로 나타나고 강제노동수용소의 인구수는 4배로 나타나는 모순이 있다. 또한, 로제필드는 '비밀 문서'로 찍혀져 있는 공식적 사료보다도 '내부적' 문서가 더욱 신빙성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강제노동수용소의 인구와 사망자수에 관해서 내부적 문서와 공식적 문서 사이의 모순이 해결되고 수미 일관된 것으로 판정되기 전에는 게티의 주장이나 내무인민위원부의 보고서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소비에뜨의 1937년에 고나한 인구통계자료는 1억 5600만명과 1억 6830만명이라는 두 통계가 존재한다. 두 가지 숫자의 차이는 무려 1300만명에 가깝다. 당시 통계보고자인 꾸르만은 1억 5600만명의 인구수가 너무 낮은 데에 당황하여 난처한 지경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탈주자, 군인 수, 그 이전에 사망한 자들의 수를 보태어서 1억 6830만명으로 허위 보고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미출간 자료에 의하면 1934년 인구는 1억 6050만명에 가까우며 이것은 1933년의 1억 6570만명에 비해 520만명이 감소했다. 만약 러시아 인구학자 똘츠의 보고대로 1937년 인구가 1억 6200만명이 확실하다면 실제상 1934년 인구는 출산율과 사망율을 적용하면 오히려 1억 5800만명에 가깝다는 결론이 나온다.

A.노브는 최소한 1934년의 1억 6050만명에서 1937년 인구가 1억 6200만명으로 보더라도 정상적 출산율과 사망율을 적용할 경우, 약 400만명 이상이 사라졌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그는 1933년 기근 시에 사라진 인구가 570만명이라는 기록에는 약 100만명의 기록이 고의적으로 누락되었으며 실제로는 670만명으로 분석하였다. 이것은 총인구의 5.5%에 해당된다.

결국 노브와 짜플린의 분석을 토대로 우리는 1937년 1월까지 기근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최소한 380만명이며, 감옥 중 사망자 수는 250만명, 처형자 수 최소한 80만명, 또 다른 비정상적인 죽음 130만명, 카자흐스탄 공화국이나 투르크스탄 공화국(의 희생자들?) 등, 해외로 도주한 200만명을 포함하여 총 900만명 이상이 희생되었을 것으로 최종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에 따라 과거 정통학파인 오브센코, 콩퀘스트, 메드베제프가 주장하는 1935~41년 사이 희생자수가 1700~1100만명이 처형되었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당시 30~60세 사이의 남자의 수가 2400만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기근에 관한 한 콩퀘스트의 숫적 통계는 거의 맞으나 대숙청으로 인한 희생자의 수는 매우 과장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스딸린 대숙청 시기인 1928~1938년 사이의 인구가 1160만명이 감소했다는 것은 혁명과 내전 시기였던 1914~25년 사이의 990만명의 인구 감소보다 더욱 큰 것임을 감안하면 대기근과 대숙청으로 인한 희생자수는 전쟁과 내전 시기의 희생보다 훨씬 더 잔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30년대 스딸린 대숙청에 관한 비판적 고찰 -대숙청의 배경과 규모를 중심으로-, 이정희, 역사학보(180), 역사학회, 2003년 12월.
261~268페이지.

3줄 요약.

1. 수정주의자들의 논거인 내부인민위원회 문서 등은 모순이 많아 그들의 사망자 관련 주장은 비판점이 있다.

2. 정통학파들은 대기근 사망자는 잘 추론했으나 대숙청 관련해선 지나치게 과장했다.

3. 결론적으로, 적백내전보다도 대숙청과 대기근이 더 많이 죽였다. -ㅅ-

논쟁:키로프 암살 이후의 대숙청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소련사

정치국과 스딸린은 끼로프 암살범 처형과 이와 관련된 당원을 숙청하고 난 이후에 또 다시 반대파 명단을 작성하고 대량 처형지시를 내린 근본적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 역사학자들 사이에는 의견의 분열이 매우 심각하다. 

끼로프의 암살을 스딸린이 조장하였다는 해석은 이론의 여지가 많은 것으로 분석된다.(필자주:기존 전체주의 정통론에 따르면, 레닌그라드 당 지도자 세르게이 키로프의 암살은 스탈린이 조장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C.워드는 적어도 스딸린이 끼로프의 암살을 미리 알고 있었거나 혹은 미리 막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고 보고 이 사건으로 매우 충격 받았으며 반대파에 대한 선제공격의 구실로 삼았다고 주장한다. 

한편 J.게티는 산업화 이후 중앙과 지방의 갈등이 증폭되자 스딸린과 중앙 정치국은 지방의 원심적 저항을 근절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게티의 구조적인 요인에 의거한 설명은 스딸린이 거둔 정치적 이득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한편 R.마닝은 1935~36년의 생산실패의 책임의 속죄양을 찾으려 했다는 점을, R.서스톤은 실제로 국내에서 스딸린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존재하였고 이에 스딸린이 단지 즉흥적으로 반응했다고 각기 주장하였다. 1936~38년간의 대숙청 사건은 시작과 끝을 비교해보면 분명한 연속선이 나타나기 때문에 스딸린이 자신의 정적들의 음모에 대한 반사적인 행동으로 보는 R.서스톤의 주장은 설득력이 극히 약하다.

1930년대 스딸린 대숙청에 관한 비판적 고찰 -대숙청의 배경과 규모를 중심으로-, 이정희, 역사학보(180), 역사학회, 2003년 12월.
258~25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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